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2. 유일신론의 빛과 그림자

[철학산책]

‘신(God)은 존재하는가’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물음일 것이다. 신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그것에 대해 논의한다면 유신론(Theism)이고,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하고 그것에 대해 공박한다면 무신론(Atheism)이다. 서양의 지성사에서 볼 때, 유신론은 대략적으로 단일신론(Henotheism), 다신론(Polytheism), 유일신론(Monotheism), 이신론(Deism), 범신론(Pantheism), 범재신론(Panentheism) 등으로 구분된다.

단일신론은 여러 인격신을 인정하지만 오직 자기 민족만을 위한 한 분의 신을 숭배하는 이론으로 초기 유대교의 야훼 신앙이 대표적이다. 다신론은 여러 신들을 전제함을 뜻하는데, 그리스, 이집트, 로마의 신들이 대표적이다. 유일신론은 초월적인 한 분의 창조주인 인격신에 대한 신앙으로 그리스도교를 꼽을 수 있다. 이신론은, 초월적인 창조주가 우주만물을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존재이법을 창조해 놓았기 때문에, 그 이법에 따라 우주만물이 끊임없이 창조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입장이다. 범신론은 초월적인 창조주란 없고 우주자연의 창조 변화 자체가 곧 신의 활동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범재신론은 신이 우주자연의 모든 것에 내재하여 활동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이렇게 다양한 신론은 무엇 때문에 발생했던 것일까? 그것은 초월적인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창조된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유일신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단일신론에서 범세계화로 전환하면서 형성된 유일신론은 서양의 중세 초기에는 별로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고 세계화되기 시작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기의 유일신 문화는 심각한 잡음 없이 대략 천여 년 동안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때가 철학과 종교가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봉착하는 문제들을 함께 공유하고,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답게 공동 전선을 형성하면서 협조하던 시대였다고 본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강력했던 신 중심 사회가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신성불가침의 신권은 점차 퇴락해 갔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인문주의 부흥이라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도래하면서 보다 자유로운 학문이 각광을 받게 되자, 지성인들이 추구하는 앎의 영역은 신의 영역을 넘보게 된다. 그럼으로써 근대사회가 열리게 되고, 결국에는 유일신의 고유한 영역은 학문의 날카로운 토론의 장으로 내몰리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앎을 추구하는 이성의 영역과 최고의 인격신을 숭배하는 유일신 사이에는 타협하기 힘든 경계가 그어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신앙과 철학적 사고의 ‘목적’과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중세기에는 철학적 사유가 유일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근대의 이성주의가 득세하면서 확고했던 신의 영역이 점차 허물어지자 철학적 사고는 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신의 위상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범신론, 범재신론의 등장이 이를 말해 준다.

1) 철학적 사유로 무장한 중세기의 유일신론


서양 중세기에 그리스도교는 우주만물에 대한 ‘창조주’와 ‘완전한 인격자’라는 양면성을 가진 유일신을 전제하고, 이로부터 신앙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이교도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게 되는데, 이에 대한 응전의 길은 바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신의 영역에 대해 논리적인 체계성을 갖춘 신앙으로 성숙하고, 좀 더 고등종교로의 위상이 드높여지게 됐던 것이다.

중세철학의 기능은 우선적으로 천계(天界)의 데이터들, 즉 창조주, 완전한 인격자, 삼위일체, 부활, 은총과 구제 및 그 밖의 결과들에 대해 정확한 해석적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신앙에 의해 인간에게 공수되기 전에 인간 이성의 바퀴가 정확히 신앙의 활주로를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대표적으로 두 철학자를 꼽을 수 있겠는데, 중세 초기에 교부철학의 대부라 불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354~430)와 스콜라철학의 꽃을 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1274)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철학과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서로 다른 두 진영 간의 관계를 조화하여 신앙의 체계적인 틀을 확보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론을 중심으로 하여 『신국론(De civitate Dei)』의 체계를 탄탄하게 세웠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가져다 방대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집필하여 유일신론 신앙관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합리적인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인 신앙의 만남
일상적인 사회생활 속에서 종교인들이란 비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아주 자주 듣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앎의 욕구가 너무도 강렬해서 의심이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철학자는 어떤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아집과 독선의 화신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쯤으로 취급해 버리기 일쑤다. 왜냐하면 논리적인 질문에 대하여 말문이 막힌 종교인은 툭하면 신앙이라는 아성으로 피신해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원천적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대략적으로 두 관점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합리적인 앎을 추구하는 철학과 돈독한 신앙을 요구하는 종교는 ‘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교는 무조건적인 ‘신앙’을 전제로 하는데, 신앙은 보통 성스런 기원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어떤 권위적인 것에 호소해서 지탱된다. 요컨대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는 나의 신념은 신앙에 기초를 둔 것이다”와 같은 진술에서 ‘신앙’은 전적으로 헌신적이며 무조건적으로 믿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다. “나는 내가 믿는 진리에 나의 전 생애를 걸고 싶다”는 진술에서도 ‘신앙’은 자기의 신념이 참됨을 보여주기 위해 이성에 의한 지적 논증이나 타당한 이유를 대지 않고 “신앙의 도약”이라는 계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철학은 알기 위해 합리적으로 따지려 드는 ‘이성’을 전제로 하는데, 이성은 어떤 권위 있는 주장이나 진술을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으로 신봉하거나 따르지 않고, 일단 의심쩍은 것으로 간주하여 그 합리적 근거를 밝히려고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이성은 참된 이치(眞理)를 드러내려고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게 된다. 어떤 진술이나 주장이 ‘권위적’ 신임장을 지닌 것으로 평가하고자 할 때도 철학자는 ‘관찰’과 ‘이성’이라는 타고난 능력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둘째, 철학과 종교는 ‘목적’에 있어서도 현저하게 다르다. 종교적 활동의 주된 목적은 숭배하고 순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존재자에게 마음을 다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관심의 핵심은 어떤 신봉자가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에 지적인 승인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신의 존재를 믿으며 자신의 삶을 신의 섭리에 내맡긴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행함에 있어서 어떤 방식을 택하는가에 관해서는 상이한 견해들이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도처에는 다양한 집단들이 신봉하는 신들이 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종교적 신앙과 예식이 존립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철학의 활동 ‘목적’은, 물론 철학의 탐구 영역이 광범위한 것이어서 유일한 어떤 것이라고 정해질 수는 없지만, 주로 지적 모험이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철학의 목적들 중의 하나는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명료하게 하거나, 과학적 탐구의 한계를 초월한 진리들을 발견해 내는 데에 있다. 그럼으로써 철학적 탐구는 절대자나 그 밖의 어떤 존재자에 대하여 맹목적인 믿음이나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돼야 하는지의 합리적인 근거를 밝힘으로써 정신세계의 앎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탐구와 종교적인 신앙에서 방법과 목적이 서로 다를지라도, 양자를 조화하여 신앙체계를 고양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캔터베리 안셀무스St. Anselm of Canterbury(1033~1109)가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에서 “신앙은 지성을 요구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고 선언한 것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려가 깊으며 성실하고 지적으로 성숙한 종교인이라면, “신(완전한 인격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자가 존재한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신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등의 물음들을 무시해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변으로 개인적으로는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겠지만, 인간만이 가지는 이성의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능력은 신앙의 조항들을 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로 구성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철학적인 사유와 종교적인 믿음은 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가치(價値)의 문제일 수도 있다.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이성의 한계에 직면한 유한적인 인간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유일신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인 믿음의 화합은 신앙이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양산되는 지식을 흡수하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적 탐구의 지식이란 시작에 불과하지만 종교적 신앙은 본래적인 길이요 곧 존재의 완성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한 인물이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들을 신국(神國)에 옮겨놓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인가? 그는 중세 교부시대의 대부로 불렸던 탁월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로마제국에 정복당한 아프리카 튀니스(현재의 알제리) 근처 타가스테Tagaste에서 345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로서 마니교(Manichaeism)를 열광적으로 신봉했고, 어머니는 유대인으로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젊은 시절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마니교에 몸을 담았고, 육체적인 사랑에 깊이 빠져 어느 창녀와 동거하여 사생아를 낳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청년 시절의 방황을 끝내고 384년 밀라노에 와서 플라톤의 철학을 접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되었고,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에 힘입어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e(340?~397)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387년에 정식으로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을 위한 철학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세례를 받은 후 1년 뒤에 타가스테로 돌아가 자신의 집에 수도원을 창설해 놓고 플라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도교 교리 정립을 위한 저작 활동에 들어갔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마침내 그는 391년이 되던 해에 사제(司祭)로 임명되었고, 395년에는 힙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힙포에서도 열광적인 저술 활동을 하였는데, 아리우스파 계열의 반달족(Vandals)이 침입하여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에도 그의 손에는 펜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430년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반달족이 이 도시를 초토화했을 적에도 그의 저술들은 보존되어 전해지게 됐다. 많은 저술들이 있지만, 후기에 나온 저술들이 유명하다. 401년에 『고백록(Confessiones)』, 416년에 『삼위일체론(De Trinitate)』, 413년에서 시작하여 426년에 끝낸 『신국론(De civitate Dei)』이 대표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한 절대적인 유일신(God)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에서 논의한 것처럼, 유일신을 무한(無限)하고, 불생불멸하는 영원한 존재로 보았다. 이는 유일신이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無始無終)임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어떤 과정 속에서 ‘연장성’을 갖는 공간 개념이나 ‘보다 일찍’이나 ‘보다 늦게’라는 시간 개념은 창조 이후에나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신은 시공(時空)의 제약을 절대로 받지 않고, 오히려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하게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술어도 유일신에게 허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개념적인 술어는 모두 일정한 ‘한정성[有限性]’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일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초월자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일신은 다만 ‘존재 자체’라고 지칭될 뿐이다. 반면에 창조된 것들은 시공과 더불어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에, 반드시 시공의 제약을 받는 유한적인 것들이다.

초월적인 유일신은 우주만물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었을까? 시공을 초월해 있음에도 유일신은 ‘무(無)로부터’ 맨 먼저 시공(時空)과 더불어 ‘무와 같은 질료’를 창조함으로써 역사에 임하게 된다.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세계화 과정은 “무와 같은 질료(質料)”, “시간(時間)”, “영원한 형상(形相)”이 동원되는데, 『고백록』에 의하면, 창조주 유일신은 맨 먼저 ‘무로부터 거의 무와 같은 질료를 창조했고, 형상이 없는 질료로부터 세계를 창조했다’(fecisti mundum de materia informi, quam fecisti de nulla re paene nullam rem)는 것이다.

창조된 ‘무와 같은 질료’는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바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되지만, 사실 자체로 아무런 규정도 없는, 허령창창한 지기(至氣)와 같은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순수 가능태(dynamis)와 유사한 것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질료에 유일신이 소장한 창조의 설계도와 같은 형상이 주입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존재함과 동시에 창조 활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럼으로써 창조된 모든 것들은 끊임없는 시공의 변화 과정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공 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해서 끊임없이 활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창조된 존재가 ‘존재 자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끊임없이 성장의 과정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는 보다 성숙한 존재, 즉 사람 자체가 되려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은 모든 불완전한 것들의 중심에서 완전한 것을 접할 수 있게 되고, 상대적인 것들 중심에서 보다 절대적인 것, 생멸의 중심에서 보다 불생불멸하는 것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 자체’는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서 창조된 모든 것들을 변하게 하는 궁극의 근원(根源)이 됨을 알 수 있다.

궁극의 근원은 바로 초월적인 유일신으로 ‘선 자체(goodness)’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선 자체’는 근원적인 선으로 “모든 선들 중의 선”(bonum omnis boni)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선 자체’의 개념은 플라톤이 말한 초월적인 이데아들을 예상하게 되는데, 플라톤의 철학에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들이고, ‘선 자체’는 바로 이데아들 중의 이데아, 즉 ‘존재 자체’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완전한 것, 절대적인 것, 불생불멸하는 것은 모두 ‘선한 것’이고, 존재(이데아)들 중의 ‘존재 자체’는 바로 가장 선한 ‘선 자체’이다. 따라서 유일신은 가치론적 측면에서 보면 ‘선 자체’요,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존재 자체’이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여타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선한 모든 것은 선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초월적인 유일신은 존재의 근원, 가치의 근원, 진리의 근원이다. 이는 존재 문제, 가치 문제, 진리 문제가 직접적으로 같은 것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음을 뜻한다. 즉 유일신만이 ‘존재 자체’요, ‘선 자체’요, ‘절대적인 진리’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유일신 이외의 모든 것들은 유일신의 정신 안에 있는 원형의 모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신의 영역에다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계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신의 세계로 탈바꿈이 된 것이다. 반면에 현실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신의 세계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염두에 둔 천국과 지상국과의 차이이다. 여기로부터 천국은 이데아계에 있는 선의 세계요 지상국은 이데아의 그림자인 타락한 세계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현실세계에서 천국을 찾은 천사 같은 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내가 천지를 주재하여 다스리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쓰나니 이것을 일러 무위이화라 하느니라.” (『도전』 4:58:4)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현상 세계로 조직한 신학자는 서양 중세 말엽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이다.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이론을 끌어들여 신학을 집대성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플라톤이 제시한 이데아론을 바탕으로 신국론을 펼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진리를 현실 세계로 끌어들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을 토대로 유일신의 교리를 조직하고 신학적 진리를 종합한 철학자였다. 이제 현실적인 자연은 더 이상 초자연적인 신국의 그림자가 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는 전형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간주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생행로는 어떠했을까? 그는 1225년에 이탈리아의 아퀴노 근처 로카세카Roccasecca 성(城)에서 호헨슈타우펜Hohenstaufen 왕가의 친족 중의 하나인 라돌프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가 될 무렵에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성직자로서의 길로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가 되던 해에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나폴리로 간다.

그의 학문은 1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7세가 되어서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으며,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1193~1280)를 찾아 문하생으로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1252년에 파리대학의 강단으로 돌아와 3년간 성서학과 명제집을 강의하다가 1256년 상투스 보나벤투라Sanctus Bonabentura(1218~1274)와 함께 파리대학 교수가 되었다.

토마스가 학문적으로 절정에 이른 시기는 1269~1272년 사이에 두 번째의 파리 체류 시기일 것이다. 여기에서 토마스는 모든 신학교 교수들이 크게 우러러보는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신학적인 논쟁에 관해 토마스의 견해를 경청하기를 갈망하였고, 토마스 또한 많은 논쟁에 직접 개입하기도 하였다. 그 뒤로 토마스는 나폴리에 설치될 예정인 신학교 관계의 업무에 참여해 달라는 수도회의 초청을 받았으나 바로 이때에 교황으로부터 리용에서 개최되는 종교회의(1274)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곳으로 향하던 중 3월에 테라치나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지닌 온화하고 티 없는 성품으로 인하여 그는 “천사를 닮은 학자”(doctor angelicus)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토마스의 학문적 태도는 어떠했을까? 그가 살았던 당시는 종교적인 세계관에 결정론적인 자연주의적 사고가 침투해 들어오던 시기였다. 그의 사고는 인식과 존재가 상호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저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그는 “사물에 관해서만 인식될 수 있고, 사물의 존재론적 진리가 여기에 있다.”고 하고, “인식은 감각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감각적인 것을 거쳐서 초감각적인 것에로 이르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런 일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는 플라톤의 전통에 속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과는 반대적인 입장이다. 그는 인식이란 영원한 근거들 안에 있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들이 신으로부터 조명될 때 가능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따르게 됐던 것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인식하는 맨 처음의 것은 물질적인 사물의 본질이다. 이런 사물들이 우리의 인식 대상이다.” 물론 우리가 햇빛 속에서 사물을 인식하듯이, 신의 빛 속에서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태양의 빛만을 바라보고 물질적인 사물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세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입장이다. 우리가 플라톤의 철학에서 주장된 영원한 이데아들에 참여함으로써만 인식한다고 한다면,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참된 지식에 도달하려면 우선적으로 감각적인 인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토마스는 감각적 경험 속에서 사유의 전체적인 자료를 발견해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다. 서양철학사에서 토마스주의를 뜻하는 토미즘Tomism을 경험주의 철학이라고 칭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토미즘이 영국의 감각적 경험주의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럼 유일신의 존재에 대해서 토마스는 어떻게 생각하였던 것일까? 그에 따르면 유일신은 “스스로 존재(ens a se)”하고, 근원적인 원인이어야 하며, 영원히 불생불멸하고, 필연적으로 완전하며, 살아있는 정신이다. 그러한 신의 본질은 “바탕으로 있는 존재 자체”(ipsum esse subsistens)로 정의되는데, 이는 유일신에게 있어서 “존재 자체(ipsum esse)”가 곧 본질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존재 자체’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말하는 최고의 개념인 보편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를 총체적으로 충만하게 채우고 있어서 더 이상 덧붙여질 수 없는 가장 완전한 현실적인 존재를 뜻한다. 따라서 ‘존재 자체’는 “모든 사물들의 현실적 존재”(actualitas omnium rerum)이므로 힘들 중의 힘이며, 생명들 중의 생명이며, 존재들 중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유일신은 형상들 중의 형상, 즉 최고로 완전한 형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말하면 유일신은 형상들 중의 형상으로 모든 창조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이다. 이러한 형상들 중의 형상(유일신) 안에서 서로 다른 형상들이 일치되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가능태(Dynamis)”는 형상이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형상이 곧 작용의 원인으로서의 현실태(Energeia)가 된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들이 현실 안으로 들어와 곧 현실태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토마스의 신학적 이론들은 거의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기본 이념은 현실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존재 근거를 밝히는 것이었다. 궁극적인 존재 원인은 “순수 가능태”가 아니라 최고의 “순수 현실태(actus purus)”로서의 “부동의 원동자”이다. 이러한 유일신은 생성과 변화에 있어서 최고의 존재가 아니라 실재(entity)에 있어서 최고의 존재가 되는 셈이다.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의거해 보면, 순수 현실태로서의 유일신은 모든 것들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우주만물은 “무(無)”로부터 창조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것들이 유일신에 근거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원인이 돼서 창조된 것이라면, 유일신은 모든 것들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해서 토마스의 섭리신학(攝理神學)이 전개된다.

그의 섭리신학에 따르면, 우주만물의 창조는 궁극의 원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는 ‘계속적인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creato continua)를 의미하는데, 인간이 인간을 낳고, 토끼가 토끼를 낳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계속되는 창조’는 창조주의 지혜에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창조된 우주만물은 처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지혜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된 우주만물은 존재 자체의 본질(형상)을 통해서만 현실적으로 실재하게 되는데, 유일신에게는 존재와 본질이 동일하지만, 창조된 것들은 존재와 본질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와 본질이 같아질 때까지 창조된 것들이 계속적으로 성숙해 감을 함축한다. 따라서 창조된 것들은 존재 자체가 되려고 끊임없이 실현해 가고 있는 과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여기로부터 우주자연의 끊임없는 창조 변화 질서가 보장된다.

유일신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고, 또한 작용의 근원이기 때문에, 창조된 만물이 목적을 향해 운행하도록 주재한다. 이는 순수 현실태로서의 유일신만이 형상들 중의 형상이고, 이 형상들이 바로 살아있는 정신이 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은 사고의 사고’라고 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작용인으로서의 형상이 원인이 되어 창조 변화해 가고 있는데, 이 형상들은 전적으로 유일신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로부터 우주자연에 대한 주재자가 바로 유일신임이 드러나게 된다.

『신학대전』에 의거해 보면, 우주만물에 대해 행사하는 유일신의 절대적인 주재는 각각의 현실적 존재가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는 창조주의 섭리법칙이다. 섭리법칙은 바로 형상들의 완전한 실현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일신은 미래를 내다봄으로써 섭리에 따라 우주만물을 주재하고 있고, 그 주재성은 바로 유일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신관의 분화


유일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의 사유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유일신의 존재는 중세기에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알 수 있듯이, 유일신은 존재들 중의 ‘존재 자체’, 선한 것들 중의 ‘선 자체’로서 모든 점에서 완전히 초자연적이고,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하고, 영원히 불생불멸하는 ‘완전(完全)한 존재’이다.

유일신이 ‘완전한 존재’라면, 이성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결정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을 것이다. 첫째는 유일신에 대한 인식(認識)의 문제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유일신의 ‘완전한 존재’를 파악하기에는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재성의 문제이다. 완전한 유일신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들, 즉 현실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는 불완전한 세계의 창조 변화에 끊임없이 사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가치의 문제이다. 완전한 유일신은 인간사의 모든 일에 관여하는 ‘도덕적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유한한 인간은 완전한 유일신을 어떻게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신학은 유일신이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유일신을 “완전한 인격자”로 간주하여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유한적인 인간이 가지는 어떤 속성들을 유일신이 부분적으로만 유사하게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일신은 인식하고(전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전능),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전선)는 것이다. 물론 유한적인 인간이 가지는 속성들 중 직접 체험되는 고통, 슬퍼함, 극심한 감정적인 변화 등은 유일신이 가질 수 없는 속성들로 묘사되고 있다.

문제는 전지, 전능, 전선의 속성들을 유한한 인간이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일신이 가지는 속성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일신이 가지는 인식 능력은 전지하기 때문에 단편적인 것도 아니며, 인간들처럼 실수하여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유일신은 과거, 현재,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단번에’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유일신은 창조는 물론이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는 시·공상에서 항상 물질적인 제약이나 물리법칙에 의존하는 인간의 능력과는 달리 근육의 약화나 피곤함 등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일신은 ‘전지’하고 ‘전능’하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 판단에도 전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옳다는 것을 명백히 분별하여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대로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일신은 항상 올바르고 전적으로 선한 존재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유일신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유일신의 ‘완전한 존재’가 “완전성”과 “인격성”(人格性)이라는 두 개념을 혼합하여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완전성’과 ‘인격성’은 상호 모순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유일신이 독특하게도 부분적으로만 인간들의 속성과 유사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모든 제약들이 제거된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큰 제약성은 물리적인 법칙을 수용해야 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유일신은 신체의 소유가 부정되어야 한다. 인간이 가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약은 관찰하고 추론하며 판단하는 데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인데, 유일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잘못도 저지를 수 없는 완전하고 선한 존재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유일신은 세상사를 어떤 방식으로 관할하여 주재하게 되는 것일까? 유일신이, 전지하고 전능하며, 불변적이고 독립적이며, 따라서 ‘완전한 존재’라면, 불완전한 현실 세계를 초월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초월적인 유일신은 그 존재 의미를 가지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창조된 현실 세계와 관련을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관할하여 주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재앙이나 인간들의 잔악한 전쟁 등에서 비롯되는 극도의 비극과 고통은 창조 이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렇다면 유일신의 창조 목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당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만일 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세상을 보다 조화롭고 안정성을 가진 세계로 창조하지 않고 ‘왜’ 이렇게 파괴와 고통을 동반하는 세계로 창조했을까.

완전한 유일신이 전능하다고 하는 진술은 더 조화롭고 질서 있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데,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이 17세기경에 영국에서 등장하게 된다. 우주자연이 합리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합리적인 창조자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현실 세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그것이다. 이신론의 사조는 한마디로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철학(신학)이론으로 볼 수 있겠는데, 통상 이성종교 내지는 자연종교라 불린다.

이신론은 허버트Edward Herbert of Cherbury(1583~1648)가 1624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진리론(De Veritate)』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주장했고, 1690~1740년 사이에 영국 경험주의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신론에 의하면,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은 인격신이 아니라 초월적인 자연신이다. 초월적인 자연신은 세계를 창조한 뒤로는 초연한 입장으로 물러나 현실 세계의 창조 변화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세상사의 모든 일이 자연의 합리적인 이법에 따라 운행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의 창조 변화는, 마치 “시계제작자(watchmaker)”가 만들어 놓은 시계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듯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이신론에는 인격적 유일신의 계시나 이적(異蹟) 같은 신학적인 이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신론의 바람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영국 경험론의 마지막 주자인 흄David Hume(1711~1776)은 1748년에 『이적론』(Essays on Miracles)을 출간하여 초월적인 유일신의 존재마저 부정하기에 이른다. 특히 뉴턴Issac Newton(1642~1727)이 등장하여 우주자연을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안정되고 정교하게 작동되는 기계 장치로 간주하자 그의 명성에 압도되어 이신론은 새로운 주장을 내놓게 된다. 그것은 우주자연의 창조 변화란 유일신의 주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기계처럼 스스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적인 재앙으로 인해 겪는 고난의 역사는 창조주 유일신의 소관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필연적인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 후 이신론은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1694~1778)에게 영향을 미쳤고, 독일과 미국의 철학과 신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셋째, 유일신은 과연 완전히 선한 도덕적 존재일까? 유일신은 전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완전한 인격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신은 인간이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요컨대 어떤 사람이 “신은 인간을 왜 이렇게 사악한 존재로 만들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유신론자는 “신은 자신의 인격적인 사랑을 인간에게 자유로이 주고자 했기 때문에, 죄악은 인간의 존재에 부여한 자유 의지에서 생겨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 또한 “신은 완전성에 있어서 아무런 결함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바라거나 희망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신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신다”의 주장은 또 어떤가? 감정을 지닌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유쾌한 경험 같은 것을 가진 사랑을 하며, 어떤 동정심 같은 것을 가진 마음으로 시간에 따라 부단히 변화하는 사랑의 개념을 가진다. 만일에 전적으로 자기 충족적인 신이 우주를 창조했으나 피조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좌절 등의 경험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러한 고통을 체험하지 않아서 혹은 체험할 필요가 없어서 알지 못하고 있는 신은 어떻게 인간이 경험하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에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고통이나 사랑 등을 신이 체험한다면 그러한 신은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다. 이는 신이 자기 충족적이고 완전한 인격자라는 주장에 모순이다.

유일신의 인격성을 제거한 범신론pantheism
초월적인 인격적 유일신과 불완전한 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다룸에 있어서 유신론자들은 치명적인 약점들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약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출현하는데, 범신론이 그것이다.

범신론자들의 기본적인 사상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통일체는 신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절대적으로 신성한 존재자란 인격적 존재일 수 없고, 오직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자연 법칙, 즉 물질과 힘이 나타나는 전체가 바로 신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초월적인 창조주가 완전한 인격자임을 떼어 버리고 현실 세계로 들어오게 됨을 뜻한다. 이와 같은 범신론을 전개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1632~1677)를 들 수 있다.

스피노자는 “존재 자체”가 실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기원인(causa sui)”을 갖는 것만이 오직 실체라고 내세우기 때문이다. ‘자기원인’이란 그 자체의 본질에 존재를 포함하는 것으로 스스로가 존재원인이 됨을 의미한다. 여기로부터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이 바로 존재 자체라는 것 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생각될 수 없는 존재로 이해하게 된다. 이 점에서 그는 전통적인 신의 존재를 변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무한하고 영원한 필연적인 존재가 바로 유일한 “신 즉 자연”(神卽自然)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영원한 실체(신) 안에 있고, 신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체로 모든 것이 되는 자연임을 의미한다.

신이 곧 자연임을 제시한 결정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만일 신이 자연 전체를 창조한 주인이라면, 창조주로서의 신은 피조물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피조물과 구분된다면, 창조주로서의 신은 피조물들에 의해 한정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게 되면 신은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 그러므로 신은 자연을 초월한 창조주가 아니고 바로 자연이며, 자연은 곧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이며 무한한 신이다.

그런데 자연은 잠시의 정지도 없이 창조 변화되고 있다. 유일신과 창조 변화하는 자연과는 어떤 관계인가? 스피노자는 자신의 저서 『윤리학(Ethica)』에서 “특별한 사물들은 곧 유일신의 속성이 변화한 모습이거나, 그것을 통해서 유일신의 속성이 어떤 정해진 방법으로 표현되는 양태(modus)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양태들이 유일신 안에 있는 사물이라고 간주되는 한, 이 양태들의 총체는 “산출되는 자연”(natura naturata)이고, 유일신은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이다. 달리 말하면 유일신은 자연의 영원하고 불변적인 법칙이고, 법칙에 따라 산출된 자연의 개별적인 것들은 그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자연의 전체와 유일신은 같은 것이며, 자연법칙으로서 “산출하는 자연”이기 때문에, 우주자연의 개별적인 모든 것들은 유일신을 원인으로 해서 그 결과로 생겨난 “산출된 자연”이다. 즉 “신 즉 자연”이기 때문에 유일신은 절대적인 제1원인이고, 이로부터 모든 것들이 결과로 생겨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유일신과 자연의 산출된 사물들과의 관계는 “영원의 상(相) 아래서”(sub specie aeternitatis)만 고찰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일 뿐이다.

모든 자연적인 사물들은 유일신을 원인으로 해서 생겨났지만, 그렇다고 유일신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사물들에 내적인 원인이며, 자연의 산출법칙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산출하는 자연”은 “산출된 자연”의 원인으로서 자연법칙을 의미하지만, 산출된 자연은 원인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신의 변용(變容)이요 양상(樣相)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영원하고 불변적인 법칙에 따르는 산출된 자연물들은 항상 반복적으로 무한히 변화한다고 할 수 있고, 반면에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신은 존재의 원인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신이 내재하여 활동한다고 보는 만유재신론 (萬有在神論 ; panentheism)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神)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 (『도전』 4:62:5~6)

근대가 물러나자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신론이 출현한다. 만유재신론이 그것이다. 만유재신론은, 신이 모든 것들의 존재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재적 존재이고, 동시에 유일신론에서처럼 초월적 존재라고 보는 견해이다. 여기에서 유일신론과 범신론에서 논의된 난점들을 피하고 장점들을 구체화하여 다양성 속에서 최고의 통일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말할 수 있게 되는데, 만유재신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20세기에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종합하여 유기체 철학으로 체계화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1861~1947)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우주자연의 창조 변화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 개념, 즉 “신(Theos)”,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 “창조성(creativity)”을 동원한다.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는 자체로는 스스로 활동할 수 없는 가능태들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성’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가 창조되어 존재하게 될 무규정성인 힘의 원리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순수질료나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지기(至氣)와 유사한 것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영원한 객체’는 현실 세계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성의 원리이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쯤으로 이해해도 될법하다. 그리고 양자를 추동(推動)하여 매개하는 제3의 존재, 즉 현실적인 창조 변화의 작인(作因)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만일 작인이 없다면, 우주만유의 세계는 영원히 가능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창조성’과 ‘영원한 객체’를 추동하여 매개하는 작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현실태(actuality), 즉 ‘현실적 존재’로서의 ‘신’이다. 여기서 신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존재신학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부동의 원동자’나 현실 세계를 초월하여 있으면서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나 혹은 초월적인 ‘최고의 인격적 존재’와 같은 그런 신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세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현실 세계에 내재하여 역동적으로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그런 신’을 뜻한다.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그런 신’은 어떤 의미일까?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신’은 양가적인 의미, 즉 현실 세계를 초월한 순수한 원리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창조성’의 피조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한 객체’들 전체가 최대한 풍부하게 현실 속에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영원한 객체’들을 경험하면서 생성의 과정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은 기본적으로 현실 세계의 그물망에 얽혀 있으면서 항상 생성되고 생성하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일 뿐”이라는 주장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신은 현실 세계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신은 초월성의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이 현실 세계에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신을 두 본성으로 분석하고 있다. 신의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과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이 그것이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장차 무엇이 될 가능적 존재인 ‘영원한 객체’들을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생성하게 된다. 이때 가능적 존재인 ‘영원한 객체’들은 신의 이러한 생성에 포섭됨으로써(신이 가능적 존재들을 파악함) 그 현실적 근거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본다면 생성된 신은 가능적 존재인 ‘영원한 객체’의 세계에 머문다는 뜻에서 현실 세계를 초월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신은 생성의 과정에서 과거의 현실 세계 전체도 자기화하는데,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이 그것이다. 즉 신은 시간의 과정에서 완결되는 ‘현실적 존재’들을 모두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구성하는데, 현실 세계에 대한 이런 경험을 통해 ‘결과적 본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실적인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현실적 존재’들과 상호 의존 관계에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 내재하여 생성하는 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화이트헤드는 신이 세계에 초월적이면서 세계에 내재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신을 원리적인 의미(영원한 객체)를 함의하는 ‘원초적 본성’과 현실적인 의미(창조성)를 함의하는 ‘결과적 본성’이 상호 결합하여 짜여들어 가는 과정에서 생성하고 생성되는 ‘현실적 존재’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느냐의 문제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신과 세계가 서로 역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과정과 실재』에서 밝히고 있다 : “모든 점에서 신과 세계는 과정과 관련하여 서로 역으로 움직인다. 신은 원초적으로 일자(一者)이다. 즉 신은 다수의 가능적 형상들의 관련성에 대한 원초적 통일성이다. 과정에서 신은 결과적 다양성을 획득하고, 원초적 성격은 이러한 다양성을 그 자신의 통일성 속에 흡수한다. 세계는 원초적으로 다자(多者), 즉 물리적 유한성을 지닌 다수의 현실적 계기들이다. 과정에서 세계는 결과적 통일성을 획득하는데, 이 통일성은 하나의 새로운 계기로서, 원초적 성격의 다양성 속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신은, 세계가 다자이면서 일자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일자이면서 다자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또한 그는 『과정과 실재』에서 “신이 일자(一者)이고 세계가 다자(多者)라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일자이고 신이 다자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세계가 신에게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신은 전적으로 세계를 포괄하는 최고의 존재자이다. 신의 원초적 본성이 영원하고 불멸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신은 존재와 생성, 변화와 불변 등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존재자이다. 신의 결과적 본성이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며, 현실태 및 가능태를 포괄하는 그런 복합적인 통일체이기 때문에, 신은 존재이면서 생성자요, 일자(一者)인 동시에 다자(多者)가 된다. 그래서 신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면서 수용성을 가진 존재자로서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신의 지식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완전한 것 또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 대한 완전한 기억이요, 앞으로 일어날 새로운 사건들에 대한 충실한 자각이다.

만유재신론의 입장에서 물리적인 현상들을 자유롭게 설명한 철학자는 화이트헤드이다. 그는, 마치 라이프니쯔가 정신실체로서의 단자 형이상학을 전개하여 사물들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복합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유기적인 우주의 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실체들은 단계들로 구분될 수 있는데, 더 높은 단계는 더 낮고 단순한 단계의 복합물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신체는 살아 있는 수십억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단일한 것으로 경험되는 존재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단일한 세포는 복합적인 것(원자와 분자들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개체이고, 분자들 또한 많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체로 이해된다. 거시 세계의 우주 역시 모든 개체들이 복합되어 하나의 개체(하나의 신)로 이해될 수 있는 단일한 것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만유재신론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 전체는 자연이고, 자연의 영혼은 신이다. 모든 것들은 신(전체로서의 하나) 안에 있으면서 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곧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