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실재reality를 찾아 나선 사람들(4)

[철학산책]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3) 형이상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아테네의 이방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 그는 그리스의 북부 마케도니아의 왕국 작은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대를 이어 의학에 종사했고, 어머니 파이스티스 또한 의사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한때 마케도니아의 왕 아민타스Amyntas 2세의 궁중 의사였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린 시절을 숙부에 의탁해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타고나면서부터 학문적 욕망에 불타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그의 모든 경력과 활동은 무엇보다도 진리 발견에 생애를 보내고, 지식을 증진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러한 욕망은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모두 각자의 정신과 일체이고, 정신의 활동이 곧 삶이라는 것이다. 초기 작품 『철학에로의 권고문 Protrepticus』에서 그는 “지혜를 획득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모든 인간은 철학함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만사를 제쳐놓고서라도 철학하는 데에 시간 보내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학문에 대한 욕망에 불타있던 그는 초년 시절부터 아테네에서 발간되는 책을 여러 경로를 통해 구입해 보았을 것이다. 특히 그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고 철학의 여신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급기야 그는 기원전 367년 17세의 나이에 아테네로 들어가 18세에 아카데미아Academia에 입학하여 플라톤의 제자가 된다. 당시 플라톤은 60세가 되어 학문의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세상을 등질 때까지 20년간을 거기에 머무르면서 철학을 철저하게 배우고, 열정적으로 탐구활동에 전념했다.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으뜸가는 제자로서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밤새 연구하다 늦잠을 자서 강의 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의 예지叡智”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의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이는 스승이 제자의 탐구정신을 높이 평가했고, 제자를 엄청나게 총애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볼 수 있다.

플라톤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포스Speusippos가 아카데미아 원장 직을 이어받았고, 아카데미아에서 철학을 수학화數學化하려는 쪽으로 기우는 스페우시포스의 학풍이 자신의 철학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테네를 떠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아시아 연안 소도시에 머물면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기원전 342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Philippos로부터 13살이 된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스승이 되어달라는 초청을 받고 궁중으로 들어간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훗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어 동서양을 최초로 통일하게 되는 알렉산드로스의 만남이 이때 처음 이뤄진 것이다. 스승이 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어떤 교육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4년 정도 그에게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속담에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려서부터 세계를 정복 통일하려는 욕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나이에(18세가 된 왕자) 마케도니아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들어가 아테네를 굴복시킨 사실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기원전 336년에 아버지가 암살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면서 정복자로서의 위용을 드날리기 시작한다. 기원전 334년 지천명知天命의 나이(50세)에 접어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제자의 덕분에 꿈에 그리던 학문의 요람지 아테네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테네를 떠나온 지 꼭 13년 만의 일이었다.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맨 먼저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 학원 정 반대편에 리케이온Lykeion이라는 학원을 설립한다. 리케이온은 아폴론Apollon 신의 별칭인 리케이오스Lykeios를 기리는 성역聖域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2번째의 학원이 된다. 스승과 제자가 설립한 두 학원 간의 경쟁은 이때부터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0여 년 동안 리케이온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연구와 강의에 매진하였고,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학술단체도 설립했다.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회원들의 도움으로 수집하였고, 구하기 힘든 자료는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요청하여 수집하였다. 인류 최초의 도서관 및 박물관은 바로 이때에 설립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사상은 출발부터 다르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의 학당>을 보면, 중앙 왼쪽에는 플라톤이 있는데, 우주론을 담은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Tiaios』를 옆에 끼고 오른손이 하늘을 향하고 있고, 바로 그 옆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데, 자신의 저서 『윤리학Ethica』을 끼고 왼손이 현실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 이 두 철학자의 모습은 천상의 이데아에서 진리를 찾아야 함을, 현실 속에서 경험적으로 진리를 밝혀야 함을 표현해 주고 있다. 플라톤이 논리학자로서 이념성을 따지는 사상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을 직시하여 경험을 중시한 과학자였던 것이다.

플라톤이 이성의 직관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탐구를 중시한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의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해부하여 기록했으며, 다른 전문가들의 관찰 기록이나 의견을 참조하여 경험적 지식을 정리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과 함께 철학, 자연과학, 동물학, 생물학, 의학, 역사학, 연대기, 정치학 및 언어학 등의 방대한 자료들을 연구하여 체계적으로 저술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게 많던 저술들은 대부분 소실되고 오늘날 5분의 1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기원전 323년 6월, 리케이온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3차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자치제를 열망하던 아테네인들은 매우 기뻤고, 마케도니아인에 대한 적대 감정의 표현은 극에 달했다.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리케이온에서의 연구와 교육활동을 접고 아테네를 떠난다. 그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처형된 것을 상기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같은 죄를 두 번 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아테네를 떠나 북쪽 칼키스로 가서 그곳에서 다음 해(BCE 322)에 숨을 거둔다.

최초로 학문을 분류한 철학자
무릇 학문이란 사유를 통해 체계화된다. 합리적인 사유는 지식을 낳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지식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누었다. 즉 “모든 사유는 실천적인 것이든가, 창작적인 것이든가, 이론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천적인 지식은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에 관계된다. 여기에는 『윤리학Ethica』과 『정치학Politica』이 속하는데, 전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평화롭고 행복할 것인가를 다루고, 후자는 사회와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가장 조화롭게 잘 사는 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창작적인 지식은 제조학, 농경학, 예술, 공학 등과 같은 사물의 제작에 관련되지만, 『시학Poetica』과 『수사학Rhetorica』의 분야만이 여기에 관한 글로 전해지고 있다. 창작적인 것은 『시학』에서 글을 잘 작성하는 법을 다루고, 말솜씨의 창작은 『수사학』에서 다룬다.

문제는 이론적인 지식이다. 지식의 목적은 창작도 아니고 행위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체로 진리일 때에만 이론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세 종류의 이론 철학으로 분류되는데, 수학, 자연학, 신학이 그것이다.

수학은 산술학, 기하학 등이 속한다. 플라톤의 제자라면 누구나 다 당대의 수학에 능통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수의 본성에 대해 빈틈없이 탐구했다. 하지만 그는 전문적인 수학자가 아니었고 수학을 발전시키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자연학은 식물학, 동물학, 심리학, 기상학, 화학, 물리학 등이 포함된다. 자연학은 두 가지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변화할 수 있거나 운동할 수 있는 것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따로따로 존재’하거나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다룬다. 그럼에도 자연학이 최고의 학은 아니다. 만일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따로 존재하는 어떤 다른 실체가 없다면 자연학은 제1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불변적인 실체(ousia)가 있다면, 그것을 다루는 학은 신성한 것으로 제1철학이 될 것이다.

신학은 신성한 존재로서의 불변적인 실체를 다룬다. 여기에서 신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계의 가사적可死的인 존재를 넘어서 있는 불변하는 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Metaphysica)을 가리킨다. 논리학은 이론학에 귀속되는데, 사실 학문을 이끌어가는 기관(organon)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학문하는 도구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그가 저술한 명제론, 개념론, 분석론 전서와 후서, 변증론, 소피스테스적 논박론 등이 속한다.

문제는 존재론이라고도 하고, 신학이라고도 하고, 제1철학이라고도 불리는 형이상학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란 말을 쓰지는 않았다. 기원전 1세기경에 로데스 출신의 안드로니쿠스Andronicus of Rhodes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술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때, ‘자연학을 넘어서(meta ta physica)’를 줄여서 그리스어에 “Metaphysika”를 붙인 것이다. 이 학문이 동양에 소개될 때, 『주역周易』의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에서 ‘형이상’을 따와 ‘형이상학’이라 했던 것이다. 형이상학은 사물에 대한 궁극의 원인과 원리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학이며, 최고의 존재와 존재 자체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제1철학이라고도 한다.

제1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보편적으로 다루는 존재론이다. 존재론은 “존재자로서의 존재(on hē on)”를 탐구한다. ‘존재자로서의 존재’를 탐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사실 ‘존재자로서의 존재’는 그 자체의 존재이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추상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보다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로서(hē)’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집안의 가장이면서 대통령인 A씨가 있다고 하자. 그가 집에 돌아가서는 ‘가장으로서의 A’이고, 공직에 나가서는 ‘대통령으로서의 A’이며, 친구들 모임에 가서는 ‘친구로서의 A’이다. 여기에서 가장이나 대통령이나 친구는 ‘A’에 협조적이거나 ‘A’를 위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다.”라고 할 때의 존재론적 탐구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공책도 ‘하나’요, 책상도 ‘하나’요, 몸도 ‘하나’라고 말할 경우, 어떤 것이 ‘하나의 본성’을 위해서 있거나 하나에 협조적이듯이, 모든 존재자는 존재의 본성이나 그 존재에 협조적이다. 이것이 존재 그 자체를 묻는 존재론이며, 곧 형이상학적 탐구라는 얘기다.

존재 그 자체는 이데아가 아닌 실체(ousia)
무엇이 학문이 될 수 있게 하는가? 그것은 실재에 대한 앎이다. 실재는 환상이 아닌 참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럼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과거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탐구되어 온 문제는 바로 ‘존재(to on)란 무엇인가?’이고, 그것은 곧 ‘실체란 무엇인가?’의 물음”이라고 말한다. 존재론적 물음은 바로 ‘실체’에 대한 탐구라는 얘기다.

실체에 대한 개념 규정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kategoria)』에서 비교적 명확히 하고 있다. 범주範疇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분류한 술어의 종류를 말하는데, 10가지 술어 범주가 있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는 서술은 모두 여기에 속하는데 실체, 시간, 공간, 관계, 능동, 피동, 상태, 소유 범주가 그것이다. 요컨대 10가지 범주는 ‘민주투사 A씨(실체 범주)가 1980년(시간 범주)에 서울(공간 범주)에서 친구들과(관계 범주) 인권운동을 하다가(능동 범주) 피검되어(피동 범주) 옥살이하게 되었는데(상태 범주) 슬하에 자녀(소유 범주)가 하나 있다’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술어를 분류한 까닭은 곧 존재의 범주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술어의 범주가 10가지라면 이 말에 대응하는 사물의 존재 범주도 10가지라는 얘기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키가 작다”는 표현에서 ‘소크라테스’는 실체 범주에 속하고, ‘작은 키’는 실체를 드러내주는 술어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서 “실체(ousia)” 범주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일차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실체 이외의 다른 색깔이나 크기, 장소와 시간 등은 실체와 관련해서 혹은 의존해서 그렇게 존재하지만, 실체는 자체로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은 과거 자연철학자들이 제시한 존재 개념과도 다르고,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현격히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이데아가 아닌 경험적인 현실세계에서 찾는다. 경험적인 사물이 실체라고 말해지는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궁극의 “기체基體(hypokeimenon)”를 실체로 본 것이다. 그러나 궁극의 기체는 어떤 방식으로도 서술될 수 없기 때문에 확실성을 본성으로 하는 실체의 규정에서 벗어나 있다. 다른 하나는 “그러그러한 이것(tode ti)”인데, 식별되고 개별화될 수 있는 것(개체성), 예컨대 ‘그러그러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을 떠나서 다른 서술 범주들, 색깔이나 크기나 모양, 이 시간, 이 공간 등은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개별적인 ‘이 사람’은 다른 범주들 없이도 독립적으로 실재할 수 있다.

실체는 개별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정작 실체 자체에 대한 규정은 아직도 애매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과거의 철학자들이 실재로 여겼던 존재를 검토한다. 우선 그는 물, 불, 흙, 공기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이론을 부정한다. 이것들은 무규정성을 본성으로 하는 질료質料(hylē)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미세한 원자가 실재라고 한 원자론, 수數를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한 피타고라스 이론, 추상적인 보편자가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한 플라톤의 이데아론 등이 모두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이데아가 실재라고 주장한 스승(플라톤)의 이론을 장황하게 논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양(whiteness)’이 실재하는 것은 어떤 실체가 하얗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플라톤은 실체가 하얗다는 것은 그것이 ‘하양을 나누어 가졌기[分有]’ 때문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얀 것’은 ‘하양’에 앞서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양’의 존재는 단순히 ‘하얀 것’에 의존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플라톤은 ‘하양’은 ‘하얀 것’에 선행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얀 것’은 단순히 ‘하양’을 분유했기 때문이다.

그럼 실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체는 감각으로 경험될 수 있어야 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현실적으로 고유의 능력을 갖고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실체를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완결된 실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성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어가는 존재로 본 것이다. 이런 조건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동물과 개별적인 식물이다. 나아가 중간적 크기의 물질적인 대상, 다시 말해서 태양, 별, 달 등과 같은 자연적인 사물들과 책상, 의자, 단지, 집 등과 같은 인공물이 실체에 귀속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될 수 있는 개별적인 실재가 근본적인 실체이고, 곧 학문의 대상이 된다는 주장이고, 반면에 플라톤은 감각을 넘어서 있는 완결된 이데아가 실체이고, 곧 학문의 대상이 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에게는 현상계의 개별적인 사물을 넘어서 있는 보편적인 형상이 실체요, 곧 학문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경험적인 개체 안에 있는 개별적인 형상, 즉 “본질(to ti ēn einai)”이 실체요, 곧 학문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고대의 존재론을 종합한 아리스토텔레스
고대의 자연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지속하는 자연의 생성 변화에 직면해서 매우 당혹했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는 오직 생성의 변화만이 존재의 진면목이라 했고, 반면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존재 세계에서 생성의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어떠한 변화도 인정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가 내놓은 존재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로부터 자연의 생성 변화하는 것이란 참된 진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여 체계화된 존재론을 전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실체는 감각에 들어오는 경험의 대상이고, 다양한 생성변화를 겪어야 하는 주로 일시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변화는 세 마디를 수반한다. 즉 “일차적으로 변화를 시작하는 어떤 것이 있고, 변화하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있다. 이것 외에 무엇으로부터 어떤 것에로 진행하는 주체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변화는 어떤 것에서 어떤 것으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변화하고 있는 것은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와도 다르고, 변화된 상태와도 다르기 때문이다.”(『자연학』 5권 1).

운동 변화는 개별적인 사물을 떠나서 성립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어떤 것’의 운동 변화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물의 크기, 양, 위치 등이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뜨거운 물이 식어서 차가운 물로 됐을 경우에, 존속하는 것은 물이고, 변화는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의 전환이다. 그럼 실체의 변화, 즉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가 생겨나거나, 그가 죽어서 없어졌을 경우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탄생과 죽음은 실체의 시작과 종말이다. 이 경우에서 존속하는 무엇(X)이다. 태어나기 전에 없었던 소크라테스가 태어남(소크라테스인 X)은 소크라테스가 생성된 것이고,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에 존속하지 않음(X)은 소크라테스의 소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실체를 복합적인 것으로 취급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목재 및 벽돌 등으로 이루어진 집이나, 어떤 원리에 의해 융합된 물질(살, 뼈, 피 등)로 구성된 사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개별적인 사물은 두 부분, 재료(stuff)와 구조(structure)로 이루어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질료(matter)”와 “형상(form)”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질료와 형상은 물리적인 요소가 아니라 실체의 논리적인 부분이다. 그는 실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재료와 구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이 질료를 재료로 하여 자신을 현실화하는 것이 개별적인 사물인 것이다. 여기에서 질료를 실체의 물질적인 측면으로, 형상을 비물질적인 측면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형상과 질료는 상대적인 개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태어날 때,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수정란을 질료라 한다면, 수정란이 성장하여 태어난 아기는 형상이다. 난자와 정자가 서로 만나 수정되는 순간은 전에 없었던 아기의 형상을 받아들여 아기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아기가 자라나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때, 아기는 질료이고 성숙한 어른은 어른의 형상을 받아들여 어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은 현실 속에 완성된 실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여 점차 완성되어가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질료는 감각적인 사물을 이루는 근본적인 물질이고, 형상은 그러한 물질을 일정한 존재로 있게 하는 원리로 볼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보편적인 형상이 현실세계 안으로 들어와 질료를 재료로 하여 개별적으로 실현되어 가고 있는 본질적인 것을 실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세계가 이데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가 자연세계 안에 있고, 형상은 보편성 그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적 존재로 실현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세계는 형상을 실현하는 장(field)
자연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이다. 운동은 장소 이동의 의미로 영어에서 movement으로, 변화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전환됨을 의미하는 change로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그리스어에서는 운동과 변화를 포함하는 단어 kinesis란 용어를 사용한다. 변화는 장소 이동, 질적인(크기, 모양, 색 등) 변이 및 생멸(생성과 소멸)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변화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변화는 가능태로서 가능적인 것의 현실태이다.”(『자연학』 3장) 여기에서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는 확연히 다르다. 가능태는 무엇이 될 능력을 갖고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현실태는 고유한 기능을 발휘하여 그 능력이 발휘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린애는 가능적으로 어른이다. 어린애가 어른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변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체(ousia)를 질료(hyle)와 형상(form)의 복합이라고 규정할 때, 질료는 가능태이고 형상은 현실태이고, 변화는 가능태인 질료가 현실적인 형상을 받아들여 부단히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자연세계는 끊임없는 생성의 장(場)이다. 이를 동양 우주론의 핵심을 담은 『주역周易』은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은 “무엇 때문에” 끊임없는 생성 변화의 과정으로 진행되어 가는가? 거기에는 결정적인 “까닭(aitia)”이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을 아리스토텔레스는 4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질료인(material cause)”, “형상인(formal cause)”, “작용인(efficient cause)”, “목적인(final cause)”이 그것이다.

첫째, 질료인은 대체로 사물이 생겨나게 되는 구성 요소를 지칭한다. 요컨대 흙벽돌과 돌을 쌓아서 만들어진 집, 목재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집,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집에서 보듯이, 질료인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집의 재질이 다르기 마련이며, 이로부터 집의 견고성이나 집에서 풍기는 느낌 등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둘째, 형상인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는 요소를 말한다. 여기에는 두 방식으로 나누어 말해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앎으로, 사물의 크기, 형태, 색깔 등이다. 이것들을 우리는 “우연적인 형상(accidental form)”이라 부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감각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 이성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것으로, 사물을 사물이게 하며 명확한 인식을 제공하는 “본질(to ti en einai)”이다. 요컨대 ‘집’의 경우에서 색깔이 다른 색으로 변하든, 좀 부서져서 형태가 달라지든, 더 크게 증축되든, 이러한 우연적인 형상이 아무리 변화해도 ‘집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면, 우리는 같은 집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만일 집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면 우리는 집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집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그대로 존속하는 것을 “본질적인 형상(essential form)”이라 부른다.

셋째, 작용인은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질료를 동원하여 형상을 실현하는 힘의 원천을 말한다. 작용인은 내재적인 요인과 외재적인 요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어느 목수가 집을 짓는다고 할 경우에, 집을 구성하는 건축 자료들은 질료인이라 할 수 있겠고, 집의 설계도는 형상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건축 행위를 하는 목수는 설계도에 따라 건축하기 때문에 외재적인 작용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생장 변화하는 것들의 경우에는 작용인이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내재적 작용인으로 볼 수 있다. 질료를 동원하여 형상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작용인은 ‘작용인으로서의 형상인’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목적인은 사물이 변화 작용을 끝냄으로써 고유한 존재 목적(telos)을 실현한 상태를 일컫는다. 만일 질료를 동원하여 형상을 완전히 실현했다면, 그것은 이미 목적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변화 작용이란 없을 것이다. 요컨대 건축가가 건축 자료들에 작용을 가하여 집의 형상을 완성하게 되면 더 이상의 건축 행위란 없게 된다는 얘기다. 이후에는 집의 기능, 다시 말해서 집의 존재 목적을 발휘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목적인은 바로 ‘목적인으로서의 형상인’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은 하나의 동적인 세계이다. 현실적인 세계는 가능태로서의 질료가 현실태로서의 형상을 부단히 실현해가는 과정, 즉 “모든 경우에 가능적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현실적으로 있는 것의 작용에 의해 현실적인 것이 생겨나는”(『형이상학』 9장) 과정인 셈이다. 이러한 생성변화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실재는 바로 실체(ousia), 즉 형상이다. 자연의 생성변화의 작용은 이것을 목표로 해서 질서화되어 가는 과정이고, 작용인은 이미 본질 속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목적은 형상과 일치하며, 작용인은 형상인과 동일시된다.

이렇게 자연의 끊임없는 생성 변화가 계속되는 까닭은 궁극적인 제1실체, 즉 순수형상에 도달하는 데에 궁극의 목적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제1실체가 되는 순수형상을 그는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라 했다. 부동의 원동자는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들이 스스로 창조 변화되게 하는 궁극의 원리라는 것이다. 마치 좋음을 인식한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행위처럼 말이다.

행복한 삶을 찾아서
靈智意三識(영지의삼식)이 卽爲靈覺生三魂(즉위영각생삼혼)이나 亦因其素以能衍(역인기소이능연)이라

영식과 지식과 의식의 세 가지 앎의 작용은 영혼과 각혼과 생혼의 삼혼을 생성하지만 이 또한 능히 삼식三識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서 뻗어 나간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자연에는 크게 두 종류의 실체가 있다. 하나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이 있고 없는 것의 차이는 “혼(psychē)”을 소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이 혼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영혼(soul)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혼은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것(animator)”에 가까운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생명체의 혼을 그 기능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가장 기본적인 혼은 장소 이동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영양을 섭취하고 생식生殖만을 하는 기능이다. 이것은 식물들이 갖고 있어서 ‘식물적인 혼’이라 한다. 다음 단계는 식물적인 혼을 포함하면서 지각 능력과 욕구 능력 및 장소 이동 능력을 가진 혼이다. 이것은 동물들이 갖고 있어서 ‘동물적인 혼’이라 한다. 지각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쾌락, 고통, 기쁨, 슬픔 등을 경험한다. 마지막 단계는 식물적인 혼과 동물적인 혼을 포함하면서 신성한 이성의 사유 능력을 갖고 있는 혼이다. 이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혼’, 즉 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과 사유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 구분된다.

기술이 기술자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의 영혼은 살아 있는 육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플라톤이 말하는 영혼은 생명을 가진 육체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였다. 조물주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신이 이데아에 있던 개별적인 영혼을 따다가 수레에 싣고 와서 현실적인 육신에 넣어 주었고, 이후에 인간의 영혼은 욕망적慾望的 영혼, 기개적氣槪的 영혼, 이성적理性的 영혼으로 각기 기능한다. 인간이 죽으면 육신의 해체와 더불어 욕망과 기개적 영혼은 없어지지만 이성적 영혼은 불멸한다.

인간이 생명을 갖고 태어난 이상 영혼은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영위한다’는 것은 영혼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을 통해 특정한 무언가를 달성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돈을 번다든가, 건강을 위해 노력한다든가, 무언가에 몰두하여 탐구에 열중한다든가, 즉 의식적으로 어떤 행위를 추구하는 것은 영혼이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목표는 결국 좋음(善)을 달성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영혼이 목표를 지향해 감은 나날이 번창하고 ‘성공적인 삶’을 구가하려는 경향이다.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차용하여 표현해 보면 행복(eudaimonia)한 삶이다. 행복은 목적 중의 목적이요 최고로 좋음이기 때문이다. 좋음은 인간 본연의 “탁월함(arete)”을 발휘함에서 찾아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란 “탁월함에 일치하는 영혼의 현실태”라고 규정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일 인간의 능력을 탁월하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번창한다고 할 수 없다. 번창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탁월하게 행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자신의 능력을 실행하되 충분하지 않게 혹은 나쁘게 실행한다면 그는 성공적인 살을 누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행하는 것에 일치하는 탁월성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성품의 탁월함과 지적인 탁월함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탁월함을 발휘하는 기능은 전자의 실천적인 측면과 후자의 이론적인 측면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성품의 탁월함은 우리가 소위 도덕적인 덕德(virtue)으로 알고 있는 것, 즉 비겁과 무모함의 중간인 용기, 인색함과 낭비의 중간인 관대함, 어느 편으로 치우침이 없는 공평무사, 금욕과 방종의 중간인 자중, 비굴함과 오만함의 중간인 긍지, 적절한 허식, 위트와 같은 성향들을 포함한다. 동양사상에서 보자면, 이는 중용中庸의 덕으로 한마디로 중화(中和)사상이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조화라는 것은 천하의 위대한 덕(中也者天下之大本, 和也者天下之達德)”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반면에 지적인 탁월함은 인간에게 고유한 본연의 이성적인 활동이다. 본성상 선한 것, 훌륭한 것 등을 획득하고 선택하는 방식은 모두 신적인 것의 관상觀想을 증진시킬 것이므로 가장 탁월한 규범이 된다. 따라서 잘 번창하고 성공적인 삶을 누린다는 것은 이성의 지적인 탐구에 종사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일은 무한히 즐겁고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다른 활동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성의 지적인 사유 활동은 아무리해도 끝없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관조적觀照的인 삶을 의미한다. 관조적인 삶은 비할 데 없는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4) 중세 철학의 길목에 선 플로티노스(Plotinos)
大一其極(대일기극)이 是名良氣(시명양기)라 無有而混(무유이혼)하고 虛粗而妙(허조이묘)라.
三一其體(사밀기체)오 一三其用(일삼기용)이니 混妙一環(혼묘일환)이오 體用無岐(채용무기)라.
大虛有光(대허유광)하니 是神之像(시신지상)이오 大氣長存(대기장존)하니 是神之化(시신지화)라.
眞命所源(진명소원)이오 萬法是生(만법시생)이니 日月之子(일월지자)오 天神之衷(천신지충)이라.
以照以線(이조이선)하야 圓覺而能(원각이능)하며 大降于世(대강우세)하야 有萬其衆(유만기중)이니라.

만물의 큰 시원(大一)이 되는 지극한 생명이여! 이를 양기良氣라 부르나니
무와 유가 혼연일체로 있으며 텅 빔(虛)과 꽉 참(粗)이 오묘하구나.
삼(三神)은 일(一神)로 본체(體)를 삼고 일(一神)은 삼(三神)으로 작용(用)을 삼으니 무와 유, 텅 빔과 꽉 참(정신과 물질)이 오묘하게 하나로 순환하고 삼신의 본체와 작용은 둘이 아니로다.
우주의 큰 빔 속에 밝음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모습이로다. 천지의 거대한 기(大氣)는 영원하니 이것이 신의 조화로다.
참 생명이 흘러나오는 시원처요, 만법이 이곳에서 생겨나니 일월의 씨앗이며, 천신(상제님)의 참 마음이로다!
만물에 빛을 비추고, 생명선을 던져 주니 이 천지조화(의 광명과 대기大氣) 대각하면 큰 능력을 얻을 것이요 성신이 세상에 크게 내려 만백성 번영하도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플로티노스는 누구인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로마는 1세기경부터 주변국을 정복해 가면서 로마를 중심으로 문화와 조직을 엮어 갔고, 이를 기반으로 2세기경에는 강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3세기경에 접어들면서 로마제국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쇠망의 길로 접어든 로마제국은 철학적으로 일원론적인 사상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된다.

특히 보편주의를 표방한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지속된 정복 전쟁과 수세기에 걸쳐 공화정 시대를 열어 오면서 삶을 충족시키는 토대가 공적이고 정치적인 공동 생활에 있다고 보았으나, 제정시대에 접어들면서 삶이 점점 탈정치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인들이 정신적으로 추구할 방향은 결국 내세지향적인 종교에 귀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정시대에는 다양한 숭배의식과 비교秘敎 등이 확산되었다. 서양 중세의 역사문화를 장식한 기독교의 초기 확산도 그 중 하나이다.

로마제국은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어디에서 찾는 것이 마땅했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적인 세계관은 로마인들에게 각광을 받았을 것 같았으나, 고뇌와 갈등 속에서 구제를 갈망하던 로마인들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당시 시대적인 조류에 부응하여 널리 분포되어 있던 스토아Stoa 철학이 전개되면서 사유의 방향은 인간의 내면적 세계로 파고들어 가 정신의 순수성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스토아철학이 보여주듯이 로마인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섭리에 기대는 태도에 물들면서 현실을 체념하는 사고에 빠지게 된다. 그들에게는 오직 유일한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해서 구제받으려는 실제적인 욕구가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시대적인 조류는 인간의 유한성과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갈등을 풀어냄에 있어서 플라톤의 철학을 일원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절실하게 요구하게 된다. 여기로부터 절대자에 의한 구원 사상이 태동하게 되는데, 여기에 부합하는 사상은 마련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아카데미아 학파의 후예인 신 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Plotinos(204~270)였다. 플라톤 사후 약 500여 년 만에 등장한 플로티노스는 바로 중세로 넘어가는 과정인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이다. 그는 플라톤의 사상을 중심으로 그리스의 모든 사상을 종합하여 일원론적으로 집대성하여 중세의 신학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3번째로 위대한, 그리스 말기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플로티노스의 출신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그는 젊은 시절(28세 때)에 정신적인 중심지였던 알레산드리아에서 근 10여 년간 연구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도서관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오늘날 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서 클레멘스Clemens라는 학자가 최초로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계시를 해석했다고 한다. 이를 이어받은 오리게네스Origenes는 암모니오스 삭카스Ammonios Sakkas를 배출했고, 플로티노스는 이로부터 플라톤 사상을 배웠다.

아카데미아 학풍을 이어받은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핵심 사상을 등에 업고 자신만의 일원론적인 사상을 종교적으로 체계화한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그리스의 운명공동체인 폴리스사회에서 공동생활을 혁신하려는 목적으로 이데아론을 전개했다면, 플로티노스는 이를 비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극단적인 종교화를 꾀했던 것이다. 그 핵심은 바로 지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일자一者’에 대한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자로부터 존재의 하향도라 불리는 “유출설”과 구원의 상향도라 불리는 “일자와의 신비적인 합일(ekstasis)” 사상이 꽤 종교적이다.

일자(to hē)는 대광명이요 절대적인 실재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일원론으로 체계화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경험하는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형태를 가지며, 생성 변화한다. 이것들의 원형은 무엇인가? 플라톤에 의하면 그 원형은 이데아들이다. 요컨대 ‘개별적으로 둥근 것’은 보편적인 ‘둥금’이라는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만 둥근 것으로 실재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에 ‘둥금’이라는 이데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개별적인 ‘둥근 것’이란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둥금’이라는 이데아의 형상을 통해서만 개별적인 둥근 형태가 알려지기 때문이다.

현상세계의 개별적인 대상들은 어느 시점에서 생겨났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사라진다. 여기에서 생성은 형상의 획득이고, 변화는 형상의 변형이며, 사라짐은 형상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둥근 것’이 외부적인 타격에 의해 조금 찌그러지기라도 한다면, 이는 둥근 형상을 상실하여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태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찌그러진 그런 것들은 ‘완전히 둥글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연에는 새로운 생명이 연속해서 진행된다.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는 형상의 획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플로티노스는 생명生命이라 부른다. 포괄적인 형상의 획득이 바로 자연 세계의 생명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전체 우주(cosmos)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힘은 영혼이다. 죽음은 생명(영혼)이 물체에서 떠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도 생명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는 곧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영혼은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형상이 없는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온갖 개별적인 형상을 갖추도록 한다. 그러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설계도가 되는 이데아는 언제 어디에서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데아는 영혼이 출원하는 정신(nous)의 사고 안에 실재한다. 그럼으로써 이데아가 언제 어디에서나 세계에 개별적인 형상을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 세계의 형상을 통해서 불변적인 정신의 원형인 이데아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에 이데아의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정신이요, 살아있게 하는 것은 세계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완전성을 목표로 하는데, 세계영혼에 형상을 부여할 때 이데아를 제시해주는 것은 바로 정신이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정신은 사유와 사유된 것으로 구성된다. 정신은 사유이고, 사유된 것이 곧 이데아가 된다는 얘기다. 정신 속에서 사유된 것이 이데아라면, ‘사유된 것의 사유’가 있어야 한다. 정신은 바로 ‘사유된 것의 사유’를 전제로 한다. 플로티노스는 그것을 ‘일자(to hēn)’라 했다.

‘일자’의 특성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자는 완전히 단일한 것이어서 그 안에 사유나 사유된 어느 것도 들어 있지 않다. 또한 일자는 만물의 원초적인 근원으로서 반드시 실재해야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 ‘존재한다.’는 말조차 쓸 수 없다. 일자는 유한한 존재를 넘어서 있는 것이고, 인간의 사유로는 파악될 수 없으며, 굳이 말한다면 존재를 초월해 있는 신神으로 묘사될 뿐이다.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단일한 것, 원초적인 일자만이 완전한 통일체로 정신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일자는 철학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요, 최종의 것이다.

일자는 광명光明 자체요,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절대적인 통일체이다. 일자는 무한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세계의 유한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감각이나 이성의 사유로 파악될 수 없는 절대적인 실체이다. 일자는 유한한 존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절대적인 선善이다. 더욱이 일자는 일체의 모든 것을 안에 포괄하고 있지만,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실체이다. 그럼에도 우주만물은 일자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일자는 우주만물의 존재 근원이요 궁극의 원인이 된다.

그럼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세계는 일자로부터 어떻게 생겨 나오게 되는 것일까?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유한적인 우주만물은 일자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자는 자체로 완전히 충만한 존재여서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고 빛에서 열이 흘러나오듯이 말이다. 이것이 존재의 하향도下向道라 볼 수 있는 “유출설”이다. 일자로부터 우주만물이 유출되는 과정은 정신의 단계, 영혼의 단계, 물질의 단계로 구분하여 요약해 볼 수 있다.

정신의 단계
일자로부터 제일 먼저 유출되어 나오는 것은 정신이다. 정신과 일자에 대한 관계는 플라톤 철학에서 지극히 선[至善]한 이데아로부터 개별적인 이데아들이 분유되어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일자는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것이지만, 정신은 주관과 객관, 사유와 사유되어진 것 등의 차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정신에는 사유되어지는 대상과 사유 주체가 있다. 사유 주체는 곧 정신이기 때문에 정신은 곧 자신을 사유하게 되며, 사유되어지는 대상은 바로 이데아들이다. 그런데 이데아들은 우주만물의 원형原型이다. 따라서 정신의 세계는 모든 존재 구조의 종합이요, 지혜이며, 존재 법칙으로서 가장 완전한 진리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정신은 또한 우주만물의 원형이기 때문에 원상原象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생성되는 모든 것들은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원인으로 이데아를 가지게 되고, 이데아는 정신의 사유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정신은 생성되는 여러 개체들 속에 내재해 있다. 따라서 정신은 ‘하나’임과 동시에 ‘많음’일 수 있다. 여기로부터 플로티노스는 ‘하나는 전체요, 전체는 하나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사상은 사유하는 정신일 수 있고, 정신은 개별적인 생성의 원인으로 개별자 내에서 스스로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은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이 아니어서 불완전한 생성의 세계에 종속하지 않는다. 정신은 오직 직관적인 사유의 세계이며, 스스로 활동하는 우주만물의 원초적인 근원이요 원인이다.

영혼의 단계
다음으로 정신에서 유출되는 것은 영혼(psyche)이다. 영혼은 두 종류의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보다 고차적인 세계영혼으로 정신을 사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다 저급한 세계영혼으로 물질과 결합하여 경험 세계를 형성하는데, 유기체의 경우에서는 생명을 일으키는 데에 작용한다. 개별적인 사물의 형성에 들어간 저급한 영혼도 자체로 생성되거나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시공에 종속하지 않으며, 생성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로티노스는 정신을 사유하는 보다 고차적인 세계영혼이든 개별적인 사물의 형성에 들어간 보다 저급한 영혼이든 모두 하나의 영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는 전체요, 전체는 하나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세계영혼이 정신에서 유출되었기 때문에, 비록 개별적인 사물이 악하거나 좋지 않을지라도, 우주 전체는 절대적으로 조화롭고 선하다.

개별적인 것은 각기 영혼을 가지는데, 모두 세계영혼에 포함된다. 이러한 개별적인 영혼도 또한 보다 높고 보다 낮은 단계의 영혼들로 구분되는데, 인간적인 영혼, 동물적인 영혼, 식물적인 영혼이 그렇다.

인간에 깃들어 있는 보다 높은 단계의 개별적인 영혼은 정신의 단계로 향할 수 있다. 이 영혼은 정신의 개입에 의해 절대적인 ‘일자’에 참여할 수 있고,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비록 보다 높은 단계의 신적인 영혼을 갖고 있을지라도 영원한 존재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물적인 육신을 갖고 있어서 ‘일자’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다 낮은 단계의 개별적인 영혼은 물체와 결합하여 감각 활동을 활기차게 해 주는 생명의 기운이다. 이는 동물과 식물에게서 확인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보다 낮은 단계의 영혼을 소유한다면, 그것은 높은 단계의 영혼이 타락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동물들처럼 감각적인 욕망과 저속한 활동에만 의존하여 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개별적인 인간은 인간 본래의 상태를 상실하여 악하고 타락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질의 단계
마지막은 세계영혼에서 유출되는 물질(hyle)의 단계이다. 물질의 단계는 어둡고 악한 곳이다. 물질적인 것은 대광명의 ‘일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일정한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유동하고 무질서하며 불완전하며 좋지 못하다. 가장 어두운 곳은 아무런 형상이 없는 무無의 심연이다. 이는 태양 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두워지기 때문에 빛에서 가장 먼 곳이 암흑 세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말해서 최상층은 너무 밝은 대광명의 일자요, 최하층은 빛이 전혀 없는 암흑의 세계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감각의 세계는 물질적인 것들로 생멸하는 장場이다. 이것들은 모두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이기 때문에,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인 것은 온전한 형상을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지 못한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물질적인 세계의 전체는 조화롭고 아름다우며 영원하다. 그러므로 우주세계에는 절대적인 악이란 없고 오직 선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일자’와 개별적인 ‘많음’은 서로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고 융화되어 있듯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모든 악한 것들은 전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모두 선에 융화되어 있는 셈이다.

천지일심의 마음 (‘일자’와의 신비적인 합일)
생겨나는 모든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형상을 온전히 구현하여 완전해지는 것이다.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인간의 완성은 영혼의 정화를 통한 ‘일자’와의 신비적인 합일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 방법은 일자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유출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삶을 위한 ‘구원의 상향도上向道’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개별적인 인간은 모두 영혼과 육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인간은 영혼과 육신 사이를 방황하면서 좋지 못한 삶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은 물질적인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죄와 벌, 죽음과 슬픔, 타락과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며 살게 마련이다. 인생은 한마디로 고해의 바다에 던져져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존재인 셈이다. 이러한 고해는 영혼이 육신에 더 많은 관심을 쏟거나 물질적인 것을 욕망하면 할수록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삶을 일거에 청산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선한 삶의 경계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근원을 살펴서 본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원시반본原始返本)’, 즉 인간의 영혼이 유출되어 나온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서 벗어나서 스스로를 정신과 결합하고, 마침내 정신의 단계를 넘어서 근원적인 ‘일자’와 합일하여 하나가 돼야 하는 것이다.

반성적인 사람은 인간이 원초적인 일자로부터 떨어져 나왔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런 사람은 일자의 신神의 세계로 되돌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이 육신에 구속되어 있는 한 신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영혼이 온갖 육신에 따른 세속적인 욕망과 고통을 벗어나야 하는데, 이것을 영혼의 정화(catharsis)라고 한다. 영혼의 정화를 거친 후에 인간은 이성의 순수사유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정신 너머의 초월적인 일자와 합일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일자의 신적인 것을 닮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자’와의 합일을 이룬 인간은 완전히 선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고, 그만큼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일자’와의 신비적인 합일을 이루는 과정은 존재의 “유출설”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데, 이것도 세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영혼의 단계다.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실천적인 탁월함(arete)을 발휘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쾌락과 번뇌에서 벗어나는 단계를 의미한다.

둘째 단계는 정신의 단계다. 이는 완벽하고 올바른 사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수도修道로, 논리적인 사유 활동을 통해서 개별적인 한계를 벗어나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영혼은 가사적인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본래적인 자아는 순수한 형상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단계는 절대적인 ‘일자’와 합일하는 단계다. 이는 사랑과 관조觀照의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유출”의 생성과정이 전도된다.

‘일자’와 합일하는 순간은 신비적인 경지에 몰입하여 본래적인 자아 속에 깃들어 있는 ‘일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합일은 본래적인 자아와 ‘일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아와 ‘일자’가 융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내면에 깃든 ‘신과의 합일’이다. 바로 이 경계에서 황홀경(ekstasis)에 빠지게 되는데, 그 순간은 ‘일자’를 직관하는 순간이고, 세상사에 대한 모든 고통이나 감정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자신마저도 잊어버림으로써(망아忘我) 완전한 환희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일자’와 신비적인 합일을 이루는 것은 최고의 가치요, 더 없는 행복이며, 궁극의 존재 목적이요, 자아의 완성이다. 플로티노스의 이러한 구원사상은 중세 신학의 거장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354-430) 이론에 그대로 투영된다. 다시 말해서 플로티노스의 초월적인 ‘일자’는 만물의 근원으로 지고지순한 실재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절대 선이요 사랑이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절대적으로 초월한 신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일자와의 신비적인 합일’은 영혼이 신과 합일함으로써 황홀경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초월적인 신이 부여하는 은총의 선물로 간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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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재론에서 관념론으로의 전향
1) 중세에서 벌어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간의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