근대사 |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의 입장에서는 국면 전환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갑오년甲午年(1894)에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기세가 함경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휩쓸었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십만 동족이 참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을미년乙未年(1895)에는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조선의 왕비 중전 민씨가 시해당하는 전고에 없던 사변事變이 발생했다.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건만 망해가는 나라 조선에게는 마땅한 응징 수단이 없었다. 1896년 2월 11일(이하 양력)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俄館播遷).
조선의 입장에서는 먼저 땅에 떨어진 국가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이를 대내외에 알리는 게 시급한 과제였다. 이어 오랜 궁핍과 절망감에 빠진 백성을 일으키고 보듬을 수 있는 개혁 정치도 절실했다. 당시 실록을 보면 고종이 과신戈臣(관료), 백성百姓(일반 양민), 군오軍伍(군대), 시정市井(상인 집단)으로부터 칭제稱帝 요청을 받았고, 이에 대한 전국적인 상소도 5개월간 빗발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여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국민적 요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제 정치의 상황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각서(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5.14)를 맺어 일본을 견제해 주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높일 수 있었던 기회였다. 드디어 1897년 8월 16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그해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圜丘壇에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즉위식은 다름 아닌 ‘황천상제皇天上帝’께 올리는 고천제告天祭였다. 환구단은 정방형의 땅에 화강암으로 3층 단을 만들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표현이다. 환구단의 지붕은 원추형 모양에 색깔은 금색으로 칠해 천자의 위상을 높였다. 고종의 고천제는 환국, 배달, 조선 이후 역대 제왕들이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등극을 알리고 천자天子(天帝之子)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皇穹宇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라는 당시 신위가 보관되어 있다.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대한은 옛 조선 곧 삼한三韓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황제 즉위식 이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12월 23일 가장 먼저 대한제국을 승인했고 잇따라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도 대한제국을 승인했다.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청산했으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곳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렇게 독립 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후 고종 황제는 황실이 중심이 된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를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1910년 대한제국은 끝내 패망했고 고종 황제 역시 1919년 1월 21일 당시 경운궁慶運宮 함녕전咸寧殿에서 돌연 68세로 붕어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주독립 국가 대한제국의 정신은 항일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역시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과 대한제국의 ‘민국民國’ 이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국호에 담았다. 사실상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대한제국인 셈이다.
고종의 천제 복원과 황제국 선포는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1860 경신庚申년 최수운 선생의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을 놓칠 수 없다.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은 최수운 선생은 민족과 인류를 향해 우주적인 대선언을 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학의 ‘다시 개벽’ 사상이다. 이는 선천 개벽으로 탄생한 인류가 앞으로 후천 개벽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참동학 증산도에서 알려주는 가을대개벽이다. 가을개벽의 역사 정신은 ‘뿌리를 찾아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앞으로 인류는 뿌리 역사와 원형 문화를 되찾아 지구촌 통일 문화 시대를 열게 된다. 천자 문화는 곧 동방 한민족의 뿌리 역사이면서 인류의 원형 문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선포는 동방 역사의 종주권 선언이면서 다가오는 개벽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의 입장에서는 국면 전환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갑오년甲午年(1894)에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기세가 함경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휩쓸었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십만 동족이 참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을미년乙未年(1895)에는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조선의 왕비 중전 민씨가 시해당하는 전고에 없던 사변事變이 발생했다.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건만 망해가는 나라 조선에게는 마땅한 응징 수단이 없었다. 1896년 2월 11일(이하 양력)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俄館播遷).
“내가 이제 조선의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나니 이는 수륙병진(水陸幷進)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원일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먼저 서울에 들어가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 써서 남대문에 붙이라.” 하시니 원일이 명을 받아 일행을 거느리고 태전으로 떠나니라. - 도전 5편 121장(1906 병오년 공사)
조선의 입장에서는 먼저 땅에 떨어진 국가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이를 대내외에 알리는 게 시급한 과제였다. 이어 오랜 궁핍과 절망감에 빠진 백성을 일으키고 보듬을 수 있는 개혁 정치도 절실했다. 당시 실록을 보면 고종이 과신戈臣(관료), 백성百姓(일반 양민), 군오軍伍(군대), 시정市井(상인 집단)으로부터 칭제稱帝 요청을 받았고, 이에 대한 전국적인 상소도 5개월간 빗발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여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국민적 요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제 정치의 상황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각서(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5.14)를 맺어 일본을 견제해 주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높일 수 있었던 기회였다. 드디어 1897년 8월 16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그해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圜丘壇에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즉위식은 다름 아닌 ‘황천상제皇天上帝’께 올리는 고천제告天祭였다. 환구단은 정방형의 땅에 화강암으로 3층 단을 만들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표현이다. 환구단의 지붕은 원추형 모양에 색깔은 금색으로 칠해 천자의 위상을 높였다. 고종의 고천제는 환국, 배달, 조선 이후 역대 제왕들이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등극을 알리고 천자天子(天帝之子)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皇穹宇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라는 당시 신위가 보관되어 있다.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대한은 옛 조선 곧 삼한三韓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황제 즉위식 이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12월 23일 가장 먼저 대한제국을 승인했고 잇따라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도 대한제국을 승인했다.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청산했으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곳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렇게 독립 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후 고종 황제는 황실이 중심이 된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를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1910년 대한제국은 끝내 패망했고 고종 황제 역시 1919년 1월 21일 당시 경운궁慶運宮 함녕전咸寧殿에서 돌연 68세로 붕어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주독립 국가 대한제국의 정신은 항일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역시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과 대한제국의 ‘민국民國’ 이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국호에 담았다. 사실상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대한제국인 셈이다.
고종의 천제 복원과 황제국 선포는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1860 경신庚申년 최수운 선생의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을 놓칠 수 없다.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은 최수운 선생은 민족과 인류를 향해 우주적인 대선언을 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학의 ‘다시 개벽’ 사상이다. 이는 선천 개벽으로 탄생한 인류가 앞으로 후천 개벽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참동학 증산도에서 알려주는 가을대개벽이다. 가을개벽의 역사 정신은 ‘뿌리를 찾아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앞으로 인류는 뿌리 역사와 원형 문화를 되찾아 지구촌 통일 문화 시대를 열게 된다. 천자 문화는 곧 동방 한민족의 뿌리 역사이면서 인류의 원형 문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선포는 동방 역사의 종주권 선언이면서 다가오는 개벽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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