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4. 실재론에서 관념론으로의 전향(2)
[철학산책]
3) 주관적 관념론자 버클리
관념론(idealism)이란?
공기 좋고 물 좋은 첩첩산중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젊은 부부夫婦가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젊은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어린애를 데리고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됐다. 친구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 친구는 부자여서 그런지 굉장히 큰 집에서 살고 있네?”라고 말했다. 이에 남편은 “별로 크지 않은 집인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내는 아들에게 “이집 굉장히 크지?”라고 물었지만 묵묵부답黙黙不答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 친구 집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즉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과연 개별적인 집이 지성 밖에 실재하는 것일까? 또한 그 집은 큰 집일까 작은 집일까?, ‘크거나 작다’고 말하는 판단의 기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서양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고대 아테네 시대에 탐구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이를 계승하여 경험주의 입장으로 정립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은 모두 실재론(realism)에 속한다. 이는 우리의 지성이 가지는 관념과는 상관없이 지성 밖에 객관적으로 집이 실재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의 스콜라철학으로 들어와서 스승이 제시한 보편적인 이데아의 실재론에 대립하여 제자가 주장한 개별적인 실체론을 옹호하는 날카로운 논쟁이 제기되었다.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이 그것이다. 유명론은 감각될 수 없는 보편자(이데아)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름뿐이고, 감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개별적인 것만이 실재한다는 입장이었다.
중세 말기에 접어들면서 유명론이 우세했지만, 근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철학적 사유방식이 대두한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 밖에 무엇이 실재하든 안 하든, 우리가 지성으로 어떻게 알게 되느냐의 문제, 즉 앎의 기원이 되는 관념觀念이 어떻게 획득되고, 획득된 관념이 얼마나 확실한 진리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느냐를 따져 봐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인식론認識論(epistemology)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철학적 사유다.
근대의 철학은 인식론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탐구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무게를 둔 대륙의 합리주의(rationalism)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 실체론에 무게를 둔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로 나눠진다.
특히 영국에서는 인식의 기원이 경험에 바탕을 둔 관념이라는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모든 지식이나 인식은 관념이고, 모든 관념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경험론의 핵심 주장인 셈이다. 여기에서 관념론은 지성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우리의 지성에 있는 관념만이 인식이요 진리라는 입장을 취한다. 즉 지성 안에 관념으로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나 개별적인 개념 모두가 지성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관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실재하는 것은 관념뿐이라는 얘기다. 앞서 젊은 부부가 방문하여 눈앞에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친구의 집은 지성 밖에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태가 우리의 관념으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집이 크다, 작다’는 대답은 지성 안에 있는 앎, 곧 관념을 기준으로 말하게 된다. ‘집이 크다’는 대답은 ‘작은 집’의 관념을 기준으로 해서 나온 말이고, ‘집이 작다’는 대답은 ‘큰 집’의 관념을 기준으로 해서 나온 말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은 ‘크거나 작은’ 의미의 관념이 없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관념론의 핵심은 사실 지성 밖에 큰 집도 작은 집도 원래 없고 단지 지성 안에 생각으로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 속에 관념으로 있으면서 판단과 언설言說의 기준이 되고 있는 지식은 모두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론에서 말하는 관념은 두 측면으로 분석하여 논의해 볼 수도 있다. 주관적 관념(subjective idea)과 객관적 관념(objective idea)이 그것이다. 주관적 관념론은 사람마다 생각이 천차만별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만든 자기만의 관념들뿐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경험론에 속하는 조지 버클리G. Berkeley(1685-1753)의 주장을 거론할 수 있다. 객관적 관념론은 주관적 관념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관념, 즉 사물의 크기, 모양, 무게, 실체 관념 등이 지성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입장이다. 이 주장을 대표하는 학자로는 대륙의 합리론자들과 영국 경험론의 초석을 다진 존 로크J. Locke(1632-1704)를 꼽을 수 있다.
관념론의 정반대 진영에는 유물론(materialism)이 대치하고 있다. 유물론은 우리가 관념으로 알고 있든 없든, 지성 바깥에 오직 물질적인 무언가가 실재하고 있고, 이것을 감각으로 지각함으로써 지성 안에 관념이 형성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관념론은 경험하는 정신이 있고, 지성 안에 오직 경험을 통해 지각된 관념만이 있으며, 이 관념들에 대응해서 정신 밖에 물질적인 것이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실재론이 유물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관념론은 동양의 불가사상佛家思想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유심론唯心論(spiritualism)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불교의 사상사에서 볼 때 오랜 동안 유식론唯識論과 경쟁하면서 줄기차게 주장된 중관론中觀論이 유심론의 중심축이라 볼 수 있을 터이지만, 유물론과는 정반대인 유심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란 오직 마음[心] 뿐이고,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 낸 것[一切唯心造]”이라는 주장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존재는 관념들의 묶음”이라는 버클리의 견해
관념론은 경험주의 인식론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버클리는 영국 아일랜드 출신으로 극단적인 경험주의 입장에서 관념을 언설한 철학자이다. 버클리는 경험론을 추종한 철저한 주관적 관념론자였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정신 속에 갖고 있는 관념들뿐이고, 이에 대응해서 정신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직 지각된 것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역으로 말해 본다면 지각되지 않은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는 왜 이런 주장을 내놓게 되었을까?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로크J. Locke의 경험론적인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출발한다. 로크의 경험적 인식론에 따르면, 관념이 인식이요 진리이다. 관념의 기원은 외적인 감각感覺과 내적인 반성反省을 통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관념은 경험을 통한 지각인 것이다. 즉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정신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있고, 정신의 인식 주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사물에 대한 감각관념인데, 이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관념의 제1 성질로 사물실체, 사물이 가지는 크기, 모양, 운동, 수 등으로 인식주관에 대응해서 정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관념의 제2 성질로 색, 소리, 맛, 향기 등으로 정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관이 감각을 통해 만들어낸 것들이다.
로크가 제시한 관념의 제1 성질은 그가 전통적인 실재론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반면에 관념의 제2 성질은 마음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응해서 정신 밖에 실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마음 안에만 존재하는 관념의 제2 성질은 사람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인식주관認識主觀에 따라 달리 형성된 것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로크는 반쪽 관념론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크는 인식에 관한 한, 객관주의客觀主義에서 주관주의主觀主義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재론에서 관념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철학자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로크가 제시한 관념의 제1 성질도 모두 정신의 지각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식주관의 마음에만 존재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인식주관의 정신만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정신 바깥에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이란 전적으로 없고, 단순히 인식주관의 지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관적 관념론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의 주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버클리는 우선 로크가 말한 사물이 가지는 실체관념이나 관념의 제1 성질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에 의하면 정신 바깥에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관념이나 제1 성질과 같은 관념은 추상 관념을 실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 외부에 물질과 같은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객관적인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물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지성이 지각한 관념들의 집합일 뿐이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관념들은, 지각하는 사람의 정신 속에 있고, 지각하는 주체를 떠나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주관적인 것들이다.
그렇다면 지성 밖에 존재하는 사물은 지각돼야만 존재하는 것일까?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자는 지각된 관념이 주관 밖에 있는 객관적인 사물과 일치 혹은 대응하는지 어떤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예 처음부터 주관 밖에 있는 객관적인 사물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인식주관에 지각된 관념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소리가 났다는 것은 우리의 청각을 통해 지각된 소리의 관념이고, 물체의 색깔이 있다는 것은 시각을 통해 색깔에 대한 지각물이 지성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며, 사물의 형태나 모양은 시각이나 촉각에 의해 지각되어진 지각물의 덩어리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빨간 사과가 하나 있고 우리가 그것을 감각을 통해 지각한다고 하자. 버클리에 의하면, 사과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과가 빨갛고, 둥글며, 먹으면 맛이 새콤하고, 씹으면 사각사각하다는 “관념들의 묶음”(bundle of ideas)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감각 지각의 묶음에 우리가 단지 ‘사과’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버클리는 주관적 관념론자로서 감각 지각의 관념들의 묶음 외에 지성 바깥에 어떤 사물도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록 인식주관 속에 있는 감각적 지각의 관념들을 모두 제거한다면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도 말이다. 이러한 입장을 버클리는 한마디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요약하고 있다.
관념론자와 실재론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우리가 사물을 관찰하여 인식한다고 할 때, 관념론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느냐 실재론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의미 내용이 현격하게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관념론과 실재론은 어떤 측면에서 정면으로 맞서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진영 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며, 어떤 근거에서 그런 대립이 생겨나는 것일까?우리의 지성 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관념이 인식주관을 떠나서 자체로 객관적인 존재성을 가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관념론과 실재론이 갈라진다. 만일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인식하는 주관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고 오직 인식주관이 지각함으로써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극단적인 관념론자이다. 극단적인 관념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어떻게 보일까? 만일 세상 사람들에게서 인식주관 속에 있는 모든 관념들을 제거시켜 버린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거나,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반면에 만일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인식하는 주관과 아무런 관계없이 인식주관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실재론자이다. 실재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보일까? 만일 인간의 인식주관이 변함이 없다면 이는 마치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사물이 찍히는 영상처럼 일정한 관념들만이 양산될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철학사에서 볼 때, 대응설적 인식론의 단초를 열어주게 된다.
서양 철학사에서 극단적인 실재론은 플라톤의 형상론(이데아론)이 전형이며, 아주 느슨한 실재론자는 로크의 인식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재론자에 의하면, 인식주관 속에 지각된 모든 관념들을 제거시킨다 하더라도 객관적 대상들은 인식하는 정신과 관계없이 정신 밖에 그대로 존재한다. 만일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 밖에 객관적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신 속에서 이뤄지는 감각 관념은 전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관념론자에 의하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우리의 지성 속에 관념으로 형성된 것이 없다면 이는 인식일 수도 없을 뿐더러 어떤 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모를 것이라는 입장이다. 어떤 것이 있다면 오직 관념으로만 확인될 뿐이라는 얘기다.
전통적으로 관념론자와 실재론자 간의 입장 차이 때문에, 학문적인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관념론자는 인식주관의 관념만이 진정으로 존재하고, 지성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절대로 없음을 온갖 이론을 끌어들여 설명했다. 반면에 실재론자는 인식주관의 관념과는 관계없이 무언가가 지성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강렬하게 내세웠다.
두 사람 간의 격렬한 논쟁이 끝나지 않게 되자 갑자기 실재론자가 꾀를 내어 관념론자에게 앞에 놓인 울퉁불퉁한 담벼락을 향하여 돌진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념론자가 그곳을 향해 돌진했다. 관념론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담벼락에 이마를 부딪쳐서 뒤로 자빠졌고, 이마에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것을 보고 실재론자가 재빠르게, “자 봐라! 정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벽이 있으니까 그것이 너의 돌진을 저지했고, 네 머리가 울퉁불퉁한 벽에 부딪쳐서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가 아파서 너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느냐?”라고 관념론자에게 말했다.
관념론자는 이에 대해 강력한 답변으로 맞섰다. “자 봐라! 담벼락에 돌진할 때 저지한 것은 어떤 저항 관념이고, 벽에 부딪쳐서 내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른다는 것은 피가 흐른다는 관념이며, 내가 아프다는 것은 아프다는 관념과 고통이라는 관념 외에 무엇이 또 있는가?”라고 대답했다. 이와 같이 관념론자와 실재론자간의 논쟁은 결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정신 바깥에 정신의 지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미리 전제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다. 이러한 논쟁은 아마 쉽게 결말내기가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버클리의 약점
존재하는 것이란 오직 지성 속에 있는 ‘관념의 다발’뿐이라고 주장하는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정말 아무런 모순이 없는 온전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적인 사유로 무장이 된 사상가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쉽게 지적해 낼 수 있을 것이다.첫째로 주관적 관념론자 버클리의 견해가 사실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란 관념들의 정교한 집합체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세계관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눈을 감거나 귀를 막을 때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라졌다가 지각하기 시작하면 다시 즉각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연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반론을 피하기 위해서 버클리는 사라지거나 갑자기 나타나는 관념을 확보하고, 또한 우리의 정신이 지각하든 안 하든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관념을 총체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어떤 정신적인 완전한 실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 버클리는 관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 때문에 지각하는 주체로서 그리고 지각물들을 변함없이 보유하는 주체로서의 어떤 실체를 전제해야 했다. 그는 “천차만별의 무한히 많은 관념들 혹은 인식 대상들 외에 이것들을 인식하거나 지각하는 ‘어떤 것’이 실재한다. 이 ‘어떤 것’은 이것들을 의욕하고 상상하며 기억하는 것과 같은 가지각색의 활동을 한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능동적 존재를 나는 ‘마음’, ‘정신’, ‘영혼’ 또는 ‘나 자신’이라 부른다. 이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 중의 어느 하나를 의미하지 않고, 내 관념들과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그 속에 관념들이 들어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버클리는 관념들 외에 관념들을 확보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만일 인식 주체로서의 정신의 실재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주관적인 관념들의 존재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의 한계를 정리해 보자. 엄격한 의미에서 보자면, 버클리는 정신 바깥에 객관적인 물질적 실재를 부정하지만 관념의 주체로서 정신의 실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세상에 참되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정신이며, 정신의 인식주관이 보유하고 있는 관념들뿐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근거에서 주관적 관념론자인 버클리는, 누군가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을 때 책상이라는 물질적인 것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자가 책상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지각 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공부하는 방을 떠나서 책상을 지각하지 않는다면 책상은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각 속에 관념으로 실재하게 된다. 만일 방안에 다른 어떤 사람도 없다면 책상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지각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없어질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책상이 전지한 신의 정신 속에 관념으로만 실재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버클리는 무한 정신으로서의 신의 실재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던 것이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이율배반적인 주장, 즉 우주자연에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이란 모든 관념을 소지하고 있는 무한정신으로서의 신과 지각을 통해서 보유하고 있는 유한정신으로서의 인식 주체인 자아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한정신으로서의 신은 우리의 정신 속에 관념을 낳게 하고, 우리의 경험적 인식 주체가 받아들이는 관념들은 모두 신의 정신 속에 있던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본다면, 버클리는 인식의 근거에 관한 한 형이상학적 유심론자라고 불려질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사라져버린 신과 자아 실체
영국 경험주의 철학은 로크와 버클리 다음으로 극단에까지 밀고 나간 흄D. Hume(1711~1776)에 이르러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사물들은 감각을 통한 지각에 의해 산출된 관념들의 전체적인 연관들이고, 이 연관의 질서가 관념의 자연법칙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흄은 관념들을 확보하는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와 무한존재로서의 신의 실재까지도 관념으로 취급해 버리고 만다. 흄에 이르러 우주자연의 실재는 물론이고 절대적인 신의 존재마저도 부정되어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지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흄은 감각을 통한 경험주의 슬로건, 즉 ‘일차적으로 감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지성 속에 없다’는 입장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 로크와 버클리의 사유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흄은 로크와 버클리를 겨냥해서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사물의 실체나 혹은 관념들을 능동적으로 가공하는 능력으로서의 인식 주체를 부정한다. 또한 경험주의 철학자 로크는 관념의 기원을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과 지성의 ‘반성’을 통한 경험에서 찾았지만, 흄은 감각적 경험에서 나오는 모든 지각 내용을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에서 찾는다.
흄에 의하면, 오직 존재하는 것은 감각을 통한 ‘인상’과 ‘관념’뿐이다. 여기에서 ‘인상’은 우리의 감각에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지각되는 표상表象이고, ‘관념’은 직접적인 감각으로부터 나온 인상이 사라진 뒤에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보다 덜 생생한 지각’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지성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감각, 감정, 정서 등은 현재의 마음에 직접적인 경험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인상’이다. 반면에 관념은 이미 경험한 인상을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 마음에 모사해 둔 보다 덜 생생한 영상映像이다. 만일 우리가 눈앞에 사과를 직접 보고 있다면, 직접적인 경험은 ‘인상’이고, 눈을 감고 사과에 대해 생각할 때 인상의 재현이나 잔상은 ‘관념’이라는 얘기다.
흄에게서 ‘인상’은 모든 지식의 기초이다. 왜냐하면 ‘인상’과 ‘관념’은 항상 대응해서 나타나며, 모든 ‘관념’은 바로 ‘인상’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상’은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 내용이다. 만일 감각이 없다면 아무것도 주어질 수 없고,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상도 없고 관념도 없고 결국 지식도 없게 된다. 문제는 감각 기관을 통해 생겨난 인상의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는 알 수 없고 오직 ‘인상’과 ‘관념’만이 알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험을 통한 학문적 지식은 어떻게 나올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흄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지각 속에 머무는 “관념들의 연합(association of ideas)”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한다. 관념들 간의 연합은 인간의 정신이 능동적으로 활동하여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 간의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연합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계기적契機的이며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마치 물질의 운동이 질량에 의존하는 것처럼, 관념의 중력이 곧 관념들 간의 연합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념연합은 “유사(resemblance)”, “접근(contiguity)”,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 법칙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해소한 흄의 극단적인 경험적 인식론은 결국 감각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지식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이 없다는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흄의 철저한 관념론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I. Kant(1724~1804)로 하여금 합리적 인식을 제공하는 이성理性의 독단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하여 인식론을 체계화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흄의 관념연합법칙은 근대 연상 심리주의 사상과 실증주의의 선구적인 면모를 제시하기도 하였고, 그의 철저한 사유 방식은 영국과 미국의 신실재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4) 절대적 관념론자 헤겔
칸트의 선험적先驗的 관념론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제시한 관념론이 등장한다. 바로 독일 출신의 칸트가 체계화한 선험적先驗的 관념론이다.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독일 관념론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극복하여 주관적 관념론과 객관적 관념론으로 분화되어 전개되었다가 결국 양자를 종합한 절대적 관념론으로 매듭을 짓게 된다.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제시한 비판적 인식론을 알아야 한다. 그의 비판적 인식론은 다음에 자세하게 소개할 것이다. 여기서는 선험적 관념론이 출현하게 된 과정을 개괄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우선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모두가 학문적 인식의 성립 조건을 올바르게 고찰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비판하면서 출범한다. 우선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그는 경험으로부터 획득한 관념만으로는 보편타당한 학문적 인식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과 이성의 필연적인 추론으로부터 획득한 합리주의 인식만으로는 현실적인 내용이 공허하여 학문적 인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 다음 그는 보편타당한 학문적 인식의 성립조건을 올바르게 밝히기 위해서 인식주관이라 볼 수 있는 이성理性(Vernunft)의 인식능력 비판에 착수하게 되는데,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인식능력을 감각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다양한 표상들에 직접 관계하는 감성感性(Sinnlichkeit)과 다양한 표상들을 개념으로 종합 통일하는 데에 관계하는 오성悟性(Verstand)으로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그는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를 통합하는 인식체계, 즉 개별적인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들어오는 다양한 표상들과 보편적인 타당성을 제공하는 합리적 사유의 선천적인 형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수립한다. 이것이 칸트의 비판적 인식론의 주요 과제다.
그의 비판적 인식론은 객관적인 대상들이 지성 밖에 이미 그대로 실재하고, 이것을 인식주관이 경험을 통해 그대로 반영한다는 모사설模寫說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성하여 창출해 낸다는 “구성설構成說”이다. 인식주관 외부에 실재하는 객관적인 대상은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로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식주관은 오직 물자체로부터 감성을 촉발하여 표상되는 다양하고 무질서한 소재를 가지고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선험적인 형식(오성 형식)에 따라 선험적으로 구성하여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선험적으로 구성해 간다는 구성설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대상에 대한 인식은 인식주관이 감각된 자료들을 가지고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구성해가는 작업인데, 칸트는 이를 선험적 연역이라고 불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다양한 감성적 직관 표상들은 선험적 연역의 과정에서 오성의 선험적 범주 형식에 따라 인식주관에 의해 정돈되고 통일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선험적 통각統覺의 통일성이라 했다. 그런데 선험적으로 통일하는 주체는 바로 인식주관으로서의 ‘나(Ich)’이다. 나는 인식의 종합을 수행하는 최고의 형식으로 순수자아라고 한다. 순수자아는 개별적인 자아로서의 내가 아닌, 어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인식주관으로서의 나이다. 이러한 인식주관을 칸트는 순수통각이라 불렀다. 순수 통각은 개념의 인식을 적극적으로 산출하는 인식론적인 주관이라는 뜻이다.
선천적先天的으로 구비되어 있는 오성의 형식에 따라 지식을 구성하는 인식주관을 선험적 주관이라고 한다. 선험적 주관은 다양하게 주어지는 직관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 안에 잡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의식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고, 이로부터 통각의 분석적 종합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의식의 종합적인 통일은 오성이 사용하는 선험철학이 성립하는 곳이며,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순수오성 자체이다. 순수오성은 인식능력으로서 감성적 직관표상들로부터 개념적 표상을 형성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오성의 선험적 범주 형식과 선험적 통각으로서의 인식주관이 선험적으로 종합하기 때문에 인식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다.
따라서 인식 대상들은 인식주관 밖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관의 구성적인 사고 형식을 통해서 인식되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칸트는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소재들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선험적 형식을 투여하여 질서를 메기고, 개념의 인식에까지 끌어올리는 선천적 종합판단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인식주관이 자연에 법칙성을 투여하여 객관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입법자”란 뜻은 바로 여기에서 연원한 것이다. 요컨대 산에 올라갔다가 토끼를 쫓아가는 여우를 보았을 때, 토끼와 여우도 우리처럼 그렇게 알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토끼라는 개념, 여우라는 개념, 쫓고 있는 개념 등을 선험적으로 파악하고, 그 상황에 적용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험적 주관의 작용에 의해서만 대상의 인식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론은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말해진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감성과 오성, 감성계와 초 감성계, 현상계와 물자체 세계를 인정하면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원리를 확립하는 것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칸트는 이러한 대립된 이원론을 선험적 주관의 입장에서 하나로 통일하지 못했다. 물론 칸트는 자연의 합목적성을 부각시킨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를 도입하여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이원론적 분열을 서로 연결시켜 조화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선험적 주관으로써 객관적인 통일성을 이루지 못했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대립적으로 분열된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이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과제로 떠올랐던 것이다.
칸트의 비판적 인식론에서 체계화된 선험적 관념론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철학은 피히테J. G. Fichte(1762~1814)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F. W. J. Schelling(1775~1854)의 객관적 관념론으로 분화되어 색다르게 전개되고, 헤겔G. W. F. Hegel(1770~1831)에 이르러 종합되어 절대적 관념론으로 완성을 보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주관적 관념론자 피히테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을 전개한다. 비판의 요지는 칸트가 주체적 자아를 외계에 종속하는 논리적인 자아와 외계의 주인이 되는 실천적 자아로 분열시켰기 때문에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통일적인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칸트가 해결하지 못한 아포리아aporia(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에 손을 댐으로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만일 객관적 대상인 물자체로부터 감성을 촉발하는 것이 어떤 뜻을 가진다면 선험적 주관의 자발성은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초월적인 물자체를 인정하게 되고, 나의 자발성은 무의미하게 되어 감각적 모사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의식도 정신도 아닌 물자체가 비물질인 지성에 어떻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까? 반면에 만일 선험적 주관의 자발적인 구성 원리가 있다면 물자체로부터의 어떠한 자극도 필요 없어진다. 그래서 피히테는 오직 관념적인 표상들만 인정하고, 이러한 경험적인 표상들이 ‘나’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하여 주관적 관념론을 밀고 나간다. 물론 ‘나’는 개별적으로 분열된 자아가 아닌, 순수한 보편적인 자아로서 절대적인 원리가 된다. 이로부터 그는 주관적 관념론을 전개해 나간다.
피히테에 의하면 이론이성이나 실천이성은 이론적인 활동과 실천적인 활동을 하는, 모두 동일한 이성이고 하나의 자아이다. 이러한 자아는 경험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개별적인 자아가 아니라 하나의 절대적인 원리로 통일된 보편적인 순수자아이다. 그래서 순수자아는 모든 것을 정초定礎하는 절대적인 원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피히테 철학은 순수자아로부터 여타의 것들을 전적으로 도출해 내기 때문에 자아 중심적 특성을 가진다.
칸트에게서 인식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나 지성 밖의 객관적인 세계는 피히테에게서는 단순히 순수자아가 표상하는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객관적인 세계는 순수자아의 의식 활동이 있는 한에서 표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아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세계는 경험적으로 표상되는 것이므로 주관적인 순수자아의 활동 소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철학은 주관적인 자아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피히테는 『전 지식학의 정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에서 순수자아로부터 나오는 지식학의 세 원리를 확립한다. 그 세 원리는 근원적이고 단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립定立하는 1원리(자아는 자아다-동일율의 범주), 자아에 대해서 단적으로 비아非我가 반정립反定立하는 2원리(자아는 비아가 아니다-모순율의 범주), 자아는 자신 내에 가분적 자아에 대해 가분적인 비아를 반 정립하여 종합하는 3원리(정립으로서의 자아와 반정립으로서의 비아를 종합 통일-충족이유율의 범주)이다.
종합의 3원리는 “자아가 스스로를 비아에 의하여 규정된 것으로 정립한다.”는 자아의 수동적인 정립작용과 “자아가 스스로를 비아에 대하여 규정하는 것으로 정립한다.”는 자아의 능동적인 정립작용을 뜻한다. 여기에서 수동적으로 정립하는 자아는 비아, 즉 자연이나 대상을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이론이성에 관계되며, 능동적으로 정립하는 자아는 자발적인 행위로서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실천이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순수자아는 스스로를 비아에 대해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와 비아의 자아는 능동적으로 행하는 실천적 자아이다. 실천적 자아는 정립, 반정립, 종합의 변증법적 발전으로부터 부단히 활동하여 절대적 자아로 발전해 간다.
객관적 관념론자 셸링
셸링의 철학은 피히테로부터 출발한다. 피히테에 의하면, 자연은 비아로서 자아에 대립해 있다. 자아 없이 비아가 성립하지 못하더라도 비아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연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자아는 비아를 예상하기 때문에 비아가 자아를 제약하듯이, 객관적인 자연은 자아를 제약한다. 그래서 실천적인 자아는 절대적인 순수자아의 자기정립 활동을 이념으로 하여 유한적 자아가 비아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절대적 자아에로의 종합 지양되는 활동이라고 피히테는 주장했다. 이것을 그는 절대적 순수자아의 변증법적인 자기 전개과정이라고 했다.셸링은 피히테의 절대적인 순수자아를 유한적인 자아 이상의 존재, 즉 절대자 자신으로 보고 있다. 절대자 자신은 이러한 자아와 비아의 근저에 있으면서 비아에 대해서도 자아와 동등한 위치를 주기 때문에, 비아로서 객관적인 자연도 절대자에게서는 자아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피히테의 순수자아가 셸링에게서는 절대자라고 한다면, 절대자는 자기 정립활동에 있어서 일체의 것을 창조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절대자는 피히테의 자아와 비아,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 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이러한 구분을 초월하는 완전한 무차별적인 존재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는 ‘절대적 동일성’이다. 그래서 셸링은 피히테의 입장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서 “동일철학”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동일철학에 의하면 근원적인 절대자는 정신과 자연의 근저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정신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며, 오직 완전히 무차별적인 절대적 동일성으로 스피노자가 말한 “신즉자연神卽自然”과 유사한 무한자로서의 참된 실재이다. 셸링은 이것으로부터 여타의 모든 유한적인 것들이 창조되어 나온다고 본 것이다.
무한적인 절대자로부터 유한적인 것들이 어떻게 생성되어 나오는 것일까? 자아와 비아,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 관념과 실재 등은 분명히 차별성을 가진 유한적인 것들이다. 이에 대해서 셸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란 질적인 차이가 없고 오직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즉 정신 속에도 자연적인 요소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정신이라고 하는 까닭은 단지 정신적인 요소가 우세하기 때문이며, 자연 속에도 정신적인 요소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자연이라 한 까닭은 자연적인 요소가 우세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고대 자연철학자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실재의 요소가 많은 것은 자연이라고 하고, 정신적인 개념의 요소가 많은 것은 정신이라고 한다면, 자연과 정신은 서로 질적으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양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정신이요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이다. 정신과 자연이 차별성을 가지는 것은 양적인 차이이지 본질에 있어서는 항상 하나이며, 같은 것들이라는 얘기다.
실재하는 것들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것들은 자연의 영역에 속하고, 관념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주관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 모든 생성에 있어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은 정도가 달라서 차별이 있을 뿐이지 언제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
셸링에게서 절대자는 유한자의 근저에 공동적으로 존재하면서 차별적인 유한자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무차별적 동일성이었다. 셸링은 이러한 무차별적인 동일자로부터 어떻게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차별적인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 관념성과 실재성이 나올 수 있는가의 문제를 양적 차이라고 말했을 뿐 방법론적으로는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헤겔은 절대자란 애초부터 유한자와 대립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한자의 근저에 놓여 있는 무차별적 동일자도 아니라고 한다.만일 절대자가 유한자와 대립된 것이라면 무한자라고 말할 수 있으나, 절대자가 유한자에 의해 한계가 지워진다는 의미에서 보면 유한적 무한자로서의 유한자일 뿐이다. 이것을 헤겔은 “악무한惡無限(das schlecht Unendliche)”이라고 하여 유한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무한자로서의 “진무한眞無限(das wahrhafte Unendliche)”과 구분한다. 진무한은 유한자와 대립한 추상적 무한자가 아니고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 자신을 실현해 가는 ‘구체적 전체’이다. 따라서 구체적 전체로서 절대자는 진무한이어야 한다. 진무한인 절대자는 구체적 전체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유한자로 변화해 가며, 이러한 변화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자기 전개 발전할 수 있다.
헤겔은 대체로 절대자의 자기전개와 발전과정을 세계의 전개과정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생성변화란 구체적 전체로서의 절대자가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서 자기를 전개해 가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역사는 유한자의 변화과정이며 역사를 통해서 절대자는 자기 자신을 실현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은 항상 자기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상의 무한한 자기발전을 반복해 갈 뿐이다. 자연이나 역사에 있어서 절대자가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전개해 가는 과정은 당연히 정신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이는 절대자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념은 존재이면서 정신이고 실재적이면서 관념적인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현실적인 것은 이념적인 것이요 이념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적인 것은 절대정신이 가지는 이념의 현현顯現이기 때문에 헤겔은 절대정신의 관념론을 완결된 학學으로 확립시키고 있다. 헤겔에 있어서 “진리는 전체(Das Wahre ist das Ganze)”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참다운 학문은 돌발적인 출현이 아니라 체계적인 것이며, 이러한 체계는 자체로 모순을 포함하면서 모순을 극복하여 종합하는 유기적인 전체의 체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체계적인 과정의 점진적인 발전단계를 거쳐서 절대자에 이르는 길은 절대자의 변증법적 자기파악의 운동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한민족의 고유경전 『천부경天符經』에서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一終無終一”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에서 나와서 우주만물의 다양성으로 전개 발전되었다가 통일적인 ‘하나’로 귀환하는 논리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변증법적 운동과정을 통해 절대자의 자기전개로부터 시작하여 절대자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도정道程이다. 즉 절대자는 의식 - 자기의식 - 이성 - 정신 - 종교 - 절대지絶對知에 이르는 절대이념이기 때문이다. 여기로부터 헤겔은 모든 것들을 절대정신에 종속시켜 체계화함으로써 독일 관념론을 완결하는 절대적 관념론을 확립한다.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자기전개 방식
세계에 대한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전개방식은 무엇이고, 이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일까? 헤겔은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보고 있으면서 절대정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구체적 전체로서의 절대정신은 일체의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포괄한다고 본다. 구체적 전체로서의 우주는 전체로서의 그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항상 구체적인 것으로서 발전해 가기 때문에 절대 정신은 고정되어 있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자신을 전개해 나가고 다시 귀환해 가는 변증법적 운동발전일 수 있다.철학은 곧 절대정신이 자신을 전개시켜 다시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단계는 3 단계로 나눠진다. 절대정신의 첫 번째 발전단계는 “밖으로 나가는 것”(Herausgehen)으로서 정립定立의 단계이고, 두 번째의 단계는 “스스로를 떼어 놓는 것”(Sichausein anderlegung)으로서 반정립反定立의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는 “스스로에게 귀환하는 것”(Zusichcommen)으로서 한층 발전된 종합 “지양”止揚의 단계이다.
① 정립定立 :
절대자가 유한자를 떠나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의 전체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선 유한자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한자는 절대이념이 아직 자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단계로서, 자신 속에 앞으로 발현되어 나올 대립적인 모순을 포함하지만 아직 드러내지 않은, 그러면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즉자태”卽自態(an sich)의 단계로서 정립 혹은 긍정적肯定的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은 오성적悟性的 인식이다. 오성적 인식은 유한적 존재를 즉자적卽自的으로 파악하여 어떤 것이라고 타당한 규정을 내려서 고정시킨다. 이러한 오성적 인식은 주관적(추상적) 보편의 인식단계이다.
② 반정립反定立 :
다음 단계는 절대이념이 자신 속에 포함되어 있던 ‘즉자태’의 내용과 모순된 다른 계기가 새롭게 발현되어서 ‘즉자태’로부터 스스로 떼어 놓으면서 대립하여 있는 상태다. 이는 “대자태”對自態(für sich)의 단계로서 반정립 혹은 부정의 단계라고 한다. 이 단계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은 오히려 ‘즉자태’에서 긍정된 규정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부정적否定的 이성의 인식이다. 부정적 이성의 인식은 상호 모순되는 규정에로 이행하는 단계의 인식이기 때문에 객관적 보편의 인식일 수 있다.
③ 종합(綜合) :
마지막 단계는 정립의 단계와 반정립의 단계 간에 발생한 모순과 대립을 지양(aufheben)하는 단계로서, 즉자적卽自的인 것과 대자적對自的인 것의 모순된 계기를 한층 새롭게 종합 통일하는 단계이다. 이는 “즉자 대자”(an und für sich)의 단계로 말해지는 종합 혹은 지양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은 오성적 사유가 고집하는 규정을 폐기함과 동시에 그 규정의 진리성을 보호함으로써 고차적인 단계로 고양高揚하는 사변적思辨的 이성의 인식이다. 사변적 이성의 인식은 추상적 보편의 인식과 객관적 보편의 인식을 종합 통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보편의 인식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정신은 정립, 반정립, 종합이라고 하는, 지양되어 통일되는 변증법적 진행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고차적인 단계에 도달함으로써 대상의 진리성이 더욱 보편화된다. 이념의 변증법적 발전단계에 있어서 최고의 발전단계는 과정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가장 구체적이면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보편자는 바로 절대정신이다.
완결된 학적 체계로서의 정신철학
절대정신에게는 실재와 사유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정신은 자신의 정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절대정신은 자기전개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귀환하여 완결한다. 이것이 절대적絶對的 인식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는 자신의 본질을 사고하는 정신이기를 바라는데, 그 절대정신은 이념의 다른 모습인 자연으로 발전하고 자연은 다시 자기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학學으로 조직한다면 정립으로서의 논리학, 반정립으로서의 자연철학, 종합통일로서의 정신철학으로 완결된 체계를 이룰 수 있다.첫째 단계는 정립으로서의 논리학이다. 논리학은 절대이념을 변증법적 발전과정으로 고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념의 학이다. 이념의 학은 “자연과 유한적 정신의 창조 이전의 영원한 본질 가운데 있는 신神의 서술”을 내용으로 한다. 그것은 순수한 본질을 다루는 이념적인 것이다. 이념의 변증법적 발전을 서술하는 논리학은 순수이성의 체계, 즉 순수사변의 왕국으로 ‘즉자태’로 정립되어 파악하는데, 형이상학이자 동시에 존재론이 그것이다.
논리학의 발전단계는 존재의 논리학, 본질의 논리학, 개념의 논리학으로 구분된다. 존재의 논리학은 존재론으로 질, 양, 한도를 다루고, 본질의 논리학은 본질론으로 본질, 현상, 현실을 다루고, 개념의 논리학은 주관적 관념, 객관적 관념, 이념(생명, 인식, 절대이념)을 다룬다. 따라서 논리학은 순수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두 정립, 반정립, 종합의 변증법적 전체 과정을 통해서 절대이념에 도달한다.
둘째 단계는 반정립으로서의 자연철학이다. 절대이념은 원래 정신적인 것이었으나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연의 객관적 형태를 취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자연철학은, 절대자 자신을 외화外化하여 자연의 객관적 대상이 된 이념, 다시 말하면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밖으로 나가 대상화된 이념을 다룬다. 이렇게 “대자태”로 된 이념은 “자기의 타재他在에 있어서의 이념”(Idee ihrem Anderssein)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이념은 전개발전으로서의 자연이며, 자연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어 진정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앞서 “현실적인 것은 이념적인 것이요 이념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자연철학의 발전단계는 세 단계, 즉 정립의 역학적 단계로서 수학적 역학(시간과 공간), 유한적 역학(물질과 운동), 절대적 역학(인력)을 다루고, 반정립의 물리학적 단계로서 보편 물리학, 특수 물리학, 전일 물리학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종합의 유기체 역학의 단계로서 광물, 식물, 동물을 다룬다. 정립의 역학적 단계에서는 ‘즉자태’로서 양적인 관계를 다루며, 반정립의 물리학적 단계에서는 ‘대자태’로서 질적으로 규정된 물체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종합의 유기체적 역학의 단계에서는 ‘즉자 대자’적인 것으로 광물, 식물, 동물의 생명체를 다룬다. 이들 생명은 결국 동물에게서는 감각하는 혼魂으로 인간에게서는 인식하는 정신으로 상승하며, 절대정신은 자연에 있어서의 소외疏外로부터 다시 자기정신에로 복귀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 단계는 종합통일로서의 정신철학이다. 정신철학은 절대이념이 자연에로의 자기 외화를 극복하고 젊어져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한 이념이다. 이 정신은 이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이념이요 스스로 돌아가는 ‘즉자 대자태’의 이념을 내용으로 한다. 정신에로 귀환한 이념은 다시 세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친다. 정신철학은, 첫째 주관적 정신의 단계로 인간학, 정신현상학, 심리학을 다루고, 둘째 객관적 정신의 단계로 추상적인 법, 도덕, 인륜성을 다루며, 마지막 절대정신의 단계로 예술, 종교, 철학을 다룬다.
주관적 정신에서는 개인적인 정신과 그 정신의 여러 능력들이 차례로 서술되는데, 개인적 정신은 자연에서 복귀하여 자연성을 가지고 있는 마음, 즉 생명의 혼이다. 이러한 혼은 의식 이전의 잠자는 마음과 같은 신체와 떨어질 수 없는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현실적인 마음이며, 이 마음이 점차 회복하여 의식 자체(감정, 지각, 오석), 자기의식, 이성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인 상태로부터 점차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의식이 싹트고, 의식은 더 발전하여 이성으로 돌아온 후, 이성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종합 통일되어 타인의 자유를 승인할 수 있게 된다.
객관적 정신은 현실적인 사회가 역사적으로 발전 전개되는 정신의 고찰이다. 이는 추상적인 법으로서 ‘즉자태’로 정립되고, 도덕으로서 ‘대자태’로 반정립되며, 양자의 종합인 인륜성으로 ‘즉자 대자태’로 종합 지양되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특히 인륜성은 가족, 시민사회, 국가로 분석되는데, 헤겔에 의하면 국가도 일종의 인격이다. 국가의 정신, 즉 국민의 정신은 개별적인 인간으로 볼 때, 신체에 대한 영혼과 같다. 그러므로 객관적 정신은 국민의 정신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국민정신을 통해서 드러난 객관적 정신은 세계사로 고양되고 보편적인 세계정신으로 지양되는데, 이러한 세계정신의 법률은 최고의 법률 자체가 된다.
절대정신은 객관적 정신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에로 돌아온 정신이다. 이는 정신의 이념적 본질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즉 유한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자기의 본성이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정신이다. 이러한 절대정신은 다시 ‘즉자태’로 예술, ‘대자태’로 종교, 그리고 ‘즉자 대자태’로 철학의 모습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발전 전개되어 완결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예술과 종교의 통일이요, 사유에 의해서 이념이 절대적인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역사와 문화는 절대정신이 자신을 실현하는 도구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세계의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현과정은 절대정신이 자유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세계사의 진행 과정 또한 절대정신의 본질인 자유를 실현해 가는 도정이다.역사는 본질적으로 이념적 정신의 역사이며, 절대정신의 본질인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 세계사世界史이다. 세계사는 곧 세계정신을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정신을 실현하는 특정한 개인은 세계사적 개인이고, 세계정신이 개별적인 민족정신으로 특수화되어 여러 가지 문화를 창출하면서 국가를 형성하고 문명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과정을 겪는다. 이것이 세계사적 민족이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세계정신이 자기를 자각하고 자신을 실현해 가는 도정이다.
위대한 세계사적 영웅(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링컨 대통령 등)이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 어떤 목적을 달성하거나, 혹은 세계사적 민족이 국가의 영도적 위치에 오른다 하더라도, 이들도 결국 세계정신이 자기 자신을 실현해 가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헤겔은 “이성의 간계”(List der Vernuft)라고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정신을 실현해 가는 세계정신은 세계사적 개인이나 세계사적 민족을 통하여 세계사의 궁극적인 절대적 자유를 실현해 가는데, 이에 대해서 헤겔은 “세계사는 자유 의식에 있어서 진보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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