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숨결이 담긴 『난중일기亂中日記』
[이 책만은 꼭]
이해영 객원기자 / 서울관악도장
이번 호에 소개할 도서는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이다. 민족의 성웅으로 불리는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노승석 여해汝諧 고전연구소장이 교감 역주하여 펴낸 책이다.
『난중일기』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알고는 있지만, 그 역사적 배경과 시대 상황, 기록이 남긴 의미 등에 대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많은 자료와 고증 및 번역을 통해 우리가 『난중일기』에 담긴 사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중흥시켰으며, 탁월한 통솔력과 전략 전술, 지역민의 자발적 동참을 유도한 감화력 등 어려운 위기 때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장이자 성웅聖雄인 충무공 이순신 조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친필 기록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 2,539일간의 진중陣中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해 보고 들은 내용을 초서草書체로 작성한 귀중한 사료이다.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공명심이나 영웅 심리, 대륙 진출 또는 해외 무역 장악의 야망, 내부 갈등의 해소를 위한 대외 전쟁 수행 등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 없이 의견이 분분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이후 보여 준 언행은 과대망상적이고, 기본적인 예절이나 지식이 부족하여 통치자로서 자질은 매우 부족하였다. 결국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을 선봉장으로 하여 선생님의 나라인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는 조선을 넘어 대륙까지 뻗어 나가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는 것을. 결국 그의 꿈은 좌절되었고, 그가 이룬 정권도 무너졌으며, 정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 막부가 서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로 율곡 이이李珥 선생과 같은 집안이다. 자가 여해汝諧로 ‘그대가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다. 시호가 충무忠武이다. 한양 건천동(지금 충무로) 출신이고, 충남 아산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모친은 초계 변씨卞氏, 처는 온양 방씨方氏(당시에는 상주 방씨)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여식이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의 현충사 경내에 있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는데, 『난중일기』에 보이는 뛰어난 문장력이나 문인의 자질은 이때 형성되었다. 22세에 무인이 되기를 결심하고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식년式年 정식 무과武科 시험에 합격하였다.
관직 생활에서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아 빠른 진급을 하였으나, 성격이 매우 강직하고 청렴한 나머지 시기와 모함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로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고 선조宣祖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전라 좌수사)로 발탁하면서 남해안 해상 방어의 한 축이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다른 전략과 전술로 옥포해전玉浦海戰 승리를 시작으로 연전연승하였고, 한산대첩閑山大捷으로 전쟁의 판도를 역전시켜 버렸다. 이후 충청⋅전라⋅경상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정유丁酉년) 왜적의 간계와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와 백의종군의 여정에 올랐다.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멸하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였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되어 수군 재건에 힘썼고, 얼마 후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상대하는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이루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후퇴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격전을 벌인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끝내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795년(정조正祖 19년)에 이순신의 문집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었다.
충남 보령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초서를 연구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 한림원 교수와 순천향대 교양학부 및 이순신연구소 교수를 역임하였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 등재 시 자문위원을 맡았다.
KBS와 조선일보사, 국방부, 박물관 등에서 특강을 하였다. 국내 최초의 교감완역본인 『교감 완역 난중일기』가 2014년 영화 〈명량〉 상영 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15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베트남어로 번역되었으며, 중고교 교과서 27종에 수록되었다. 현재는 여해汝諧 고전연구소장으로 이순신의 문헌을 발굴하며 여해학교에서 인성 교육을 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한국의 차 문화 천년』(공역), 『사호집』, 『이충무공 종가 유물도록』, 『충무공 유사』⋅『교서집』(현충사), 『난중일기 유적 편』 등이 있다. 저서로는 『충무공 사료 집성』, 『이순신의 리더십』(여해), 『충무공, 최후까지 충성을 다하다』(교보문고/길 위의 인문학), 『이순신의 승리비결-주역으로 풀다』가 있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1795년(조선 정조 19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원래 제목은 『임진일기壬辰日記』, 『계사일기癸巳日記』 등으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친필 원본은 초서草書로 되어 있으며(초고본草稿本),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正字(해서楷書)로 해독한 전서본全書本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탈초脫草) 편집을 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를 간행하였다.
1962년 12월 20일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대한민국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난중일기』는 2004년 문화재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전편에 대한 탈초 작업을 한 뒤 해독 원문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이라는 사이트에 올라가 있다(https://www.heritage.go.kr).
정유년은 충무공에게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된 해이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투옥되었다가 나와서 백의종군하는 중에 또다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이었다. 여기에 자식처럼 길러 낸 조선 수군의 전멸이 있던 해였다. 기적적인 명량대첩을 일궈 내기까지 그 고충을 『난중일기』 내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유난히 심하게 흘려 있거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된 부분이 많다.
그 후 1960년 4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의 국역본 『난중일기』가 오늘날 번역의 효시가 되었다. 초고본에 대한 원문 교열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문화재 자료 『이충무공 난중일기』’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용어와 명칭에서 전고 미상과 오독 등이 남아 있어 학계에서는 새로운 교감校勘과 재번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교감’이란 같은 종류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들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이에 노승석 저자는 『난중일기』 백여 곳을 교감하여 2008년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 이후로는 교감 논문이 나오지 않았다(한국연구재단 등재 논문 기준). 2010년에는 이를 기초로 한 『교감 완역 난중일기』(민음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최초의 교감완역본校勘完譯本으로서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가 등재될 때 심의 자료로 제출되었다.
노승석 저자의 교감완역본이 『난중일기』 원문을 축자逐字 형태로 완역한 책이라고 한다면, 이 책 교주본校註本은 이순신과 관련된 한중 최대 규모의 문헌 자료를 문헌학과 고증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난중일기』를 더욱 정밀하게 교감校勘 역주譯註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국내에 알려진 적이 없는 새로운 문헌 내용들을 소개하고, 후대에 전하는 『난중일기』 초본도 모두 수록하고 용어, 인명, 지명 등을 모두 완벽하게 고증하였다.
『난중일기』 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狀啓를 올린 일 등이며, 그중에는 장계 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초기 임진, 계사, 갑오 일기). 또한 공사公私 간의 인사 문제와 가족에 대한 안부 걱정, 그리고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간혹 시문을 지어 적기도 하였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자신의 수결手決(Sign)인 ‘일심一心’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明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물품 목록도 적혀 있다.
이 부분의 끝에는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에 나오는 구절과 손자병법 모공 편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선거이는 통제공과 동갑내기로 가장 절친한 전우였다. 부원수 겸 전라도병마절도사로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웠고, 진도군수로 한산대첩에도 참전했었다. 여진족과 왜군을 저지하는 전쟁터에서 통제공과 함께 평생을 함께하다 같은 해에 세상을 마감하였다.
병신년에는 다른 해보다 활을 쏜 기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 무렵 요시라가 간계를 부렸으며, 정유재란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이로써 120일간의 백의종군을 끝낸 통제공은 조선 수군 재건과 함께 정유일기를 다시 썼다. 진주에서 약 보름간 전남 벽파진으로 가면서 수군 병력과 물자 등을 모으고 12척의 판옥선을 수습하러 다녔다. 이즈음 충무공은 몸이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고 신음하기도 하는 등 병에 관련된 기록들이 많아졌다.
명량대첩 후 조선 수군은 군사 고군산군도 선유도, 말도 인근까지 이동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명량대첩 이후 조선 수군은 전북 군산 선유도까지 그 진영을 옮겨가며 수군을 재건하였다.
11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난중일기』는 11월 17일 기록이 마지막 일기이다. 이즈음 천상에 기도한 내용이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7권 「선조조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에 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월 19일에 뇌물을 받은 진린이 왜선을 통과시키고, 노량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러 오는 시마즈군 등과 노량해전을 벌였는데, 이때 충무공이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 시마즈군은 훗날 사쓰마 번藩이 되고, 숙적宿敵 쵸슈 번과 손을 잡고 바쿠후 체제를 무너트리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되었다. ■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완벽했다.”
-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1862~1948),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 장교이자 역사가로, 『해양이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에서 이순신 통제사를 높이 평가했다. 발라드는 인종주의자였기 때문에 인종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성향에 대해서는 반드시 경계하며 객관적으로 읽어 낼 필요는 있다.
-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1862~1948),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 장교이자 역사가로, 『해양이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에서 이순신 통제사를 높이 평가했다. 발라드는 인종주의자였기 때문에 인종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성향에 대해서는 반드시 경계하며 객관적으로 읽어 낼 필요는 있다.
[머리말]
이번 호에 소개할 도서는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이다. 민족의 성웅으로 불리는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노승석 여해汝諧 고전연구소장이 교감 역주하여 펴낸 책이다.
『난중일기』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알고는 있지만, 그 역사적 배경과 시대 상황, 기록이 남긴 의미 등에 대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많은 자료와 고증 및 번역을 통해 우리가 『난중일기』에 담긴 사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 기록
7년 전쟁과 『난중일기』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초반 일본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조선 땅을 짓밟았다. 속수무책으로 몰리던 조선군은 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바닷길을 막고 연전연승으로 한산도, 명량 등지에서 왜군을 격퇴하면서 7년 전쟁의 전세를 뒤집었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사로 전쟁이 막을 내렸다.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중흥시켰으며, 탁월한 통솔력과 전략 전술, 지역민의 자발적 동참을 유도한 감화력 등 어려운 위기 때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장이자 성웅聖雄인 충무공 이순신 조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친필 기록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 2,539일간의 진중陣中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해 보고 들은 내용을 초서草書체로 작성한 귀중한 사료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호칭을 장군將軍 또는 제독提督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정도 일리도 있고, 대중에게 친숙한 호칭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불렀을 호칭인 통상統相 또는 통제사, 통제공이라 호칭한다. 기존 호칭과 다르게 대하는 이유는 충무공 이순신 통제사는 결코 한 장수로만 담기에는 그 그릇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또한 공직 생활에서 보여준 행정력과 일 처리와 인간적인 풍모, 인품, 덕성 등을 볼 때도 문무겸전의 전형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고자 함도 내포되어 있다. 더불어 『난중일기』에서 보이는 감성적이고 도덕에 바탕한 인간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싶기 때문이다. 참고로 통제사는 정2품 상上 정헌대부正憲大夫이다. 무반계 최고 품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정3품 상上으로 네 품계 아래에 있다.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꿈
16세기 동아시아는 한 사람의 헛된 꿈에 의해 역사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바로 100여 년간의 일본 전국 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1536~1598)이다. 그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던 중 혼노사本能寺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후계자로 부상하여 규슈九州를 정벌하는 등 일본을 통일하고 정무를 총괄하는 관백關白의 지위에 올랐다.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공명심이나 영웅 심리, 대륙 진출 또는 해외 무역 장악의 야망, 내부 갈등의 해소를 위한 대외 전쟁 수행 등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 없이 의견이 분분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이후 보여 준 언행은 과대망상적이고, 기본적인 예절이나 지식이 부족하여 통치자로서 자질은 매우 부족하였다. 결국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을 선봉장으로 하여 선생님의 나라인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는 조선을 넘어 대륙까지 뻗어 나가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는 것을. 결국 그의 꿈은 좌절되었고, 그가 이룬 정권도 무너졌으며, 정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 막부가 서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지은이 이순신李舜臣(1545 을사 ~ 1598 무술)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로 율곡 이이李珥 선생과 같은 집안이다. 자가 여해汝諧로 ‘그대가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다. 시호가 충무忠武이다. 한양 건천동(지금 충무로) 출신이고, 충남 아산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모친은 초계 변씨卞氏, 처는 온양 방씨方氏(당시에는 상주 방씨)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여식이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의 현충사 경내에 있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는데, 『난중일기』에 보이는 뛰어난 문장력이나 문인의 자질은 이때 형성되었다. 22세에 무인이 되기를 결심하고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식년式年 정식 무과武科 시험에 합격하였다.
관직 생활에서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아 빠른 진급을 하였으나, 성격이 매우 강직하고 청렴한 나머지 시기와 모함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로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고 선조宣祖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전라 좌수사)로 발탁하면서 남해안 해상 방어의 한 축이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다른 전략과 전술로 옥포해전玉浦海戰 승리를 시작으로 연전연승하였고, 한산대첩閑山大捷으로 전쟁의 판도를 역전시켜 버렸다. 이후 충청⋅전라⋅경상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정유丁酉년) 왜적의 간계와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와 백의종군의 여정에 올랐다.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멸하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였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되어 수군 재건에 힘썼고, 얼마 후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상대하는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이루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후퇴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격전을 벌인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끝내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795년(정조正祖 19년)에 이순신의 문집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었다.
옮긴이 노승석
충남 보령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초서를 연구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 한림원 교수와 순천향대 교양학부 및 이순신연구소 교수를 역임하였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 등재 시 자문위원을 맡았다.
KBS와 조선일보사, 국방부, 박물관 등에서 특강을 하였다. 국내 최초의 교감완역본인 『교감 완역 난중일기』가 2014년 영화 〈명량〉 상영 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15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베트남어로 번역되었으며, 중고교 교과서 27종에 수록되었다. 현재는 여해汝諧 고전연구소장으로 이순신의 문헌을 발굴하며 여해학교에서 인성 교육을 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한국의 차 문화 천년』(공역), 『사호집』, 『이충무공 종가 유물도록』, 『충무공 유사』⋅『교서집』(현충사), 『난중일기 유적 편』 등이 있다. 저서로는 『충무공 사료 집성』, 『이순신의 리더십』(여해), 『충무공, 최후까지 충성을 다하다』(교보문고/길 위의 인문학), 『이순신의 승리비결-주역으로 풀다』가 있다.
『난중일기』는 어떤 책인가?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1795년(조선 정조 19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원래 제목은 『임진일기壬辰日記』, 『계사일기癸巳日記』 등으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친필 원본은 초서草書로 되어 있으며(초고본草稿本),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正字(해서楷書)로 해독한 전서본全書本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탈초脫草) 편집을 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를 간행하였다.
1962년 12월 20일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대한민국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난중일기』는 2004년 문화재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전편에 대한 탈초 작업을 한 뒤 해독 원문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이라는 사이트에 올라가 있다(https://www.heritage.go.kr).
두 권의 『정유일기丁酉日記』
『난중일기』는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 해에는 일기 분량이 일정하지 않고 누락이 심하였지만, 큰 전쟁이 없었던 해는 비교적 일정하게 적혀 있다. 초반 임진壬辰, 계사癸巳, 정유丁酉 일기가 전자에 속하고 갑오甲午, 병신丙申 일기가 후자에 속한다. 을미乙未 일기는 큰 전쟁이 없었던 해이지만 초고본이 전하지 않아 원본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다. 정유丁酉 일기는 먼저 일기를 적었다가 나중에 다시 재작성하여 두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정유년은 충무공에게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된 해이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투옥되었다가 나와서 백의종군하는 중에 또다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이었다. 여기에 자식처럼 길러 낸 조선 수군의 전멸이 있던 해였다. 기적적인 명량대첩을 일궈 내기까지 그 고충을 『난중일기』 내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유난히 심하게 흘려 있거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된 부분이 많다.
『난중일기』 번역본
『난중일기』에 대한 한글 번역 작업은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55년 11월 30일 『임꺽정林巨正』의 저자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의 아들 홍기문洪起文(1903~1992)이 『리순신장군전집』을 번역하여 평양에 있는 국립출판사의 주필 이상호가 5천 부를 발행하였다. 이는 초고본과 전서본을 합본하여 최초로 번역한 것이나, 초고본을 확인하지 않고 활자본을 토대로 번역한 것이므로 초고본의 미상, 오독 부분을 밝히지 못한 한계가 있다.그 후 1960년 4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의 국역본 『난중일기』가 오늘날 번역의 효시가 되었다. 초고본에 대한 원문 교열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문화재 자료 『이충무공 난중일기』’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용어와 명칭에서 전고 미상과 오독 등이 남아 있어 학계에서는 새로운 교감校勘과 재번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교감’이란 같은 종류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들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이에 노승석 저자는 『난중일기』 백여 곳을 교감하여 2008년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 이후로는 교감 논문이 나오지 않았다(한국연구재단 등재 논문 기준). 2010년에는 이를 기초로 한 『교감 완역 난중일기』(민음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최초의 교감완역본校勘完譯本으로서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가 등재될 때 심의 자료로 제출되었다.
노승석 저자의 교감완역본이 『난중일기』 원문을 축자逐字 형태로 완역한 책이라고 한다면, 이 책 교주본校註本은 이순신과 관련된 한중 최대 규모의 문헌 자료를 문헌학과 고증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난중일기』를 더욱 정밀하게 교감校勘 역주譯註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국내에 알려진 적이 없는 새로운 문헌 내용들을 소개하고, 후대에 전하는 『난중일기』 초본도 모두 수록하고 용어, 인명, 지명 등을 모두 완벽하게 고증하였다.
『난중일기』의 연도별 주요 내용
『난중일기』 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狀啓를 올린 일 등이며, 그중에는 장계 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초기 임진, 계사, 갑오 일기). 또한 공사公私 간의 인사 문제와 가족에 대한 안부 걱정, 그리고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간혹 시문을 지어 적기도 하였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자신의 수결手決(Sign)인 ‘일심一心’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明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물품 목록도 적혀 있다.
1592년 임진壬辰년
1월부터 전쟁에 대비하여 진영과 무기를 점검하고, 전라좌도 수군 지역인 발포, 사도, 여도, 방답진을 순시하였다. 3월에 거북선을 시험하였다. 4월 13일, 14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 등이 분전했지만 함락되었고, 충주에서 신립이 이끄는 정예 병력이 참패하여 한양이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4월 27일에 출전 명령이 내려졌다.
5월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고, 29일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였다. 6월에 당포, 당항포 등 해전에서 승리하고 7월에 삼도 수군이 연합하여 학익진을 펼친 한산도대첩(견내량 해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8월에 왜군이 본진으로 삼은 부산포해전에서 왜선 백여 척 이상을 격파하였지만, 선봉장 역할을 하던 녹도 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하였다.
1593년 계사癸巳년
2~3월에 웅포해전을 일곱 차례 치르고, 참전 중에 3월 23일부터 4월까지 중단했던 일기를 5월에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6월 2차 견내량 해전을 치르고,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고,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진영에서 농사, 고기잡이, 소금 굽기, 그릇 굽기 등을 시행하여 군량을 비축하였다. 12월에 장계를 올려 진중에 무과武科를 설치하였다.
1594년 갑오甲午년
1월에 모친 초계 변씨卞氏를 찾아가 명절을 함께 보냈다. 설을 쇠고 돌아가는 통제공에게 모친은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두세 번 분부하고 타일렀다. 본영의 격군 742명에게 주연을 열었다.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이 병들어 죽은 271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3월에 2차 당항포해전이 발생하였다. 4월에는 진중에서 무과 시험을 실시하였다. 어영담이 병사했다. 8월에 권율 등과 작전 계획을 세웠으며, 9월에는 장문포해전이 발생했고 별다른 전공이 없었다. 10월 곽재우와 김덕령과 작전을 모의하고, 영등포, 장문포의 왜적을 공격하였다.
이 부분의 끝에는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에 나오는 구절과 손자병법 모공 편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1595년 을미乙未년
을미년에는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시기였다.1월에 맏아들 회薈의 혼례를 치렀고, 2월에는 원균이 충청 병사로 이직하였다. 둔전의 벼를 각 포구에 분급하였고, 5월에 남원 등의 식량을 운반하고 소금 굽는 가마솥을 제작하였다. 8월에 체찰사 오리 이원익을 진주晉州에서 만나고 이후 함께 한산도 진영으로 와서 여러 가지를 의논하였다. 9월에 충청 수사 선거이宣居怡에게 시를 주고 송별하였다. 10월에 명나라 부사副使 양방형이 부산에 가고 11월에 체찰사 이원익이 떠났다.
선거이는 통제공과 동갑내기로 가장 절친한 전우였다. 부원수 겸 전라도병마절도사로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웠고, 진도군수로 한산대첩에도 참전했었다. 여진족과 왜군을 저지하는 전쟁터에서 통제공과 함께 평생을 함께하다 같은 해에 세상을 마감하였다.
1596년 병신丙申년
1월에 청어를 잡아 군량 5백 섬을 마련하고 2월에 흥양둔전의 벼 352섬을 받았다. 3월에 원균이 이원익에게 곤장 40대를 맞고, 4월에는 장사를 가장한 부산의 정탐 왜병 4명을 효수하였다. 윤閏 8월, 무과 시험장을 열었고 체찰사 이원익과 순회 점검했다. 10월에는 여수 본영에 모친을 모셔 와 구경시켜 드렸다. 이때 모친은 여든이 넘은 연세였다.
병신년에는 다른 해보다 활을 쏜 기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 무렵 요시라가 간계를 부렸으며, 정유재란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1597년 정유丁酉년
정유년이 되어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온다는 허위 정보에 출동하지 않자, 2월에 이순신은 왕명 거역죄로 서울로 압송되고, 3월에 옥에 갇혔다가 정탁鄭琢의 상소로 4월 1일 특사特赦되되면서 백의종군을 명 받았다.4월 3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5일 아산 어라산 선영에 도착하고, 11일 모친상을 당하였다. 4월 19일에 길을 떠나 5월 8일, 초계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갔다.
7월 16일에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 백의종군 중인 통제공은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진주 손경례 집에서 받았다.
7월 16일에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 백의종군 중인 통제공은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진주 손경례 집에서 받았다.
이로써 120일간의 백의종군을 끝낸 통제공은 조선 수군 재건과 함께 정유일기를 다시 썼다. 진주에서 약 보름간 전남 벽파진으로 가면서 수군 병력과 물자 등을 모으고 12척의 판옥선을 수습하러 다녔다. 이즈음 충무공은 몸이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고 신음하기도 하는 등 병에 관련된 기록들이 많아졌다.
9월에 조정에서 육전을 명하나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어 싸울 수 있다.”라고 장계하였고, 16일에는 명량에서 13척으로 왜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하였다. 10월 29일, 보화도로 진영을 옮기고 셋째 아들 면葂이 전사하였다. 12월, 선조가 상중에 있지만 육식하기를 명하였다.
1598년 무술戊戌년
명량대첩 후 조선 수군은 군사 고군산군도 선유도, 말도 인근까지 이동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명량대첩 이후 조선 수군은 전북 군산 선유도까지 그 진영을 옮겨가며 수군을 재건하였다.
2월 18일,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 7월 16일,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과 연합작전을 세웠고, 24일에는 절이도해전에서 송여종이 포획해 온 적선 6척과 적군의 머리 69급을 진린에게 주었다. 10월 2일, 왜교 전투에서 유정劉綎과 협공하였다.
11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난중일기』는 11월 17일 기록이 마지막 일기이다. 이즈음 천상에 기도한 내용이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7권 「선조조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에 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일삼경時日三更에 순신舜臣이 궤축우천왈跪祝于天曰
금일고결사今日固決死하오니 원천필섬차적願天必殲此賊하소서
이날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이순신이 무릎을 꿇고서 상제님(‘천天’은 상제님을 뜻함)에게 빌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했사오니, 바라옵건대 상제님이시여! 이 원수 왜적을 반드시 섬멸하여 주시옵소서.”
금일고결사今日固決死하오니 원천필섬차적願天必殲此賊하소서
이날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이순신이 무릎을 꿇고서 상제님(‘천天’은 상제님을 뜻함)에게 빌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했사오니, 바라옵건대 상제님이시여! 이 원수 왜적을 반드시 섬멸하여 주시옵소서.”
11월 19일에 뇌물을 받은 진린이 왜선을 통과시키고, 노량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러 오는 시마즈군 등과 노량해전을 벌였는데, 이때 충무공이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 시마즈군은 훗날 사쓰마 번藩이 되고, 숙적宿敵 쵸슈 번과 손을 잡고 바쿠후 체제를 무너트리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되었다. ■
충무공 이순신 통제공의 명언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태산같이 침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
– 첫 출정인 옥포해전에서 장졸에게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려는 조정의 움직임에 대한 응답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일부당경一夫當逕 족구천부足懼千夫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니,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
– 명량대첩 전 장졸들에게
●차수약제此讐若除 사즉무감死則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노량해전 전에 제를 지내며
●전방급戰方急 신물언아사愼勿言我死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 노량해전에서 남긴 유언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태산같이 침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
– 첫 출정인 옥포해전에서 장졸에게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려는 조정의 움직임에 대한 응답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일부당경一夫當逕 족구천부足懼千夫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니,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
– 명량대첩 전 장졸들에게
●차수약제此讐若除 사즉무감死則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노량해전 전에 제를 지내며
●전방급戰方急 신물언아사愼勿言我死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 노량해전에서 남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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