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상생문화연구소 연재(1) 철학philosophy이란 무슨 말인가
[철학산책]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이 글은 송대의 위대한 학자 주자朱子(1130~1200)의 ‘권학가’에 나오는 글의 일부분이다. 핵심 뜻은 우리가 배움을 이루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인간의 삶이란 너무도 짧아 순간의 시간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사진]
그래서일까? 오늘을 살고 있는 인간은 태어나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배움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 같다.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나아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몇십 년을 배움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배움은 끝이 없다. 어쩌면 인간은 배우기 위해 태어나서 배우다 생을 마감하는지도 모른다. 생은 곧 고달픈 배움의 길인 것이다.
배움의 길은 실로 다양하다. 그래서 배움을 통해 얻어낸 지식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더없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러한 지식을 전문성과 체계성을 갖추어 정리한 것이 소위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학문의 영역은 전문분야에 따라 실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학문의 분야는 철학, 심리학, 역사학, 국문학, 수학, 과학, 생물학, 의학, 화학, 예술, 음악, 수사학, 논리학, 천문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토목공학, 심지어 자동차공학, 미장학, 연극영화학 등 무수하게 열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자는 권학가에서 이렇게 많은 분야의 학문을 세세하게 다 섭렵하라고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주자는 적어도 학문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인생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되는가 하는 삶의 지혜를 깨닫도록 한 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분ㅋ야에 관련된 진리 탐구는 통상 학문들 중의 학문, 소위 철학哲學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철학哲學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우리의 시야에 ‘철학’이란 단어가 자주 들어오곤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도회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양 철학관’이나 ‘운명 철학관’이 그것이다.
문제는 철학이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학을 마치 ‘신비주의’적인 영역을 사고하는 것이거나 인생의 미래를 점치는 방법쯤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궈낼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은 철학이란 ‘난해’하고 ‘심오한’ 학문으로 간주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접하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어지럽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철학을 고차원적인 학문으로 생각하여 마치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나 탁월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반면에 철학을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자 개인적인 평범한 사고의 전유물로 취급하려는 사람도 허다하다. 즉 “철학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고유한 인생철학,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철학이 있는 거야”라고 운운하면서 철학을 마치 한 개인에게 의례히 있게 마련인 양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더욱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철학의 의미를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난상토론의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요컨대 어떤 이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학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 뜻이 명확하지도 않은 상징이나 애매모호한 말을 끌어들일 때 “야! 그 말은 참으로 철학적이다”라고 하여 철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이나 생각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철학을 그럴듯하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학은 과연 그렇게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접근하기에 그렇게도 난해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인생철학, 삶의 철학으로 취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또한 철학이란 말은 단순히 항간에 통용되고 있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아무 때나 적용해서 사용해도 되는 그런 뜻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철학을 그런 종류의 것으로 취급해버린다면 아마 본래적인 의미의 ‘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본다.
철학고의 대상은 무엇이고, 이 학문이 가지는 ‘본래적인 의미’는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소위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간혹 곤혹스러워할 수 있고, 때로는 무척 당황스러울 수 있는 과제로 부상하기도 한다. 이런 물음에 대한 보다 안전한 대답을 마련하는 길은 우선 ‘철학’이란 개념을 어원적으로 파헤쳐 그 의미를 간취看取해 보는 것이다.
‘철학’이란 말은 영어의 “Philosophy”를 번역한 것이다. Philosophy는 원래 그리스어의 Philosophia에서 유래된 것으로, “Philos”와 “Sophia”의 합성어이다. ‘Philos’는 통상 ‘사랑(愛)’ 내지는 ‘욕망慾望’으로, ‘Sophia’는 ‘지혜智慧’ 내지는 ‘지식知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Philo’는 원래 희랍어 동사 ‘phileō(사랑하다)’에서 ‘eō’를 빼고, 복합명사를 만들 때 쓰는 어간 ‘o’를 붙인 것이며, “Sophia”는 동사 ‘sophizō(지혜롭다)’에서 나온 형용사 ‘Sophos’에서 어미 ‘os’를 빼고 ‘ia’를 붙여 여성명사로 된 것이다. 이러한 두 단어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은 글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함’이며, ‘철학자’는 ‘지혜(지식)를 사랑하는 자’(愛知者)라고 불려진다.
사랑philos의 어원
철학을 ‘지혜 또는 지식을 사랑함’으로 말할 적에 ‘사랑Philo’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좀 더 소개해 보자. 사랑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사랑하다phileō’를 원초적으로 분석해 봄이 좋을 것이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고작 몇 번 정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입에 발린 듯이 사랑한다는 말을 던지며 산다. 이 말의 쓰임새는 수없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나는 너를 죽도록 사랑한다”, “나는 너보다 개를 더욱 사랑한다”, “나는 돈을 끔찍이 사랑한다”, “나는 예술 작품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나는 축구를 미치도록 사랑한다”, “나는 돈보다, 자식보다 명예를 더 사랑한다”, “나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한다” 등과 같이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다양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말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뜻은 원초적으로 ‘…하고 싶은 욕망慾望’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대상을 간직하거나 소유하고 ‘싶다’든가, 아끼거나 지켜주고 ‘싶다’든가, 아니면 대상과 하나가 되거나 대상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떤 무형적인 대상(일종의 정신적인 모든 것)이든 유형적인 대상(물질적인 모든 것)이든 어떤 것을 열광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은 대상을 소유하고 싶거나, 그 대상과 늘 하나가 되어 같이 있고 싶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 대상을 위해 생사를 초월하여 헌신하고 싶다는 일종의 ‘욕망’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원초적으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사람은 살아있는 한 사랑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태생적으로 ‘…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욕망은 아마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것, 휴식을 위해 잠을 자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 욕망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언가를 ‘욕망’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다. 이 말은 곧 사람은 사랑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라는 얘기다.
에로스Eros 신의 정체
그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욕망(사랑)을 갖고 살아야 하며, 그 대상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또한 사람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도 마구잡이식으로 욕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욕망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Platon(BCE 427~347)의 대화편 『잔치Symposium』에 나오는 ‘에로스Eros’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잔치』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잠깐 들여다보자. 옛날에 풍요를 상징하는 남신男神 폴로스Polos와 빈곤을 상징하는 여신 페니아Penia가 있었다. 남신 폴로스는 글자의 어원이 말해주듯이 부유함, 명예, 지혜, 아름다움, 좋음 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여신 페니아는 글자의 어원이 말해주듯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입을 옷이 없어 다 해진 옷을 입고 다녀야 했고, 편안하게 잠을 잘 집이 없어서 늘 어디에서 하루 밤을 지내야 할지를 걱정하며, 하루의 끼니를 때울 양식도 없어서 항상 빌어먹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항상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는 여신 페니아는 자나 깨나 늘 풍요의 신을, 즉 먹을 것에 있어서나 입을 것에 있어서나 아름다움에 있어서나 고귀함에 있어서나 소위 좋다는 것을 두루 풍부하게 갖춘 폴로스 신을 동경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생일에 신들이 초대되어 축하연이 베풀어졌는데, 여기에 풍요의 신 폴로스도 초대되었다. 많은 신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고, 풍요의 신 폴로스도 이 연회의 흥에 도취되어 신주神酒를 너무 지나치게 먹은 나머지 취해서 제우스Zeus 신전의 뜰에서 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바로 이때 음식을 구걸하러 왔던 빈곤의 신 페니아는 늘 동경해왔던 풍요의 신 폴리스가 술에 만취가 되어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회는 이때다 하고 얼른 그의 옆에 누워서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랑의 신 에로스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풍요의 신 폴로스와 빈곤의 신 페니아의 양극단 사이에서 태어난 신이다. 그런 까닭에 에로스 신은 어머니 페니아를 닮아서 가난하고 거칠며 저돌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폴로스를 닮아서 언제나 틈만 있으면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선한 것, 보다 지혜롭고 진리인 것 등,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욕망하거나 풍부하게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로스 신은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자도 아니며, 지혜로운 자도 무지한 자도 아닌 중간자이다.
에로스 신은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중간에 있지만 항상 완전성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만일 누군가에게 에로스 신이 들어와 에로스를 가지게 된다면, 그는 보다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 즉 빈곤한 것보다는 풍요로운 것을, 지혜롭지 못한 것보다는 지혜로운 것을,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을, 선하지 못한 것보다는 선한 것을, 불완전한 것보다는 완전한 것을 가지려고 욕망하고, 그런 것들을 동경하여 획득하려고 열광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만일 에로스 신이 들어오지 않아 에로스를 갖고 있지 않다면, 보다 풍요로운 것, 보다 좋은 것, 보다 지혜로운 것, 보다 아름다운 것 등을 동경하거나 추구하여 획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에로스는 충만充滿으로 돌아가려는 욕망(原始返本의 정신)
의식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보다 좋은 것을 알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소유하려고 욕망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이를 소유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아름답게 되려고 욕망한다는 얘기다. 갈증이 생기면 물을 먹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고, 배가 고프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이러한 욕망은 원초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니 이를 채움으로써 보다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데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더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망, 이것이 곧 사랑이라 볼 수 있다. 사랑은 근원적으로 가치價値 있는 것에 대한 욕망에서 출원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이 왜 이런 에로스를 원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느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적당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로 『잔치』에 나오는 다른 미토스mythos(설화說話)를 끌어들여 보자.
아주 옛날에 우주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식물 및 동물들이 살고 있었고, 신들이 이 우주를 다스리던 시기가 있었다. 동물들 중에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있었는데, 인간 종족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하나는 수컷과 수컷이 결합한 인간, 다른 하나는 수컷과 암컷이 결합한 인간, 또 다른 하나는 암컷과 암컷이 결합해 있는 인간이다. 이들 각각의 종족은 모두 탁월한 지혜를 갖고 있었고, 무엇이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충분한 능력뿐만 아니라 또한 동물들 중 제일 빠른 속도를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분야에서든 부족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충만한 존재로 살았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전지全知, 전능全能에 가까운 존재였다고나 할까?
이런 충만한 능력을 두루 갖춘 인간 종족은 누구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을까? 바로 인간들과 동물들을 다스리던 신들의 제왕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인간 종족이 혹시나 자신의 지위를 탐내어 모반을 일으킬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제우스는 번개의 칼로 서로 결합되어 있던 각각의 인간 종족을 반쪽으로 잘라냈다. 반쪽이 된 인간 종족은 충만充滿한 상태에서 불만不滿의 상태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후 반쪽이 된 인간 종족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은 잘려버린 나머지 반쪽과 만나기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욕망한 나머지 거의 빈사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잃어버린 자기의 반쪽을 만나기라도 하면 근원적인 본래의 상태, 즉 함께 결합해 있었던 옛날의 더없이 좋았던 충만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으므로 포만감에 젖게 됐으며,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이 미토스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반쪽으로 태어나는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본래의 자기 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늘 불만족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잃어버린 자기 짝을 만나 하나가 되어 본래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무언가를 항상 그리워하고 동경하면서 열광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궁극적으로 근원을 찾아 충분히 만족한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의지, 다른 말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정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에로스의 대상은 무엇일까
그런데 반쪽으로 태어난 인간의 본래 짝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일까 아니면 정신적인 어떤 것일까? 인간은 잃어버린 본래의 짝이 원초적으로 사람인지, 부유함인지, 명예인지, 아름다움인지, 지혜인지 전혀 모르고 태어난다. 그것은 반성적反省的 인지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인지능력이 발달하게 되고, 교육을 통해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가 함양된다. 인지능력과 반성적 사고는 곧 분별을 가져오게 되고, 분별력을 통해 선택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인간은 어느 것을 선택해야 자신에게 부족했던 면을 채워 본래의 좋은 상태, 보다 충만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요리조리 파악하게 된다.
원초적으로 부족한 반쪽을 채움으로써 본래의 충만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대상을 사람으로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을 끔찍이 사랑할 것이고, 명예로 알게 된다면 명예를 위해 헌신할 것이고, 물질적인 부유함으로 알게 된다면 끊임없이 돈을 추구할 것이고, 권력으로 알게 된다면 권력을 선택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동경하면서 그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대상을 얻기라도 한다면 사랑한 만큼의 충만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근거한다면, “나는 어떤 것보다 돈을 사랑한다.”, “나는 무엇보다 명예를 사랑한다.”, “나는 자식보다 개를 사랑한다.”, “나는 낙엽 타는 냄새를 사랑한다.” 는 말들이 난무하는 현상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든, 사람을 사랑하든, 개를 사랑하든, 돈을 사랑하든, 사람은 일순간이라도 그 무언가를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만족은 곧 삶의 존재 의미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원초적으로 영원히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주는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들일까? 이것들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대상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고대 최고의 철학자라 불리는 플라톤의 의중에 최고로 가치 있는 대상은 항존성恒存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진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리라.
원초적으로 충만한 존재는 항존성과 지속성을 동반한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될 수 있을 법하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 각자의 욕망에 따라 다양하게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다름 아닌 지혜智慧이다. 앞서 ‘지혜를 사랑함’이 철학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제 지혜란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구명해보는 것으로 나아가 보자. [아테나 사진]
일상을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그는 지혜가 없어 세상일에 대해 잘 대처해 갈지 의문이다.”, “그녀는 다방면에 대단한 지혜가 있어.”, “그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야.”, “넌 왜 그리 지혜롭지 못하냐?” 등과 같이 ‘지혜’란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종종 듣게 된다. 심지어 가시덤불 같은 세상살이에 너무 지쳐 선사先師를 찾아가 도道를 구한다거나 지혜를 구한다고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니는 구도자들도 있다.
‘지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일까? 이런 문제들이 던져지면 그리 간단하게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통념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고 있는 ‘지혜’란 말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혜’란 말이 가지는 본질적인 뜻을 보다 선명하게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에서 철학에서 말하는 지혜의 어원적인 의미부터 살펴보려 한다.
지혜(Sophia)의 어원적인 뜻
‘지혜’는 고대 그리스어의 동사 ‘지혜롭다(sophizō)’에서 ‘지혜로운(sophos)’이라는 형용사로 파생되었고, 이로부터 명사가 된 것이다.
‘지혜로운(sophos)’에서 어간은 ‘soph-’인데, 이는 근원적으로 직업에 관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혜로운(sophos)’은 원래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데에 있어 그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구두를 잘 만드는 사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말을 잘 타는 사람, 활을 잘 쏘는 사람 등, 각각의 직업에서 뛰어난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혜로운(sophos)’은 원래의 뜻이 점점 확장되어 물건을 실질적으로 다루는 데에 있어서 영리하거나 혹은 윤리적인 행동에 있어서도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 즉 일반적으로 자기가 맡은 분야에 있어서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을 가리키게 됐다. 요컨대 ‘지혜로운 사람’은 손재주이건 인위적인 것이건 구체적인 행위에 있어서 슬기로운 사람을 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 있어서 지혜롭게 행위를 하는 ‘행위’와 지식적인 것으로서의 ‘지혜로운’은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리스 사회에 고도의 문화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행위와 함께 쓰였던 ‘지혜로운’은 점점 추상화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때그때의 행위와 일치하지 않은 지식으로 진화하게 되자 점차 행위는 행위대로 지식적인 것은 지식적인 것대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 때 그리스인들은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지식적인 측면을 ‘지혜로운’으로 말하게 됐는데, 이는 사물을 탁월하게 혹은 훌륭하게 다룰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건축행위가 일어나는 장면을 연상하면 쉽게 구분이 될 것이다. 우리가 목조건물을 짓고자 할 때, 집을 훌륭하게 지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설계자와 공사장에서 실제로 집을 짓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전자의 사람은 훌륭한 집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그런 집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지만, 후자의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건축 설계에 따라서 집을 짓는 작업만을 수행할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것을 아주 훌륭하게 잘 해낼 줄 아는 능력으로서의 기술(technē)은 곧 ‘지혜’라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런데 탁월하거나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능력은 원래의 상태에서 머물지 않고 자꾸 진보하게 됐다. 즉 이러한 어떤 능력은 으뜸이 되는 능력도 있고, 중간에 오는 것도 있어서 항상 정도(degree)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서 지식이 곧 능력임을 추론해낼 수 있다. 요컨대 어떤 것을 잘할 줄 아는 능력이란 여러 가지의 대상들에 대한 앎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다양한 일들에 있어서 어떻게 처리하고 행위를 할 것인가에 대한 앎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탁월하게 처리할 지적능력을 가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지적으로 사물들을 훌륭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란 곧 지적인 앎을 뜻하므로, 지적 능력으로서의 지혜는 앎(지식)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는 탁월하게 아는 것
지혜는 앎(지식)과 실제로 같은 의미일까? 이 문제를 명쾌하게 구분 짓기 위해서는 ‘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밝혀져야 한다. 문제는 ‘앎(지식)’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인식론認識論(epistemology)에 관한 것으로, 철학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철학자들에게 줄곧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서 ‘안다’는 말의 사용법이 그리스 사회에서 다양한 의미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지혜에 관련된 것만을 설명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앎들이 있다. 그리스 시대만 하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앎들을 구분했다. 시각을 동원해 봐서 아는 감각적 지식(eidō : 이는 감각적 시각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나중에 외관을 봐서 아는 것인 에이도스eidos가 나온다), 관조적인 상태로부터 아는 명상적인 지식(thēoria), 사물들을 비교할 때 구분하여 아는 일반적인 지식(gignōskō),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진술을 통해 아는 역사적인 지식(historia), 사유하여 아는 정신적인 지식(noein), 마음의 상태를 아는 실천적 지식(phroneō)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앎들 외에 학문적인 문맥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앎도 있다, 이는 ‘알다(epistamai)’라는 동사에서 나온 인식(epistēmē)이다.
인식이란 앎도 원초적으로는 “농사를 지을 줄 안다.”, “집을 지을 줄 안다.”, “스키를 탈 줄 안다.”, “글을 쓸 줄 안다.” 등과 같이 기본적인 의미에서 출발했다. 인식이란 앎도 지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행위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하였지만, 나중에 행위적인 측면이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고 남아 있는 지식의 측면만이 인식으로 진화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분리된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혜와 인식은 같은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식(epistēmē)과 지혜(sophia)는 엄밀한 의미에서 같은 것이 아니다. 양자 간에는 근본적으로 극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탁월卓越함’이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다. 지혜는 탁월함의 의미를 포함하지만, 인식은 그런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즉 ‘탁월함’의 의미를 내장하는 지혜는 으뜸이 되는 지식이나 중간에 오는 지식도 있어서 지식의 정도(degree)를 허용하지만 인식은 정도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보다 더 큰 지혜’란 말을 쓸 수 있지만 ‘보다 더 큰 인식’이란 말을 쓸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지혜는 앎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게 아는 것, 즉 으뜸이 되는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
원리(archē)와 원인(aitia)에 대한 앎이 지혜
탁월하게 아는 지식이 지혜라면, 어떤 앎이 탁월성을 확보해 주는가? 서양의 학문을 일으켰던 그리스인들에게는 근원의 원리나 원인, 혹은 근원적인 법칙에 대한 앎이 탁월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근원의 원리나 원인, 법칙은 현상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었고, 또한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일어나게 될 것들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원의 원리나 원인, 법칙 등의 지식은 우리가 어떻게 획득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서 알든, 직업을 탐구하여 알든 앎을 통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앎에는 우선 그 대상이 주어져야 한다. 앎의 대상이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라면 그 앎은 소위 허구(fictum)가 된다. 지혜는 허구가 아닌 이상 실재(res)에 대한 것이며,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대상에서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은 실로 각 분야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철학 외에 여타의 다른 개별 학문들, 물리학, 생물학, 화학, 사회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천문학, 법학, 의학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제 학문에서 각기 수행하는 탐구 목적은 결국 궁극의 원리나 원인, 아니면 불변의 법칙을 찾아내어 아는 것일 게다.
물리학은 사물들에 대한 물리적 현상의 근원적인 존재 원리나 원인, 즉 인간이나 여타의 개별적인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의 요소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물로 구성되어 변화해 가는가의 원리나 원인을 찾아 지식체계를 구축한다. 생물학은 생명 현상의 근원적인 원리나 원인, 즉 인간이나 여타의 생명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요소가 무엇이고, 이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여 생명 현상을 이루어 각각의 종의 형태를 유지하는가의 원리나 원인을 찾아 지식체계를 정립한다. 사회학은 근원적으로 인간 및 동식물들의 사회적 관계법칙으로서의 원리나 원인을 탐구한다. 마찬가지로 잡다한 분야로 나누어진 개별적인 학문은 각기 독자적인 영역에서 그 원리나 원인을 찾아 체계적인 지식을 구축한 것이다.
문제는 개별적인 제 학문에서 탐구한 원리나 원인, 혹은 궁극의 법칙에 대한 앎을 탁월한 지식으로 지혜의 반열에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서 ‘지혜를 사랑함’을 철학으로 규정한다면, 개별적인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도 모두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라고 호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여명기라 불리는 서양 고대에 있어서 지혜를 탐구하는 철학은 모든 학문의 총칭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초기에 철학하는 사람은 마치 백과사전과 같이 모든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학문은 점점 고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각기 분야별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여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철학의 탐구영역이 개별적인 학문의 영역으로 분가되어 정작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존립 근거를 상실한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학자들은 서슴지 않고 철학의 무용론을 들먹이기까지 한다.
철학은 보편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학문
이쯤 되면 으뜸이 되는 지혜에 대한 탐구 영역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있다면 철학이 탐구하는 으뜸이 되는 지혜의 영역과 개별적인 학문에서 탐구하는 영역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으뜸이 되는 지혜는 가장 탁월한 것이니까 그 탐구 대상 또한 인간이 취급할 수 있는 한의 모든 것, 즉 전체적인 것을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분야의 부분보다는 전체적인 분야의 총체성이 더욱 탁월한 지식일 테니까. 그러니까 가장 탁월한 지식으로서의 지혜는 사물을 특수한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할 때, 물리학적 탐구는 사람을 구성하는 물리적 측면에서, 생물학은 살아있는 신체의 생명적인 측면에서, 심리학적 탐구는 사람의 정신의 측면에서, 윤리학적 탐구는 사람의 윤리적인 행위의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궁구窮究하여 각기 근원의 원리나 원인, 혹은 법칙을 알아내지만, 철학적 탐구는 여타의 다른 사물들과의 총체적인 연관 속에서 사람 자체, 즉 사람의 본성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이나 원리를 파악한다. 그런 까닭에 으뜸이 되는 지혜를 탐구하는 철학과 여타의 개별과학에서 추구하는 학문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서양철학의 출발이 되었던 전설적인 시대로 돌아가보자. 서양의 지적 전통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신화의 시대가 지나고 학문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학문의 시대로 전향되기 시작한 요람지는 그리스의 고대 도시였던 밀레토스Miletos이다. 이곳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탈레스Thales(BCE 640~546)가 출현하여 유럽문화의 바탕이 되는 철학과 학문이 탄생했던 것이다.
철학은 탐구의 출발부터 모든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근원적인 원인原因(aitia), 즉 세계의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질서와 조화를 주는 근원의 ‘원리原理(archē)’를 찾고자 한다. 물론 개별적인 학문도 대상의 내용에 따라 특수한 관점에서 근원적인 원리를 추구하지만, 그러나 으뜸이 되는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사물을 전체적이고도 총제적인 관점에서 탐구하여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지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 다음호 주제 : 2. 철학은 아무나 하나>
知天下之勢者(지천하지세자)는 有天下之生氣(유천하지생기)하고
暗天下之勢者(암천하지세자)는 有天下之死氣(유천하지사기)니라
천하대세를 아는 자에게는 천하의 살 기운(生氣)이 붙어 있고,
천하대세에 어두운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死氣)밖에 없느니라 (도전道典 2:137:3)
暗天下之勢者(암천하지세자)는 有天下之死氣(유천하지사기)니라
천하대세를 아는 자에게는 천하의 살 기운(生氣)이 붙어 있고,
천하대세에 어두운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死氣)밖에 없느니라 (도전道典 2:137:3)
1 철학哲學이라는 학문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已秋聲(계저오엽이추성)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렵나니
잠시 순간의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 봄날의 꿈을 깨지도 않았는데
돌층계 앞의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已秋聲(계저오엽이추성)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렵나니
잠시 순간의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 봄날의 꿈을 깨지도 않았는데
돌층계 앞의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이 글은 송대의 위대한 학자 주자朱子(1130~1200)의 ‘권학가’에 나오는 글의 일부분이다. 핵심 뜻은 우리가 배움을 이루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인간의 삶이란 너무도 짧아 순간의 시간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사진]
그래서일까? 오늘을 살고 있는 인간은 태어나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배움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 같다.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나아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몇십 년을 배움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배움은 끝이 없다. 어쩌면 인간은 배우기 위해 태어나서 배우다 생을 마감하는지도 모른다. 생은 곧 고달픈 배움의 길인 것이다.
배움의 길은 실로 다양하다. 그래서 배움을 통해 얻어낸 지식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더없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러한 지식을 전문성과 체계성을 갖추어 정리한 것이 소위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학문의 영역은 전문분야에 따라 실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학문의 분야는 철학, 심리학, 역사학, 국문학, 수학, 과학, 생물학, 의학, 화학, 예술, 음악, 수사학, 논리학, 천문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토목공학, 심지어 자동차공학, 미장학, 연극영화학 등 무수하게 열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자는 권학가에서 이렇게 많은 분야의 학문을 세세하게 다 섭렵하라고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주자는 적어도 학문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인생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되는가 하는 삶의 지혜를 깨닫도록 한 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분ㅋ야에 관련된 진리 탐구는 통상 학문들 중의 학문, 소위 철학哲學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철학哲學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우리의 시야에 ‘철학’이란 단어가 자주 들어오곤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도회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양 철학관’이나 ‘운명 철학관’이 그것이다.
문제는 철학이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학을 마치 ‘신비주의’적인 영역을 사고하는 것이거나 인생의 미래를 점치는 방법쯤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궈낼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은 철학이란 ‘난해’하고 ‘심오한’ 학문으로 간주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접하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어지럽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철학을 고차원적인 학문으로 생각하여 마치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나 탁월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반면에 철학을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자 개인적인 평범한 사고의 전유물로 취급하려는 사람도 허다하다. 즉 “철학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고유한 인생철학,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철학이 있는 거야”라고 운운하면서 철학을 마치 한 개인에게 의례히 있게 마련인 양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더욱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철학의 의미를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난상토론의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요컨대 어떤 이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학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 뜻이 명확하지도 않은 상징이나 애매모호한 말을 끌어들일 때 “야! 그 말은 참으로 철학적이다”라고 하여 철학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이나 생각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철학을 그럴듯하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학은 과연 그렇게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접근하기에 그렇게도 난해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인생철학, 삶의 철학으로 취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또한 철학이란 말은 단순히 항간에 통용되고 있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아무 때나 적용해서 사용해도 되는 그런 뜻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철학을 그런 종류의 것으로 취급해버린다면 아마 본래적인 의미의 ‘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본다.
철학고의 대상은 무엇이고, 이 학문이 가지는 ‘본래적인 의미’는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소위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간혹 곤혹스러워할 수 있고, 때로는 무척 당황스러울 수 있는 과제로 부상하기도 한다. 이런 물음에 대한 보다 안전한 대답을 마련하는 길은 우선 ‘철학’이란 개념을 어원적으로 파헤쳐 그 의미를 간취看取해 보는 것이다.
‘철학’이란 말은 영어의 “Philosophy”를 번역한 것이다. Philosophy는 원래 그리스어의 Philosophia에서 유래된 것으로, “Philos”와 “Sophia”의 합성어이다. ‘Philos’는 통상 ‘사랑(愛)’ 내지는 ‘욕망慾望’으로, ‘Sophia’는 ‘지혜智慧’ 내지는 ‘지식知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Philo’는 원래 희랍어 동사 ‘phileō(사랑하다)’에서 ‘eō’를 빼고, 복합명사를 만들 때 쓰는 어간 ‘o’를 붙인 것이며, “Sophia”는 동사 ‘sophizō(지혜롭다)’에서 나온 형용사 ‘Sophos’에서 어미 ‘os’를 빼고 ‘ia’를 붙여 여성명사로 된 것이다. 이러한 두 단어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은 글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함’이며, ‘철학자’는 ‘지혜(지식)를 사랑하는 자’(愛知者)라고 불려진다.
2 사랑philos이라는 의미
사랑philos의 어원
철학을 ‘지혜 또는 지식을 사랑함’으로 말할 적에 ‘사랑Philo’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좀 더 소개해 보자. 사랑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사랑하다phileō’를 원초적으로 분석해 봄이 좋을 것이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고작 몇 번 정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입에 발린 듯이 사랑한다는 말을 던지며 산다. 이 말의 쓰임새는 수없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나는 너를 죽도록 사랑한다”, “나는 너보다 개를 더욱 사랑한다”, “나는 돈을 끔찍이 사랑한다”, “나는 예술 작품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나는 축구를 미치도록 사랑한다”, “나는 돈보다, 자식보다 명예를 더 사랑한다”, “나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한다” 등과 같이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다양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말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일까?
‘사랑한다’는 뜻은 원초적으로 ‘…하고 싶은 욕망慾望’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대상을 간직하거나 소유하고 ‘싶다’든가, 아끼거나 지켜주고 ‘싶다’든가, 아니면 대상과 하나가 되거나 대상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떤 무형적인 대상(일종의 정신적인 모든 것)이든 유형적인 대상(물질적인 모든 것)이든 어떤 것을 열광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은 대상을 소유하고 싶거나, 그 대상과 늘 하나가 되어 같이 있고 싶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 대상을 위해 생사를 초월하여 헌신하고 싶다는 일종의 ‘욕망’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원초적으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사람은 살아있는 한 사랑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태생적으로 ‘…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욕망은 아마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것, 휴식을 위해 잠을 자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 욕망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언가를 ‘욕망’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다. 이 말은 곧 사람은 사랑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라는 얘기다.
에로스Eros 신의 정체
그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욕망(사랑)을 갖고 살아야 하며, 그 대상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또한 사람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도 마구잡이식으로 욕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욕망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Platon(BCE 427~347)의 대화편 『잔치Symposium』에 나오는 ‘에로스Eros’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잔치』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잠깐 들여다보자. 옛날에 풍요를 상징하는 남신男神 폴로스Polos와 빈곤을 상징하는 여신 페니아Penia가 있었다. 남신 폴로스는 글자의 어원이 말해주듯이 부유함, 명예, 지혜, 아름다움, 좋음 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여신 페니아는 글자의 어원이 말해주듯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입을 옷이 없어 다 해진 옷을 입고 다녀야 했고, 편안하게 잠을 잘 집이 없어서 늘 어디에서 하루 밤을 지내야 할지를 걱정하며, 하루의 끼니를 때울 양식도 없어서 항상 빌어먹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항상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는 여신 페니아는 자나 깨나 늘 풍요의 신을, 즉 먹을 것에 있어서나 입을 것에 있어서나 아름다움에 있어서나 고귀함에 있어서나 소위 좋다는 것을 두루 풍부하게 갖춘 폴로스 신을 동경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생일에 신들이 초대되어 축하연이 베풀어졌는데, 여기에 풍요의 신 폴로스도 초대되었다. 많은 신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고, 풍요의 신 폴로스도 이 연회의 흥에 도취되어 신주神酒를 너무 지나치게 먹은 나머지 취해서 제우스Zeus 신전의 뜰에서 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바로 이때 음식을 구걸하러 왔던 빈곤의 신 페니아는 늘 동경해왔던 풍요의 신 폴리스가 술에 만취가 되어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회는 이때다 하고 얼른 그의 옆에 누워서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랑의 신 에로스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풍요의 신 폴로스와 빈곤의 신 페니아의 양극단 사이에서 태어난 신이다. 그런 까닭에 에로스 신은 어머니 페니아를 닮아서 가난하고 거칠며 저돌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폴로스를 닮아서 언제나 틈만 있으면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선한 것, 보다 지혜롭고 진리인 것 등,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욕망하거나 풍부하게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로스 신은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자도 아니며, 지혜로운 자도 무지한 자도 아닌 중간자이다.
에로스 신은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중간에 있지만 항상 완전성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만일 누군가에게 에로스 신이 들어와 에로스를 가지게 된다면, 그는 보다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 즉 빈곤한 것보다는 풍요로운 것을, 지혜롭지 못한 것보다는 지혜로운 것을,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을, 선하지 못한 것보다는 선한 것을, 불완전한 것보다는 완전한 것을 가지려고 욕망하고, 그런 것들을 동경하여 획득하려고 열광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만일 에로스 신이 들어오지 않아 에로스를 갖고 있지 않다면, 보다 풍요로운 것, 보다 좋은 것, 보다 지혜로운 것, 보다 아름다운 것 등을 동경하거나 추구하여 획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에로스는 충만充滿으로 돌아가려는 욕망(原始返本의 정신)
의식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보다 좋은 것을 알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소유하려고 욕망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이를 소유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아름답게 되려고 욕망한다는 얘기다. 갈증이 생기면 물을 먹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고, 배가 고프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이러한 욕망은 원초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니 이를 채움으로써 보다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데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더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망, 이것이 곧 사랑이라 볼 수 있다. 사랑은 근원적으로 가치價値 있는 것에 대한 욕망에서 출원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이 왜 이런 에로스를 원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느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적당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로 『잔치』에 나오는 다른 미토스mythos(설화說話)를 끌어들여 보자.
아주 옛날에 우주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식물 및 동물들이 살고 있었고, 신들이 이 우주를 다스리던 시기가 있었다. 동물들 중에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있었는데, 인간 종족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하나는 수컷과 수컷이 결합한 인간, 다른 하나는 수컷과 암컷이 결합한 인간, 또 다른 하나는 암컷과 암컷이 결합해 있는 인간이다. 이들 각각의 종족은 모두 탁월한 지혜를 갖고 있었고, 무엇이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충분한 능력뿐만 아니라 또한 동물들 중 제일 빠른 속도를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분야에서든 부족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충만한 존재로 살았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전지全知, 전능全能에 가까운 존재였다고나 할까?
이런 충만한 능력을 두루 갖춘 인간 종족은 누구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을까? 바로 인간들과 동물들을 다스리던 신들의 제왕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인간 종족이 혹시나 자신의 지위를 탐내어 모반을 일으킬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제우스는 번개의 칼로 서로 결합되어 있던 각각의 인간 종족을 반쪽으로 잘라냈다. 반쪽이 된 인간 종족은 충만充滿한 상태에서 불만不滿의 상태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후 반쪽이 된 인간 종족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은 잘려버린 나머지 반쪽과 만나기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욕망한 나머지 거의 빈사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잃어버린 자기의 반쪽을 만나기라도 하면 근원적인 본래의 상태, 즉 함께 결합해 있었던 옛날의 더없이 좋았던 충만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으므로 포만감에 젖게 됐으며,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이 미토스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반쪽으로 태어나는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본래의 자기 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늘 불만족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잃어버린 자기 짝을 만나 하나가 되어 본래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무언가를 항상 그리워하고 동경하면서 열광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궁극적으로 근원을 찾아 충분히 만족한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의지, 다른 말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정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에로스의 대상은 무엇일까
그런데 반쪽으로 태어난 인간의 본래 짝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일까 아니면 정신적인 어떤 것일까? 인간은 잃어버린 본래의 짝이 원초적으로 사람인지, 부유함인지, 명예인지, 아름다움인지, 지혜인지 전혀 모르고 태어난다. 그것은 반성적反省的 인지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인지능력이 발달하게 되고, 교육을 통해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가 함양된다. 인지능력과 반성적 사고는 곧 분별을 가져오게 되고, 분별력을 통해 선택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인간은 어느 것을 선택해야 자신에게 부족했던 면을 채워 본래의 좋은 상태, 보다 충만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요리조리 파악하게 된다.
원초적으로 부족한 반쪽을 채움으로써 본래의 충만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대상을 사람으로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을 끔찍이 사랑할 것이고, 명예로 알게 된다면 명예를 위해 헌신할 것이고, 물질적인 부유함으로 알게 된다면 끊임없이 돈을 추구할 것이고, 권력으로 알게 된다면 권력을 선택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동경하면서 그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대상을 얻기라도 한다면 사랑한 만큼의 충만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근거한다면, “나는 어떤 것보다 돈을 사랑한다.”, “나는 무엇보다 명예를 사랑한다.”, “나는 자식보다 개를 사랑한다.”, “나는 낙엽 타는 냄새를 사랑한다.” 는 말들이 난무하는 현상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든, 사람을 사랑하든, 개를 사랑하든, 돈을 사랑하든, 사람은 일순간이라도 그 무언가를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만족은 곧 삶의 존재 의미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원초적으로 영원히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주는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들일까? 이것들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대상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고대 최고의 철학자라 불리는 플라톤의 의중에 최고로 가치 있는 대상은 항존성恒存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진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리라.
원초적으로 충만한 존재는 항존성과 지속성을 동반한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될 수 있을 법하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 각자의 욕망에 따라 다양하게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다름 아닌 지혜智慧이다. 앞서 ‘지혜를 사랑함’이 철학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제 지혜란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구명해보는 것으로 나아가 보자. [아테나 사진]
3 무엇이 지혜sophia인가
일상을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그는 지혜가 없어 세상일에 대해 잘 대처해 갈지 의문이다.”, “그녀는 다방면에 대단한 지혜가 있어.”, “그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야.”, “넌 왜 그리 지혜롭지 못하냐?” 등과 같이 ‘지혜’란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종종 듣게 된다. 심지어 가시덤불 같은 세상살이에 너무 지쳐 선사先師를 찾아가 도道를 구한다거나 지혜를 구한다고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니는 구도자들도 있다.
‘지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일까? 이런 문제들이 던져지면 그리 간단하게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통념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고 있는 ‘지혜’란 말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혜’란 말이 가지는 본질적인 뜻을 보다 선명하게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에서 철학에서 말하는 지혜의 어원적인 의미부터 살펴보려 한다.
지혜(Sophia)의 어원적인 뜻
‘지혜’는 고대 그리스어의 동사 ‘지혜롭다(sophizō)’에서 ‘지혜로운(sophos)’이라는 형용사로 파생되었고, 이로부터 명사가 된 것이다.
‘지혜로운(sophos)’에서 어간은 ‘soph-’인데, 이는 근원적으로 직업에 관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혜로운(sophos)’은 원래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데에 있어 그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구두를 잘 만드는 사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말을 잘 타는 사람, 활을 잘 쏘는 사람 등, 각각의 직업에서 뛰어난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혜로운(sophos)’은 원래의 뜻이 점점 확장되어 물건을 실질적으로 다루는 데에 있어서 영리하거나 혹은 윤리적인 행동에 있어서도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 즉 일반적으로 자기가 맡은 분야에 있어서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을 가리키게 됐다. 요컨대 ‘지혜로운 사람’은 손재주이건 인위적인 것이건 구체적인 행위에 있어서 슬기로운 사람을 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혜로운 사람’에게 있어서 지혜롭게 행위를 하는 ‘행위’와 지식적인 것으로서의 ‘지혜로운’은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리스 사회에 고도의 문화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행위와 함께 쓰였던 ‘지혜로운’은 점점 추상화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때그때의 행위와 일치하지 않은 지식으로 진화하게 되자 점차 행위는 행위대로 지식적인 것은 지식적인 것대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 때 그리스인들은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지식적인 측면을 ‘지혜로운’으로 말하게 됐는데, 이는 사물을 탁월하게 혹은 훌륭하게 다룰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건축행위가 일어나는 장면을 연상하면 쉽게 구분이 될 것이다. 우리가 목조건물을 짓고자 할 때, 집을 훌륭하게 지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설계자와 공사장에서 실제로 집을 짓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전자의 사람은 훌륭한 집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그런 집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지만, 후자의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건축 설계에 따라서 집을 짓는 작업만을 수행할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것을 아주 훌륭하게 잘 해낼 줄 아는 능력으로서의 기술(technē)은 곧 ‘지혜’라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런데 탁월하거나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능력은 원래의 상태에서 머물지 않고 자꾸 진보하게 됐다. 즉 이러한 어떤 능력은 으뜸이 되는 능력도 있고, 중간에 오는 것도 있어서 항상 정도(degree)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서 지식이 곧 능력임을 추론해낼 수 있다. 요컨대 어떤 것을 잘할 줄 아는 능력이란 여러 가지의 대상들에 대한 앎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다양한 일들에 있어서 어떻게 처리하고 행위를 할 것인가에 대한 앎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탁월하게 처리할 지적능력을 가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지적으로 사물들을 훌륭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란 곧 지적인 앎을 뜻하므로, 지적 능력으로서의 지혜는 앎(지식)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는 탁월하게 아는 것
지혜는 앎(지식)과 실제로 같은 의미일까? 이 문제를 명쾌하게 구분 짓기 위해서는 ‘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밝혀져야 한다. 문제는 ‘앎(지식)’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인식론認識論(epistemology)에 관한 것으로, 철학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철학자들에게 줄곧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서 ‘안다’는 말의 사용법이 그리스 사회에서 다양한 의미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지혜에 관련된 것만을 설명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앎들이 있다. 그리스 시대만 하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앎들을 구분했다. 시각을 동원해 봐서 아는 감각적 지식(eidō : 이는 감각적 시각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나중에 외관을 봐서 아는 것인 에이도스eidos가 나온다), 관조적인 상태로부터 아는 명상적인 지식(thēoria), 사물들을 비교할 때 구분하여 아는 일반적인 지식(gignōskō),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진술을 통해 아는 역사적인 지식(historia), 사유하여 아는 정신적인 지식(noein), 마음의 상태를 아는 실천적 지식(phroneō)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앎들 외에 학문적인 문맥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앎도 있다, 이는 ‘알다(epistamai)’라는 동사에서 나온 인식(epistēmē)이다.
인식이란 앎도 원초적으로는 “농사를 지을 줄 안다.”, “집을 지을 줄 안다.”, “스키를 탈 줄 안다.”, “글을 쓸 줄 안다.” 등과 같이 기본적인 의미에서 출발했다. 인식이란 앎도 지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행위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하였지만, 나중에 행위적인 측면이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고 남아 있는 지식의 측면만이 인식으로 진화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분리된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혜와 인식은 같은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식(epistēmē)과 지혜(sophia)는 엄밀한 의미에서 같은 것이 아니다. 양자 간에는 근본적으로 극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탁월卓越함’이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다. 지혜는 탁월함의 의미를 포함하지만, 인식은 그런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즉 ‘탁월함’의 의미를 내장하는 지혜는 으뜸이 되는 지식이나 중간에 오는 지식도 있어서 지식의 정도(degree)를 허용하지만 인식은 정도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보다 더 큰 지혜’란 말을 쓸 수 있지만 ‘보다 더 큰 인식’이란 말을 쓸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지혜는 앎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게 아는 것, 즉 으뜸이 되는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
원리(archē)와 원인(aitia)에 대한 앎이 지혜
탁월하게 아는 지식이 지혜라면, 어떤 앎이 탁월성을 확보해 주는가? 서양의 학문을 일으켰던 그리스인들에게는 근원의 원리나 원인, 혹은 근원적인 법칙에 대한 앎이 탁월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근원의 원리나 원인, 법칙은 현상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었고, 또한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일어나게 될 것들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원의 원리나 원인, 법칙 등의 지식은 우리가 어떻게 획득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서 알든, 직업을 탐구하여 알든 앎을 통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앎에는 우선 그 대상이 주어져야 한다. 앎의 대상이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라면 그 앎은 소위 허구(fictum)가 된다. 지혜는 허구가 아닌 이상 실재(res)에 대한 것이며,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대상에서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은 실로 각 분야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철학 외에 여타의 다른 개별 학문들, 물리학, 생물학, 화학, 사회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천문학, 법학, 의학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제 학문에서 각기 수행하는 탐구 목적은 결국 궁극의 원리나 원인, 아니면 불변의 법칙을 찾아내어 아는 것일 게다.
물리학은 사물들에 대한 물리적 현상의 근원적인 존재 원리나 원인, 즉 인간이나 여타의 개별적인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의 요소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물로 구성되어 변화해 가는가의 원리나 원인을 찾아 지식체계를 구축한다. 생물학은 생명 현상의 근원적인 원리나 원인, 즉 인간이나 여타의 생명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요소가 무엇이고, 이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여 생명 현상을 이루어 각각의 종의 형태를 유지하는가의 원리나 원인을 찾아 지식체계를 정립한다. 사회학은 근원적으로 인간 및 동식물들의 사회적 관계법칙으로서의 원리나 원인을 탐구한다. 마찬가지로 잡다한 분야로 나누어진 개별적인 학문은 각기 독자적인 영역에서 그 원리나 원인을 찾아 체계적인 지식을 구축한 것이다.
문제는 개별적인 제 학문에서 탐구한 원리나 원인, 혹은 궁극의 법칙에 대한 앎을 탁월한 지식으로 지혜의 반열에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서 ‘지혜를 사랑함’을 철학으로 규정한다면, 개별적인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도 모두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라고 호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여명기라 불리는 서양 고대에 있어서 지혜를 탐구하는 철학은 모든 학문의 총칭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초기에 철학하는 사람은 마치 백과사전과 같이 모든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학문은 점점 고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각기 분야별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여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철학의 탐구영역이 개별적인 학문의 영역으로 분가되어 정작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존립 근거를 상실한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학자들은 서슴지 않고 철학의 무용론을 들먹이기까지 한다.
철학은 보편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학문
이쯤 되면 으뜸이 되는 지혜에 대한 탐구 영역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있다면 철학이 탐구하는 으뜸이 되는 지혜의 영역과 개별적인 학문에서 탐구하는 영역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으뜸이 되는 지혜는 가장 탁월한 것이니까 그 탐구 대상 또한 인간이 취급할 수 있는 한의 모든 것, 즉 전체적인 것을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분야의 부분보다는 전체적인 분야의 총체성이 더욱 탁월한 지식일 테니까. 그러니까 가장 탁월한 지식으로서의 지혜는 사물을 특수한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할 때, 물리학적 탐구는 사람을 구성하는 물리적 측면에서, 생물학은 살아있는 신체의 생명적인 측면에서, 심리학적 탐구는 사람의 정신의 측면에서, 윤리학적 탐구는 사람의 윤리적인 행위의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궁구窮究하여 각기 근원의 원리나 원인, 혹은 법칙을 알아내지만, 철학적 탐구는 여타의 다른 사물들과의 총체적인 연관 속에서 사람 자체, 즉 사람의 본성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이나 원리를 파악한다. 그런 까닭에 으뜸이 되는 지혜를 탐구하는 철학과 여타의 개별과학에서 추구하는 학문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서양철학의 출발이 되었던 전설적인 시대로 돌아가보자. 서양의 지적 전통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신화의 시대가 지나고 학문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학문의 시대로 전향되기 시작한 요람지는 그리스의 고대 도시였던 밀레토스Miletos이다. 이곳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탈레스Thales(BCE 640~546)가 출현하여 유럽문화의 바탕이 되는 철학과 학문이 탄생했던 것이다.
철학은 탐구의 출발부터 모든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근원적인 원인原因(aitia), 즉 세계의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질서와 조화를 주는 근원의 ‘원리原理(archē)’를 찾고자 한다. 물론 개별적인 학문도 대상의 내용에 따라 특수한 관점에서 근원적인 원리를 추구하지만, 그러나 으뜸이 되는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사물을 전체적이고도 총제적인 관점에서 탐구하여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지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 다음호 주제 : 2. 철학은 아무나 하나>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