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신神은 존재하는가 1. 세계화된 그리스도교의 유일신론
[철학산책]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서양의 지성사를 들여다 볼 때, 종교문화가 융성했던 시대가 있었다. 서양의 중세문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로마의 문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의 문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신들이 존재하고, 신들이 우주자연의 변화무쌍한 현상들을 각 분야별로 관장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다신(多神)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이집트에는 절대적인 창조자란 뜻을 가진 태양신 라(Ra), 개의 머리를 한 저승사자 아누비스Anubis(이집트어로 인푸inpu), 영생과 부활을 상징하는 저승의 신 오시리스Osiris, 이집트를 지배하는 매의 모습을 닮은 신 호루스Horus 등이 숭배되었고, 그리스에는 올림포스 12신을 대표하는 신들의 제왕이자 하늘과 날씨를 주관하는 제우스Zeus, 태양과 빛의 신 아폴로Apollo, 학문의 여신 아테나Athena, 전쟁과 파괴를 관장하는 신 아레스Ares,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등이 숭배되었으며, 로마에는 로마로 건너간 그리스 신들 외에 신들 중의 신 쥬피터Jupiter, 로마의 시조 신 로물루스Romulus, 하늘의 문지기 신 야누스Janus, 꽃의 여신 플로라Flora 등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서양의 중세기에는 창조주인 유일신을 숭배하는 그리스도교의 종교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웠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종교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유일신 종교는 광막한 사막을 배경으로 유대인(Yehudim)들 사이에서 출범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악조건의 자연환경과 타민족의 기나긴 압제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간의 의지보다는 오히려 비이성적인 신앙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을 구가하려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그들은 초월적인 창조주 단일신(單一神)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메시아Messiah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민족종교가 쇠퇴하면서 이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예수(Jesus of Nazareth)가 등장한다. 예수는 유대인의 민족 중심적 종교관을 타파하여 범세계적인 유일신(God) 중심적 신앙으로 전환시킨 인물이다.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중심적 사고는 당시 통일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로 침투되었고, 철학적 사유와 조우하면서 중세 종교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근대로 접어들어 그리스도교는 지구촌 각 지역으로 퍼지면서 범세계적인 종교가 됐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발원은 고대 유대 지방에서 숭배되어온 부족신 ‘야훼Yahweh’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신(多神)이 난무하던 옛 시절에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신으로 야훼를 택하여 숭배하게 된다. 야훼신은 유대 민족의 숱한 역경과 고난의 행보에 동참하면서 창조주 야훼 하느님의 구세사상으로 거듭나게 되고, 논리적인 사고의 날카로운 도전과 정치적인 탄압을 극복하면서 유대 민족사에 정착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찾아갔던 약속의 땅은 당시 가나안Canaan이라고 불렸다. 거기에는 이미 페니키아인, 블레셋인(팔레스타인), 히타이트인 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다신 가운데 고대 유대인이 숭배한 강력한 신들을 꼽으라면, “엘”El, “바알”Baal, “야훼”Yahweh이다. “엘”은 신과 인간의 아버지, 혹은 시간의 아버지란 뜻이지만, 셈족 언어로는 신들 중 으뜸가는 신을 의미하며, 후에는 자신의 민족을 염려하며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이었고, “바알”은 원래 폭풍과 비의 신으로 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하며, 가나안 지역에서 널리 숭배되었던 신이었다. 그리고 “야훼”는 하늘의 신, 유대인의 부족 신, 전쟁의 신이었다.
기원전 1600년경에 이스라엘 지역 전역에 기근이 겹치자 이를 피해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애굽埃及)로 이주해 갔다.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비참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도한 모세Moses는 기원전 1300~1250년경에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한다. 이것이 모세의 출애굽(出埃及) 사건이다.
모세는 이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서 시나이Sinai 반도에 도착했고, 시나이 산에서 유목민의 신 야훼Yahweh(처음에는 YHWH란 이름을 가진 신을 부족의 신으로 택했으나 후에 야훼로 발음되고, 나중에 여호아Jehovah로 바뀐다)로부터 십계명(十誡命)을 받는다. “너희 하나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신명기」5-6)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40여 년을 황량한 광야에서 방황해야만 했다. 끝내 모세는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수아Yehoshua가 유대인들을 이끌게 된다. 도덕적 지도자이자 유능한 군사 전략가였던 그는 마침내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됐던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 “너의 선조들의 신 야훼”라고 기록하였듯이, 야훼가 유대 민족의 절대적인 숭배 신으로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때부터 미래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열어가게 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스라엘 군대를 신속하게 조직하여 중앙의 고원지대, 남쪽의 도시국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을 차지하여 수세기 전에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됐던 것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도 야훼신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원주민에 대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잔혹한 지배와 살육을 지시했다. 야훼신은 페니키아의 몰록Moloch 신보다 훨씬 더 잔인한 면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현저하게 잔인한 야훼신의 관념은 피로 얼룩졌던 기나긴 전쟁 기간을 지나면서 더욱 강하게 형성된 것이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이후,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정치체제는 물론이고 종교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은 토착민들과 섞이면서 서로 결혼했고, 여러 신들, 말하자면 다신들 종교 숭배가 유포된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왕국은 12지파로 나뉘어져 거의 200년 동안 모세를 통해 전해진 율법이 다스리는 신정정치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후 도덕적 결함을 지녀 거룩한 땅을 서슴없이 더럽힌 사울Saul 왕, 뒤를 이어 야훼 하느님과의 신실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 나라를 잘 다스린 다윗David(?~기원전 962?) 왕, 지혜가 출중했으나 쾌락에 나라를 말아먹은 솔로몬Solomon(기원전 971~931) 왕도 나왔다.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Assyria는 북 이스라엘을 휩쓸었고,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 왕의 침략을 받은 남 유다는 10년 후에 멸망하였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었고, 느브갓네살 왕은 많은 유대인들을 바빌론의 포로로 잡아갔던 것이다.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성전 파괴와 더불어 귀족 및 사제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갔고, 이후 페르시아의 키루스Cyrus(기원전 590?~530) 왕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기원전 538년에 5만여 명의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느헤미아Nehemia(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지도자)의 도움으로 성전 재건에 힘쓰고, 토라(율법)에 대한 글을 수집하고 편집하였으며, 국가 재건에 힘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단일신관의 강화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야훼가 우주를 지배한다는 초보적인 유일신 사상이 등장한다. 전통적이고 고유한 민족적 특성으로 간주되었던 단일신론이 보편적인 신론으로 첫발을 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의례의 집중화와 거룩한 문헌의 경전화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나사렛Nazareth 교도들이다. 나사렛 교도는 유일신교를 발아시킨 역사상 최초의 종교집단의 중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포로기 중에 고대 근동 지방의 창조설화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우주 창조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이 고백하던 출애굽기의 야훼 하느님이야말로 우주만물을 창조한 초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전에는 부족의 조상신에 지나지 않았던 야훼가 이제는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이며 주권자로서의 위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창조주는 「창세기」 첫 장에 등장한다. 창세기의 내용은 우주창조의 기원에 대한 바빌론 신화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서에서 말하는 최초로 창조된 인간 아담Adam의 이름은 바빌론 신화나 근동 신화에서 채용한 아다파Adapa(첫 번째 인간)와 유사하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이러한 창조신화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민족 수호신으로 받아들인 출애굽기의 야훼 하느님을 초월적인 창조주로 그 위상을 승격시킨 것이다. 따라서 야훼신은 범세계적인 신으로 지위가 드높여지고 있었다.
특히 예언자 집단은 창조와 율법, 그리고 역사 속에서 야훼신이 계시되고 활동한다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초월적인 창조주 야훼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독특한 제의와 율법은 더욱 강조되고 세련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 탄압으로부터 받은 그들의 삶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그들은 야훼신이 내려준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징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했고, 언젠가는 야훼신이 자기의 민족을 용서하여 지구상의 다른 민족보다 더 높이 들어 올릴 날이 올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야훼신이 비록 자기 민족에게 가혹한 징벌을 내렸지만 모세를 통해 내려준 율법은 본질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세계를 초월한 야훼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율법을 내려주었으며,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계시 속에서 야훼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한 인식은 야훼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의지에 대한 깨달음을 뜻한다. 그래서 랍비들은 깨달음을 통해 초월적 야훼신의 진정한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헬렌화의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 종교집단에게 빼앗겼던 적도 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의 제우스Zeus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받기도 하였고, 유대교가 법으로 금지되기도 하였으며, 엄청난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자 기원전 165년에 마카베우스Judas Maccabeus는 유대교를 헬레니즘식으로 바꾸는 것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마카비’(망치) 반란이다. 이 반란으로 유대인들은 종교적 자유와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게 되어 야훼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몇 번에 걸쳐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기원전 165년에 잠깐 독립한 마카베우스 반란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성공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로마의 억압적 통치에 유대인들은 빈번히 저항해 보았지만 정복자의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미래 역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믿고 신뢰하기에는 그들이 당하는 현실적인 고통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로마의 통치기에 지중해 연안에는 무자비한 압제와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리라는 메시아Messiah(구세주)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고대인들은 왕(王)을 메시아로 여겼는데, 이런 메시아에 대한 신앙은 특히 유대인들의 정신에 강하게 터를 잡는다. 민족의 지도자와 같은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들을 억압자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유대 종교에 매우 중요한 특징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에 대한 초기의 믿음은 주님께서 기름 부은 자(왕)로 나타나 타국의 지배로부터 유대 민중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헬렌화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역사의식이 증폭되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온 구세주(왕)는 유대 민족을 초월적인 야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리라는 종교적 믿음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부터 유대인들은 초기에 민족의 신이었다가 후에 창조주로까지 승격하여 숭배했던 단일신 야훼 하느님을 더 이상 편협한 신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또한 헬렌화 시기에 「구약」을 쓰기 시작한 유대의 랍비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서 창조주 야훼 하느님이 이렇게 불완전한 현실세계, 끔찍한 악의 세계를 창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이런 시점에서 헤브라이즘Hebraism 전통과 그리스의 플라톤Platon 철학이 만나게 되고, 두 전통이 융합하여 유대 종교의 사상적 체계가 창출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기여한 대표적인 이론가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Philo of Alexandria(기원전 25~기원후 40)이다.
필로는 유대교의 전통에서 형성된 야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였고, 또한 매우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던 인물이다. 신앙과 철학으로 무장한 그는 자기 민족에게 계시된 구약에 뿌리를 두고 창조주에 대한 엄격하고 일원론적인 유대교적 가르침을 고수하였고, 동시에 전적으로 선(善)하고 완전한 인격자 야훼 하느님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필로의 신앙체계에서 야훼 하느님은 세계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는 유일신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유일신에는 어떤 말이나 특성도 덧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일신은 선한 것보다 더 선하며, 완전한 것보다 더 완전하다. 그래서 신은 ‘존재’라고만 말할 뿐이라는 얘기다. 반면에 물질적인 것은 악의 원리이다. 현실세계는 죄악의 원인이고, 육신은 영혼의 무덤이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로부터 벗어나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밝고 선한 신의 세계와 고통으로 가득 찬 어두운 현실세계의 이원적 투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완전한 선의 세계와 불완전한 악의 세계, 신국과 지상국, 밝음과 어두움 등으로 분리된 이원론(二元論)적 사고는 바로 플라톤의 철학에 기원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변함없이 진짜로 있는 실재의 세계(이데아의 세계)와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변화하는 현실세계(그림자의 세계)에 바탕을 둔 것이다. 비유하건대 두 세계는 하늘에 떠 있는 실재하는 달(moon)과 물위에 비친 달 모습의 관계와 같다. 실재하는 달은 그대로 있는데, 구름이 가리면 물 위에 떠 있는 달이 없어지기도 하고, 물이 출렁거리면 달의 모습이 요동치는 형상을 보이는 관계와 같다는 얘기다. 이와 같이 필로는 유대인의 민족 신앙과 순수한 그리스 철학을 결합하여 인간의 창조와 타락과 같은 「구약」의 이야기를 유비(allegories)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육체 안에 갇힌 영혼은 죄악과 고통의 연속이지만, 이를 벗어나 신의 경계로 고양되면 선과 진리에 접하게 된다는 신앙이 나오게 된 것이다.
논리적인 사고에서 볼 때, 창조주 야훼 하느님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요동치는 현실세계를 초월해 있어야 한다. 창조주가 초월해 있다면, 피조(被造)된 현실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한 창조주가 불완전한 현실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이 곧 불완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세계와 창조주와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단절된 상태가 될 것이고, 인류의 구원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에서 필로는 초월자 유일신과 현실세계 간에 관계의 다리를 놓는다. 그 다리가 이른 바 구세사상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되는 “로고스”Logos의 개념이다.
‘로고스’란 어원적으로 볼 때 ‘말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말”이란 뜻이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말’은 유일신 야훼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성화되었다. 이 “로고스”가 곧 현실세계로 들어와서는 지혜 내지 정신으로 발휘된다. 여기로부터 필로는 세계 안으로 들어온 “로고스”가 초월적인 완전한 유일신과 불완전한 현실세계를 매개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창조주 유일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가르친다.
세상 안으로 들어온 “로고스”는 하느님의 의지를 실행하는 심부름꾼, 대표자, 천사 또는 정령(精靈)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로고스”는 세계의 대사제로서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자요, 위안을 가져다주는 자로서 야훼 하느님 앞에서 세계를 대표하며, 현실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즉 “로고스”는 힘들 중의 힘이며, 최고의 천사이며, 하느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장남이며, 제2의 하느님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로고스가 곧 구세주(Cristos)라는 믿음으로 정착되면서 로마시대에 성자(聖子) 하느님으로 정착된다.
생멸을 거듭하는 현실 속에서 “로고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천지만물은 유일신 하느님의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로고스는 천지만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혼(靈魂)이다. 인간도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그 안에는 영혼이 내재한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구분해볼 때, 로고스는 정신적인 영혼의 척도이며,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 된다. 고통과 좌절로 뒤범벅이 된 인간 삶의 과제는 오직 육체에서 벗어나 영원한 신의 지혜인 로고스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로고스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 신과 일체(신인합일神人合一)가 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인간은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로고스가 내재한다고 하더라도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신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직 유일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 신의 프뉴마Pneuma(생명의 진리인 영)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생명의 진리인 영(프뉴마)은 다른 동물에서 보다도 인간에게서 돋보이는 지혜의 영에 가까운 뜻이다. 그래서 필로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신의 진리를 깨우쳐 그 경계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를 잠재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성령(聖靈)이라는 믿음으로 확대되고, 로마 시기에 성령 하느님으로 정립된다.
그러므로 필로는 플라톤 사상을 토대로 하여 헬레니즘 전통의 신관, 창조관, 구원관을 끌어들여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서 출범하는 그리스도교 교리 정립에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우선 유대인의 민족신에 국한되었던 야훼 하느님 신앙을 초월적인 창조주 및 유일신 하느님 신앙으로 고양하여 보편적인 종교로 탈바꿈하는 작업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음으로 신의 지혜요 대리인이며 아들이 되는 로고스가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왕이 나와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공고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유일신으로부터 출원하는 프뉴마(진리의 영)로부터 성령의 의미가 정초되는 것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리스 철학과 유대 민족의 종교를 통합하려는 필로의 노력은 새롭게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시대, 즉 성부 하느님의 대리자로 등장하는 구세주의 성자 하느님의 시대를 여는 데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된 것이다.
마케도니아 제국이 분열되고 로마가 다시 세계적인 통일제국을 건설하기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시민들의 삶이 점점 피폐해져 갔고, 이민족의 통합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정서가 와해되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로마인들은 고통과 번뇌로부터 안녕과 마음의 평온을 갈망하게 됐을 것이다. 이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절대적 존재인 신에로의 귀의를 갈구하게 되고, 세속적인 삶에서 초월적인 영원한 삶을 욕망하게 되었음을 함축한다. 이런 시기에 예수가 출현했고,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가 침투해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에게 예언되어온 메시아를 예수로 간주하면서 출발한다. 그리스도교가 비록 유대교의 한 종파에서 시작하였지만, 종파간의 투쟁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을 도왔고, 그리스도 교회의 조직형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아가 로마 황제의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다양한 민족적 계급적 배경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점차 채워줌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점진적으로 세계적인 종교로 변모되어간다. 그렇게 되기까지 가장 중심에 있는 핵심교리는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립이었다.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화가 나고 창피해서 은밀히 파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 아이는 하느님이 보내신 아이이며 결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수가 태어나 두 살쯤 되었을 때, 요셉은 유대지방을 통치하던 헤롯Herod이 어린 애들을 모두 죽인다는 천사(天使)의 가르침에 따라 이집트로 이주한다. 거기에서 그는 몇 년을 살다가 안전을 확인한 후에 팔레스티나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와 나자렛Nazareth에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나자렛 교도라 불렀다.
나자렛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헤롯의 폭정과 로마의 무단 통치에 신음하며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할 유대교는 전통과 율법과 형식에만 치우쳐서 유대인들의 고통과 갈증을 해소해 주질 못했다. 유대인들은 역사상 최대의 왕국을 건설했던 다윗의 업적에 대한 향수를 그리면서 오로지 ‘한 사람의 영웅적인 왕(메시아)이 출현하여 행복한 시대를 연다’는 희망만을 간직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메시아를 너무도 애타게 기다린 유대교의 한 종파가 바로 나자렛 교도였던 것이다.
예수가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30세쯤 되어서야 현실적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역의 과정은 그때부터 복음서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특히 사람들 앞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사도 요한John에게 세례를 받은 후부터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가에서 메시아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 회개(悔改)의 복음을 베풀었는데, 예수 또한 그 강가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노라고 요청하였다. 요한은 그가 메시아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예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강변하였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복음」 3:17)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한다.
예수는 유대인이 숭배하는 민족의 수호신과는 차원이 다른 전지전능한 인격적 인 유일신 하느님을 믿었다. 그는 믿음, 사랑, 구원을 내세우면서 3년 동안(27~30년) 팔레스티나, 사마리아, 그리고 주변국을 두루 다니면서 설교하였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본격적으로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복음을 전파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이 목메어 기다리던 메시아는 곧 예수라는 말이 유포되기 시작했고, 그의 복음은 주변에서 로마의 심장부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유대교 측에서는 예수를 이단자로 취급하였고, 예수의 복음을 민족 종교의 수치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예수 또한 유대인들이 율법 위주에 꽁꽁 매인 민족 신앙을 혐오했고, 유대교의 신앙을 고수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Pharisee)들을 위선과 거짓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거리낌 없이 규탄했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바리새인들을 극적으로 자극하게 되었는데, 가장 모독적인 장면은 예수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 즉 ‘율법을 폐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세상에 온 성육신 하느님’이라고 한 대목이다. 이로부터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이 유포되자 민중들은 예수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민중들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으로 기도하러 갔다가 신성모독 혐의로 체포된다. 로마 총독 빌라도Pontius Pilate는 예수의 혐의가 없음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는데, 헤롯은 이 사건에 휘말리기 싫어서 다시 빌라도에게 넘겼다. 빌라도는 광분하는 민중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형을 언도하였으나 예수는 죽은 지 3일 후에 부활하였다고 전한다.
복음서는 나자렛교의 예수가 구세주임을 끊임없이 가르친다. 특히 오순절(Pentecost)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곳에서 베드로Saint Peter는 첫 번째 설교를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메시아다. 그가 불의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무덤은 예수를 집어삼킬 수 없었고,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이 거저 주어진다.”고 하면서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서 교회로 인도했다. 나중에 베드로는 십자가형 형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는데, 예수와 동일하게 죽을 자격이 없어서 자청해서 그랬다고 한다.
나자렛 예수가 신의 아들로서 진정한 구세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너무도 강력하고 전적으로 설파한 인물은 사도 바울Paulos이다. 바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Saul이다. 그는 눈이 멀었었는데 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눈을 뜨게 되고, 복음 전파의 전사로 나섰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울은 구약을 근거로 예수가 왜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청년기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로마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전파했던 것이다.
바울은 심지어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타인과 유대교를 넘어 그리스 및 로마 세계로 확장되어 가도록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곳들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무던히 애썼던 인물이다. 바울의 복음 전파는 실로 엄청났다. 특히 코린트 지방에서 그는 「로마서」를 작성하여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로마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사도행전은 바로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바울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예수의 복음이 사도 바울에 의해 그리스적이며 영지주의(Gnosticism)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리스의 정신세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사상적인 언어와 개념체계로 재정돈되어야 함을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적 사고에서 신앙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예수는 완전하고 초월적인 신(God)과 불완전한 존재인 현실적 인간 사이의 중간적인 위치에서 양자를 매개하는 신인(神人)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예수는 생물학적인 존재로서의 육신을 가진 존재이면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초월적인 진리와 인간의 이성적 진리, 초자연의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매개자이다. 그리스적 사고에서는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 세계와 이성을 초월한 신의 세계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 속에 개입해 들어온 것이다.
예수는 차안과 피안, 이성과 신앙 간의 매개자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교를 그리스 문명권에 전파하면서 신적 존재로서의 주님[王]이란 개념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유대교의 전통에서 형성된 메시아(그리스어 번역은 그리스도)이자 다가올 새 시대의 왕으로 간주했다. 그는 오로지 예수가 구세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전적으로 설파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이 자리 잡은 그리스적 사상 위에서 유대교적 부활사상을 접목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전환시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울에 의해 그리스적 사고로 무장된 그리스도 복음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신이 죽었다가 되살아난다는 것은 동방의 의례에서 나온 것인데,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은 아티스Attis 신의 죽음과 부활의례(復活儀禮)를 모방한 것이다. 미트라Mithra 신앙 역시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예수의 탄생은 본래의 탄생일과는 상관없이 미트라 신이 태어난 동짓날을 상징하여 12월 25일로 기념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순결하게 태어났다는 사상은 유대교의 전통에는 없었던 것이고, 오히려 동방의 의례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신과 여성 사이의 성적 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즉 동정녀 마리아 숭배는 이집트의 이시스Isis 신 숭배를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가 죽은 이후, 다양한 종파들 간의 계속적인 투쟁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의 중심인물이 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인류의 시원적인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원죄의 관념이 그리스도교에 흘러들어왔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내세관이 정착되면서 구세사상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구세주 예수가, 원죄를 짊어진 채 태어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인류의 죄를 사하여 성부 하느님에게로 인도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고대의 다른 종교들이 다 그렇듯이,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을 구원의 방편으로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전체적인 관점은, 바로 갈릴리의 설교자 예수의 위대한 사역과 많은 설교가 기다려왔던 메시아요 그리스도임을 믿게끔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원죄의 개념과 인류 구원이라는 토대 위에서 신인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되는 예수는 구세주가 될 수 있었고,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는 예수의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 단번에 사라진다는 믿음으로 정착된 것이다. 여기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죄에서 행방된다는 믿음이 점차 확산되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로고스”가 유일신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대리자요, 심부름꾼이며, 제2의 신으로 아들이라는 것이다. 신의 아들인 로고스는 세계의 대사제이고, 고통을 겪는 인류를 구원하여 밝고 영원한 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구세주이다. 그러나 예수가 바로 신의 아들로 구세주라고 줄기차게 외치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 교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되면서 내외적인 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이 대표적이다.
사도시대에 영지주의가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유입된 영지주의는 예수가 그리스도의 화신(化身)이요, 신의 아들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성육신(成肉神)임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이로부터 1세기 말부터 2세기 중엽까지 교회의 지도자들은 12개 정도의 영지주의 분파와 싸웠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종교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비밀스런 지식의 핵심은 예수란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아니며, 물질세계란 악하고, 단지 몇몇 선택된 사람의 영혼만이 물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할 수 있고, 성령의 도움으로 신의 세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영지주의자들은 로마교회를 자신들만의 비밀 종교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획책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곧 그리스도임을 지키려는 교회 지도자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리스 지성인 마르키온Marcion(85?~160?)은 소아시아 출신으로 137년경 로마 교회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영지주의의 비밀스런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여러 영지주의자들의 관념을 자신의 성서 비판과 결합하였으며, 그리스도교에서 유대교적인 뿌리를 떼어내려고 그리스 사상과 융합시켰다. 마르키온은 바울이야말로 가장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사도로 보았으며, 바울의 서한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지주의 노선을 극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념체계를 구축하였다.
2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리스도교회는 교리체계의 사상적 논란을 거듭하면서 로마제국의 전역에 퍼져 나간다. 교리에 대한 여러 논쟁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복음의 핵심진리를 신비스럽게 이해해 갔던 것이다. 두드러진 것은 절대자 하느님이 한 분이지만 삼위의 하느님(Trinity),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이라고 가르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다. 이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벌어진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줄기차게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인간으로 육화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라면,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복음은 곧 하느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볼 때 분명히 모순적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패러독스(역설, paradox)를 해결해야 그리스도를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역설의 논리를 내놓은 이가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카르타고 출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155?~220?)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De came christi)라는 책에서 “신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신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에 완전히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는 묻혔다가 부활했다.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단언한다. 한마디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의 논리는 후에 종교적인 믿음과 이성적인 사고 사이를 날카롭게 갈라놓은 계기가 된다. 즉 신앙과 이성적인 사유는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육화했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여러 세기 동안 교파들 간의 피나는 논쟁과 투쟁을 양산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예수를 하느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방식이다. 만일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한 지위로 말하게 된다면, 군주로서의 성부 하느님에 대한 권위를 손상시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군주성을 보존하면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격성을 유지시키려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자는 로마인 사벨리우스Sabellius(?~260?)였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느님의 세 양태(樣態)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군주론 학파는 양태론(modalism) 혹은 사벨리아니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 또한 좋은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는 아들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에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유신론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신론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권에서 종교적인 신론의 핵심이며, 근본 바탕을 지탱해 주는 결정적인 지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삼위일체’는, 글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위격에 있어서는 ‘세 분 하느님’으로 존재하지만, 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한 분 하느님’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 분 하느님이 세 분이라는 얘기다. 이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쉽게 납득이 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라고 본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아무리 뒤져봐도 ‘삼위일체’란 말은 없다. 삼위일체란 개념은 라틴어 번역어인 “위격(位格)에 있어서는 세 분이고, 그 본체(실체)는 하나이다.”(una substantia tres personae)라는 표현에서 나왔다.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의 철학에서 “세 기체는 하나의 실체를 가진다”(μία ουσία τρες ὕποστάσεις)는 표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하나의 실체’란 ‘전에도 영원히 있어왔고, 지금도 있으며, 장차 오게 될 한분의 아버지 하느님’, 다시 말해서 태초에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느님을 의미한다. 세 분의 위격에 대하여 말하자면, 창조주 하느님은 단 한 분의 하느님이 아니라 삼위의 하느님으로, 즉 ‘성부 하느님(聖父)’, ‘성자 하느님(聖子)’, ‘성령 하느님(聖靈)’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성부 하느님은 구약 시대에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온 ‘야훼’라 부르는 분이고, 성자 하느님은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구세주)에서 나온 예수를, 성령 하느님은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여 인간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성령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본질은 하나이지만, 그 본질을 소유한 분은 셋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신성(신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하나’의 신성을 소유한 인격자는 각각 셋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세 분 하느님이 신성과 능력, 영광과 권능에서 완전히 동등하다는 뜻이다.
콘스탄티누스F. V. A. Constantinus (272~337)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로마 제국의 서쪽을 다스리는 공동 황제가 된다. 그는 312년에 로마 교회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정적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하면서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편다. 그는 이교도 국가인 로마제국이 자행해온 박해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고, 리키니우스Licinius(263~325) 와 함께 313년에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반포하여 모든 종교에 대해서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허락했으며, 압수된 그리스도교의 재산을 돌려주었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교회와 싸우는 것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리스도교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밀라노칙령에서 체결된 그리스도교 교회와 제국의 동맹은 로마제국 황제들의 정책으로 더욱 공고해졌고, 황제들은 교회를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관대한 후원자요 보호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256~336년)에 의해 정통교회가 위협을 받자 주교들을 공의회에 소집하기도 하였으며,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긴장이 있을 때마다 공의회를 개최하여 해결하였다. 황제와 주교들은 서로 협력하였고, 그리스도교는 황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점점 로마제국을 닮아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가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지배적인 종교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인 까닭은 데오도시우스F. Theodosius(347~395)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가종교로 선포함(392년)으로써 비롯된다. 결국 세계의 정복자로 군림하던 로마는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사유에, 종교적으로는 그토록 박해했던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의해서 정복을 당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낳고 말았다.
아리우스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면, 태어난 자는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예를 들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아니라 단지 무(無)로부터 신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예수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단지 그를 닮았을 뿐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정면 도전이었던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296~373)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자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다’라고 주장한다.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는 서로 양분하여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로부터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이집트,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대중들은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그 문제로 인해 가두 투쟁도 전개했다. 로마로부터 이집트의 분열을 걱정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직 그리스도 교인이 아니면서도 그 분열을 극복하고자 대담한 조치를 취한다.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를 개최하여 신조를 채택한 것이 그것이다.
니케아 신조(325년, Symbolum Nicaenum) : “우리는 한 분 하느님을 믿는다. …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이시다.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분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며 … 나신 자이지 만들어진 분이 아니다.” 니케아공의회의 신조에 따라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정통교회의 최악의 이단으로 파면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336년에 죽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었고, 광범위하게 퍼져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에 이와 유사한 교리들이 끊임없이 나왔고, 5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리우스 가르침은 계속적으로 정통 교회와의 마찰을 빚게 된다. 정통 교회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불허한 독실한 그리스도 교인이었던 테오도시우스F. Theodosius(379~395년)는 379년에 동방의 황제가 되자 380년에 그리스도교를 국가의 의무종교로 만들었고, 391년에는 모든 이교도들의 신전을 폐쇄하고 예배를 금지하였다. 그는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이 로마인들에게 전수해준 저 종교를 믿기를 바란다.”고 선언함으로써 많은 로마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에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공의회를 열어 니케아 신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성령에 대한 진술을 신조에 첨가하였다.
콘스탄티누스 공의회 : 여기에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성령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신다.”의 조항이 그것이다. 후에 스페인 쪽에는 아직 아리우스파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어로 된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589년 제3차 툴레도Toledo 교회 쉬노드synod 에서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라는 구절을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고쳐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를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는 세계로 퍼지게 되었는데, 4세기에는 고트족과 반달족이 그리스도교화되었고 , 5세기 후반에는 프랑크족에게 수용되었다.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는 외곽의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화되었고, 9~10기에는 슬라브 민족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함으로써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이 그리스도교화되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신도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스승이라.’하여 따르리라. ‘예수가 재림한다.’하나 곧 나를 두고 한 말이니라.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道典』 2:40:1-5)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 각 지역에 분포하여 살고 있는 민족은 오랜 습속과 생활방식을 이어오면서 각기 다른 신앙문화를 창출해왔다. 이슬람 사원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 교회나 성당에서 소망을 고백하는 사람, 정화수 떠놓고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람, 지독한 가뭄이 들어 농작물이 바싹바싹 타들어갈 때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농부, 이러한 모습들은 그 방식과 절차가 다르고 목적이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모두 인간사에 관여하는 신神을 숭배하는 신교문화神敎文化의 표본이다.
신교문화란 신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출현한 신교문화는 각기 다른 체계를 갖추어 종교문화로 자리를 잡아 개인이나 민족사, 국가의 정신을 선도해 가기도 했지만, 지성知性의 논리적인 사고와 학문의 진보로 인해 우주자연의 신비가 점차 벗겨지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퇴색하여 사라진 것도 있다.
오랜 세월동안 신교문화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종교가 있다. 이는 보다 강력한 일신一神이 존재하고, 이분이 현실세계에 직접 관여하면서 나약한 인간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고, 소망을 들어주며, 신실한 믿음을 가진 인간에게 무한한 혜택을 주리라는 공통적인 확신에서 형성된 것이다.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교문화의 대표적인 경우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탄탄한 논리적 체계성을 갖춤으로써 무려 2000여 년 동안 세력을 떨쳐 왔고, 인류의 문명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현존하는 유일신 종교는 이슬람교보다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를 우선으로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결정적인 공격을 받아오면서 적절한 논리의 대응과 나름대로 체계성을 확립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1. 세계화된 그리스도교의 유일신론(Monotheism)”에서 유대교의 단일신론(Henotheism) 신앙이 어떻게 발원하여 범세계적인 ‘그리스도교의 유일신론’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를 개괄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2. 유일신론의 빛과 그림자”에서 지성의 논리적 사유로부터 도전挑戰을 받은 유일신론이 서구 지성사에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를 검토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3. 최고의 유일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근거”에서 최고의 신에 대한 증명이 어떻게 진술되었던가를 간략하게 소개해볼 것이다.
신교문화란 신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출현한 신교문화는 각기 다른 체계를 갖추어 종교문화로 자리를 잡아 개인이나 민족사, 국가의 정신을 선도해 가기도 했지만, 지성知性의 논리적인 사고와 학문의 진보로 인해 우주자연의 신비가 점차 벗겨지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퇴색하여 사라진 것도 있다.
오랜 세월동안 신교문화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종교가 있다. 이는 보다 강력한 일신一神이 존재하고, 이분이 현실세계에 직접 관여하면서 나약한 인간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고, 소망을 들어주며, 신실한 믿음을 가진 인간에게 무한한 혜택을 주리라는 공통적인 확신에서 형성된 것이다.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교문화의 대표적인 경우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탄탄한 논리적 체계성을 갖춤으로써 무려 2000여 년 동안 세력을 떨쳐 왔고, 인류의 문명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현존하는 유일신 종교는 이슬람교보다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를 우선으로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그리스적 사유로부터 결정적인 공격을 받아오면서 적절한 논리의 대응과 나름대로 체계성을 확립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1. 세계화된 그리스도교의 유일신론(Monotheism)”에서 유대교의 단일신론(Henotheism) 신앙이 어떻게 발원하여 범세계적인 ‘그리스도교의 유일신론’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를 개괄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2. 유일신론의 빛과 그림자”에서 지성의 논리적 사유로부터 도전挑戰을 받은 유일신론이 서구 지성사에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를 검토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3. 최고의 유일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근거”에서 최고의 신에 대한 증명이 어떻게 진술되었던가를 간략하게 소개해볼 것이다.
서양의 지성사를 들여다 볼 때, 종교문화가 융성했던 시대가 있었다. 서양의 중세문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로마의 문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의 문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신들이 존재하고, 신들이 우주자연의 변화무쌍한 현상들을 각 분야별로 관장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다신(多神)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이집트에는 절대적인 창조자란 뜻을 가진 태양신 라(Ra), 개의 머리를 한 저승사자 아누비스Anubis(이집트어로 인푸inpu), 영생과 부활을 상징하는 저승의 신 오시리스Osiris, 이집트를 지배하는 매의 모습을 닮은 신 호루스Horus 등이 숭배되었고, 그리스에는 올림포스 12신을 대표하는 신들의 제왕이자 하늘과 날씨를 주관하는 제우스Zeus, 태양과 빛의 신 아폴로Apollo, 학문의 여신 아테나Athena, 전쟁과 파괴를 관장하는 신 아레스Ares,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등이 숭배되었으며, 로마에는 로마로 건너간 그리스 신들 외에 신들 중의 신 쥬피터Jupiter, 로마의 시조 신 로물루스Romulus, 하늘의 문지기 신 야누스Janus, 꽃의 여신 플로라Flora 등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서양의 중세기에는 창조주인 유일신을 숭배하는 그리스도교의 종교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웠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종교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유일신 종교는 광막한 사막을 배경으로 유대인(Yehudim)들 사이에서 출범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악조건의 자연환경과 타민족의 기나긴 압제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간의 의지보다는 오히려 비이성적인 신앙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을 구가하려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그들은 초월적인 창조주 단일신(單一神)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메시아Messiah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민족종교가 쇠퇴하면서 이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예수(Jesus of Nazareth)가 등장한다. 예수는 유대인의 민족 중심적 종교관을 타파하여 범세계적인 유일신(God) 중심적 신앙으로 전환시킨 인물이다.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중심적 사고는 당시 통일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로 침투되었고, 철학적 사유와 조우하면서 중세 종교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근대로 접어들어 그리스도교는 지구촌 각 지역으로 퍼지면서 범세계적인 종교가 됐던 것이다.
1) 창조주이며 유대 민족의 단일신 야훼 하느님
그리스도교의 발원은 고대 유대 지방에서 숭배되어온 부족신 ‘야훼Yahweh’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신(多神)이 난무하던 옛 시절에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신으로 야훼를 택하여 숭배하게 된다. 야훼신은 유대 민족의 숱한 역경과 고난의 행보에 동참하면서 창조주 야훼 하느님의 구세사상으로 거듭나게 되고, 논리적인 사고의 날카로운 도전과 정치적인 탄압을 극복하면서 유대 민족사에 정착하게 된다.
유대인이 선택한 전쟁의 신 야훼
유대 민족의 단일신 신앙은 오래전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 「창세기」 11장을 보면, 대략적으로 기원전 약 2000년경 초엽 북부 아라비아 지역(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역)에 거주하는 부유한 가계의 족장이었던 아브라함Abraham은 가신(家神, Teraphim)의 부름을 들은 후, 자기가 태어난 우르Ur(이라크 지방에 있는 땅)를 버리고, 약속의 땅을 향해 자기의 부족을 이끌고 지중해의 동쪽 끝으로 길을 떠난다. 아브라함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낮선 땅을 향해 고독한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부족을 비옥한 땅으로 이끌어줄 신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신과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계약은 「창세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아브라함이 찾아갔던 약속의 땅은 당시 가나안Canaan이라고 불렸다. 거기에는 이미 페니키아인, 블레셋인(팔레스타인), 히타이트인 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다신 가운데 고대 유대인이 숭배한 강력한 신들을 꼽으라면, “엘”El, “바알”Baal, “야훼”Yahweh이다. “엘”은 신과 인간의 아버지, 혹은 시간의 아버지란 뜻이지만, 셈족 언어로는 신들 중 으뜸가는 신을 의미하며, 후에는 자신의 민족을 염려하며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이었고, “바알”은 원래 폭풍과 비의 신으로 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하며, 가나안 지역에서 널리 숭배되었던 신이었다. 그리고 “야훼”는 하늘의 신, 유대인의 부족 신, 전쟁의 신이었다.
기원전 1600년경에 이스라엘 지역 전역에 기근이 겹치자 이를 피해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애굽埃及)로 이주해 갔다.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비참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도한 모세Moses는 기원전 1300~1250년경에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한다. 이것이 모세의 출애굽(出埃及) 사건이다.
모세는 이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서 시나이Sinai 반도에 도착했고, 시나이 산에서 유목민의 신 야훼Yahweh(처음에는 YHWH란 이름을 가진 신을 부족의 신으로 택했으나 후에 야훼로 발음되고, 나중에 여호아Jehovah로 바뀐다)로부터 십계명(十誡命)을 받는다. “너희 하나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신명기」5-6)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40여 년을 황량한 광야에서 방황해야만 했다. 끝내 모세는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수아Yehoshua가 유대인들을 이끌게 된다. 도덕적 지도자이자 유능한 군사 전략가였던 그는 마침내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됐던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 “너의 선조들의 신 야훼”라고 기록하였듯이, 야훼가 유대 민족의 절대적인 숭배 신으로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때부터 미래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열어가게 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스라엘 군대를 신속하게 조직하여 중앙의 고원지대, 남쪽의 도시국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을 차지하여 수세기 전에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됐던 것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도 야훼신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원주민에 대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잔혹한 지배와 살육을 지시했다. 야훼신은 페니키아의 몰록Moloch 신보다 훨씬 더 잔인한 면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현저하게 잔인한 야훼신의 관념은 피로 얼룩졌던 기나긴 전쟁 기간을 지나면서 더욱 강하게 형성된 것이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이후,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정치체제는 물론이고 종교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은 토착민들과 섞이면서 서로 결혼했고, 여러 신들, 말하자면 다신들 종교 숭배가 유포된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왕국은 12지파로 나뉘어져 거의 200년 동안 모세를 통해 전해진 율법이 다스리는 신정정치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후 도덕적 결함을 지녀 거룩한 땅을 서슴없이 더럽힌 사울Saul 왕, 뒤를 이어 야훼 하느님과의 신실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 나라를 잘 다스린 다윗David(?~기원전 962?) 왕, 지혜가 출중했으나 쾌락에 나라를 말아먹은 솔로몬Solomon(기원전 971~931) 왕도 나왔다.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Assyria는 북 이스라엘을 휩쓸었고,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 왕의 침략을 받은 남 유다는 10년 후에 멸망하였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었고, 느브갓네살 왕은 많은 유대인들을 바빌론의 포로로 잡아갔던 것이다.
창조주 유일신관 등장
유대의 종교사를 보면, 유대인들은 기원전 7~6세기경 바빌론Babylon 포로기와 페르시아Persia의 통치기간에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이 시기를 통상 포로기 이후 또는 제2차 성전시대라고 불린다. 이때에 유대 요시아Josias(BCE 621~?)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의례의 집중화에 힘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일신 야훼만을 숭배해야 한다는 엄격한 원칙이 책정되었다는 점이다. 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들의 숭배를 제거 내지 금지시켰던 것이다.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성전 파괴와 더불어 귀족 및 사제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갔고, 이후 페르시아의 키루스Cyrus(기원전 590?~530) 왕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기원전 538년에 5만여 명의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느헤미아Nehemia(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지도자)의 도움으로 성전 재건에 힘쓰고, 토라(율법)에 대한 글을 수집하고 편집하였으며, 국가 재건에 힘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단일신관의 강화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야훼가 우주를 지배한다는 초보적인 유일신 사상이 등장한다. 전통적이고 고유한 민족적 특성으로 간주되었던 단일신론이 보편적인 신론으로 첫발을 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의례의 집중화와 거룩한 문헌의 경전화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나사렛Nazareth 교도들이다. 나사렛 교도는 유일신교를 발아시킨 역사상 최초의 종교집단의 중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포로기 중에 고대 근동 지방의 창조설화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우주 창조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이 고백하던 출애굽기의 야훼 하느님이야말로 우주만물을 창조한 초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전에는 부족의 조상신에 지나지 않았던 야훼가 이제는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이며 주권자로서의 위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창조주는 「창세기」 첫 장에 등장한다. 창세기의 내용은 우주창조의 기원에 대한 바빌론 신화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서에서 말하는 최초로 창조된 인간 아담Adam의 이름은 바빌론 신화나 근동 신화에서 채용한 아다파Adapa(첫 번째 인간)와 유사하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이러한 창조신화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민족 수호신으로 받아들인 출애굽기의 야훼 하느님을 초월적인 창조주로 그 위상을 승격시킨 것이다. 따라서 야훼신은 범세계적인 신으로 지위가 드높여지고 있었다.
특히 예언자 집단은 창조와 율법, 그리고 역사 속에서 야훼신이 계시되고 활동한다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초월적인 창조주 야훼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독특한 제의와 율법은 더욱 강조되고 세련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 탄압으로부터 받은 그들의 삶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그들은 야훼신이 내려준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징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했고, 언젠가는 야훼신이 자기의 민족을 용서하여 지구상의 다른 민족보다 더 높이 들어 올릴 날이 올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야훼신이 비록 자기 민족에게 가혹한 징벌을 내렸지만 모세를 통해 내려준 율법은 본질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세계를 초월한 야훼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율법을 내려주었으며,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계시 속에서 야훼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한 인식은 야훼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의지에 대한 깨달음을 뜻한다. 그래서 랍비들은 깨달음을 통해 초월적 야훼신의 진정한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세계를 초월한 유일신과 구세(messiah) 사상 태동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타국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그로 인해 정치적으로 독립을 하지 못하고 혹독한 압제와 핍박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마케도니아 알렉산더Alexander(기원전 356~323) 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하자 동방 세계에 헬렌화(hellenization)가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300년경부터 유대교의 랍비들은 구약(舊約)을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기에 헬렌화로 인하여 유대교에는 전혀 없었던 새로운 내세관과 영혼불멸 사상이 생겨났고, 또한 사후 보상과 심판에 관한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영향으로 종말론이 유대교에 유행하기도 하였다.헬렌화의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 종교집단에게 빼앗겼던 적도 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의 제우스Zeus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받기도 하였고, 유대교가 법으로 금지되기도 하였으며, 엄청난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자 기원전 165년에 마카베우스Judas Maccabeus는 유대교를 헬레니즘식으로 바꾸는 것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마카비’(망치) 반란이다. 이 반란으로 유대인들은 종교적 자유와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게 되어 야훼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몇 번에 걸쳐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기원전 165년에 잠깐 독립한 마카베우스 반란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성공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로마의 억압적 통치에 유대인들은 빈번히 저항해 보았지만 정복자의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미래 역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믿고 신뢰하기에는 그들이 당하는 현실적인 고통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로마의 통치기에 지중해 연안에는 무자비한 압제와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리라는 메시아Messiah(구세주)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고대인들은 왕(王)을 메시아로 여겼는데, 이런 메시아에 대한 신앙은 특히 유대인들의 정신에 강하게 터를 잡는다. 민족의 지도자와 같은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들을 억압자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유대 종교에 매우 중요한 특징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에 대한 초기의 믿음은 주님께서 기름 부은 자(왕)로 나타나 타국의 지배로부터 유대 민중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헬렌화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역사의식이 증폭되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온 구세주(왕)는 유대 민족을 초월적인 야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리라는 종교적 믿음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부터 유대인들은 초기에 민족의 신이었다가 후에 창조주로까지 승격하여 숭배했던 단일신 야훼 하느님을 더 이상 편협한 신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또한 헬렌화 시기에 「구약」을 쓰기 시작한 유대의 랍비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서 창조주 야훼 하느님이 이렇게 불완전한 현실세계, 끔찍한 악의 세계를 창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이런 시점에서 헤브라이즘Hebraism 전통과 그리스의 플라톤Platon 철학이 만나게 되고, 두 전통이 융합하여 유대 종교의 사상적 체계가 창출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기여한 대표적인 이론가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Philo of Alexandria(기원전 25~기원후 40)이다.
필로는 유대교의 전통에서 형성된 야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였고, 또한 매우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던 인물이다. 신앙과 철학으로 무장한 그는 자기 민족에게 계시된 구약에 뿌리를 두고 창조주에 대한 엄격하고 일원론적인 유대교적 가르침을 고수하였고, 동시에 전적으로 선(善)하고 완전한 인격자 야훼 하느님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필로의 신앙체계에서 야훼 하느님은 세계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는 유일신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유일신에는 어떤 말이나 특성도 덧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일신은 선한 것보다 더 선하며, 완전한 것보다 더 완전하다. 그래서 신은 ‘존재’라고만 말할 뿐이라는 얘기다. 반면에 물질적인 것은 악의 원리이다. 현실세계는 죄악의 원인이고, 육신은 영혼의 무덤이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로부터 벗어나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밝고 선한 신의 세계와 고통으로 가득 찬 어두운 현실세계의 이원적 투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완전한 선의 세계와 불완전한 악의 세계, 신국과 지상국, 밝음과 어두움 등으로 분리된 이원론(二元論)적 사고는 바로 플라톤의 철학에 기원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변함없이 진짜로 있는 실재의 세계(이데아의 세계)와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변화하는 현실세계(그림자의 세계)에 바탕을 둔 것이다. 비유하건대 두 세계는 하늘에 떠 있는 실재하는 달(moon)과 물위에 비친 달 모습의 관계와 같다. 실재하는 달은 그대로 있는데, 구름이 가리면 물 위에 떠 있는 달이 없어지기도 하고, 물이 출렁거리면 달의 모습이 요동치는 형상을 보이는 관계와 같다는 얘기다. 이와 같이 필로는 유대인의 민족 신앙과 순수한 그리스 철학을 결합하여 인간의 창조와 타락과 같은 「구약」의 이야기를 유비(allegories)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육체 안에 갇힌 영혼은 죄악과 고통의 연속이지만, 이를 벗어나 신의 경계로 고양되면 선과 진리에 접하게 된다는 신앙이 나오게 된 것이다.
구세사상을 정립한 필로
문제는 초월적인 완전한 야훼 하느님이 악에 물든 현실세계를 어떻게 창조하였고, 현실적인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느냐가 관건이다.논리적인 사고에서 볼 때, 창조주 야훼 하느님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요동치는 현실세계를 초월해 있어야 한다. 창조주가 초월해 있다면, 피조(被造)된 현실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한 창조주가 불완전한 현실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이 곧 불완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세계와 창조주와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단절된 상태가 될 것이고, 인류의 구원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에서 필로는 초월자 유일신과 현실세계 간에 관계의 다리를 놓는다. 그 다리가 이른 바 구세사상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되는 “로고스”Logos의 개념이다.
‘로고스’란 어원적으로 볼 때 ‘말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말”이란 뜻이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말’은 유일신 야훼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성화되었다. 이 “로고스”가 곧 현실세계로 들어와서는 지혜 내지 정신으로 발휘된다. 여기로부터 필로는 세계 안으로 들어온 “로고스”가 초월적인 완전한 유일신과 불완전한 현실세계를 매개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창조주 유일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가르친다.
세상 안으로 들어온 “로고스”는 하느님의 의지를 실행하는 심부름꾼, 대표자, 천사 또는 정령(精靈)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로고스”는 세계의 대사제로서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자요, 위안을 가져다주는 자로서 야훼 하느님 앞에서 세계를 대표하며, 현실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즉 “로고스”는 힘들 중의 힘이며, 최고의 천사이며, 하느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장남이며, 제2의 하느님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로고스가 곧 구세주(Cristos)라는 믿음으로 정착되면서 로마시대에 성자(聖子) 하느님으로 정착된다.
생멸을 거듭하는 현실 속에서 “로고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천지만물은 유일신 하느님의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로고스는 천지만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혼(靈魂)이다. 인간도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그 안에는 영혼이 내재한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구분해볼 때, 로고스는 정신적인 영혼의 척도이며,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 된다. 고통과 좌절로 뒤범벅이 된 인간 삶의 과제는 오직 육체에서 벗어나 영원한 신의 지혜인 로고스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로고스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 신과 일체(신인합일神人合一)가 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인간은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로고스가 내재한다고 하더라도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신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직 유일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 신의 프뉴마Pneuma(생명의 진리인 영)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생명의 진리인 영(프뉴마)은 다른 동물에서 보다도 인간에게서 돋보이는 지혜의 영에 가까운 뜻이다. 그래서 필로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신의 진리를 깨우쳐 그 경계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를 잠재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성령(聖靈)이라는 믿음으로 확대되고, 로마 시기에 성령 하느님으로 정립된다.
그러므로 필로는 플라톤 사상을 토대로 하여 헬레니즘 전통의 신관, 창조관, 구원관을 끌어들여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서 출범하는 그리스도교 교리 정립에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우선 유대인의 민족신에 국한되었던 야훼 하느님 신앙을 초월적인 창조주 및 유일신 하느님 신앙으로 고양하여 보편적인 종교로 탈바꿈하는 작업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음으로 신의 지혜요 대리인이며 아들이 되는 로고스가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왕이 나와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공고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유일신으로부터 출원하는 프뉴마(진리의 영)로부터 성령의 의미가 정초되는 것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리스 철학과 유대 민족의 종교를 통합하려는 필로의 노력은 새롭게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시대, 즉 성부 하느님의 대리자로 등장하는 구세주의 성자 하느님의 시대를 여는 데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된 것이다.
2) 범 세계화된 삼위일체(The Trinity) 하느님
마케도니아 제국이 분열되고 로마가 다시 세계적인 통일제국을 건설하기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시민들의 삶이 점점 피폐해져 갔고, 이민족의 통합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정서가 와해되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로마인들은 고통과 번뇌로부터 안녕과 마음의 평온을 갈망하게 됐을 것이다. 이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절대적 존재인 신에로의 귀의를 갈구하게 되고, 세속적인 삶에서 초월적인 영원한 삶을 욕망하게 되었음을 함축한다. 이런 시기에 예수가 출현했고,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가 침투해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에게 예언되어온 메시아를 예수로 간주하면서 출발한다. 그리스도교가 비록 유대교의 한 종파에서 시작하였지만, 종파간의 투쟁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을 도왔고, 그리스도 교회의 조직형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아가 로마 황제의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다양한 민족적 계급적 배경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점차 채워줌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점진적으로 세계적인 종교로 변모되어간다. 그렇게 되기까지 가장 중심에 있는 핵심교리는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립이었다.
예수의 출현
광활한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변방의 외진 곳 유대의 땅, 그 중에서도 베들레헴Bethlehem이라는 마을에 요셉Joseph과 약혼녀 마리아Mary 사이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족보를 따져 올라가다보면 아브라함과 다윗까지 올라가지만, 정작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단지 어머니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처녀의 몸으로 성령에 의해서 아이를 가졌다는 것과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고 대단히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화가 나고 창피해서 은밀히 파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 아이는 하느님이 보내신 아이이며 결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수가 태어나 두 살쯤 되었을 때, 요셉은 유대지방을 통치하던 헤롯Herod이 어린 애들을 모두 죽인다는 천사(天使)의 가르침에 따라 이집트로 이주한다. 거기에서 그는 몇 년을 살다가 안전을 확인한 후에 팔레스티나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와 나자렛Nazareth에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나자렛 교도라 불렀다.
나자렛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헤롯의 폭정과 로마의 무단 통치에 신음하며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할 유대교는 전통과 율법과 형식에만 치우쳐서 유대인들의 고통과 갈증을 해소해 주질 못했다. 유대인들은 역사상 최대의 왕국을 건설했던 다윗의 업적에 대한 향수를 그리면서 오로지 ‘한 사람의 영웅적인 왕(메시아)이 출현하여 행복한 시대를 연다’는 희망만을 간직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메시아를 너무도 애타게 기다린 유대교의 한 종파가 바로 나자렛 교도였던 것이다.
예수가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30세쯤 되어서야 현실적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역의 과정은 그때부터 복음서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특히 사람들 앞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사도 요한John에게 세례를 받은 후부터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가에서 메시아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 회개(悔改)의 복음을 베풀었는데, 예수 또한 그 강가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노라고 요청하였다. 요한은 그가 메시아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예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강변하였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복음」 3:17)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한다.
예수는 유대인이 숭배하는 민족의 수호신과는 차원이 다른 전지전능한 인격적 인 유일신 하느님을 믿었다. 그는 믿음, 사랑, 구원을 내세우면서 3년 동안(27~30년) 팔레스티나, 사마리아, 그리고 주변국을 두루 다니면서 설교하였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본격적으로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복음을 전파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이 목메어 기다리던 메시아는 곧 예수라는 말이 유포되기 시작했고, 그의 복음은 주변에서 로마의 심장부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유대교 측에서는 예수를 이단자로 취급하였고, 예수의 복음을 민족 종교의 수치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예수 또한 유대인들이 율법 위주에 꽁꽁 매인 민족 신앙을 혐오했고, 유대교의 신앙을 고수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Pharisee)들을 위선과 거짓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거리낌 없이 규탄했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바리새인들을 극적으로 자극하게 되었는데, 가장 모독적인 장면은 예수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 즉 ‘율법을 폐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세상에 온 성육신 하느님’이라고 한 대목이다. 이로부터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이 유포되자 민중들은 예수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이다.
민중들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으로 기도하러 갔다가 신성모독 혐의로 체포된다. 로마 총독 빌라도Pontius Pilate는 예수의 혐의가 없음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는데, 헤롯은 이 사건에 휘말리기 싫어서 다시 빌라도에게 넘겼다. 빌라도는 광분하는 민중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형을 언도하였으나 예수는 죽은 지 3일 후에 부활하였다고 전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데올로기
초기 예수의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믿는 자들” 혹은 “형제”라 불렸는데, 이들의 적대자들은 이들이 새로운 신앙을 한다는 이유로 경멸했다. 적대집단은 이들을 모멸하고 경멸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도라 불렀다. 이것이 기원이 되어 예수가 죽은 후 2세기 후반부터 예수의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교도라 자칭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것이다.복음서는 나자렛교의 예수가 구세주임을 끊임없이 가르친다. 특히 오순절(Pentecost)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곳에서 베드로Saint Peter는 첫 번째 설교를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메시아다. 그가 불의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무덤은 예수를 집어삼킬 수 없었고,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이 거저 주어진다.”고 하면서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서 교회로 인도했다. 나중에 베드로는 십자가형 형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는데, 예수와 동일하게 죽을 자격이 없어서 자청해서 그랬다고 한다.
나자렛 예수가 신의 아들로서 진정한 구세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너무도 강력하고 전적으로 설파한 인물은 사도 바울Paulos이다. 바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Saul이다. 그는 눈이 멀었었는데 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눈을 뜨게 되고, 복음 전파의 전사로 나섰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울은 구약을 근거로 예수가 왜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청년기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로마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전파했던 것이다.
바울은 심지어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타인과 유대교를 넘어 그리스 및 로마 세계로 확장되어 가도록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곳들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무던히 애썼던 인물이다. 바울의 복음 전파는 실로 엄청났다. 특히 코린트 지방에서 그는 「로마서」를 작성하여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로마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사도행전은 바로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바울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적 정신으로 무장한 바울
그리스도가 로마의 중심부로 침투하여 교리와 복음이 전파되자 교인들의 세력이 확장되었고, 이를 염려한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박해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고 신자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계시(啓示)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적 사고의 이성에 의해서도 신에 대한 진리가 파악될 수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됐다.예수의 복음이 사도 바울에 의해 그리스적이며 영지주의(Gnosticism)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리스의 정신세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사상적인 언어와 개념체계로 재정돈되어야 함을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적 사고에서 신앙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예수는 완전하고 초월적인 신(God)과 불완전한 존재인 현실적 인간 사이의 중간적인 위치에서 양자를 매개하는 신인(神人)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예수는 생물학적인 존재로서의 육신을 가진 존재이면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초월적인 진리와 인간의 이성적 진리, 초자연의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매개자이다. 그리스적 사고에서는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 세계와 이성을 초월한 신의 세계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 속에 개입해 들어온 것이다.
예수는 차안과 피안, 이성과 신앙 간의 매개자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교를 그리스 문명권에 전파하면서 신적 존재로서의 주님[王]이란 개념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유대교의 전통에서 형성된 메시아(그리스어 번역은 그리스도)이자 다가올 새 시대의 왕으로 간주했다. 그는 오로지 예수가 구세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전적으로 설파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이 자리 잡은 그리스적 사상 위에서 유대교적 부활사상을 접목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전환시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울에 의해 그리스적 사고로 무장된 그리스도 복음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신이 죽었다가 되살아난다는 것은 동방의 의례에서 나온 것인데,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은 아티스Attis 신의 죽음과 부활의례(復活儀禮)를 모방한 것이다. 미트라Mithra 신앙 역시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예수의 탄생은 본래의 탄생일과는 상관없이 미트라 신이 태어난 동짓날을 상징하여 12월 25일로 기념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순결하게 태어났다는 사상은 유대교의 전통에는 없었던 것이고, 오히려 동방의 의례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신과 여성 사이의 성적 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즉 동정녀 마리아 숭배는 이집트의 이시스Isis 신 숭배를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가 죽은 이후, 다양한 종파들 간의 계속적인 투쟁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의 중심인물이 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인류의 시원적인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원죄의 관념이 그리스도교에 흘러들어왔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내세관이 정착되면서 구세사상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구세주 예수가, 원죄를 짊어진 채 태어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인류의 죄를 사하여 성부 하느님에게로 인도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고대의 다른 종교들이 다 그렇듯이,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을 구원의 방편으로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전체적인 관점은, 바로 갈릴리의 설교자 예수의 위대한 사역과 많은 설교가 기다려왔던 메시아요 그리스도임을 믿게끔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원죄의 개념과 인류 구원이라는 토대 위에서 신인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되는 예수는 구세주가 될 수 있었고,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는 예수의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 단번에 사라진다는 믿음으로 정착된 것이다. 여기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죄에서 행방된다는 믿음이 점차 확산되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로마 초기에 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한 종파에서 떨어져 나온 그리스도 교회는 로마제국의 전성기로 접어들자 거대한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적인 세계에 뛰어들음으로써 로마 전역과 이방인의 세계에까지 신속하게 퍼져나가게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그리스적 사고로 무장하여 이교도들의 끊임없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세련되어 갔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로고스”가 유일신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대리자요, 심부름꾼이며, 제2의 신으로 아들이라는 것이다. 신의 아들인 로고스는 세계의 대사제이고, 고통을 겪는 인류를 구원하여 밝고 영원한 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구세주이다. 그러나 예수가 바로 신의 아들로 구세주라고 줄기차게 외치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 교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되면서 내외적인 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이 대표적이다.
사도시대에 영지주의가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유입된 영지주의는 예수가 그리스도의 화신(化身)이요, 신의 아들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성육신(成肉神)임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이로부터 1세기 말부터 2세기 중엽까지 교회의 지도자들은 12개 정도의 영지주의 분파와 싸웠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종교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비밀스런 지식의 핵심은 예수란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아니며, 물질세계란 악하고, 단지 몇몇 선택된 사람의 영혼만이 물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할 수 있고, 성령의 도움으로 신의 세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영지주의자들은 로마교회를 자신들만의 비밀 종교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획책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곧 그리스도임을 지키려는 교회 지도자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리스 지성인 마르키온Marcion(85?~160?)은 소아시아 출신으로 137년경 로마 교회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영지주의의 비밀스런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여러 영지주의자들의 관념을 자신의 성서 비판과 결합하였으며, 그리스도교에서 유대교적인 뿌리를 떼어내려고 그리스 사상과 융합시켰다. 마르키온은 바울이야말로 가장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사도로 보았으며, 바울의 서한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지주의 노선을 극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념체계를 구축하였다.
2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리스도교회는 교리체계의 사상적 논란을 거듭하면서 로마제국의 전역에 퍼져 나간다. 교리에 대한 여러 논쟁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복음의 핵심진리를 신비스럽게 이해해 갔던 것이다. 두드러진 것은 절대자 하느님이 한 분이지만 삼위의 하느님(Trinity),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이라고 가르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다. 이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벌어진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줄기차게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인간으로 육화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라면,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복음은 곧 하느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볼 때 분명히 모순적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패러독스(역설, paradox)를 해결해야 그리스도를 가장 합리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역설의 논리를 내놓은 이가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카르타고 출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155?~220?)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De came christi)라는 책에서 “신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신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에 완전히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는 묻혔다가 부활했다.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단언한다. 한마디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의 논리는 후에 종교적인 믿음과 이성적인 사고 사이를 날카롭게 갈라놓은 계기가 된다. 즉 신앙과 이성적인 사유는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육화했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여러 세기 동안 교파들 간의 피나는 논쟁과 투쟁을 양산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예수를 하느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방식이다. 만일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한 지위로 말하게 된다면, 군주로서의 성부 하느님에 대한 권위를 손상시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군주성을 보존하면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격성을 유지시키려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자는 로마인 사벨리우스Sabellius(?~260?)였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느님의 세 양태(樣態)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군주론 학파는 양태론(modalism) 혹은 사벨리아니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 또한 좋은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는 아들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에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느님
그리스도교는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창조주 하느님(Elohim)을 믿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를 단일신교나 다신교가 아니라 유일신 종교라 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유대교의 단일신교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는 철학의 날카로운 도전과 정치적인 탄압을 극복하면서 범세계적인 “삼위일체” 신론(성부, 성자, 성신)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삼위일체 신론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창조주 하느님이 세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위격에 있어서 세 분의 신”이라는 뜻이다.그리스도교 유신론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신론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권에서 종교적인 신론의 핵심이며, 근본 바탕을 지탱해 주는 결정적인 지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삼위일체’는, 글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위격에 있어서는 ‘세 분 하느님’으로 존재하지만, 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한 분 하느님’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 분 하느님이 세 분이라는 얘기다. 이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쉽게 납득이 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라고 본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아무리 뒤져봐도 ‘삼위일체’란 말은 없다. 삼위일체란 개념은 라틴어 번역어인 “위격(位格)에 있어서는 세 분이고, 그 본체(실체)는 하나이다.”(una substantia tres personae)라는 표현에서 나왔다.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의 철학에서 “세 기체는 하나의 실체를 가진다”(μία ουσία τρες ὕποστάσεις)는 표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하나의 실체’란 ‘전에도 영원히 있어왔고, 지금도 있으며, 장차 오게 될 한분의 아버지 하느님’, 다시 말해서 태초에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느님을 의미한다. 세 분의 위격에 대하여 말하자면, 창조주 하느님은 단 한 분의 하느님이 아니라 삼위의 하느님으로, 즉 ‘성부 하느님(聖父)’, ‘성자 하느님(聖子)’, ‘성령 하느님(聖靈)’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성부 하느님은 구약 시대에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온 ‘야훼’라 부르는 분이고, 성자 하느님은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구세주)에서 나온 예수를, 성령 하느님은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여 인간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성령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본질은 하나이지만, 그 본질을 소유한 분은 셋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신성(신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하나’의 신성을 소유한 인격자는 각각 셋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세 분 하느님이 신성과 능력, 영광과 권능에서 완전히 동등하다는 뜻이다.
로마를 점령한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초기부터 3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세계적인 종교로 확대되어가자, 311년에 와서야 로마 황제는 드디어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려도 좋다는 허락을 한다.콘스탄티누스F. V. A. Constantinus (272~337)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로마 제국의 서쪽을 다스리는 공동 황제가 된다. 그는 312년에 로마 교회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정적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하면서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편다. 그는 이교도 국가인 로마제국이 자행해온 박해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고, 리키니우스Licinius(263~325) 와 함께 313년에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반포하여 모든 종교에 대해서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허락했으며, 압수된 그리스도교의 재산을 돌려주었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교회와 싸우는 것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리스도교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밀라노칙령에서 체결된 그리스도교 교회와 제국의 동맹은 로마제국 황제들의 정책으로 더욱 공고해졌고, 황제들은 교회를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관대한 후원자요 보호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256~336년)에 의해 정통교회가 위협을 받자 주교들을 공의회에 소집하기도 하였으며,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긴장이 있을 때마다 공의회를 개최하여 해결하였다. 황제와 주교들은 서로 협력하였고, 그리스도교는 황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점점 로마제국을 닮아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가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지배적인 종교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인 까닭은 데오도시우스F. Theodosius(347~395)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가종교로 선포함(392년)으로써 비롯된다. 결국 세계의 정복자로 군림하던 로마는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사유에, 종교적으로는 그토록 박해했던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의해서 정복을 당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낳고 말았다.
공인된 삼위일체 하느님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지배 종교가 된 4세기 무렵,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영지주의 연장선상에 있던 리비아 출신 아리우스Arius(256~336년)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이면서도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교회와 모순되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파의 중심지는 이집트와 그리스 전통이 몹시 강한 알렉산드리아였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는 당시 신에 대한 교리의 교조적 비합리성을 완화시켜 지식층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던 인물이다.아리우스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면, 태어난 자는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예를 들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아니라 단지 무(無)로부터 신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예수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단지 그를 닮았을 뿐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정면 도전이었던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296~373)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자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다’라고 주장한다.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는 서로 양분하여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로부터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이집트,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대중들은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그 문제로 인해 가두 투쟁도 전개했다. 로마로부터 이집트의 분열을 걱정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직 그리스도 교인이 아니면서도 그 분열을 극복하고자 대담한 조치를 취한다.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를 개최하여 신조를 채택한 것이 그것이다.
니케아 신조(325년, Symbolum Nicaenum) : “우리는 한 분 하느님을 믿는다. …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이시다.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분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며 … 나신 자이지 만들어진 분이 아니다.” 니케아공의회의 신조에 따라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정통교회의 최악의 이단으로 파면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336년에 죽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었고, 광범위하게 퍼져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에 이와 유사한 교리들이 끊임없이 나왔고, 5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리우스 가르침은 계속적으로 정통 교회와의 마찰을 빚게 된다. 정통 교회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불허한 독실한 그리스도 교인이었던 테오도시우스F. Theodosius(379~395년)는 379년에 동방의 황제가 되자 380년에 그리스도교를 국가의 의무종교로 만들었고, 391년에는 모든 이교도들의 신전을 폐쇄하고 예배를 금지하였다. 그는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이 로마인들에게 전수해준 저 종교를 믿기를 바란다.”고 선언함으로써 많은 로마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에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공의회를 열어 니케아 신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성령에 대한 진술을 신조에 첨가하였다.
콘스탄티누스 공의회 : 여기에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성령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신다.”의 조항이 그것이다. 후에 스페인 쪽에는 아직 아리우스파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어로 된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589년 제3차 툴레도Toledo 교회 쉬노드synod 에서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라는 구절을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고쳐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를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는 세계로 퍼지게 되었는데, 4세기에는 고트족과 반달족이 그리스도교화되었고 , 5세기 후반에는 프랑크족에게 수용되었다.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는 외곽의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화되었고, 9~10기에는 슬라브 민족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함으로써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이 그리스도교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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