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칼럼 | 비움과 채움의 道
[칼럼]
이강옥 / 서울영등포도장
최근 주부들과의 대화에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녀들에게 수영, 태권도, 영어는 물론 심지어 국어, 수학까지도 과외를 받게 한다는 것이다. 가정에 한 명 내지는 두 명 밖에 안 되는 자녀들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옮겨 다니다 보니 부모나 애들이나 늘 바쁘고 피곤하다. 자연을 벗하며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몸의 문화를 배우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대학에 입학하는 20대까지 이어진다. 온갖 종류의 이른바 스팩을 쌓느라 바쁘다. 요즘 애들이 타자와의 관계성이 약화되고 자신밖에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단지 교육현실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 가치의 문제요, 삶의 본질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현세 인류는 역사상 어느 때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양적 팽창의 환경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70억이라는 엄청난 수의 인류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다. 인류 최초의 국가를 환국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1만년이다. 장구한 1만년에서 현대의 1백년은 불과 1%에 지나지 않는다. 즉 지금 살고 있는 세대는 과거 99%의 인류 삶과는 질과 양에서 전혀 다른 시대환경에 놓여있는 셈이다. 인구는 계속 넘쳐나고 기회는 한정된다. 좋으나 싫으나 남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의 그 어떤 시대도 지금처럼 내면적, 정신 문화적 가치가 평가절하되어 후순위로 밀린 경우는 없었다. 물질적으로는 가장 풍부한 이 시대가 오히려 과거에 비해 자살률이 현저히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만의 빈 공간이 없음으로 인해 자아발견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고, 단순히 타자他者와의 비교만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이렇게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생명훼손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요즘엔 종교인들이 포교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진리(道)가 들어갈 빈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로 끊임없이 채울려고 하고 채우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낀다.
물질과 정신이 균형된 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이는 천지자연의 본성이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현실적 선택의 문제로 보면 ‘채움’과 ‘비움’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다. 끊임없는 ‘채움’만을 요구하는 현시대의 삶에서 ‘비움’은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가치이다. 문명은 작위作爲의 ‘채움’이요, 자연은 조화造化의 ‘비움’이다. 물질은 에너지의 ‘채움’이요, 정신은 유형적 틀의 ‘비움’이며 경계의 ‘확장’이다. ‘채움’은 인위人爲요, ‘비움’은 무위無爲라고도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정신문명은 동양에서, 물질문명은 서양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그 배경 중 하나가 ‘비움’에 대한 인식 차이다. 서양에는 비움에 대한 사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무無를 삶의 한 축으로 노래한 노자적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존재의 확실성에 대한 의문과 물질의 해부학적 탐구에 대한 전공은 서양이 한다. 반면 동양은 존재의 근원을 찾고 물질세계를 초월한 종교적 의문과 깨달음을 전공으로 한다. 그림이나 사진을 봐도 동서양 차이는 분명하다. 서양사람들의 작품은 인물 등의 피사체被寫體에 집중되어 있고, 동양은 배경과 드넓은 여백餘白을 중시한다.
인간으로 오시어 5만년 후천세상의 틀을 짜 놓으신 우주주재자이신 증산상제님께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비움의 도를 잘 느낄 수 있는 말씀이다. 비워야 물건이든 도든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움은 단순히 텅 빔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채움으로 가는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우주운동의 본질도 결국 채움과 비움의 연속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봄여름의 과정동안 꾸준히 채워가고, 가을에 열매를 맺은 뒤 비워가는 과정이 그것인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보면 채움과 비움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봄에 해당하는 지지地支인 인寅은 채움 활동을 시작할 때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가을의 신申의 영향을 받아 비움을 미리 준비한다. 다시 말해 서로 극克하는 성질을 지닌 상대방에 의해 견제를 받으면서 균형 잡힌 우주운동을 하게 된다.
사회와 개인이 모두 ‘채움과 비움’의 묘리를 얻게 되면, 사회적 공론인 ‘소유와 나눔’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많이 가진 자가 내놔야 한다는 식의 비현실적 주장이 아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나눔과 비움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움과 채움의 대상이 단지 ‘물질’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운영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채우려고 한다면 누군가는 비워야 한다. 서로 채우려고만 할 때는 갈등과 다툼이 생긴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채움과 비움을 잘 조율하고 균형을 잡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른바 튀는 사람,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구성원들만을 중시하고, 그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뒤에서 움직였던 구성원들을 박대한다면 그 조직은 반드시 역풍을 맞는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소우주인 ‘내’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배경에는 수많은 ‘비움’들의 도움이 작용하고 있다. 몸짱을 만든다거나 성형을 한다거나 하는 외형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함부로 몸을 굴린다거나, 내면의 정신 성숙을 방치한다든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현재의 가족이 소중한 것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돌아가신 조상들 역시 똑같이 소중한 분들이다. 나와 함께 공존하고 나의 삶과 교류하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비움’의 소중함을 느끼고 체험하는 삶이 되면 이 사회는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대우주의 운행 목적과 존재의 본질을 깨우칠 수 있는 초석 또한 마련될 것이다.
최근 주부들과의 대화에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녀들에게 수영, 태권도, 영어는 물론 심지어 국어, 수학까지도 과외를 받게 한다는 것이다. 가정에 한 명 내지는 두 명 밖에 안 되는 자녀들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옮겨 다니다 보니 부모나 애들이나 늘 바쁘고 피곤하다. 자연을 벗하며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몸의 문화를 배우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대학에 입학하는 20대까지 이어진다. 온갖 종류의 이른바 스팩을 쌓느라 바쁘다. 요즘 애들이 타자와의 관계성이 약화되고 자신밖에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단지 교육현실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 가치의 문제요, 삶의 본질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현세 인류는 역사상 어느 때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양적 팽창의 환경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70억이라는 엄청난 수의 인류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다. 인류 최초의 국가를 환국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1만년이다. 장구한 1만년에서 현대의 1백년은 불과 1%에 지나지 않는다. 즉 지금 살고 있는 세대는 과거 99%의 인류 삶과는 질과 양에서 전혀 다른 시대환경에 놓여있는 셈이다. 인구는 계속 넘쳐나고 기회는 한정된다. 좋으나 싫으나 남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의 그 어떤 시대도 지금처럼 내면적, 정신 문화적 가치가 평가절하되어 후순위로 밀린 경우는 없었다. 물질적으로는 가장 풍부한 이 시대가 오히려 과거에 비해 자살률이 현저히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만의 빈 공간이 없음으로 인해 자아발견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고, 단순히 타자他者와의 비교만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이렇게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생명훼손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요즘엔 종교인들이 포교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진리(道)가 들어갈 빈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로 끊임없이 채울려고 하고 채우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낀다.
물질과 정신이 균형된 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이는 천지자연의 본성이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현실적 선택의 문제로 보면 ‘채움’과 ‘비움’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다. 끊임없는 ‘채움’만을 요구하는 현시대의 삶에서 ‘비움’은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가치이다. 문명은 작위作爲의 ‘채움’이요, 자연은 조화造化의 ‘비움’이다. 물질은 에너지의 ‘채움’이요, 정신은 유형적 틀의 ‘비움’이며 경계의 ‘확장’이다. ‘채움’은 인위人爲요, ‘비움’은 무위無爲라고도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정신문명은 동양에서, 물질문명은 서양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그 배경 중 하나가 ‘비움’에 대한 인식 차이다. 서양에는 비움에 대한 사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무無를 삶의 한 축으로 노래한 노자적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존재의 확실성에 대한 의문과 물질의 해부학적 탐구에 대한 전공은 서양이 한다. 반면 동양은 존재의 근원을 찾고 물질세계를 초월한 종교적 의문과 깨달음을 전공으로 한다. 그림이나 사진을 봐도 동서양 차이는 분명하다. 서양사람들의 작품은 인물 등의 피사체被寫體에 집중되어 있고, 동양은 배경과 드넓은 여백餘白을 중시한다.
인간으로 오시어 5만년 후천세상의 틀을 짜 놓으신 우주주재자이신 증산상제님께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기허즉수물器虛則受物이요 심허즉수도心虛則受道니라” (도전 2:142)
비움의 도를 잘 느낄 수 있는 말씀이다. 비워야 물건이든 도든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움은 단순히 텅 빔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채움으로 가는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우주운동의 본질도 결국 채움과 비움의 연속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봄여름의 과정동안 꾸준히 채워가고, 가을에 열매를 맺은 뒤 비워가는 과정이 그것인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보면 채움과 비움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봄에 해당하는 지지地支인 인寅은 채움 활동을 시작할 때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가을의 신申의 영향을 받아 비움을 미리 준비한다. 다시 말해 서로 극克하는 성질을 지닌 상대방에 의해 견제를 받으면서 균형 잡힌 우주운동을 하게 된다.
사회와 개인이 모두 ‘채움과 비움’의 묘리를 얻게 되면, 사회적 공론인 ‘소유와 나눔’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많이 가진 자가 내놔야 한다는 식의 비현실적 주장이 아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나눔과 비움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움과 채움의 대상이 단지 ‘물질’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운영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채우려고 한다면 누군가는 비워야 한다. 서로 채우려고만 할 때는 갈등과 다툼이 생긴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채움과 비움을 잘 조율하고 균형을 잡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른바 튀는 사람,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구성원들만을 중시하고, 그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뒤에서 움직였던 구성원들을 박대한다면 그 조직은 반드시 역풍을 맞는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소우주인 ‘내’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배경에는 수많은 ‘비움’들의 도움이 작용하고 있다. 몸짱을 만든다거나 성형을 한다거나 하는 외형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함부로 몸을 굴린다거나, 내면의 정신 성숙을 방치한다든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현재의 가족이 소중한 것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돌아가신 조상들 역시 똑같이 소중한 분들이다. 나와 함께 공존하고 나의 삶과 교류하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비움’의 소중함을 느끼고 체험하는 삶이 되면 이 사회는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대우주의 운행 목적과 존재의 본질을 깨우칠 수 있는 초석 또한 마련될 것이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