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의 자기계발] - 매헌 윤봉길, 도산 안창호

[칼럼]

나라를 구한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프로필
독립운동가. 본명은 우의禹儀. 아호는 매헌梅軒. 청년 시절 농촌 계몽운동에 힘쓰다 국외 독립운동 소식과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고, 1930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여러 활동을 거치고 나서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김구金九의 명령을 받고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개최하는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의 군부와 관부 주요 인사 여럿을 사상시켰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사형을 당하였다. 이 거사는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로부터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출생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
사망 1942년 12월 19일
경력 한인애국단원, 훙커우 공원 투탄 의거
본관 파평坡平(지금의 경기도 파주)


윤봉길 의사 명언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는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靑島(칭다오)에서의 서신

윤봉길 의사 유언


청년제군靑年諸君에게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걸대나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서색曙色은 점점 밝아오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끓은 청년제군들이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며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윤봉길 의사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보낸 유언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 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한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요.”
-1932년 12월 19일 유언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 도산 안창호



프로필


한말韓末에 애국계몽 활동을 했으며, 이후 도덕적 실력양성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 1907년 신민회新民會,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해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후 상하이로 떠나 프랑스 조계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소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으며, 1926년 2월 상하이로 돌아와서 남북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윤봉길의 폭탄투척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죽었다.
출생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망 1938년 3월 10일
활동분야 정치, 사회, 교육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자


도산 안창호의 명언


*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될 공부를 하지 않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자기의 몸과 집을 자신이 다스리지 않으면 대신 다스려 줄 사람이 없듯이 자기의 국가와 자기의 민족을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요, 주인 관념이다.
정직과 성실만이 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은 사랑으로써 해야 할 것입니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꿈속에서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뼈저리게 뉘우쳐라.

*진정한 애국심은 그 말보다 실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질서와 환경(청결)은 문명인의 자격이다.
책임 있는 곳에 주인이 있다.

*청년이 다짐해야 할 2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속이지 말자.
둘째 놀지 말자.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청년은 스스로 생각할 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여라.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공은 우리에게, 책임은 내게로 돌려라.
우리라는 말이 심히 좋은 말이거니와, 이 말을 책임진다거나 책임 회피에 이용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오.
책임에 대해서는 내 것이라 하고, 영광에 관해서는 우리 것이라 하는 것이 도덕에 맞는 언행이오.
공은 우리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내게로 돌려야 하오.

*모든 일은 참되고 실속이 있도록 애써 실행하라.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얼굴을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보고 옆에서 엿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