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제갈諸葛씨
[한국의 성씨]
남양南陽 제갈씨
시조 제갈규諸葛珪
중국 후한 말기에 태산군승泰山郡丞을 지낸 제갈규諸葛珪가 시조이다. 그는 삼국지三國志에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으로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이다. 그의 5세손 제갈충諸葛忠이 위나라는 살 곳이 못 된다 하여 띠배를 타고 동쪽 우리나라에 도래하여 전라도 지리산에 안착 거주하였다. 그때가 신라 13대 미추왕 5년(서기 376년)이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제갈 성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제갈량의 원래 성씨는 갈葛씨였다. 제갈량 조상은 진나라 말기 진승과 오광의 봉기에 가담한 장군 갈영葛嬰의 후손이라고 한다. 갈영은 전공을 올렸지만 진승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한漢 문제 때 그 공적을 인정받아 자손이 제현후諸縣候에 봉해진다. 제현은 당시 낭야군瑯琊郡(지금의 산동성 청도)에 속한 지역이다. 그 뒤 여러 대가 지나서 그들의 일족이 제현에서 양도陽都로 옮겨 갔는데, 양도에서는 원래부터 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둘을 구별하기 위해 양도의 사람들은 그들을 ‘제현의 갈씨’라는 의미로 제갈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이후로 언제부터인가 두 글자인 제갈이 통용되게 되었다고 한다.
제씨와 갈씨로 분파
고려 현종 때 시조의 32세손 제갈한諸葛漢이 학문과 인품으로 명성이 높자 현종이 이를 칭찬하고 그에게 벼슬을 권유하였다. 그가 끝내 이를 사양하자 현종이 크게 감탄하여 두 아들에게 사분성賜分姓(성을 나누어 하사함)하였다. 형인 제갈홍諸葛泓은 제諸씨로 하여 낭야군瑯琊君에 봉해지고, 아우 제갈형諸葛瀅은 갈葛씨로 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남양은 와룡선생 제갈량이 은거했던 중국 형주의 남양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때부터 제씨와 갈씨가 분성되어 세전하였다. 구한말 고종 때 성씨 환원운동還元運動이 일어나자 제씨와 갈씨 일부가 제갈씨諸葛氏로 복성復姓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에 제갈諸葛, 제諸, 갈葛 3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참고로 제諸성은 21,976명, 갈葛성은 2,086명으로 조사됐다.(2015년 기준)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제갈은諸葛殷이 고려에서 시랑侍郞을 지냈고, 제갈훤諸葛萱이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다. 제갈윤신諸渴允信은 한말韓末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분으로,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 연기우延基羽의 부장副將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한일합방 이후 철원鐵原, 평강平康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현대 인물로는 제갈정웅諸葛政雄(제6대 대림대학 총장), 제갈융우諸葛隆佑(인천지방검찰청 검사장), 제갈영종諸葛榮鍾(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제갈원영諸葛院英(인천시의회 시의원), 제갈경배(제48대 대전지방국세청장), 제갈성렬(대한민국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등이 있다.(전 현직 구분 없음)
대구 달성군 논공읍 영모재의 유래
시조의 52세손 제갈자경, 중경, 연경 삼형제는 고향 진주를 떠나 장자張子 자경은 달성군 구지면 덕곡동에 안착하고 차자次子 중경은 달성군 논공읍 본리리에 삼자三子 연경은 서울로 각각 분산 거주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중경의 자손들은 약 400년 동안 본리리에 세거하면서 1947년에 영모재를 건립하였다. 6.25 전란 때 소실되었으나 1960년에 중건되었다. 후에 달성공단이 조성됨으로써 논공읍 남리로 이사한 세거민들이 1981년에 새로 옮겨 지었다. 영모재 안의 무후사武侯祠는 제갈공명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주요 집성촌은 대구 달성군, 경기도 가평군, 천안시 성환읍, 강원도 철원군 등지이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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