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새 지평을 열어주신 말씀
[입도수기]
김재용(62세) | 대구대명도장 | 2014년 음력 6월 입도
한 생生이 찰나인 것을, 인연이 아닌 십년의 결혼생활 청산 후 노모와 두 아들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종교편력의 시간들이었다. 생사가 고苦라면, 생사가 죄악이 아닐까? 참회문을 쓰라면 제 행行이 하나도 예외 없이 회한으로 채색될 것 같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람은 자기 내면을 향하여 성찰과 ‘왜?’라는 존재의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진리는 가장 수승殊勝한 하나일진대, 문과 길은 참으로 많다. 이혼 후 정신적 고통과 방황은 겪은 자만이 알 것이다. 휴가 및 휴일 때 등산과 여행이 최고의 위안이었다. 까불고 웃으며 나를 따르는 예쁜 두 아들 녀석들에 대한 그토록 슬프고 예쁘고 미안한 마음은 그들이 전역과 졸업할 때까지 내 마음속 깊이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었다.
서른 초반 나이에 만난 한 스님이 있었다. 최초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일어난 곳을 보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석존이 밝힌 그 자리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한 생각 일으키는 것과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과 그 무게가 어떠냐?”는 말에 “같습니다.” 하고 그 후 유식공부에 빠졌었다. “만유가 식識이 전변되어….” 실재를 공空으로 설파하는가 보다. 모든 것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변화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하나를 체體로 삼고 하는 공부라는 것이 참선이다. 그러나 교만인지, 생활에 쫓기는 것 때문인지, 나의 두 친구가 찾아왔다. 주신酒神과 농신弄神이다.
그러던 중 ○○진리회를 만났다. 이곳에서 권선감을 만났고, 상제님을 만났고, 태을주를 만났고, 태을주의 신비도 경험했고, 색다른 단어들을 만났다. 선천, 후천, 신명, 귀신 등. 내가 아는 마음에는 문도 문틀도, 길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 여기서는 “심야자 귀신지추기야 문호야 도로야.”라고 해서 색다른 뉘앙스를 느꼈다. 하지만 귀신에 대한 의문과 마음에 대한 설명이 미진함도 있었지만, 또 다시 생활속에서 주신 및 농신들과 어울려 세월을 보냈다.
이번엔 ○○교를 만나게 되었다. 전도자는 나를 낚시하려고 5년 가까운 세월을 공을 들였다. 여기에서 귀신과 역易과 신명에 대해 알게 되었다. 타 종교를 길가의 잡초 밟듯이 밟고, 개벽 때, “종교를 따르지 않으면, 다 괴질에 걸려 죽고, 종교인은 사악해서, 의사는 생명을 가지고 장난했기 때문에 죽는다.” 했다. 생명을 가르치는 교敎라면서 역逆이었다. 타 종교를 비판하려면, 그 도장의 마룻바닥도 공들여 닦고, 화장실도 깨끗이 청소해 보고, 그 땅바닥에 입 맞춰 보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긴가 민가 하다가 그만 뒀다. 그 종교는 결국 사람을 피조물이라고 단정 지어, 나는 또 나오고 말았다. 같은 개념의 말을 차별성과 수승함을 표방하기 위해 예를 들어 전도, 포덕, 포교 등등을 내세운다. 수승殊勝하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수승한 것일 뿐. 진실로 수승한 것은 대비도, 비판도 배제하는 게 아닌가?
앞으로 도道나 종교 같은 것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텅 빈 조용한 마음은 그냥 있지 못하고, 또 움직이고 있었다. 죽기 전 영혼의 청소와 ‘진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인연이 있어 전화한 곳이 (내 기억으로는) 대전의 증산도 본부였다. 『천지성공』을 택배로 받고, 대구대명도장을 찾고도 세월만 보냈다.
예전 『천지개벽경』과 『개벽실제상황』을 읽고, 썩어가는 자연과 환경, 타락되어가는 인간의 도덕성, 분실되어버린 본성을 걱정했는데, 인人개벽과 자연개벽의 역사적 필연성과 당위성을 깊이 생각해 보았고, 신명공사란 말에서 신神을 다시 생각했다. 신이 보일 듯 말 듯, 알 듯 말 듯. 그리고 신이 이치를 밟고 다닌다는 것. 신 속에 신학의 신을 대입해도 튕겨져 나오고, 심心을 대입해도 튕겨져 나온다. 도장에 가끔 가서 책을 사서 보면서도 입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상생방송 7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태을궁에 갔다. 행사 중 종도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원죄를 ‘상극’ 한마디로 파괴시킬 때, 해변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또 영혼관은 불교의 유식사상(제8식 아뢰야식)에 더 잘 되어있다는 말씀! 당신의 그 위대한 겸허로 인해 대양 깊숙이 가라앉는 나의 영혼을 느꼈다. 또한 근본공부에 너무 깊이 파지 말고, 행行을 통한 수행공부를 강조하셨다. 후천의 종교는 실천종교라고 조용히 받아들였다. 이 점은 나의 큰 단점이기에 부끄럽고 나 자신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환갑을 넘기고 진갑의 철봉에 매달린 너덜하고 초췌한 나의 모습. 늦다! 늦다! 더 없이 늦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하지만 누에의 비유를 듣고 옳다! 옳다! 남은 복이 더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 잘하는 자, 아는 것이 많은 자, 도 닦기 어렵다고 했던가. 큰 바보가 되자!
돌아와서 후배에게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빌려주고 종교와 과학의 본질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밤까지 음주를 즐겼다. 이튿날 내가 불러들인 복마로 인해 한 달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심히 앓았다. 그리고 강수호사님과 권포감님의 깊은 배려로 마침내 도적부를 적었다.
성찰과 존재의 화두를 던지고
한 생生이 찰나인 것을, 인연이 아닌 십년의 결혼생활 청산 후 노모와 두 아들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종교편력의 시간들이었다. 생사가 고苦라면, 생사가 죄악이 아닐까? 참회문을 쓰라면 제 행行이 하나도 예외 없이 회한으로 채색될 것 같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람은 자기 내면을 향하여 성찰과 ‘왜?’라는 존재의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진리는 가장 수승殊勝한 하나일진대, 문과 길은 참으로 많다. 이혼 후 정신적 고통과 방황은 겪은 자만이 알 것이다. 휴가 및 휴일 때 등산과 여행이 최고의 위안이었다. 까불고 웃으며 나를 따르는 예쁜 두 아들 녀석들에 대한 그토록 슬프고 예쁘고 미안한 마음은 그들이 전역과 졸업할 때까지 내 마음속 깊이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었다.
서른 초반 나이에 만난 한 스님이 있었다. 최초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일어난 곳을 보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석존이 밝힌 그 자리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한 생각 일으키는 것과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과 그 무게가 어떠냐?”는 말에 “같습니다.” 하고 그 후 유식공부에 빠졌었다. “만유가 식識이 전변되어….” 실재를 공空으로 설파하는가 보다. 모든 것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변화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하나를 체體로 삼고 하는 공부라는 것이 참선이다. 그러나 교만인지, 생활에 쫓기는 것 때문인지, 나의 두 친구가 찾아왔다. 주신酒神과 농신弄神이다.
내가 경험한 종교들
그러던 중 ○○진리회를 만났다. 이곳에서 권선감을 만났고, 상제님을 만났고, 태을주를 만났고, 태을주의 신비도 경험했고, 색다른 단어들을 만났다. 선천, 후천, 신명, 귀신 등. 내가 아는 마음에는 문도 문틀도, 길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 여기서는 “심야자 귀신지추기야 문호야 도로야.”라고 해서 색다른 뉘앙스를 느꼈다. 하지만 귀신에 대한 의문과 마음에 대한 설명이 미진함도 있었지만, 또 다시 생활속에서 주신 및 농신들과 어울려 세월을 보냈다.
이번엔 ○○교를 만나게 되었다. 전도자는 나를 낚시하려고 5년 가까운 세월을 공을 들였다. 여기에서 귀신과 역易과 신명에 대해 알게 되었다. 타 종교를 길가의 잡초 밟듯이 밟고, 개벽 때, “종교를 따르지 않으면, 다 괴질에 걸려 죽고, 종교인은 사악해서, 의사는 생명을 가지고 장난했기 때문에 죽는다.” 했다. 생명을 가르치는 교敎라면서 역逆이었다. 타 종교를 비판하려면, 그 도장의 마룻바닥도 공들여 닦고, 화장실도 깨끗이 청소해 보고, 그 땅바닥에 입 맞춰 보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긴가 민가 하다가 그만 뒀다. 그 종교는 결국 사람을 피조물이라고 단정 지어, 나는 또 나오고 말았다. 같은 개념의 말을 차별성과 수승함을 표방하기 위해 예를 들어 전도, 포덕, 포교 등등을 내세운다. 수승殊勝하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수승한 것일 뿐. 진실로 수승한 것은 대비도, 비판도 배제하는 게 아닌가?
내 영혼의 깊은 울림
앞으로 도道나 종교 같은 것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텅 빈 조용한 마음은 그냥 있지 못하고, 또 움직이고 있었다. 죽기 전 영혼의 청소와 ‘진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인연이 있어 전화한 곳이 (내 기억으로는) 대전의 증산도 본부였다. 『천지성공』을 택배로 받고, 대구대명도장을 찾고도 세월만 보냈다.
예전 『천지개벽경』과 『개벽실제상황』을 읽고, 썩어가는 자연과 환경, 타락되어가는 인간의 도덕성, 분실되어버린 본성을 걱정했는데, 인人개벽과 자연개벽의 역사적 필연성과 당위성을 깊이 생각해 보았고, 신명공사란 말에서 신神을 다시 생각했다. 신이 보일 듯 말 듯, 알 듯 말 듯. 그리고 신이 이치를 밟고 다닌다는 것. 신 속에 신학의 신을 대입해도 튕겨져 나오고, 심心을 대입해도 튕겨져 나온다. 도장에 가끔 가서 책을 사서 보면서도 입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상생방송 7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태을궁에 갔다. 행사 중 종도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원죄를 ‘상극’ 한마디로 파괴시킬 때, 해변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또 영혼관은 불교의 유식사상(제8식 아뢰야식)에 더 잘 되어있다는 말씀! 당신의 그 위대한 겸허로 인해 대양 깊숙이 가라앉는 나의 영혼을 느꼈다. 또한 근본공부에 너무 깊이 파지 말고, 행行을 통한 수행공부를 강조하셨다. 후천의 종교는 실천종교라고 조용히 받아들였다. 이 점은 나의 큰 단점이기에 부끄럽고 나 자신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환갑을 넘기고 진갑의 철봉에 매달린 너덜하고 초췌한 나의 모습. 늦다! 늦다! 더 없이 늦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하지만 누에의 비유를 듣고 옳다! 옳다! 남은 복이 더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 잘하는 자, 아는 것이 많은 자, 도 닦기 어렵다고 했던가. 큰 바보가 되자!
돌아와서 후배에게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빌려주고 종교와 과학의 본질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밤까지 음주를 즐겼다. 이튿날 내가 불러들인 복마로 인해 한 달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심히 앓았다. 그리고 강수호사님과 권포감님의 깊은 배려로 마침내 도적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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