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성도 | 문공신
[이달의 성구]
문공신의 구도 과정
문공신文公信은 태인 강삼리江三里에서 태어나 장가들고 나서는 고부 와룡리臥龍里로 이거한 사람이라. 공신의 집은 와룡리 일대의 땅을 모두 가진 부호인지라 가사에 근심 없이 일찍부터 도道를 구하니라.
공신은 참봉參奉으로 어려서부터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16세 되는 갑오동학혁명 때는 중형仲兄 선명善明을 따라 황토현黃土峴 전투에 참가하여 다섯 살짜리 아이五歲童의 영험을 목격하고 더욱 도를 갈구하던 중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조용히 칩거하다가 한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수릿골에서 세례를 받기도 하니라.
문공신의 구도 과정
문공신文公信은 태인 강삼리江三里에서 태어나 장가들고 나서는 고부 와룡리臥龍里로 이거한 사람이라. 공신의 집은 와룡리 일대의 땅을 모두 가진 부호인지라 가사에 근심 없이 일찍부터 도道를 구하니라.
공신은 참봉參奉으로 어려서부터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16세 되는 갑오동학혁명 때는 중형仲兄 선명善明을 따라 황토현黃土峴 전투에 참가하여 다섯 살짜리 아이五歲童의 영험을 목격하고 더욱 도를 갈구하던 중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조용히 칩거하다가 한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수릿골에서 세례를 받기도 하니라.
그 후 다시 동학을 열렬히 신봉하여 동학도들이 갑진년에 ‘얼싸 좋다, 갑진甲辰 을사乙巳’를 노래하며 강경에서 큰 집회를 열 때 논 열세 마지기를 성금으로 내놓을 정도로 신심이 도탑더니 일진회의 위세가 등등하여 고을 원員이 일진회 지회장에게 당하배堂下拜를 하던 시절에 흥덕, 부안 두 고을의 일진회 회장을 지내니라.
그러나 갑진, 을사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이변이 없자 이에 실망하여 동학 운동에 회의를 품고 지내다가 하루는 생각하기를 ‘이것이 모두 내가 찾는 길이 아닌 듯하니 어디를 가야 참된 길을 찾나?’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참 선생을 찾아다니다가 무주에 큰 선생이 있다 하여 찾아가니라. (도전 3:202:1~9)
계시 받은 문공신, 향남방하라
공신이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함께 태인 관왕묘에 가서 ‘참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거늘 닷새째 되는 날까지는 머리가 둘 달리고 셋 달린 잡귀들이 나타나 마구 몰아붙이매 공신이 무서워 벌벌 떨더니 엿새째에 이르러 비로소 잡귀가 사라지고 관운장關雲長이 나타나 “향남방向南方하라.” 하고 사라지니라. (3:202:13~15)
엎드려 재차 간청하매
공신이 모정에 들어가 “실례합니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아, 쉬려면 올라와서 쉬지, 그럼.” 하시며 주모를 불러 “여기 술 한 상 차려 오라.” 하시는데 공신이 상제님을 뵈니 둥그런 용안에 환한 기운이 가득하여 단번에 선생님인 줄을 알겠더라. 이 때 상제님께서 한쪽에 앉아 계시고 성도들이 옆에 앉아 술을 마시는데 그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 보니 나이 든 성도들이 젊은 상제님께 존대를 하고 상제님은 그들에게 하대를 하시는지라 공신이 속으로 ‘저렇게 나잇살이나 먹은 노인들이 존대를 하고 저 양반은 반말하는 걸 보니 틀림없구나.’ 생각하고 대뜸 상제님 앞으로 가서 넙죽 엎드리며 “원願이 제자 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반가워하시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호령하시기를 “이놈, 고얀 놈! 이런 고얀 놈 봤나. 이놈이 순전히 동학꾼이로구나.” 하시거늘 공신이 엎드린 채 거듭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나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라. (3:204:3~11)
칠성용정七星用政의 선기옥형 도수
정미년 12월에 정토칠봉淨土七峰 아래 와룡리臥龍里 문공신文公信의 집에 계시며 대공사를 행하시니라. 며칠 동안 진액주津液呪를 수련케 하시고 당요唐堯의 ‘역상일월성신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를 해설하시며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껍데기요, 일월은 지인至人이 아니면 빈 그림자라. 당요가 일월이 운행하는 법을 알아내어 온 누리의 백성들이 그 은덕을 입게 되었느니라.” 하시고
日月無私治萬物(일월무사치만물)하고 江山有道受百行(강산유도수백행)이라
일월은 사사로움 없이 만물을 다스리고
강산은 큰 도가 있어 온갖 작용을 수용하느니라.
하시며 선기옥형璿璣玉衡 도수를 보실 때
天地大八門(천지대팔문)이요 日月大御命(일월대어명)이라
禽獸大道術(금수대도술)이요 人間大積善(인간대적선)이라
時乎時乎鬼神世界(시호시호귀신세계)니라
라 쓰시어 경수의 집 벽에 붙이시고 경수의 집에 저울갈고리 도수를 정하시니라. 이어 응종의 집에 추 도수, 공신의 집에 끈 도수를 정하신 뒤에 다시 경수의 집에 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 도수와 공신의 집에 천지대팔문天地大八門 도수를 정하시고 여러 날 동안 주야로 세 집을 번갈아 왕래하시며 공사를 행하시니라. (5:196)
공사 주인을 누구에게 정해야겠느냐
저녁진지를 드신 뒤 상제님께서 성도 약 20여 명을 방안에 앉히시고 오선위기 진주眞主 공사를 보시니 공신도 이 자리에 참석 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공사를 보는데 돈 천 냥이 필요하니 누가 돈 천 냥을 대겠느냐?” 하시니 공신이 누가 먼저 낼세라 얼른 “제가 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니라. 공신이 잠시라도 상제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인편으로 서신을 보내어 추수한 쌀을 팔고 모시도 팔아 천 냥을 마련케 하고 인부 열 사람으로 하여금 나누어지고 오게 하여 상제님께 올리니 상제님께서 이 돈을 경비로 사용하여 열흘 동안 공사를 행하시니라.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신 뒤에 물으시기를 “공사 주인을 누구에게 정해야겠느냐?” 하시니 성도들이 모두 아뢰기를 “돈 낸 사람에게다 정하여야겠습니다.”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너희들 말이 진실로 옳도다.” 하시니라. (3:205)
문공신의 7년 공사
상제님께서 어천하시기 전 공신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남은 7년의 공사를 너에게 맡긴다.” 하시고 “은두장미隱頭藏尾를 해야 살아남으리라.” 하시니라. 이에 공신이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 7년 동안 혼자서 오쟁이에 보릿가루를 담아 지고 주로 충청도 지방을 다니며 상제님의 말씀을 좇아 공사를 보는데 대개는 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며 공사를 보고 명산을 찾아 글과 부符를 써서 제를 올리기도 하니라. 두승산에 가서 산제山祭를 모시고, 부안 줄포扶安 茁浦 해변에서 수륙제水陸祭를 올리고 안면도安眠島에 가서는 ‘북을 울린다.’ 하며 북 도수를 보니라. (10:136:3~8)
영산 문공신의 죽음
도술약국을 연 지 몇 달 후 공신이 주변을 정리하고 이것저것을 소각하더니
그로부터 사흘 후 자리에 누워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각자 소원대로 글을 써서 내 몸에 넣어라. 내 손으로 못 쓰는 사람은 무엇이 한恨인지 말로 하라. 대신 써서 넣어 준다.” 하고 잠시 거친 호흡을 쉬더니 잠이 든 듯 천명을 다하거늘 이 날은 갑오甲午(道紀 84, 1954)년 음력 5월 7일이더라.
공신이 죽던 날 밤 하얀 꽃상여가 하늘에 떠서 창唱을 하듯이 웅웅 소리가 나며 천천히 떠 가니라. (10:149: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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