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길, 온돌의 길 | 〈다큐 공감 74회 - 한반도에서 알래스카까지! 고래의 길을 가다〉 해설
[칼럼]
한재욱 / 본부도장
이번 호에서는 KBS 1TV에서 방영된 〈다큐 공감 74회 - 한반도에서 알래스카까지! 고래의 길을 가다〉의 내용을 정리해 보려 한다. 2003년,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고고학계가 깜짝 놀랄 만한 발굴이 이뤄졌다. 한국형 온돌이 알래스카에서 발굴된 것이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3,000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 도대체 누가 왜 알래스카에 한국식 온돌을 짓고 살았던 걸까?
2014년 11월 1일 방송된 이 다큐멘터리에서 제작진은 시베리아 대륙에서 시작해 만주 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대륙 로드에서 벗어나 한반도와 캄차카반도, 알류샨 열도, 알래스카를 잇는 북태평양 해양 로드를 조명하고 고대 한반도인의 삶을 추적한다. 고래를 잡던 해양 어로 문화권의 고래의 길과 한국인의 독특한 주거 문화인 온돌의 길을 조사하며 이 두 개의 길이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밝히고 알래스카의 선사인들이 한국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밝힌다.
세계 최대의 고래 서식지라 불리는 알래스카는 1년 내내 고래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선사 시대 문명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알래스카에서 영국 애버딘 대학의 고고학자 리차드 크넥Rick Knecht 교수가 알래스카 정부와 공동으로 발굴을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03년 온돌 집이 발굴됐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발굴팀을 이끌고 있던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리차드 크넥 교수는 약 3,000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식 온돌과 매우 낯익은 인상의 탈 조각을 발굴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탈이 고래 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3,000년 전 이곳에 한국식 온돌을 만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고래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살게 된 것일까?
크넥 교수팀이 발굴하는 곳은 주로 선사 시대 알래스카 원주민이 살았던 곳이다. 고고학의 불모지로 알려졌던 알래스카지만 영국 애버딘 대학과 알래스카주 정부의 후원으로 발굴이 시작된 이후 알래스카는 선사 시대 주요 유적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크넥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미척개지와 같은 알래스카의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인류 문화를 발전시키는 엄청난 진보라고 생각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혁명’, ‘인류문화의 엄청난 진보’는 모두 한국과 관련이 있다.
미국 고고학회가 발간하는 격월간지 《고고학(Archaeology)》 2007년 5~6월호는 알래스카주 어널래스카Unalaska시 아막Amaknak섬에서 다리 건설을 위한 발굴을 하던 중 온돌을 갖춘 집터가 나왔다고 보고했다. 땅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돌을 정교하게 쌓아 만든 선사 시대 집터로 약 3,000년 전에 조성된 것이었다. 문명의 불모지라 여겨 온 알래스카에 선사 시대부터 상당히 발달된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음을 말해 주는 엄청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크넥 교수는 “지난 1997년에도 이 지역에서 온돌 구조가 발굴됐지만 그때는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크넥 교수에게 한국의 온돌을 떠올리게 한 것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이 굴뚝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크넥 교수는 이 터가 ‘국보급 유적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발굴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이곳은 새로운 다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굴된 유적인데 발굴 시작 후 1년도 못 돼서 사람들은 다리 건설을 택했고 유적은 다시 깊은 땅 밑에 묻히고 말았다.
다시 묻힌 그 유적이 정말 한국식 온돌이었을지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크넥 교수에게 한국에서 발견된 온돌 유적 자료를 보여 주었다. 자료들을 본 교수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당시 발굴 사진들을 보여 주며 비교를 했다. 비록 유적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혔지만 알래스카에 흔적을 남긴 고대 한반도인에 대한 강력한 호기심을 남겨 주었다.
유적이 발견된 어널래스카시는 수천 년 동안 미국 내 최고의 어획량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항구 도시이다. 이곳 주민들에게도 한국형 온돌을 가진 선사 시대 유적의 발견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주민들의 안전 문제로 유적이 땅에 묻혔지만 어널래스카의 당시 셜리 마콰르츠 시장도 이 유적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적이) 한국과 알래스카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면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죠.”라고 말하며 무척 흥미로워했다. 이 유적이 알래스카 고대사의 중요한 단서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상한 관심 덕분에 유적과 함께 발굴된 많은 유물들은 다행히도 인근의 ‘알류샨 박물관’에 보존 조치되었다. 아막낙섬 발굴 터에서 수습한 유물들에는 선사 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돌로 된 기름등잔이 있다. 이 등잔에는 지금도 고래기름을 태운 흔적이 뚜렷하다. 선사 시대의 고래기름은 연기가 나지 않고 화력이 좋은 최첨단 연료였다.
이곳엔 등잔과 함께 수많은 고래 뼈들이 보관돼 있다.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이 천장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사다리를 고래 뼈로 만들었다고 한다. 알래스카는 나무가 아주 귀했으니까 고래 뼈로 사다리를 만드는 게 더 쉬웠을 거라는 얘기다. 나무 대신 고래 뼈로 집에 대들보를 세웠던 이들은 고래 사냥법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래를 활용해 척박한 삶의 환경을 극복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공식적으로 고래잡이는 금지됐지만 국제포경위원회의 허가에 따라 알래스카에서는 지금도 1년에 103마리의 고래를 잡을 수 있다. 단 알래스카 전통 방식으로 사냥을 해야 하고 잡은 고래는 마을 주민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 자료 화면에는 고래를 잡아 육지로 끌어 올릴 때 족히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줄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보인다.
3,000년 전 한국형 온돌을 만들고 이곳에 정착했던 이들도 고래와 함께 이런 모습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사실을 말해 주는 중요한 단서 하나가 알류샨 박물관 특별 전시실에 있다. 그것은 2007년도에 발견된 고래 뼈로 만든 탈이다.
발견된 것은 두 개의 조각뿐으로 최근에 조각을 합쳐서 원래 모양을 알게 됐다. 고래 뼈로 만든 이 탈의 부드러운 눈썹의 선과 가느다란 눈매가 어딘가 우리 눈에 익숙하다. 온돌 터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 중에 유독 이 탈을 특별하게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의 울산 울주군 태화강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사 시대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 이곳에 살던 선사인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암각화에는 해양과 육상 동물들 그리고 사냥 장면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353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림이 한 면에 있는 것이다. 그중 58점이 고래 그림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주인공은 고래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고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암각화에는 많은 동물들 속에 유일하게 사람 얼굴 형상이 있다. 선사 시대 암각화 전문가인 이상목 전 울산암각화박물관 관장은 알래스카 고래 뼈 탈의 얼굴이 이것과 닮았다고 말한다.
고래가 사람에게 남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고래의 꼬리 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알래스카 고래 뼈 탈과 반구대 암각화의 얼굴상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마도 고래 토템이라고 볼 수 있는 문화가 고래 뼈 탈에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반구대 암각화 역시 이 주장을 잘 보여 주는 유물이다. 선사 시대 고래는 우리 민족에게도 중요한 존재였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술 많이 먹는 사람을 ‘술고래’라고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을 쓴다. 언어는 삶을 반영한다. 고래에 관련된 이 많은 표현들은 고래가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였음을 말해 준다.
태화강이 있는 울산에서는 매년 고래 축제가 열린다. 그래서 지금도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 관광선이 운항 중이다. 우리의 바다는 지금도 세계적인 고래 서식지이다. 전 세계 80종의 고래 중 35종의 고래가 우리 바다에 살고 있다. 북태평양에 사는 고래들은 시원한 북극 연안에서 여름을 나고 추운 겨울이 되면 한반도 동해안으로 내려와 새끼를 낳는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보는 돌고래뿐 아니라 깊은 바다에 사는 몸집 큰 고래들도 연안에서 볼 수 있다. 밍크고래, 알래스카가 주 서식지인 혹등고래, 상어와 작은 고래까지 잡아먹는 바다의 지배자 범고래도 동해안이 주 활동 무대이다.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한 귀신고래는 1914년 미국의 해양학자 로이체프먼 앤드류스가 한국 회색고래라 이름 붙인 동해안의 대표적인 고래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원정 온 포경선은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에서 뛰어논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동해와 서해는 전 대양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난류와 한류가 만나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어 고래들이 좋아하는 먹이 생물들이 많이 분포하기 때문에 고래가 많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옛 문헌에도 고래에 관한 기록이 많다. 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우리 동해를 경해鯨海(고래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초의 어류도감 『현산어보玆山魚譜』에는 죽은 고래에서 고래기름을 빼내 열 항아리를 채웠다고 소개하는가 하면 조선의 백과사전 중 하나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새끼를 낳은 고래가 미역을 먹는 것을 보고 사람들도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였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인 공주 석장리 유적은 내륙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도 고래의 흔적이 발견됐다. 석장리 유적이 처음 발견된 1964년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는데 구석기인들이 복을 기원하며 집터 한가운데 새긴 것은 다름 아닌 고래였다. 마당 가운데 선명하게 고래 모양이 나타나 있다.
학자들은 바다와 멀리 있는 석장리에서 고래 흔적이 발견된 것을 놀랍게 여기고 있다. 1999년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선사 시대 유적에서는 고래 뼈가 무려 2,000점이나 발견됐다. 그중에 고래 사냥을 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고래 귀뼈도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고래의 일부에서 작살이 꽂힌 채로 발견된 유물이 있다. 3,000년 전 알래스카의 온돌을 만들었던 이들처럼 선사 시대 한반도인들도 고래잡이의 달인들이었다. 국립파리자연사박물관 교수였던 해양생물학자 다니엘 호비노는 자신의 저서 『포경의 역사』에서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를 “고래 사냥의 기원을 나타내는 기록화”라고 평가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선사 시대 한반도에서 고래잡이의 달인들이 알래스카로 건너간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추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를 소개한다.
덩치 큰 고래는 잡는 것보다 끌어 올리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고래 사냥의 오랜 전통인 부구浮具를 최근까지 사용해 왔는데, 반구대 암각화에도 바로 부구가 그려져 있다. 즉 알래스카 원주민과 선사 시대 한반도인이 같은 방식으로 고래를 잡았던 것이다.
이상목 전 관장은 내륙 지방이 동물들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 생활이었던 것에 비해 해안 지역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정착 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내륙보다 먹을거리가 풍성한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같은 생활 방식과 문화를 공유했고 오늘날 북태평양 해양 어로 문화라 불리는 독특한 해양 문화권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처럼 선사 시대 한반도인들도 해안을 따라 알래스카까지 갔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으로 지정학적 의미가 매우 크다. 한국은 환국⋅배달⋅조선을 이어온 대륙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22담로제를 경영하며 동아시아 바닷길을 제패한 해양 대제국 백제라는 나라가 나올 정도로 해양의 민족이었다. 지금의 한국인은 대륙과 해양의 유전자를 모두 가진 것이다.
선사 시대 우리 민족의 이동을 연구해 온 배재대 손성태 교수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알류샨 열도로 이어지는 해양 어로에 주목해 왔다. 캄차카반도부터 알래스카까지는 알류샨 열도, 즉 수많은 섬들로 촘촘히 이어져 있다. 충분히 건널 수 있다는 얘기인데 그는 실제로 이 추측을 증명해 준 탐험가를 소개한다.
범선帆船은 선체 위에 세운 돛에 바람을 받게 하여 그 풍력을 이용하여 진행하는 배, 즉 돛단배를 의미한다. 돛단배만으로도 보름 안에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목 전 관장은 이 루트를 통해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해 볼 만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큐에는 알래스카에서 온돌을 발굴한 리차드 크넥 교수가 2014년 9월 한국을 찾는 내용을 소개한다. 알래스카 유적이 한국의 온돌이 맞는지 온돌 전문가 김준봉 교수와 함께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김준봉 교수는 상생방송에도 출연해 온돌에 대한 심도 깊은 강의를 했었다.
김준봉 교수가 중국의 난방 방식인 캉炕과 한국의 온돌을 비교하는데, 방의 일부분만 데우는 캉은 입식형이고 바닥 전체를 데우는 온돌은 좌식형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크넥 교수는 이 설명을 듣고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난방 구조는 좌식형이라고 확실히 말한다.
같은 아시아의 난방 장치라도 한국형과 중국형은 차이가 있다. 중국의 난방 장치 캉은 방 한쪽에 입식형으로 아궁이를 설치한 반면, 우리는 신발을 벗고 생활할 수 있게 만든 좌식형이다. 방바닥 전체를 데울 수 있도록 방 바깥 아래쪽에 아궁이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뜨거운 공기와 연기는 고래라는 길을 통해 뻗어 나간다. 이 고래의 열기로 바닥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연기는 바깥에 있는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고래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온돌을 만들면서 불길을 고래라고 이름 붙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남한에서 발견된 온돌 중 가장 오래된 건 1985년 발견된 경남 사천 늑도의 온돌이다. 2,000년 전의 것으로 바닥의 일부만 따뜻하도록 만든 부분 온돌이다. 그런데 2005년 연해주에서 북옥저인들이 사용했던 온돌이 발견됐다. 2,500년 전의 것으로 온돌의 역사를 앞당겼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온돌 유적지들이 전부 한반도와 주변 일대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2,0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그것도 우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 알래스카에서 온돌이 발견된 것이다. 바닥을 걷어 내자 밑으로 고래가 선명히 드러나고 불을 땐 자리와 공기 유입구도 확인됐다.
김준봉 교수는 크넥 교수에게 직접 한국의 온돌을 몸으로 느껴 보도록 온돌방으로 안내하는데 이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영국의 교수가 미국의 알래스카를 조사하다 온돌을 발견하고 그 온돌의 원형을 확인하러 먼 한국 땅에 와서 온돌방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온돌방에 앉아 보고 방바닥을 손으로 만져 보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크넥 교수는 매우 놀라워했다.
다큐에서는 우석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온돌학회의 세미나도 소개한다. 이 자리에서 리차드 크넥 교수는 알래스카에서 발굴한 온돌의 발굴 과정부터 분석 결과까지 빠짐없이 발표했다. 알래스카 온돌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관심 역시 뜨거웠다.
학회의 세미나에서는 알래스카의 온돌이 한국에서 전해졌다는 데 의구심을 가진 학자도 있었다. 온돌의 분포 범위로 보면 시베리아에는 온돌이 없는데, 알래스카에는 그렇게 전해졌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크넥 교수는 “그것은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0년 전만 해도 북미에 온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고 답했다.
영국의 고고학자가 알래스카 유적을 발굴해서 한국의 온돌이라고 확신하는데 한국의 학자가 그걸 부정하는 이 장면은 참으로 아이러니해 보였다. 학자적 견해라는 입장을 떠나서 크넥 교수의 말대로 ‘인식의 문제’라는 말이 크게 와닿았다. 필자는 이것이 ‘역사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 그랬을 리가 없다, 한반도에 쪼그라들어 식민 역사로 살아온 우리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는 소한사관小韓史觀의 전형적 모습일 것이다.
우리에게 고래는 굉장히 친근한 바다 동물이다. 그러면서 최고의 자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고래와 함께 바다로 나가는 진취적 선택을 통해 미지의 대륙과 조우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큐 말미에 리차드 크넥 교수는 한국이 북극 문명에 뚜렷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유적을 통해서 확신하게 됐지만, 인류사의 시원과 이동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통해서 제대로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책 해제에서는 알래스카를 넘어서 인디언 생활 문화 속에도 구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환국의 환족은 베링 해협을 건너 남북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이주하였다. 이것은 인디언의 언어, 혈액형, 체질, 치아, 문화 등을 연구한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북미 인디언과 동북아인의 연관성은 인디언의 생활 도구와 풍습에서도 확인된다.
온돌은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방식이다 보니 거실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생활하고, 방바닥을 항상 청결하게 관리해 위생적 거주 형식을 유지했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의 선수들이 다른 어떤 동계 올림픽보다 따뜻하게 숙소 생활을 했다는 소식은 당시 널리 회자되었다. 이처럼 아파트든 주택이든 한국의 어디에도 온돌의 변형된 난방 형태가 기본 장착되어 있다.
조선인들이 서양보다 먼저 난방 장치를 발명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 전달의 난방 장치를 만드는 데 놀라고, 그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 방법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 프랑스인 여행가 듀크로끄
100년 전 조선을 여행했던 서양인들의 눈에는 온돌이 이렇게나 효율적이고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온돌에서 나고 온돌에서 자랐으며 온돌에서 죽을 것이다.”
역사학자 겸 민속학자 손진태는 1928년 잡지 〈별건곤〉에 한민족의 문화는 “온돌을 태반으로 하여 탄생하였으며 우리의 민족성은 온돌을 자모慈母로 하여 훈육되었다.”라고 썼다. 이른바 우리는 ‘온돌 민족’인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북단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3,000년 전 한국의 온돌은 유라시아 대륙 중심의 사고 속에서 미처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고대사의 존재를 밝혀 준다. 고래를 따라 바닷길을 개척하고 고래와 함께 알래스카에 문명의 꽃을 피워 낸 선사 시대 한반도인,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모습을 드러낸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
다큐 소개
이번 호에서는 KBS 1TV에서 방영된 〈다큐 공감 74회 - 한반도에서 알래스카까지! 고래의 길을 가다〉의 내용을 정리해 보려 한다. 2003년,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고고학계가 깜짝 놀랄 만한 발굴이 이뤄졌다. 한국형 온돌이 알래스카에서 발굴된 것이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3,000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 도대체 누가 왜 알래스카에 한국식 온돌을 짓고 살았던 걸까?
2014년 11월 1일 방송된 이 다큐멘터리에서 제작진은 시베리아 대륙에서 시작해 만주 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대륙 로드에서 벗어나 한반도와 캄차카반도, 알류샨 열도, 알래스카를 잇는 북태평양 해양 로드를 조명하고 고대 한반도인의 삶을 추적한다. 고래를 잡던 해양 어로 문화권의 고래의 길과 한국인의 독특한 주거 문화인 온돌의 길을 조사하며 이 두 개의 길이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밝히고 알래스카의 선사인들이 한국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밝힌다.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온돌 유적의 충격
세계 최대의 고래 서식지라 불리는 알래스카는 1년 내내 고래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선사 시대 문명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알래스카에서 영국 애버딘 대학의 고고학자 리차드 크넥Rick Knecht 교수가 알래스카 정부와 공동으로 발굴을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03년 온돌 집이 발굴됐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발굴팀을 이끌고 있던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리차드 크넥 교수는 약 3,000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식 온돌과 매우 낯익은 인상의 탈 조각을 발굴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탈이 고래 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3,000년 전 이곳에 한국식 온돌을 만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고래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살게 된 것일까?
크넥 교수팀이 발굴하는 곳은 주로 선사 시대 알래스카 원주민이 살았던 곳이다. 고고학의 불모지로 알려졌던 알래스카지만 영국 애버딘 대학과 알래스카주 정부의 후원으로 발굴이 시작된 이후 알래스카는 선사 시대 주요 유적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크넥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미척개지와 같은 알래스카의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인류 문화를 발전시키는 엄청난 진보라고 생각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혁명’, ‘인류문화의 엄청난 진보’는 모두 한국과 관련이 있다.
아낙막 섬 발굴지는 놀라움 그 자체였어요. 마치 ‘한국의 온돌’ 같아 보였어요.
- 리차드 크넥 교수
- 리차드 크넥 교수
미국 고고학회가 발간하는 격월간지 《고고학(Archaeology)》 2007년 5~6월호는 알래스카주 어널래스카Unalaska시 아막Amaknak섬에서 다리 건설을 위한 발굴을 하던 중 온돌을 갖춘 집터가 나왔다고 보고했다. 땅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돌을 정교하게 쌓아 만든 선사 시대 집터로 약 3,000년 전에 조성된 것이었다. 문명의 불모지라 여겨 온 알래스카에 선사 시대부터 상당히 발달된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음을 말해 주는 엄청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크넥 교수는 “지난 1997년에도 이 지역에서 온돌 구조가 발굴됐지만 그때는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크넥 교수에게 한국의 온돌을 떠올리게 한 것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이 굴뚝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크넥 교수는 이 터가 ‘국보급 유적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발굴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이곳은 새로운 다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굴된 유적인데 발굴 시작 후 1년도 못 돼서 사람들은 다리 건설을 택했고 유적은 다시 깊은 땅 밑에 묻히고 말았다.
다시 묻힌 그 유적이 정말 한국식 온돌이었을지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크넥 교수에게 한국에서 발견된 온돌 유적 자료를 보여 주었다. 자료들을 본 교수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당시 발굴 사진들을 보여 주며 비교를 했다. 비록 유적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혔지만 알래스카에 흔적을 남긴 고대 한반도인에 대한 강력한 호기심을 남겨 주었다.
“정말 놀라워요. 정말 비슷한데요. 한국에서 찍었다고 해도 믿겠어요. 보세요. 한국의 선사인들이 이 유적과 비슷한 집터를 사용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한국과 알래스카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죠.” - 리차드 크넥 교수
알류샨 박물관과 고래 뼈 탈
유적이 발견된 어널래스카시는 수천 년 동안 미국 내 최고의 어획량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항구 도시이다. 이곳 주민들에게도 한국형 온돌을 가진 선사 시대 유적의 발견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주민들의 안전 문제로 유적이 땅에 묻혔지만 어널래스카의 당시 셜리 마콰르츠 시장도 이 유적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적이) 한국과 알래스카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면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죠.”라고 말하며 무척 흥미로워했다. 이 유적이 알래스카 고대사의 중요한 단서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상한 관심 덕분에 유적과 함께 발굴된 많은 유물들은 다행히도 인근의 ‘알류샨 박물관’에 보존 조치되었다. 아막낙섬 발굴 터에서 수습한 유물들에는 선사 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돌로 된 기름등잔이 있다. 이 등잔에는 지금도 고래기름을 태운 흔적이 뚜렷하다. 선사 시대의 고래기름은 연기가 나지 않고 화력이 좋은 최첨단 연료였다.
이곳엔 등잔과 함께 수많은 고래 뼈들이 보관돼 있다.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이 천장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사다리를 고래 뼈로 만들었다고 한다. 알래스카는 나무가 아주 귀했으니까 고래 뼈로 사다리를 만드는 게 더 쉬웠을 거라는 얘기다. 나무 대신 고래 뼈로 집에 대들보를 세웠던 이들은 고래 사냥법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래를 활용해 척박한 삶의 환경을 극복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알래스카 선사인들은) 고래의 내장으로 비옷을 만들었고, 고래 신경으로 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고기는 음식으로 먹었죠. 기름은 태워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거나 불빛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고래는 버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뼈는 그 자체로 작살을 만들거나 작은 그릇이나 병을 만들고 탈도 만들었죠. 그렇게 고래의 모든 부위는 각각의 용도를 위해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 잉그리드 마티스 알류샨 박물관 학예사
- 잉그리드 마티스 알류샨 박물관 학예사
공식적으로 고래잡이는 금지됐지만 국제포경위원회의 허가에 따라 알래스카에서는 지금도 1년에 103마리의 고래를 잡을 수 있다. 단 알래스카 전통 방식으로 사냥을 해야 하고 잡은 고래는 마을 주민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 자료 화면에는 고래를 잡아 육지로 끌어 올릴 때 족히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줄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보인다.
3,000년 전 한국형 온돌을 만들고 이곳에 정착했던 이들도 고래와 함께 이런 모습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사실을 말해 주는 중요한 단서 하나가 알류샨 박물관 특별 전시실에 있다. 그것은 2007년도에 발견된 고래 뼈로 만든 탈이다.
발견된 것은 두 개의 조각뿐으로 최근에 조각을 합쳐서 원래 모양을 알게 됐다. 고래 뼈로 만든 이 탈의 부드러운 눈썹의 선과 가느다란 눈매가 어딘가 우리 눈에 익숙하다. 온돌 터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 중에 유독 이 탈을 특별하게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의 울산 울주군 태화강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사 시대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 이곳에 살던 선사인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암각화에는 해양과 육상 동물들 그리고 사냥 장면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353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림이 한 면에 있는 것이다. 그중 58점이 고래 그림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주인공은 고래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고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출처 : 나는 박물관 간다)
그런데 이 암각화에는 많은 동물들 속에 유일하게 사람 얼굴 형상이 있다. 선사 시대 암각화 전문가인 이상목 전 울산암각화박물관 관장은 알래스카 고래 뼈 탈의 얼굴이 이것과 닮았다고 말한다.
많이 닮았어요. 특히 눈썹하고 눈 사이 빈 공간이라든지. 눈썹과 코 모양을 마치 고래 뒤집어진 것처럼 그린 부분이 (반구대 암각화와) 유사성이 굉장히 많아요. 전체적으로 얼굴이 굉장히 길고 역삼각 형태의 모습들이 중국이나 이런 데서 보이는 둥근 형태의 탈과는 차이점이 많네요. 그리고 이것들은 알래스카 이누이트족의 마스크 그림입니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물고기가 생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먹거리였는데 (유적에) 물고기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물고기가 가면 형태로 바뀌었다는 거죠. (탈의 형태) 모티브는 고래 꼬리들, 이것도 고래 꼬리잖아요. 왜냐면 물고기는 꼬리가 수직인데 고래는 수평이잖아요.
- 이상목 전 관장/울산 암각화 박물관
- 이상목 전 관장/울산 암각화 박물관
고래가 사람에게 남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고래의 꼬리 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알래스카 고래 뼈 탈과 반구대 암각화의 얼굴상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마도 고래 토템이라고 볼 수 있는 문화가 고래 뼈 탈에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반구대 암각화 역시 이 주장을 잘 보여 주는 유물이다. 선사 시대 고래는 우리 민족에게도 중요한 존재였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를 사냥하던 집단들이 새긴 그림인데 사실 그쪽 지역(알래스카)에도 마찬가지로 고래를 사냥했던 해양 어로 민족들이 만든 탈이겠죠. 이들 사이에는 분명히 신화적인 공통성이 충분히 내재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이상목 전 관장/울산암각화박물관
한국 문화 속의 고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술 많이 먹는 사람을 ‘술고래’라고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을 쓴다. 언어는 삶을 반영한다. 고래에 관련된 이 많은 표현들은 고래가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였음을 말해 준다.
태화강이 있는 울산에서는 매년 고래 축제가 열린다. 그래서 지금도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 관광선이 운항 중이다. 우리의 바다는 지금도 세계적인 고래 서식지이다. 전 세계 80종의 고래 중 35종의 고래가 우리 바다에 살고 있다. 북태평양에 사는 고래들은 시원한 북극 연안에서 여름을 나고 추운 겨울이 되면 한반도 동해안으로 내려와 새끼를 낳는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보는 돌고래뿐 아니라 깊은 바다에 사는 몸집 큰 고래들도 연안에서 볼 수 있다. 밍크고래, 알래스카가 주 서식지인 혹등고래, 상어와 작은 고래까지 잡아먹는 바다의 지배자 범고래도 동해안이 주 활동 무대이다.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한 귀신고래는 1914년 미국의 해양학자 로이체프먼 앤드류스가 한국 회색고래라 이름 붙인 동해안의 대표적인 고래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원정 온 포경선은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에서 뛰어논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동해와 서해는 전 대양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난류와 한류가 만나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어 고래들이 좋아하는 먹이 생물들이 많이 분포하기 때문에 고래가 많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옛 문헌에도 고래에 관한 기록이 많다. 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우리 동해를 경해鯨海(고래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초의 어류도감 『현산어보玆山魚譜』에는 죽은 고래에서 고래기름을 빼내 열 항아리를 채웠다고 소개하는가 하면 조선의 백과사전 중 하나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새끼를 낳은 고래가 미역을 먹는 것을 보고 사람들도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였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인 공주 석장리 유적은 내륙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도 고래의 흔적이 발견됐다. 석장리 유적이 처음 발견된 1964년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는데 구석기인들이 복을 기원하며 집터 한가운데 새긴 것은 다름 아닌 고래였다. 마당 가운데 선명하게 고래 모양이 나타나 있다.
학자들은 바다와 멀리 있는 석장리에서 고래 흔적이 발견된 것을 놀랍게 여기고 있다. 1999년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선사 시대 유적에서는 고래 뼈가 무려 2,000점이나 발견됐다. 그중에 고래 사냥을 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고래 귀뼈도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고래 사냥과 해양 어로 문화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고래의 일부에서 작살이 꽂힌 채로 발견된 유물이 있다. 3,000년 전 알래스카의 온돌을 만들었던 이들처럼 선사 시대 한반도인들도 고래잡이의 달인들이었다. 국립파리자연사박물관 교수였던 해양생물학자 다니엘 호비노는 자신의 저서 『포경의 역사』에서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를 “고래 사냥의 기원을 나타내는 기록화”라고 평가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고래를 적극적으로 포획을 해야 되는 유용한 생활 자원, 식량 자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고래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이미 오랜 시대에 걸쳐 누적돼 있었다는 것, 지금부터 7,000년 전 황성동 유적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가 바로 고래에 있었던 거죠.
- 정의도 원장/한국 문물연구원
- 정의도 원장/한국 문물연구원
다큐멘터리에서는 선사 시대 한반도에서 고래잡이의 달인들이 알래스카로 건너간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추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를 소개한다.
부구는 원주민들이 물개 가죽을 베어서 풍선처럼 만든 그런 도구입니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에도 그런 그림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래가 있고 배가 있고 작살을 (고래가) 맞고 있죠. 여기 보면 알 수 없는 물체가 하나 있어요. 항상 고래 사냥 장면에는 배와 함께 이런 알 수 없는 물체가 있어요. 이것이 부구라는 도구들인데 실제로 에스키모인들을 보면 물개나 고래를 따라가서 작살을 찍으면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고래를 당기는 게 아니고 바로 이 부구라는 도구가 물에 뜨잖아요. 이게 고래나 이런 물개 같은 것들을 잡게 만들어요. 굉장히 중요한 도구인데 에스키모인들의 카누 위에 이 부구가 실려져 있습니다.
- 이상목 전 관장/울산암각화박물관
- 이상목 전 관장/울산암각화박물관
덩치 큰 고래는 잡는 것보다 끌어 올리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고래 사냥의 오랜 전통인 부구浮具를 최근까지 사용해 왔는데, 반구대 암각화에도 바로 부구가 그려져 있다. 즉 알래스카 원주민과 선사 시대 한반도인이 같은 방식으로 고래를 잡았던 것이다.
인류사가 농경에서 시작되었다, 또는 목축에서 시작됐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해양 어로 문화라는 아주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 문화의 특징들은 굉장히 이른 시기에도 불구하고, 농경 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해양 어로 자원을 통해서 정착 생활을 했던 아주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상목 전 관장/울산암각화박물관
이상목 전 관장은 내륙 지방이 동물들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 생활이었던 것에 비해 해안 지역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정착 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내륙보다 먹을거리가 풍성한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같은 생활 방식과 문화를 공유했고 오늘날 북태평양 해양 어로 문화라 불리는 독특한 해양 문화권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처럼 선사 시대 한반도인들도 해안을 따라 알래스카까지 갔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으로 지정학적 의미가 매우 크다. 한국은 환국⋅배달⋅조선을 이어온 대륙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22담로제를 경영하며 동아시아 바닷길을 제패한 해양 대제국 백제라는 나라가 나올 정도로 해양의 민족이었다. 지금의 한국인은 대륙과 해양의 유전자를 모두 가진 것이다.
고래 사냥을 하려면 바다에 타고 나갈 배가 있어야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여러 척의 배가 있습니다. 배는 고래의 몸부림을 버텨 낼 정도로 튼튼해야 합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경남 창녕 비봉리에서 발견된 배의 파편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비봉리 목선은 2003년 태풍으로 침수된 지역을 재건하다가 발견되었는데, 약 8천 년 전에 제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많은 학자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8천 년 전이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에 속합니다. 소나무 재질로, 최대 길이 약 310㎝, 폭 60㎝, 깊이 약 20㎝로 추정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울산에 세계 최대 조선소가 있는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이 조선 강국이 되기 위한 유전자는 어쩌면 8천 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 오동석 저자 / 『나는 박물관 간다』 책에서
- 오동석 저자 / 『나는 박물관 간다』 책에서
한반도에서 아메리카로
아마도 해양 자원이 필요한 아시아 해안의 사람들은 고래 사냥이라든지 바다표범 사냥, 또는 낚시를 하기 위해 해양 동물을 따라서 알래스카로 왔을 것입니다. 아마 고래들을 따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북극 역사에서 아주 유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누이트족들과 유럽 사람들도 모두 고래를 따라 먼 거리를 이동했습니다. 그런 일이 벌써 선사 시대부터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 리차드 크넥 교수
선사 시대 우리 민족의 이동을 연구해 온 배재대 손성태 교수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알류샨 열도로 이어지는 해양 어로에 주목해 왔다. 캄차카반도부터 알래스카까지는 알류샨 열도, 즉 수많은 섬들로 촘촘히 이어져 있다. 충분히 건널 수 있다는 얘기인데 그는 실제로 이 추측을 증명해 준 탐험가를 소개한다.
캄차카반도까지 도착한 이후에 바로 해류를 타고서 알류샨 열도를 따라서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되죠. 1803년에 본 랑고스도르프라는 사람이 캄차카반도에서 범선을 타고 알래스카까지 여행을 한 일기가 있습니다. 그 일기에 따르면 이 사람이 하루에 225킬로씩 이동했거든요. 알류샨 열도의 총 길이가 1,700마일, 2,720킬로거든요. 12.5일이면 태평양 바다를 건너서 알래스카에 도착할 수 있더라고요.
- 손성태 교수/배재대 스페인중남미어학과
- 손성태 교수/배재대 스페인중남미어학과
범선帆船은 선체 위에 세운 돛에 바람을 받게 하여 그 풍력을 이용하여 진행하는 배, 즉 돛단배를 의미한다. 돛단배만으로도 보름 안에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목 전 관장은 이 루트를 통해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해 볼 만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캄차카반도와 한반도 사이는 굉장히 작은 섬들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해양 루트를 통해서 알래스카에서 한반도까지 수백 년, 수천 년 기간을 거친다면 상당한 교류가 있었겠죠. 그건 당연한 상상이고 반드시 생각해 볼 상상인데 우리가 그걸 이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상목 전 관장/울산암각화박물관
- 이상목 전 관장/울산암각화박물관
온돌의 길, 고래의 길
다큐에는 알래스카에서 온돌을 발굴한 리차드 크넥 교수가 2014년 9월 한국을 찾는 내용을 소개한다. 알래스카 유적이 한국의 온돌이 맞는지 온돌 전문가 김준봉 교수와 함께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김준봉 교수는 상생방송에도 출연해 온돌에 대한 심도 깊은 강의를 했었다.
김준봉 교수가 중국의 난방 방식인 캉炕과 한국의 온돌을 비교하는데, 방의 일부분만 데우는 캉은 입식형이고 바닥 전체를 데우는 온돌은 좌식형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크넥 교수는 이 설명을 듣고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난방 구조는 좌식형이라고 확실히 말한다.
같은 아시아의 난방 장치라도 한국형과 중국형은 차이가 있다. 중국의 난방 장치 캉은 방 한쪽에 입식형으로 아궁이를 설치한 반면, 우리는 신발을 벗고 생활할 수 있게 만든 좌식형이다. 방바닥 전체를 데울 수 있도록 방 바깥 아래쪽에 아궁이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뜨거운 공기와 연기는 고래라는 길을 통해 뻗어 나간다. 이 고래의 열기로 바닥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연기는 바깥에 있는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고래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온돌을 만들면서 불길을 고래라고 이름 붙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남한에서 발견된 온돌 중 가장 오래된 건 1985년 발견된 경남 사천 늑도의 온돌이다. 2,000년 전의 것으로 바닥의 일부만 따뜻하도록 만든 부분 온돌이다. 그런데 2005년 연해주에서 북옥저인들이 사용했던 온돌이 발견됐다. 2,500년 전의 것으로 온돌의 역사를 앞당겼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온돌 유적지들이 전부 한반도와 주변 일대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2,0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그것도 우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 알래스카에서 온돌이 발견된 것이다. 바닥을 걷어 내자 밑으로 고래가 선명히 드러나고 불을 땐 자리와 공기 유입구도 확인됐다.
김준봉 교수는 크넥 교수에게 직접 한국의 온돌을 몸으로 느껴 보도록 온돌방으로 안내하는데 이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영국의 교수가 미국의 알래스카를 조사하다 온돌을 발견하고 그 온돌의 원형을 확인하러 먼 한국 땅에 와서 온돌방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온돌방에 앉아 보고 방바닥을 손으로 만져 보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크넥 교수는 매우 놀라워했다.
알래스카에서 본 온돌이 한국에서는 현재 더욱 발전된 상태로 남아 있고 한국의 문화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 온돌은 아주 효율적이고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방법이죠. 온돌을 보고 나니 고고학에서 온돌을 과소평가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리차드 크넥 교수
- 리차드 크넥 교수
다큐에서는 우석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온돌학회의 세미나도 소개한다. 이 자리에서 리차드 크넥 교수는 알래스카에서 발굴한 온돌의 발굴 과정부터 분석 결과까지 빠짐없이 발표했다. 알래스카 온돌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관심 역시 뜨거웠다.
고래의 이동길과 온돌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분포와는 일치한다. 이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 김준봉 교수
- 김준봉 교수
학회의 세미나에서는 알래스카의 온돌이 한국에서 전해졌다는 데 의구심을 가진 학자도 있었다. 온돌의 분포 범위로 보면 시베리아에는 온돌이 없는데, 알래스카에는 그렇게 전해졌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크넥 교수는 “그것은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0년 전만 해도 북미에 온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고 답했다.
영국의 고고학자가 알래스카 유적을 발굴해서 한국의 온돌이라고 확신하는데 한국의 학자가 그걸 부정하는 이 장면은 참으로 아이러니해 보였다. 학자적 견해라는 입장을 떠나서 크넥 교수의 말대로 ‘인식의 문제’라는 말이 크게 와닿았다. 필자는 이것이 ‘역사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 그랬을 리가 없다, 한반도에 쪼그라들어 식민 역사로 살아온 우리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는 소한사관小韓史觀의 전형적 모습일 것이다.
결론
우리에게 고래는 굉장히 친근한 바다 동물이다. 그러면서 최고의 자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고래와 함께 바다로 나가는 진취적 선택을 통해 미지의 대륙과 조우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로서 저의 할 일은 한국과 북극의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들을 풀고 선사 인류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한국과 북극 사이에는 분명 어떤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고대 북극 지역의 문화 발달에 뚜렷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결코 고립되어서는 발달할 수 없습니다. 고대 선사 인류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이동하며 문화가 양쪽 지역에서 서로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리차드 크넥 교수
- 리차드 크넥 교수
다큐 말미에 리차드 크넥 교수는 한국이 북극 문명에 뚜렷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유적을 통해서 확신하게 됐지만, 인류사의 시원과 이동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통해서 제대로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책 해제에서는 알래스카를 넘어서 인디언 생활 문화 속에도 구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환국의 환족은 베링 해협을 건너 남북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이주하였다. 이것은 인디언의 언어, 혈액형, 체질, 치아, 문화 등을 연구한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북미 인디언과 동북아인의 연관성은 인디언의 생활 도구와 풍습에서도 확인된다.
온돌은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방식이다 보니 거실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생활하고, 방바닥을 항상 청결하게 관리해 위생적 거주 형식을 유지했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의 선수들이 다른 어떤 동계 올림픽보다 따뜻하게 숙소 생활을 했다는 소식은 당시 널리 회자되었다. 이처럼 아파트든 주택이든 한국의 어디에도 온돌의 변형된 난방 형태가 기본 장착되어 있다.
조선인들이 서양보다 먼저 난방 장치를 발명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 전달의 난방 장치를 만드는 데 놀라고, 그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 방법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 프랑스인 여행가 듀크로끄
100년 전 조선을 여행했던 서양인들의 눈에는 온돌이 이렇게나 효율적이고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온돌에서 나고 온돌에서 자랐으며 온돌에서 죽을 것이다.”
역사학자 겸 민속학자 손진태는 1928년 잡지 〈별건곤〉에 한민족의 문화는 “온돌을 태반으로 하여 탄생하였으며 우리의 민족성은 온돌을 자모慈母로 하여 훈육되었다.”라고 썼다. 이른바 우리는 ‘온돌 민족’인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북단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3,000년 전 한국의 온돌은 유라시아 대륙 중심의 사고 속에서 미처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고대사의 존재를 밝혀 준다. 고래를 따라 바닷길을 개척하고 고래와 함께 알래스카에 문명의 꽃을 피워 낸 선사 시대 한반도인,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모습을 드러낸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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