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과학, 인류의 근원적 물음들을 논하다
[이 책만은 꼭]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선택하라 선언한다.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 주인공은 결정해야 한다. 가상세계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깨어나서 현실세계로 갈 것인가. 당신은 이 책에서도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두 개의 알약은 바로 ‘과학’과 ‘영성’이다. 각 분야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우주와 생명, 마음, 신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영성 진영의 대표선수 디팩 초프라. 하버드 출신 의사이자 대체의학자로서 오늘날 전세계 뉴에이지 영성철학계의 수퍼스타이다. 이에 대항해 과학계를 대변해 나선 존재 레너드 믈로디노프. 스티븐 호킹과 함께 저술활동을 했던 물리학계의 석학이자 세계적 과학저술가이다. 영성과 과학이라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핵심주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파랗고 빠알간 알약들을 연속 콤보로 화려하게 제시한다. 생소한 물리학 용어, 매혹적인 이론 전개, 상대방의 급소를 질러대는 검투사의 칼날들. 피 튀기는 논리전쟁의 향연을 풀코스로 즐길 수 있는 기회!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한 세계를 선택할 수도, 두 세계를 모두 포용할 수도 있다. 세계관의 전쟁일까? 관점을 뛰어넘는 진화일까?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을 놓고 벌이는 세기적 빅 매치에 당신을 초대한다.
책에서 말하는 두 개의 알약은 바로 ‘과학’과 ‘영성’이다. 각 분야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우주와 생명, 마음, 신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영성 진영의 대표선수 디팩 초프라. 하버드 출신 의사이자 대체의학자로서 오늘날 전세계 뉴에이지 영성철학계의 수퍼스타이다. 이에 대항해 과학계를 대변해 나선 존재 레너드 믈로디노프. 스티븐 호킹과 함께 저술활동을 했던 물리학계의 석학이자 세계적 과학저술가이다. 영성과 과학이라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핵심주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파랗고 빠알간 알약들을 연속 콤보로 화려하게 제시한다. 생소한 물리학 용어, 매혹적인 이론 전개, 상대방의 급소를 질러대는 검투사의 칼날들. 피 튀기는 논리전쟁의 향연을 풀코스로 즐길 수 있는 기회!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한 세계를 선택할 수도, 두 세계를 모두 포용할 수도 있다. 세계관의 전쟁일까? 관점을 뛰어넘는 진화일까?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을 놓고 벌이는 세기적 빅 매치에 당신을 초대한다.
전쟁: 서로의 관점
【디팩 초프라】 과학은 이미 오래전에 종교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신앙의 자리에 사실이 들어서고, 미신은 무릎을 꿇었다. 수천년 전에 세계 곳곳의 문화에서 부처, 예수, 노자 같은 깨우친 영적 스승들이 삶을 보는 깊이있는 시각들을 내놓았다. 고통과 싸움으로 점철된 일상세계 너머에 초월적인 영역이 자리한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종교는 세상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고통, 다툼은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가. 우리는 종교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근원은 신이 아니라 바로 의식, 영성이다. ①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가 있다. ②이 비가시적인 실재는 우리 자신을 자각함으로서 알 수 있다. ③지능, 창조성, 조직력이 우주에 내재되어 있다. 오감이 미치는 범위 너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이 자리하며 그 잠재력을 풀어내는 열쇠는 바로 의식이다. 현자賢者들과 각자覺者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만물의 참된 근원, 곧 그대 자신을 자각하게 될 테니. 우리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천년 전에 우리가 약속받았던 깊은 힘들을 일깨우게 될 것이다.
【레너드 믈로디노프】 현대물리학으로 가능해진 모든 핵무기보다 종교의 이름으로 학살당한 이가 더 많았다. 십자군 전쟁부터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선과 사랑의 도구만이 아니라 증오의 도구로도 쓰였던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영적 진화가 계속될수록, 진정한 종교심에 이르는 길은 삶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을 통해 나 있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지식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통해 나 있다는 게 더욱 확실해질 것 같다.” 디팩의 말대로 진짜 쟁점은 앎이고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에 있다. 과학자들이 정밀한 객관적 측정과 정밀한 객관적 개념을 쓰는 데에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물론 그들도 종종 직관과 주관적 느낌을 길잡이로 삼지만 검증이라는 또 다른 단계가 있어야 함을 인식한다. 과학은 관찰, 이론, 실험이 서로 고리를 이루면서 나아간다. 이론과 경험적 증거가 조화를 이룰 때까지 그 고리는 반복된다. 그러나 개념들을 정밀하게 정의하고 실험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이 방법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과학이 내놓는 답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과학을 공부하는 주된 이유는 크나큰 우주의 구도 속에 우리 삶이 어떤 식으로 들어맞는지 알고 싶어하는 충동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답들은 진리일 때만 믿음을 준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디팩이 말하는 아름다운 세계관을 생각하면서 리처드 파인먼이 한 말도 생각해 보라고. “첫째 원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쉽게 속을 수 있습니다.”
우주
【레너드 믈로디노프】 은하계란 양자마당의 미시적 요동이 낳은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쉽게 생각하면 입자들이 쉬지 않고 부글부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끓는 솥과 같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진공 요동이 기막힌 예측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우주가 무無에서 저절로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모른다. 관찰 가능한 현상들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예측들을 내놓고 이를 시험해야 한다. 스티븐 호킹은 대중문화에서 최후의 현자로 간주되는 인물로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하는 말에는 과학의 무게 전체가 실린다. 2010년, 호킹의 선언은 전 세계의 뉴스가 되었다. “우주를 운행시키려고 신을 불러낼 필요는 없다.” 독실한 신자들의 세계에서는 과학을 신앙의 적으로 여길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학, 형이상학, 신비주의적 사변들, 증거의 구속을 받지 않는 사변들과는 달리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이론은 관찰이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그림이 우리의 근원을 신에게서 찾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은 결국 그 답을 내놓을 것이다.
【디팩 초프라】 양자이론의 위대한 개척자 닐스 보어는 말했다. “우리가 실재한다고 부르는 모든 것은 실재한다고 여길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단단한 물체만이 우주에서 실재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이들에게 이 말은 치명타이다. 입자가 비가시적인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과학적 진실은 영성의 입장에서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빅뱅이 일어나기 전 우주의 상태에는 모든 가능성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의 위대한 현자들은 “아함 브라마스미”를 발견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는 의미로 단순히 표현하면 “내가 우주다”라는 뜻이다. 즉 자연 어디에나 의식이 있다는 뜻과도 상통한다.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우주라는 마당에 담겨 있다면 우리는 의식이나 사람의 가치를 배재할 수 없다. 사랑 진리 자비심 희망 도덕 아름다움 그리고 신에게 귀속되었던 모든 가치를 기르는 보금자리가 바로 우주이기를 바란다. 인간에게 우주는 그렇게 의미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생명
【레너드 믈로디노프】 우주에 어떠한 생명력이 있다는 믿음은 자연의 힘들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특별한 자질이 생명에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종교적 또는 영적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생명이란 무엇일까? 디팩은 생명 있는 우주의 토대를 의식이라고 보고 접근한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생명 있는 것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것들이 지닌 질서와 그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질서 유지하기를 그친다면 우리들은 죽고 몹시 무질서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슈뢰딩거는 생명을 보는 방식에 대해 명쾌한 견해를 서술했다. “생명에만 있는 특징이 무엇일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물질 한 조각을 살아있다고 말할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물질 조각이 움직이고 환경과 재료를 교환하는 등 계속 무슨 일을 하는 걸까? 평형이라는 비활성 상태로 빠르게 붕궤하는 일을 피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유기체를 몹시 불가사의하게 보이도록 한다.
【디팩 초프라】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다음 이야기를 주목해야 한다. “나는 우주에 대한 종교적 느낌이야말로 과학 연구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고귀한 동기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파울리를 비롯한 학자들은 과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뒤에 생명에 대해 과학보다 훨씬 폭 넓은 설명을 영성이 쥐어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존재의 본질이다. 본질은 가장 기초적인 것, 없애버릴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여전히 창조력을 가진 것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수십억년에 걸쳐서 우주는 창조능력을 이어왔다. 창조의 동력은 생명력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학자들은 그런 힘들을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생명력은 상상력에 더 가깝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뇌가 창조하면서 발산하는 열량을 잰다 해도 그것이 그의 상상력을 측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뇌에서 발생하는 열은 부수효과일 뿐 본질은 아니다. 그 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측정할 수도 없다. 유물론자들은 이에 동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 기구에 기록되지 않는 힘들은 분명 존재한다. 욕망의 힘, 호기심의 힘, 사랑의 힘을 측정할 수 있는가?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창조성이 자리한다. 그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영성이다.
마음과 뇌
【레너드 믈로디노프】 뇌를 둘로 가르면 환자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만일 마음이 비물질적인 영역에 존재한다면 뇌들보(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신경섬유다발) 절단수술이 마음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오로지 물질적인 뇌에서만 생기는 것이라면 뇌를 둘로 갈랐을 때 마음 또한 둘로 나뉘어야 할 것이다. 신경학자 크리스토프 코흐가 바로 그런 사태에 대해 책을 썼다. 뇌를 둘로 가른 환자가 두 개의 마음을 나타내는 현상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마음이 뇌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하나였던 마음이 두 개로 나뉘어질 이유가 없다. 마음의 기원이 뇌라는 물리적 실체 속에 있다는 사실은 생물학에서 거듭되어 입증돼왔다. 물론 마음의 기초가 뉴련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떠오름 현상임을 입증하는 수준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날마다 다양한 증거가 나타나면서 아름다움, 사랑, 희망, 고통 같은 마음의 경험들이 물리적 뇌가 만든 것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현재 보고 싶은 영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외부 모니터에 원하는 영상을 제어하는 수준까지 발전한 상태이다. 멀고 먼 여정에 비하면 아직 초기단계이지만 전 세계 수많은 곳에서 이뤄지는 연구와 관련 성과들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디팩 초프라】 악기 없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가? 물론 불가하다. 뇌가 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악기가 음악을 만들었다고 하면 이건 사실인가? 터무니없을 것이다. 악기는 기계일 뿐 새 음악을 창조해 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안의 모차르트를 찾아내기 위해 악기를 현미경으로 검사한다고 해서 그 안에 창조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뇌 연구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 생각과 느낌의 기원을 찾아낸다고 뉴런의 분자구조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악기에서 음악이 나오기 전에 마음이 먼저 음표를 적어야 한다. 뇌가 생각을 나타내기 전에 마음이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결정할 때 ‘마음을 정했다’라고 말하지 ‘뇌를 정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수행이 깊은 불교 승려들의 뇌 스캔 영상을 보면 일반인과 매우 다른 점을 보여준다. 정상인의 뇌에 비하면 승려들의 뇌는 감마파 구역의 진동수가 두배로 작동한다. 가장 큰 발견은 전전두엽피질(두뇌의 사령탑, 다른 높은 기능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자비심을 맡은 중추)의 일반적 활성이 대단히 강력하다는 것이다. 이는 자비에 대한 명상을 오랫동안 한 끝에 생긴 변화였다. 이 경우에는 뇌가 스스로를 바꿨다고 말하면 부정확한 표현이다. 먼저 그 승려들은 자비심을 일으킬 뜻을 품었고 그 다음에 오랫동안 자비에 대해 명상했고 마침내 뇌가 그것을 따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티벳 승려의 예에서 보았듯이 의도는 뇌 기능을 스스로 새롭게 바꾼다. 뇌의 물질적 지형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신神
【레너드 믈로디노프】 인간은 치우침과 주관성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한 난관을 피하기 위해 과학과 수학이라는 학문들이 개발한 방법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특히 결론에 이르는 방식, 증거가 정당할 때 결론을 바꿀 수 있는 열린 마음을 모두 알고 나서 우리는 그 학문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를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우리들은 늘 자신이 합리적이고 옳다고 가정한다. 언제나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며 살아가지만 어떻게 해서 지금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은 자신이 객관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객관성은 착각인 경우가 더 많다. 진실을 보자면 우리가 날마다 하는 분석들은 언제나 기존에 가진 믿음과 욕망에 좌우되고 있다. 뇌는 언제나 자각 수준 아래에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기적이다’라고 생각하는 현상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설명 불가능했던 일들도 언젠가는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런 일들은 길고 긴 역사 내내 계속 이어져 왔다. 생각의 명료함과 이성 능력에서 거의 초인에 가까웠던 아인슈타인, 그의 영적 삶을 빚어낸 것은 바로 우주의 합리성이었다. “합리성을 이해함으로서 사람은 개인의 희망과 욕망의 족쇄로부터 원대한 해방을 이뤄낸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과학은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종교적으로 영성화 하는 일에 이바지하는 듯 보인다.”
【디팩 초프라】 종교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 하나는 신에 이르는 길이 자기네 전매특허라고 주장한 것이다. 신성이 조직종교의 신을 의미하는 한 영적인 길이 본류가 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위인들에게서 감화를 받아 마음을 넓힌 뒤에 예수 그리스도와 교감하게 하라. 그리고 우리 교회는 버리도록 하라.” 전통적인 신을 찾는 일을 그치기만 하면 그 자리에 다른 목표가 들어선다. 바로 초월이다. 초월이란 넘어감이다. 인도의 유명한 영적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청중과 격렬한 논쟁을 벌일 것을 고집했다. 구루 또는 자칭 성자를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의식의 옮겨감을 이야기할 때 청중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질 못해서 당혹스러워 하곤 했다. 그는 잠시 강의를 멈추고 구름 낀 산꼭대기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순간이라도 여러분이 저 산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완전히 이해할 것입니다. 실재는 여러분에게서 모습을 숨겼으나 눈길 받기를 기다리며 천지사방 어디에나 있지요.” 사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지각하지 않는 한 영적 가르침은 허구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실제로 산을 볼 수 있을까? 윌리엄 제임스는 신을 찾는 수수께끼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우리 주위 사방에는 무한한 세계들이 자리하고 얇디얇은 장막들이 가르고 있을 뿐이다.” 장막들을 이루는 것은 막히고 위축된 의식, 다른 세계들을 이루는 것은 널리 뻗은 자유로운 의식이다. 영적인 길은 자각 위에 드리운 장막들을 걷어내는 길이며 그러려면 헌신이 필요하다. 자신의 자각 속으로 충분히 깊이 들어가면 침묵과 평화가 자리한 곳을 찾게 될 것이다. 초월은 여러분을 빛의 영역으로 데려다준다 스스로 찾아내라. 신이 아닌 실재를! (정리 / 한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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