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Norway
[세계지역문화탐방]
노르웨이는 세계지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이곳은 바이킹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고, 얼마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눈부신 설경과 스키의 나라, 자연이 준 마법 백야白夜와 피오르드fjord를 관광산업으로 하는 나라 등 노르웨이를 묘사하는 수사는 많다. 국기에 나타나 있는 자유·평등·박애 이념을 바탕으로 바이킹의 후손답게 해운, 해양, 수산업의 강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노르웨이를 찾아가 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노르웨이는 공식 명칭이 노르웨이 왕국(The Kingdom of Norway)으로,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서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국토는 북위 57도에서 72도에 걸쳐 남북으로 약 1,750㎞ 길게 늘어지고 동경 4도에서 32도에 걸쳐 동서로 좁은 형태의 모습이다. 그 면적은 약 39만㎢로, 한반도의 약 1.7배, 대한민국의 약 4배이다.노르웨이 땅은 250만 년 전부터 여러 번 빙하로 뒤덮였고, 지금도 약 1,700여 개의 빙하가 있다. 국토의 72%는 빙하의 침식을 받은 평탄한 꼭대기를 지닌 산지이다. 특징적인 것은 서쪽에 섬이 많다는 것인데,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2,000여 개의 섬을 포함하여, 노르웨이에는 섬이 약 15만 개나 있다. 그러다보니 해안선이 매우 길며, 거대한 피오르드fjord(협만峽灣: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 지형이 발달하였다.
인접국을 보면 동부로는 나라의 대부분이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부 지역은 남으로는 핀란드, 동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부의 스카게라크 해협 건너편에는 덴마크가 있다. 또 남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해, 북해가 위치해 있다.
노르웨이의 산계山系는 영국 제도를 형성하는 칼레도니아Caledonia계의 연장으로, 최고봉인 갈트회피겐(2,470m)이 남쪽에 있다. 글로마Glåma 강(599km)이 가장 주요한 강이며 뫼사 호가 가장 큰 호수(368㎢)이다. 노르웨이는 알래스카와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기후가 더 따뜻하다. 그것은 멕시코 만류 덕분이다. 이 만류가 협만의 동결을 막아준다. 우리나라와 같이 4계절이 나타나지만 겨울이 가장 길고 여름은 짧지만 덥다. 7월 평균 기온은 남쪽의 17℃로부터 북쪽의 10℃까지 변화한다. 또한 1월 평균 기온은 남동 해안의 영하 2℃로부터 내륙 골짜기의 영하 10℃까지 기온차가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동쪽의 750㎜ 이하로부터 서쪽의 약 2,052㎜까지 큰 차이가 있다. 빈번한 돌풍이 발생하며 날씨 변화가 심하다. 북부 노르웨이는 백야白夜의 지방이다. 5월 중순부터 7월말까지 한여름에는 시계가 한밤중인 0시를 가리켜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계속된다. 반대로 11월말부터 1월말까지는 해가 지평선 위로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 중 서너 시간만 해를 볼 수 있는 긴 밤이 지속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조화이다.
노르웨이의 역사
노르게 왕국의 시작, 9세기 하랄드 1세노르웨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말기인 BCE 90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노르웨이인의 조상은 바이킹Viking계 민족인 노르드인Norsemen이다. 노르웨이Norway라는 국명도 고대 노르드어로 ‘북쪽의 길(Norðvegr)’을 의미한다. 그들은 8세기 말까지 남부에서 여러 개의 작은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각 부족 국가는 일단의 무사들을 이끄는 족장이 지배했다. 이러한 분열된 공동체가 하나로 통일된 것은 9세기 후반이다. 885년경 하랄드 1세Harald Fair Hair가 처음으로 노르웨이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하였다. 노르게Norge 왕국, 즉 노르웨이Norway 왕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통일국가의 완성은 이루지 못한 채 끊임없는 내란과 덴마크의 침략 등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고, 노르드인들은 강력한 해양 전사인 바이킹으로서 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9세기부터 노르드인은 해외로 진출하였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반세기에 걸친 노르드인의 지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바이킹의 해외 활동은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0세기 이후 노르웨이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지속되었으나, ‘해상의 왕’으로 유명했던 올라프 1세Olav Ⅰ Tryggvesson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기독교 전파에 노력하였다. 노르웨이의 재통일과 기독교로의 개종은 올라프 하랄드손Olav Haraldsson(재위 1016~1028년)을 기점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빠져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많은 노르웨이인들을 개종시켰다. 역사에서는 서기 1000년을 노르웨이에 기독교가 전래된 기점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로의 개종과정에서 올라프 하랄드손은 많은 적을 만들게 되고 1028년 덴마크의 카누테 왕King Canute과 결탁한 노르웨이 귀족들에 의해 축출되었다가 1030년 왕권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스베레 왕가 시대(1184-1319)
1130년부터 50년간 왕권을 둘러싼 귀족들 간의 내란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1184년 스베레 시구르드손Sverre Sigurdsson이 강력한 통일 국가를 완성하였다. 1184부터 1319년까지는 스베레 왕가 시대인데, 이 때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등으로 노르웨이의 영토를 확장하고 왕위를 장자가 상속하게 하는 등 국력이 신장되고 제도가 크게 정비되었다. 1217년 호콘 4세Håkon Ⅳ Håkonsson den Gamle가 즉위하여 내란을 점차 평정하고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1217~1263년에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배하여 노르웨이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권 대립 항쟁이 그치지 않아 왕권이 쇠퇴해갔다.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연합(1397-1523)
1397년에는 스칸디나비아 3국인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이 칼마르 연합Union of Kalmar을 맺었다. 그것은 덴마크 왕이 다른 두 나라 왕을 겸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 호콘 6세의 미망인이며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의 딸인 마가레테Margarethe 여왕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통치하고 있었는데, 스웨덴을 포함하는 스칸디나비아 3국간 연합을 형성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칼마르 연합이 가능했던 것은 스칸디나비아 3국 왕실 간 친인척 관계, 문화적·언어적 유사성, 그리고 독일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 등 여러 가지 요인에 기인하였다. 연합의 국왕은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의 원로원 간 합의를 통해 선출하였는데, 그 첫 국왕은 에릭왕King Erik이었다.
그런데 1448년, 노르웨이 지배권을 둘러싸고 덴마크와 스웨덴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패권 경쟁에서 덴마크가 우세를 보임으로써 노르웨이는 덴마크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1523년에는 연합의 왕이던 크리스티안 2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Gustav Vasa가 봉기, 크리스티안 2세를 스웨덴에서 축출하고 스웨덴 국왕이 되자 스칸디나비아 3국 연합은 해체되었다.
노르웨이·덴마크 연합(1523-1814)
칼마르 동맹이 130여 년간 지속되다가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함으로써 와해는 되었으나, 덴마크 왕에 의한 노르웨이의 지배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덴마크 지배하의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한 투쟁은 모두 실패하였다. 16세기 초 오슬로의 아케르스후스Akershus성에서 덴마크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알브손Alvsson의 독립운동은 덴마크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극작가 입센Ipsen은 ‘At Akershus’라는 시詩에서 알브손Alvsson의 죽음을 ‘노르웨이의 심장을 강타’한 사건으로 묘사했다. 덴마크의 지배는 노르웨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전에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던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도화가 이루어졌고,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노르웨이 지배층의 대다수가 덴마크 귀족들로 구성됨에 따라 덴마크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노르웨이는 이전까지 주로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1700년대부터 상업이 발달하면서 노르웨이 경제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스웨덴 연합(1814-1905)
노르웨이의 운명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또 바뀐다. 나폴레옹 전쟁시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함께 나폴레옹 진영에 소속되어 스웨덴과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패하면서 스웨덴과 영국은 덴마크 국왕 프리드리히 6세에게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이양하도록 압박했고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하며 킬Kiel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1700년대 말경부터 싹트기 시작한 노르웨이 국민의 독립 의식은 덴마크의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치달았고 킬 강화조약에서 노르웨이를 양도한 덴마크 왕의 권위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르웨이 정부는 에이츠볼Eidsvold에서 국가회의를 소집하고, 1814년 5월 17일에 독자적인 헌법과 왕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스웨덴의 칼 14세는 노르웨이를 전격 침공하였고, 노르웨이는 결국 스웨덴과의 연합 수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1905년까지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스웨덴과의 연합 동안 1814년 5월에 채택된 헌법을 간직하도록 허용되었고, 헌법상으로는 독립 국가였다. 스웨덴과의 연합 기간은 노르웨이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다당제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경제적으로는 산업사회로의 진전 및 상업선단의 급성장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1825년 미국으로의 첫 이민이 이루어진 후, 1910년까지 약 40만명의 노르웨이인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를 하였다.
1905년, 독립 군주국이 되다
1814년 독립이 좌절된 이후, 노르웨이는 지속적으로 연합 내에서 평등권 획득을 주장했다. 1890년대에 노르웨이가 독자적인 영사권을 주장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01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영사제도에 관하여 협상을 하였으나 스웨덴 외무성의 감독을 받는 조건으로 영사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제안을 노르웨이측이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고, 1905년 6월에는 노르웨이 의회가 내각의 제안으로 독자적인 영사제도 수립을 결의하자 스웨덴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1905년 9월, 독자적인 영사제도를 둘러싼 양국간의 갈등은 양국이 각기 육군과 해군에 동원령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는데, 결국 양국 대표들이 회합을 가진 칼스타드Karlstad에서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완전한 독립과 연합의 분리를 승인하였다.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했으며, 노르웨이는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했다. 14세기 말부터 1814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1814년부터 1905년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노르웨이는 이로써 완전 독립을 하여 입헌군주국으로 오늘날의 왕가를 이루게 되었다.
홀로서기, 그 이후
1905년 독립 군주국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노르웨이는 1914년까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 했고, 1913년에는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다.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즉각 중립을 선포했다. 노르웨이는 중립이 존중되어 1차 대전의 직접적 피해를 겪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후 노르웨이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1935년 새로운 경제정책을 도입하고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세금 징수를 늘리고 공공사업을 확대하는 시책을 펴나갔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복지국가 건설 과정은 일시 중단되었다. 1940년 4월 독일군은 덴마크를 점령하고 노르웨이의 일부지역을 점령했다. 자체 군사력이 약했던 노르웨이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자 전 국토를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은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노르웨이 상선단 대부분은 연합국의 관리하에 편입되었다. 독일 점령기간 중 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으며 35,000명의 노르웨이인들이 집단수용소나 감옥에 수용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노르웨이는 UN(국제연합)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하였고, 1949년에는 전통적인 중립정책에서 친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입헌군주국 - 내각책임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이들의 공통점은 입헌군주국가라는 점이다. 모두 왕을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지구촌에는 지금도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군주제 국가가 적지 않지만, 노르웨이 국왕은 형식상 국가 원수이다. 노르웨이 국왕은 교회의 수장이며, 총리 및 각료 임명권, 법률거부권,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칙령은 국왕이 결제를 하고 총리가 부서한다. 정부에서 결정한 사항은 매주 금요일 국무회의에서 국왕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권한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국가 원수는 하랄드 5세King Harald Ⅴ 국왕으로 1991년에 즉위하였는데, 노르웨이 왕실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향유하고 있다.
행정부: 내각
형식적 행정권은 국왕에게 있지만, 현실 정치의 실질적인 행정권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 조직(내각)은 총리실을 비롯하여 총 18개 부部, 18명의 장관(외교부의 경우 장관 2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각은 최고 책임자인 총리와 각료로 구성되며, 총리는 의회의 동의하에 형식상 국왕이 임명한다. 2015년 현재 노르웨이 내각 총리는 2013년 총선을 통해 우파 연정으로 집권한 보수당의 에르나 솔베르그Erna Solberg이다.
입법부: 단원제 의회
노르웨이의 의회는 스투르팅Storting(노르웨이어로는 스토르틴게트Stortinget)이라고 불리며, 노르웨이 최상위 정치 조직이다. 노르웨이 의회는 원래 양원제였다. 19개의 주(필케)를 단위로 하는 대선거구제에서 선출된 16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169명의 의원 가운데 4분의 1이 상원에 해당하는 러그팅Lagting을, 나머지 의원들이 하원에 해당하는 오델스팅Odelsting을 이루는 양원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2009년 10월부터 이것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지금은 임기 4년의 단원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의회는 19개 주에서 선출되는 총 169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처럼 1인 2표제(인물과 정당에 각 1표)를 시행하고 있으며, 선거구별로 크기 및 인구수에 따라 4~15명의 인원을 선출한다. 특이한 점은 보궐선거가 없다는 점이다. 궐석 시에는 해당 정당의 비례대표 리스트 순위에 따라 승계된다.
노르웨이에는 노동당Labour Party,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중앙당Centre Party,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ic Party, 자유당Liberal Party, 사회주의 좌파당Socialist Left Party, 진보당Progress Party 등 여러 정당이 있다. 2013년 9월 선거 결과 보수당과 진보당 기독민주당 자유당 등 보수야당 연합이 총 169석 중 과반 이상인 96석을 차지하고, 여당인 노동당을 비롯한 3개 진보정당 연합은 72석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철의 에르나'로 불리는 에르나 솔베르그 보수당 당수가 노르웨이 사상 두 번째 여성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고 있다. 특징적인 점은 당시 의원 중 여성 의원이 전체의 40.8%인 69명이 선출된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높은 여성 비율이다. 이런 면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각의 40%가 여성, 기업 임원의 40%가 여성인 나라, 유엔이 ‘성평등의 천국’이라 부르는 나라, 그것이 노르웨이다.
정치정세의 특징
노르웨이는 입헌군주국으로서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제도적 관행상 영국과 유사한 정치체제이다. 비례대표제도로 인해 군소정당이 난립하고는 있으나,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보수계)로 구분되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이 운영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2차 대전 후 국내정치의 주안점은 경제정책이었는 바,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 간에 사유재산권의 범위, 공업화 및 도시화에 따른 장단점이 주요 논쟁대상이 되었고, 특히 1960년대에는 북해에서 원유와 가스가 발견됨에 따라 개발을 둘러싼 국가의 역할문제가 큰 논란거리를 형성하였다. 세금, 사회보장문제, 북해유전문제 등 경제문제 이외에 교육문제, 노인복지, 의료개혁, 환경, 대NATO 정책, EU 가입문제 등이 오랜 정치 쟁점이라 할 수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대법원Høyesterett, 고등법원, 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17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고, 내각의 권고에 따라 국왕이 임명하며 종신제로 운영된다. 개별 사건 심의시, 법원은 5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며, 이들 5명중 1명이 위원장 역할을 수행한다.
고등법원은 항소법원으로의 역할만 담당한다. 법률 적용 및 소송 절차, 판결 등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항소 가능하며, 통상적인 항소심의 경우, 3인의 법관과 4명의 법률비전문가(lay people)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하며, 징역 6년 이상의 중대한 범죄의 항소심의 경우, 3인의 법관과 10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한다.
지방법원은 민사 및 형사사건의 제1심 법원이다. 통상적인 경우, 1인의 법관과 2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하며, 중대한 형사사건의 경우, 2인의 법관과 3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한다. 민사사건의 경우, 통상 1인의 법관이 심의하나, 일방 당사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3인의 법관으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할 수 있다. 또한 3인의 법관으로 법원이 구성되는 경우, 일방 당사자의 요청이 있으면 4인의 법률비전문가가 심의에 참여할 수 있다.
행정구역
노르웨이의 행정 구역은 필케Fylke(‘주’ ; County)를 가장 상위의 범주로 한다. 우리나라의 광역 자치 단체에 해당하는 필케는 19개이다. 주(오슬로는 전통적인 주로 간주하지 않음)는 국가와 지방자치제 사이의 행정적인 중간 단계를 제공하기 위해 1975년에 형성되었다. 각 주는 직접 선거에 의해 광역의회County Council를 구성한다. 필케는 기초 자치 단체인 코뮤네Kommune(‘군’ ; Municipality)로 세분화된다. 노르웨이에는 2012년 1월 기준, 429개의 지방자치체가 과세, 사회복지 정책 등에 있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가장 큰 지방자치체municipality는 수도 오슬로Oslo(647,676명)로, 유일하게 광역과 기초 자치 단체를 겸한다.
경제
2014년 기준 노르웨이의 국내총생산(GDP)은 5,116억 달러로 세계 26위 규모이다. 이는 1조 4,495억 달러로 세계 13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보다 적은 수치이다. 그러나 한 국가 국민들의 1인당 소득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지표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 per capita)을 보면 다르다. 노르웨이는 99,295 달러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이지만 우리나라는 28,739 달러로 29위이다. 우리나라보다 약 3.5배나 높다. 이는 에너지, 해운, 해양, 수산업 강국으로서의 노르웨이 위상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경제 안정화를 우선시하는 노르웨이의 경제정책은 높은 고용률, 지속가능한 개발정책, 공평한 수입의 분배 그리고 잘 구성된 복지시스템 구축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친환경과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전략적 바탕 위에 이루어지고 있다. OECD의 노르웨이 경제보고서(2012.2.15)에 따르면 노르웨이 경제는 석유관련 막대한 수익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 규모를 석유관련 수입으로 적립된 펀드(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 GPFG)의 일정 규모(4%) 이하로 유지하는 재정규칙을 대체로 잘 준수하는 가운데 건전한 거시정책을 수행함으로써 현재 유로위기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양호한 경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노르웨이 경제 발전의 기초는 제조업이 아닌 원유 개발(1969년 에코피스크Ekofisk 유전에서 처음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노르웨이 경제의 특성상 국민 경제는 석유산업 의존도가 매우 높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의 경우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반면, 서비스 부문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주요 부존자원은 원유, 천연가스, 철광석이며, 경제적 강점은 에너지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지만 약점은 국내시장이 협소하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산업을 종사자를 기준으로 보면 1차 산업이 약 2%, 2차 산업이 20%, 3차 산업이 78%를 차지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면 1차 산업이 약 1%, 2차 산업이 40%, 3차 산업이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전국토의 4%만이 경작 가능하여 농업생산이 미미하다.
노르웨이의 2013년 무역 흑자는 323 billion NOK인데, 그 효자 수출품이 역시 석유와 가스이다. 노르웨이의 가장 큰 수출국은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 독일 순이고, 수입은 스웨덴, 독일, 중국, 영국 순이다. 노르웨이의 수출과 수입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스웨덴인데, 수입의 14% 수출의 9%를 차지한다. 노르웨이 수출의 약 80%, 수입의 60%는 EU(유럽연합) 국가와 이루어진다. 개발도상국에서 수입되는 것은 18%에 지나지 않으며, 주목할 만한 점은 최근 중국이 3위의 수입국일 정도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석유와 가스이고 그 뒤를 이어 어업과 수산물, 금속(특히 알루미늄)이다. 노르웨이 연어와 고등어는 우리나라로도 많이 수출되고 있다. 노르웨이가 수입하는 품목으로는 산업기계, 컴퓨터, 전기, 자동차 엔진 등이 많다.
중요 기업과 산업으로는 세계 최대 특수 선박 제조회사인 에이커 솔루션즈Aker Solutions, 세계 4대 선급협회 중 하나인 데트 노르스케 베리타스Det Norske Veritas, 선박용 통신 장비 기기업체인 네라NERA, 수중음향탐지장치인 소나Sonar를 제조하는 심라드SIMRAD, 잠수정 업체인 아르구스Argus, 마린 패션 업체인 헬리 한센Helly Hansen 등 해운과 북해 유전 관련 산업이 활발하다. 웹 브라우저 Opera를 만들고 있는 오페라 소프트웨어Opera Software도 노르웨이 기업이다.
사회와 문화
민족과 언어
노르웨이 주민은 금발과 파란 눈을 지니며 키가 큰 사람이 많다. 또한 장수長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균 수명은 남자는 73.6세이며, 여자는 80.3세이다. 그리고 랩Lapp족은 북부 노르웨이에만 살며 용모, 언어, 문화가 모두 이색적이다. 인구의 98%는 게르만계(북유럽인, 유럽중부인, 발트해 연안인) 노르웨이인이며 최대 소수민족은 약 0.6%를 차지하는 랩족이다. 노르웨이인을 구성하는 주체는 장신長身 장두長頭 금발 벽안碧眼의 게르만계系 북유럽인종이나, 최북부 지방의 핀마르크주에는 유사 이전부터 살아온 약 2만의 라프인人이 있다. 남서부에는 단두형短頭型에 다갈색 모발과 눈을 가진 알프스계系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또 핀마르크주에는 라프인과의 혼혈족인 단두에 얼굴이 넓은 주민들을 볼 수 있다.
노르웨이의 공식 언어는 노르웨이어이다. 노르웨이어는 북게르만어(또는 노르드어)에 속하며 덴마크어와 스웨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단일어가 아니다. 현재 노르웨이에는 2개의 공용어가 있다. 하나는 보크몰Bokmål(‘책 속의 언어’), 속칭 리크스몰로 부르는 언어인데 이는 과거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을 때 노르웨이어화한 덴마크어이다. 덴마크어 문어체를 노르웨이 동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언의 음운 조직으로 번안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니노르스크Nynorsk(‘신 노르웨이어’), 속칭 란스몰로 부르는 언어이다. 이는 19세기 중엽 민족주의에 자극되어 고古노르웨이어와 각 지방의 방언을 정리하여 만든 언어로 1885년 의회의 승인으로 공용어가 되었다. 보크몰과 니노르스크는 공식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지만 보크몰은 오슬로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 및 상류계층의 사람들의 일상어이다. 니노르스크는 전체 인구의 10~15%가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서부 해안에서 사용되고 정부 문서, 문학 작품, 희곡, 방송, 교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약 2만여 명의 노르웨이인들은 사미Sámi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미어는 핀란드·우그리어족에 속한다. 북사미어의 경우 노르웨이 북부 지역에서는 노르웨이어와 동등한 자격의 공식 언어로 자리 잡았다. 모국어가 노르웨이어가 아닌 이주민들과 난민들의 숫자 때문에 현재 노르웨이 초등학교에서는 약 110가지의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영어는 노르웨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국제적 언어로 사용되며,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그 뒤를 잇는다.
복지
노르웨이는 1997년 2월 ‘국가 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 제정을 계기로 노르웨이 사회복지제도의 근간인 국가보험제도(National Insurance Scheme)를 시행하고 있다. 국가보험제도는 국민연금(National Pension Insurance), 실업보험(Unemployment Insurance), 국민의료보험(National Health Insurance), 직업재해보험(Occupational Injuries Insurance), 출산·아동보험 등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 거주자는 외국정부 또는 국제기구에 고용되어 근무하는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국적에 관계없이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노르웨이는 이웃나라인 스웨덴 덴마크와 더불어 세계 최고수준의 복지국가이다. 이는 풍부한 자원 덕분에 복지 재정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 기반을 둔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는 세계 142개 나라를 대상으로 '2014 세계 번영 지수'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노르웨이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에 선정되었다고 하였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평균 수명은 물론 인간개발지수(HDI)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에서 남녀 평등 지수가 가장 높다. 최근 징병제를 여성에게도 확대하는 법안이 통과돼 2015년부터 시작될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는 1978년 양성평등법(Gender Equality Act)을 제정하여 교육 고용 등 사회 제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방지 및 제거하고자 한다. 양성평등법은 채용 승진 해고 시 성별에 따른 차별 및 임신을 이유로 한 해고를 금지하고 있다. 양성평등법 및 기업법은 550여개에 달하는 공기업 및 상장기업에게 이사진의 40% 이상을 여성에 할당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기타 결혼법, 상속법, 성명법姓名法, 시민권법 및 근로관계 법령 등에서 양성 간 지위 평등 및 여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들을 두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결혼 후에도 부부는 별성別姓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자녀의 성도 부모 중 일방의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 분야의 경우 여성에 대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은 일찍이 20세기 초(1913년)에 주어 졌고, 정치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 신장으로 여성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다. 2008년 기준 여성의 공직 점유 비율을 보면, 중앙의회의 경우 총 169명 중 64명(38%), 중앙정부에는 약 40%에 이른다. 2013년 고용 인력 현황을 보면, 총인구 중 직장을 다니는 사람 수가 약 270만 명으로 약 절반이다. 총 노동 인구 중 여성이 약 47%를 차지한다. 여성은 전체 여성인구의 약 68%, 남성은 전체 남성인구의 74%가 고용되어있다. 직장을 다니는 여성 중 풀타임으로 일하는 여성은 약 60%이다.
교육
노르웨이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10년을 의무교육으로 한다. 초등 과정은 6~13세, 1~7학년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등 과정은 13~16세, 고등 과정은 16~19세로 나뉘어져있다. 전체 학생 수는 약 90만 명에 이르고, 총 학교 수는 3,400여 개이다. 대학은 70여 개 정도이고, 학생 수는 23만 명 정도이다. 특징적인 것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정부지원으로 무상교육(외국인도 동일)이 실시된다는 점이다. 다만 대학 중에서 University는 모두 국가 보조금으로 운영되나 college 및 사립대학 등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영어는 기초 교육 과정에서 의무이고, 반수가 넘는 학생들이 불어와 독어를 추가로 선택하고 있다.
언론
노르웨이는 언론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한다. 매체를 보면, 먼저 신문의 경우 전국적인 독자망을 갖고 있는 것은 3개(Verdens Gang, Aftenposten, Dagbladet)다. 그러나 전국에는 200개가 넘는 신문사들이 있다. 전체 신문 발행부수는 약 300만부이다. 방송으로는 국영 NRK(노르웨이 방송협회)를 비롯하여, 민방 TV 2, TV Norge, TV 3 등 다양한 채널이 있다. 노르웨이 최대 통신사는 1867년 설립된 NTB(Norsk Telegrambyraa)이다.
종교
노르웨이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헌법상 루터 복음교를 국교로 한다. 2013년 현재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82% 정도인데, 그중 국교인 루터교 인구가 76.1%를 차지한다. 그 다음이 로마가톨릭으로 2.4%이다. 기독교는 10세기경 주로 해외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왕족들에 의하여 전래 포교되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늦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가운데 하나다. 1539년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를 루터교로 개종시켰다.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늦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나라에 속한다. 노르웨이에서는 루터교 의식에 따라 교회에서 왕의 즉위식부터 세례, 결혼, 장례 등이 다 행해진다. 부활절, 성령강림주일, 성탄절처럼 기독교 교회력에 나오는 절기들은 공휴일로 인정된다.
노르웨이 국교회는 노르웨이 국왕이 교회장이며 의회(Storting)가 최고 집행부이다. 왕실은 의무적으로 복음 루터교를 실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왕이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정부 통제를 책임지고 있다. 문화교회부는 행정적인 책임을 지며, 의회는 교회 관련 법안과 예산안을 채택하는 일을 담당한다. 모든 주교와 주임 사제들은 정부가 임명한다.
개신교 국가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슬람, 불교, 로마 가톨릭 등의 종교가 다 보장된다. 최근 수십 년 간 노르웨이에 많은 기타 종교단체들이 생겨났다. 1964년 헌법 제2조가 개헌되어 노르웨이 내에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었고, 1969년에는 종교 및 생활신조 단체들에 대한 국가 보조금 지급 계획이 도입되었다.
2013년 말 노르웨이 국교 신도는 총인구의 약 75%를 차지하는 384만 명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국교 루터복음교가 아닌 다른 종교 생활을 한다. 2014년의 경우 그 숫자가 587,000여 명에 이른다. 국교 이외 종교의 인구 지형을 보면, 루터복음교가 아닌 여타 기독교도가 57.4%를 차지하여 가장 많다. 비기독교 중 가장 많은 종교 인구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교로 22.5%를 차지한다. 이어 불교가 2.9%, 힌두교가 1.3%, 시크교가 0.6%를 차지하였다. 그 외에 바하이교, 유대교도 800~1,100여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문화 예술
노르웨이 문화예술계의 대표적 인물로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미술),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음악), 그리고 헨리크 입센Henrik Ibsen(문학) 3인을 꼽고 있다. 오랜 식민역사로 인해 전통문화의 취약성을 안고 있는 점 때문에 노르웨이는 현대 문화예술 진흥에 역점을 두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는 문화예술진흥부문에 GDP의 3%를 지원하고 있고 베르겐 국제 페스티벌, 노르웨이 국제영화제 등 국제행사 외에도 지역별로 각종 행사를 펼치고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국제펜클럽 노르웨이 지부, 노르웨이 작가연맹 등을 중심으로 시, 소설, 희곡작품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음악 부문은 국립 오슬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비롯 크리스챤산드, 베르겐, 트론하임 등지에 시립 심포니오케스트라를 두고 정기 및 부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갖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솔베이지 송”의 작곡가 에드워드 그리그의 생전의 예술활동을 기리는 그리그 기념 사업회는 매년 베르겐에서 ‘그리그 추모음악제’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한편 노르웨이 서중부에 위치한 Molde시에서 매년 여름 세계 유명 재즈 음악인을 초대하여 대규모 재즈음악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12월에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주관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위한 축하 음악회를 열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 국민화가로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는 에드워드 뭉크의 이름을 본따서 만든 오슬로 소재 뭉크박물관에서는 그의 생전에 작품들을 장르별로 연중 전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소수의 민간화랑과 국립박물관 등지에서 국내외 현대 작가의 작품 전시회를 자주 갖고 있어, 1~2년 전에 전시 계약을 해야 할 정도이다.
영화 부문은 노르웨이 국제영화제, 노르웨이 단편영화제 및 Film from the South등 주요 영화제를 개최하고 세계작품 초청 시사회를 갖고 있다. 정부의 영화산업 진흥을 위한 투자에 비해 외국 작품의 범람과 당지의 높은 인건비로 인한 대외 경쟁력이 약해 노르웨이 작품 활동은 미미한 편이다. 한편, 노르웨이 정부는 현재 소수민족인 사미Sami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영화 제작도 지원하고 있다.
한국과 노르웨이의 관계
노르웨이는 NATO 회원국으로 친서방노선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1959년 3월 2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우리나라는 1972년 12월 노르웨이에 상주공관을 설치하였고, 노르웨이는 1980년에 주한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노르웨이는 6.25전쟁 발발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외과 병원단을 파견한 바 있으며, 그후 메디컬 센터Medical Center 운영 지원 등을 통하여 양국관계는 계속 발전되어 왔다. 메디컬 센터는 국립의료원의 전신으로,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과 유엔한국재건단(UNKRA) 및 우리 정부가 공동으로 1958년에 설립했고 1968년 우리 정부가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노르웨이는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1973년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남북한 수교 후 대남북한 형평관계 유지를 표방하고 있어 친서방이라고는 하나 실리가 없는 한 우리나라에 편중된 관계유지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의 경제관계가 증진됨으로써 한-노르웨이 관계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 최근 2006년 한국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회원국: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간에 체결된 한-EFTA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한-노르웨이 양국간 교역량이 4배, 투자 규모가 15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상호보완적인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어 향후 경제 통상 협력의 잠재력이 매우 큰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2009년 한-노르웨이 수교 50주년을 계기로 향후 50년간의 새로운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위해 지속 협력키로 하고, 특히 녹색성장이라는 양국의 미래 공동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녹색미래를 위한 파트너쉽’을 구축 모색해 나가기로 하였다.
한국과 노르웨이 간의 무역 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해운과 해양이다. 1979년 이후 노르웨이인 소유의 선박 중 280척이 한국에서 제작되었으며, 노르웨이 도로에서는 지금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를 많이 볼 수 있다. 2014년 한국 기준 교역 현황을 보면, 수출은 선박, 해양구조물, 승용차, 타이어 분야에서 16.69억 달러를 기록했고, 수입은 선박용 부품, 펌프, 배전 및 제어기, 자동제어기 부품을 중심으로 28.41억 달러였다. 2013년 신고 기준 투자 현황을 보면 대對노르웨이 투자는 54건 18.56억 달러, 대對한국 투자는 138건 4.74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노르웨이는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에 참가하였고, 한국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때 노르웨이에 선수단을 파견한 바 있다.
2014년 현재 노르웨이에 체류 중인 한국 교민은 692명이다. 그 중 시민권자 및 영주권자가 440명이고, KOTRA를 비롯하여 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현대미포조선 STX조선 등에서 진출한 일반 체류자가 252명이다. 노르웨이의 한인 교민단체로는 1972년 결성된 주노르웨이 한인회(Korean Resident's Association)가 있고, 입양인 단체로는 한국인 입양인 협회(Forum for Korean Adoptees, Norway)가 있다. 한국전 이후 1954년경부터 시작된 노르웨이의 한인 입양인은 현재 약 6,800~6,9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NATO 회원국으로 친서방 노선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동서긴장완화 및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1973년 6월 22일 북한과 상호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1973년 8월 노르웨이에 상주 공관을 개설하였으며, 노르웨이도 북경주재 대사로 하여금 겸임토록 하였다. 노르웨이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실질협력관계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 북한과의 관계는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 1976년 북한 공관원의 마약 및 술, 담배 밀수사건, 1983년 KAL기 폭파 사건 및 미얀마사건, 김일성 우상화 체제, 북한의 허구적인 선전 책동 등으로 인하여 노르웨이는 북한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대사는 1991년 3월 경제사정으로 오슬로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고, 스웨덴에서 겸임하기로 하였다고 노르웨이에 통보한 후 4월 30일 북한대사관을 완전 철수하였다. 북한의 폐쇄성과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경제적 파탄 및 권력 세습 등으로 북한에 대한 노르웨이의 인식은 매우 나쁘나, 일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노르웨이인들은 북한을 옹호하고자 하는 태도를 아직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노르웨이는 북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개발원조를 하지 않고 있으나, 인도적 차원에서는 매년 대북지원을 해오고 있다. 2008년 현재 주스웨덴 북한대사가 노르웨이 대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주한 노르웨이대사가 북한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북한간의 교역은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노르웨이의 국기
노르웨이는 덴마크와의 동맹 기간인 1380~1814년 사이에 사회·문화적으로 덴마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 형태인 붉은색 바탕에 그려진 하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 안에 파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그려져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그것은 곧 덴마크의 국기인 ‘단네브로Dannebrog’를 바탕으로 청색 십자가를 첨가한 형태이다. 청·백·적색은 1814년에 제정된 ‘에이츠볼(Eidsvold) 헌법’에서 강조한 기본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를 각각 상징한다.그러나 이 국기는 스웨덴의 지배 하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사용될 수 없었다. 1905년 독립을 하면서 비로소 노르웨이는 이 국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노르웨이 국기 하나에는 7나라의 국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세계에는 비슷한 국가가 많은데,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노르웨이 국기 1장이면’이라는 제목으로 노르웨이 국기 사진이 한 장 게재되었다.
아래 그림은 노르웨이 국기인데, 검은색 네모로 다른 나라 국기를 표시해놓았다. 노르웨이 국기에는 ‘인도네시아’, ‘폴란드’, ‘핀란드’, ‘프랑스’, ‘네덜란드’, ‘태국’의 국기가 숨겨져 있다.
노르웨이의 의회 옴부즈맨ombudsman 제도
노르웨이 의회는 총선이 치러진 다음해 1월 1일부터 4년 임기로 의회옴부즈맨Parliamentary Ombudsman을 임명해 운영하고 있다. 옴부즈맨은 변호사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의원일 필요는 없다. 옴부즈맨 제도는 1809년 스웨덴 정부에서 행정부의 독주를 막고자 고안한 것으로, ‘행정감찰관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정부(국가, 주, 시정부)의 부당한 행위로 고통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을 취지로 한다. 옴부즈맨은 정부와 개인 사이에서 독립적이고 공정한 중재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옴부즈맨의 판정은 명령이 아닌 권고이다. 옴부즈맨은 제출된 불만사항을 검토하고 성명을 발표하는데, 만약 정부의 행위가 위법이거나 명백히 부당하다고 옴부즈맨이 판정할 경우 해당 관청이나 관료는 해당 건을 재고하고 일반적으로 옴부즈맨의 권고를 따르게 된다. 1962년 옴부즈맨법은 옴부즈맨이 의회에 매년 보고서를 제출토록 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옴부즈맨은 의회의 감시 기능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이외에도 군인 또는 공익근무요원을 위한 옴부즈맨 제도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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