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세계사 |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거목巨木,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역사인물탐구]
김종우 객원기자 / 서울동대문도장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에 백범 김구가 있다면 만주 지역에는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있다.
김동삼은 흔히 ‘만주벌 호랑이’ 또는 ‘독립운동계 통합의 화신’으로 불린다. 독립운동 연구자들 사이에 가장 추앙받는 인물이 김동삼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하는 대중은 많지 않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그동안 많이 묻혀 있었고 특히 무장투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 보면 김동삼의 대일 항전이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과가 혁혁하다. 김동삼이 1923년 독립운동가 대표들의 최대 모임인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당시 독립운동계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념과 방략을 달리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 김동삼의 삶은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고 좌우 대립이 극심한 오늘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는 1878년 6월 23일(음력)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이름은 동삼東三,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이는 당시 만주 지역의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을 일컫는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그가 태어난 천전리는 흔히 내앞 마을로 불리는데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후손이 모여 사는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그는 한말 안동 지역의 최고 유학자며 지도자였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구학문인 성리학을 익히며 성장했다. 김흥락은 김성일의 종손이자 영남 퇴계 학맥의 적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안동 지역에서 퇴계의 학맥을 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로 여겨져 많은 존경을 받았다.
서산 김흥락은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 안동 의병을 일으키는 논의를 주도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김동삼도 청소년 시기에 이미 민족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 20대 중반 나이가 된 1905년을 전후하여 서울을 드나들며 한말 구국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김동삼이 계몽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안동 지방 유림 중에서 계몽 운동가로 변신한 대표적인 인물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 등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동의 유림 인사들 중에서 서울을 드나들면서 서양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대표적으로 동산 유인식이다. 석주 이상룡과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유인식은 성균관에서 단재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개화 운동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전통적인 성리학 질서에 뿌리를 두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흔히 ‘혁신유림’이라고 불렀다. 이상룡⋅유인식⋅김동삼 등이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혁신유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힘을 합쳐 안동 지방에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망 이후에는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 세 사람 가운데 이상룡이 1858년생으로 나이가 가장 많고 유인식은 그로부터 7년 연하이며 김동삼은 유인식보다 12년 연하였다. 1910년 당시 이상룡은 52세이고 유인식은 45세이며 김동삼은 32세였다. 앞의 두 사람이 중장년이었다고 한다면 김동삼은 청년이었던 셈이다. 청년 김동삼은 이들과 함께 역사적 격랑을 헤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김동삼은 계몽 운동의 실천 방안으로 근대적인 신식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여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1907년 3월 김동삼은 이상룡⋅유인식⋅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취임하였다. 협동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은 3년제 중등 과정이었다. 근대적인 학문을 가르치면서도 자주독립 정신과 애국심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사⋅지리⋅국어 교육 등에도 중점을 두었다. 시세 변화를 일깨우는 동시에 민족 지도자를 육성하려는 의도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과 국가 정신을 앙양하려는 의도 속에서 추진되었다.
협동학교는 영남 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이자, 새로운 깃발이었다. 그래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상을 보도하면서 그 역할에 대하여 격려와 기대감을 표시하였다. 협동학교는 신지식인, 젊은 지성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양성된 인물들이 경북 지역 곳곳으로 계몽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김동삼은 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09년 3월경에는 계몽 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에도 참가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 등을 중심으로 영남 지역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경북과 경남 전체의 계몽 운동가를 묶어 나갔다.
이 사실은 당시 그가 서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약하였고, 계몽 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겉으로는 협동학교라는 공개된 공간에서 민족 문제를 해결해 나갈 새로운 지성을 키워 내고,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삼은 이러한 조직을 통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군 기지 건설에 필요한 인적 물적인 기반을 구축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론을 견지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신민회나 대동청년단 등은 모두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사실상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신민회는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倂呑되자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망명亡命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망명 계획을 전달받은 안동의 이상룡은 처남과 상의하여 망명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를 실행하는 역할을 김동삼이 맡았다. 그는 집안 아우인 김만식을 미리 만주로 파견하여 기초 조사를 마친 뒤 1911년 1월 집단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의성 김씨와 고성 이씨가 주축이 되어 수백 명의 식구들이 가산을 정리하여 길을 나섰다. 이들은 먼 길을 거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하여 이회영⋅이동녕 일가와 합류하였다.
김동삼을 비롯한 망명자들은 가장 먼저 교민들의 생활 공동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이는 교민 사회를 근거로 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상룡이 사장으로 추대되었고 내무부장에 이회영,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선출되었으며 아직 젊은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의 임무를 온몸으로 실행하였다. 경학사는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설치하였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곧바로 이어진 흉작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경학사는 부득이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13년에 경학사를 대신하여 부민단扶民團을 새로 조직하였는데 김동삼은 여기서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김동삼은 1914년에 신흥강습소 졸업생 등 385명을 이끌고 유하현 밀림 지대에 들어가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척하였다.
백두산 서쪽에 있다고 해서 백서농장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말이 농장이지 사실은 병농 일체를 추구했던 독립군 비밀 병영이었다. 그는 백서농장의 장주莊主에 선임되었다. 장주라는 것은 농장 주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군 군영의 최고 지휘자의 직책이라 할 수 있다. 김동삼은 백서농장의 장주를 맡으면서 독립운동계의 거목으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2월에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는데, 김동삼은 이상룡과 더불어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는 3.1운동 전년에 준비된 것으로 ‘무오戊午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당시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들이 서명하였고, 주로 만주 지역 활동가들이 주역을 맡았다. ‘대한大韓’으로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 ‘대한大韓’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선언서 본문 끝의 대표자 39명은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던 최고 지도자들이었다. 김교헌⋅김규식⋅김동삼⋅김약연⋅김좌진을 비롯하여 조소앙⋅여준⋅이동녕⋅이동휘⋅이범윤⋅이상룡⋅이승만⋅이시영⋅박용만⋅박은식⋅신규식⋅신채호⋅안창호⋅조성환⋅허혁 등 모두 당대의 독립운동을 대표할 만한 이들이었다. 이 명단에 김동삼이 있는 걸 보면 그가 이미 독립운동계의 거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와의 강력한 항전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적 성격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의 정비 또는 새로운 결성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상룡⋅이탁李鐸 등 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서
서로군정서는 신흥중학을
1922년 김동삼은 남만주의 주요한 독립운동 단체 8단 9회의 대표 71명이 모인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를 주도, 합의를 이끌어 내어
대한통의부의 항일 무장투쟁을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1921년 초부터 임시정부의 조직 개편을 비롯한 다방면의 문제 해결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2년 동안 준비 과정을 거쳐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에 중국 상하이(상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렸다. 국내를 비롯하여 상해⋅만주⋅북경⋅노령⋅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의 단체, 단체 대표 400명 정도가 상하이에 집결했고, 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는 규모였다. 이 회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집결하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또 민주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 대표자 총회였다.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의장 두 사람은 좌파와 우파를 대표하는 윤해와 안창호가 선임되었다. 김동삼은 의장뿐 아니라 군사 분과 위원장으로도 선출되었는데, 남만주와 대한통의부의 군사 단체로서 위상이 반영된 인선이었다.
김동삼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갈등을 조정하여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만주로 돌아왔다.
그는 1924년 전만통일회의 의장(1924), 정의부 외무⋅학무⋅교육위원장(1925)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2월과 10월 두 차례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생활 개선과 농업 생산 증대를 꾀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정의부正義府 대표로 참의부參議部⋅신민부新民府⋅정의부 등 3부 통합을 위해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해 12월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으며,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유일당 결성에 주력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이상룡⋅박은식⋅유인식⋅윤세복⋅신채호⋅김승학처럼 대부분 역사학자이거나 역사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김동삼 역시 대종교의 독립운동과 해학 이기가 창립한 단학회와의 연관성(3대 최시흥 회장 시절, 김동삼은 고문을 맡음)을 살펴볼 때 환인⋅환웅⋅단군을 중심으로 한 우리 역사와 정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강한 역사의식은 독립 투쟁을 전개하는 자양분이 되고 동지들을 규합하는 힘이 되었다.
1930년 신민부 군정 세력과 함께 #만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하여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여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북만으로 이동하여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을 추진하던 중 하얼빈哈爾濱에서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3월 3일(음력)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평소 김동삼을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장례에 나섰다. 한용운은 김동삼의 유해를 자신의 거처인 심우장尋牛莊으로 옮기고 모든 장례 절차를 주선하였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는데 많은 문상객들이 김동삼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여 모였다. 한용운은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른 뒤, 선생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한용운은 영결식에서 방성대곡放聲大哭하면서 다시 이런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만해가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때 한 번뿐이라는 일화는 김동삼의 성품을 말해 준다.
1934년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하얼빈에서 달려온 맏아들 정묵에게 전했다는 김동삼의 말이 ⟪조선일보》 1934년 4월 2일자 기사에 전한다.
김동삼은 독립운동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가정조차도 가까이한 적이 없다. 사생활이 전혀 없는 삶이었다. 한 명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뒤에 가려진 가족들의 생활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단한 삶의 여정이었다.
1911년 겨울,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손을 잡고 망명을 떠난 이해동李海東(1905~2003)은 훗날 김동삼의 며느리가 된다. 그녀는 1989년 망명 77년 만에 만주를 떠나 고국에 돌아왔다. 이해동이 남긴 회고록 『만주생활 77년』에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동삼 선생의 가족사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가슴 시린 이야기다.
또 한 권의 책은 김동삼의 손자 김중생이 남긴 『험난한 팔십인생 죽음만은 비켜갔다』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생애뿐만 아니라 한⋅중⋅일 3국 사이에 펼쳐진 동아시아의 역사를 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은 삼대三代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일송 김동삼 선생 집안은 삼대가 몰락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2022년 4월 13일에는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모식을 겸해 〈일송 김동삼 선생 기념사업회〉 발족식이 열렸다. 앞으로 기념사업회를 기점으로 다양한 기념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자료>
김병기. 『만주지역 통합운동의 주역 김동삼』. 서울: 역사공간, 2012.
김중생. 『험난한 팔십인생 죽음만은 비켜갔다』. 서울: 명지출판사, 2013.
김희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경기도: 지식산업사, 2009.
이시종. “일송 김동삼의 역사인식과 독립투쟁”. 일송김동삼선생 기념사업회, 2022.
대한사랑 계간지 3호, 2020.
< 인터넷 자료 >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815gb.or.kr)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홈페이지(https://db.history.go.kr/) /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순국선열유족회 홈페이지(www.soongook.org)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에 백범 김구가 있다면 만주 지역에는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있다.
김동삼은 흔히 ‘만주벌 호랑이’ 또는 ‘독립운동계 통합의 화신’으로 불린다. 독립운동 연구자들 사이에 가장 추앙받는 인물이 김동삼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하는 대중은 많지 않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그동안 많이 묻혀 있었고 특히 무장투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 보면 김동삼의 대일 항전이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과가 혁혁하다. 김동삼이 1923년 독립운동가 대표들의 최대 모임인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당시 독립운동계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념과 방략을 달리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 김동삼의 삶은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고 좌우 대립이 극심한 오늘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출생과 성장, 국내 활동
혁신유림의 일원이 되어
그는 1878년 6월 23일(음력)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이름은 동삼東三,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이는 당시 만주 지역의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을 일컫는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그가 태어난 천전리는 흔히 내앞 마을로 불리는데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후손이 모여 사는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그는 한말 안동 지역의 최고 유학자며 지도자였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구학문인 성리학을 익히며 성장했다. 김흥락은 김성일의 종손이자 영남 퇴계 학맥의 적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안동 지역에서 퇴계의 학맥을 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로 여겨져 많은 존경을 받았다.
서산 김흥락은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 안동 의병을 일으키는 논의를 주도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김동삼도 청소년 시기에 이미 민족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 20대 중반 나이가 된 1905년을 전후하여 서울을 드나들며 한말 구국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김동삼이 계몽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안동 지방 유림 중에서 계몽 운동가로 변신한 대표적인 인물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 등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동의 유림 인사들 중에서 서울을 드나들면서 서양 사조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대표적으로 동산 유인식이다. 석주 이상룡과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유인식은 성균관에서 단재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개화 운동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전통적인 성리학 질서에 뿌리를 두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흔히 ‘혁신유림’이라고 불렀다. 이상룡⋅유인식⋅김동삼 등이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혁신유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힘을 합쳐 안동 지방에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망 이후에는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 세 사람 가운데 이상룡이 1858년생으로 나이가 가장 많고 유인식은 그로부터 7년 연하이며 김동삼은 유인식보다 12년 연하였다. 1910년 당시 이상룡은 52세이고 유인식은 45세이며 김동삼은 32세였다. 앞의 두 사람이 중장년이었다고 한다면 김동삼은 청년이었던 셈이다. 청년 김동삼은 이들과 함께 역사적 격랑을 헤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구국 계몽 운동
김동삼은 계몽 운동의 실천 방안으로 근대적인 신식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여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1907년 3월 김동삼은 이상룡⋅유인식⋅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취임하였다. 협동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은 3년제 중등 과정이었다. 근대적인 학문을 가르치면서도 자주독립 정신과 애국심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사⋅지리⋅국어 교육 등에도 중점을 두었다. 시세 변화를 일깨우는 동시에 민족 지도자를 육성하려는 의도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과 국가 정신을 앙양하려는 의도 속에서 추진되었다.
협동학교는 영남 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이자, 새로운 깃발이었다. 그래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상을 보도하면서 그 역할에 대하여 격려와 기대감을 표시하였다. 협동학교는 신지식인, 젊은 지성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양성된 인물들이 경북 지역 곳곳으로 계몽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독립군 양성을 위한 기반 구축
김동삼은 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09년 3월경에는 계몽 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에도 참가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 등을 중심으로 영남 지역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경북과 경남 전체의 계몽 운동가를 묶어 나갔다.
이 사실은 당시 그가 서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약하였고, 계몽 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겉으로는 협동학교라는 공개된 공간에서 민족 문제를 해결해 나갈 새로운 지성을 키워 내고,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삼은 이러한 조직을 통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군 기지 건설에 필요한 인적 물적인 기반을 구축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론을 견지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신민회나 대동청년단 등은 모두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사실상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만주 망명과 서간도 무장투쟁
독립군 기지 건설과 집단 망명 결행
신민회는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倂呑되자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망명亡命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망명 계획을 전달받은 안동의 이상룡은 처남과 상의하여 망명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를 실행하는 역할을 김동삼이 맡았다. 그는 집안 아우인 김만식을 미리 만주로 파견하여 기초 조사를 마친 뒤 1911년 1월 집단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의성 김씨와 고성 이씨가 주축이 되어 수백 명의 식구들이 가산을 정리하여 길을 나섰다. 이들은 먼 길을 거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하여 이회영⋅이동녕 일가와 합류하였다.
경학사와 신흥학교를 세우다
김동삼을 비롯한 망명자들은 가장 먼저 교민들의 생활 공동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이는 교민 사회를 근거로 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상룡이 사장으로 추대되었고 내무부장에 이회영,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선출되었으며 아직 젊은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의 임무를 온몸으로 실행하였다. 경학사는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설치하였다.
독립군영 백서농장을 건설하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곧바로 이어진 흉작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경학사는 부득이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13년에 경학사를 대신하여 부민단扶民團을 새로 조직하였는데 김동삼은 여기서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김동삼은 1914년에 신흥강습소 졸업생 등 385명을 이끌고 유하현 밀림 지대에 들어가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척하였다.
백두산 서쪽에 있다고 해서 백서농장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말이 농장이지 사실은 병농 일체를 추구했던 독립군 비밀 병영이었다. 그는 백서농장의 장주莊主에 선임되었다. 장주라는 것은 농장 주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군 군영의 최고 지휘자의 직책이라 할 수 있다. 김동삼은 백서농장의 장주를 맡으면서 독립운동계의 거목으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통합 운동의 주역이 되다
대한독립선언서 민족 대표자로 참가하다
1919년 2월에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는데, 김동삼은 이상룡과 더불어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는 3.1운동 전년에 준비된 것으로 ‘무오戊午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당시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들이 서명하였고, 주로 만주 지역 활동가들이 주역을 맡았다. ‘대한大韓’으로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 ‘대한大韓’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선언서 본문 끝의 대표자 39명은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던 최고 지도자들이었다. 김교헌⋅김규식⋅김동삼⋅김약연⋅김좌진을 비롯하여 조소앙⋅여준⋅이동녕⋅이동휘⋅이범윤⋅이상룡⋅이승만⋅이시영⋅박용만⋅박은식⋅신규식⋅신채호⋅안창호⋅조성환⋅허혁 등 모두 당대의 독립운동을 대표할 만한 이들이었다. 이 명단에 김동삼이 있는 걸 보면 그가 이미 독립운동계의 거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의 주역이 되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와의 강력한 항전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적 성격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의 정비 또는 새로운 결성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상룡⋅이탁李鐸 등 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확대⋅개편
하여 업무 전반을 총괄하는 총무사장을 맡았다. 한족회는 독립군을 편성하고 독립 전쟁을 수행할 군정부를 건립하려고 했다. 백서농장은 폐지되고 1919년 11월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가 발족돼 김동삼은 군권을 통솔하는 참모장이 됐다. 당초에는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려 하였지만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서軍政署로 명칭을 바꾸어 임시정부의 하부기관으로 편입하였다.서로군정서는 신흥중학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로 개편하고 1919년 음력 5월 정식 사관학교로 개교식을 했다. 1911년 신흥강습소에서부터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고 주력이 안도현 삼림 지역으로 이동하기까지 3천,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신흥학교와 백서농장 출신자, 그리고 뒤이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이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의열단에도 참여했다.1922년 김동삼은 남만주의 주요한 독립운동 단체 8단 9회의 대표 71명이 모인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를 주도, 합의를 이끌어 내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를 결성했다. 대한통의부는 군사 활동과 동포 사회에 대한 자치 행정의 기능을 강화하여 정부 형태를 갖춘 조직이다. 김동삼은 대한통의부의 총장이자 중앙행정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사실상 행정 수반이자 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었다. 청산리 대첩 이후에 경신참변庚申慘變(1920년)과 자유시 참변(1921년)을 거친 뒤, 만주 지역 군사 세력을 통합하려던 그의 노력이 진전을 보인 것이다.대한통의부의 항일 무장투쟁을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의용군義勇軍
이다. 통의부 의용군의 무장 활동 중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이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와 군경 등 적 사살을 통한 치안의 교란이었다. 당시 국내 보도에 1923년 중 독립군의 출현 횟수가 무려 1천 건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국경 지역에서 전개된 치열한 무장 활동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국민대표회의 의장을 맡다
1921년 초부터 임시정부의 조직 개편을 비롯한 다방면의 문제 해결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2년 동안 준비 과정을 거쳐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에 중국 상하이(상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렸다. 국내를 비롯하여 상해⋅만주⋅북경⋅노령⋅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의 단체, 단체 대표 400명 정도가 상하이에 집결했고, 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는 규모였다. 이 회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집결하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또 민주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 대표자 총회였다.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의장 두 사람은 좌파와 우파를 대표하는 윤해와 안창호가 선임되었다. 김동삼은 의장뿐 아니라 군사 분과 위원장으로도 선출되었는데, 남만주와 대한통의부의 군사 단체로서 위상이 반영된 인선이었다.
김동삼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갈등을 조정하여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만주로 돌아왔다.
통의부 분열을 종식시키고 정의부를 조직하다
그는 1924년 전만통일회의 의장(1924), 정의부 외무⋅학무⋅교육위원장(1925)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2월과 10월 두 차례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생활 개선과 농업 생산 증대를 꾀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정의부正義府 대표로 참의부參議部⋅신민부新民府⋅정의부 등 3부 통합을 위해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해 12월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으며,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유일당 결성에 주력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이상룡⋅박은식⋅유인식⋅윤세복⋅신채호⋅김승학처럼 대부분 역사학자이거나 역사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김동삼 역시 대종교의 독립운동과 해학 이기가 창립한 단학회와의 연관성(3대 최시흥 회장 시절, 김동삼은 고문을 맡음)을 살펴볼 때 환인⋅환웅⋅단군을 중심으로 한 우리 역사와 정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강한 역사의식은 독립 투쟁을 전개하는 자양분이 되고 동지들을 규합하는 힘이 되었다.
하얼빈에서 체포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
1930년 신민부 군정 세력과 함께 #만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하여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여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북만으로 이동하여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을 추진하던 중 하얼빈哈爾濱에서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3월 3일(음력)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름
평소 김동삼을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장례에 나섰다. 한용운은 김동삼의 유해를 자신의 거처인 심우장尋牛莊으로 옮기고 모든 장례 절차를 주선하였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는데 많은 문상객들이 김동삼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여 모였다. 한용운은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른 뒤, 선생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옥중 유언)
한용운은 영결식에서 방성대곡放聲大哭하면서 다시 이런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유사지추有事之秋에 분열과 혼란을 통합할 유일무이한 민족 지도자를 잃었다. 2천만 동포를 잃은 것과 같다.”
만해가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때 한 번뿐이라는 일화는 김동삼의 성품을 말해 준다.
글을 마치며
1934년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하얼빈에서 달려온 맏아들 정묵에게 전했다는 김동삼의 말이 ⟪조선일보》 1934년 4월 2일자 기사에 전한다.
“이런 일정한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남들이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원래 그런 죽음을 소망하였던 바인데 오늘날 이런 곳에서 죽게 되는 것은 유한遺恨으로도 생각된다. 죽기 전에 여러 친구들을 만나서 부탁할 말이 몇 가지 있지마는 어찌 마음대로 되겠느냐.”
김동삼은 독립운동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가정조차도 가까이한 적이 없다. 사생활이 전혀 없는 삶이었다. 한 명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뒤에 가려진 가족들의 생활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단한 삶의 여정이었다.
1911년 겨울,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손을 잡고 망명을 떠난 이해동李海東(1905~2003)은 훗날 김동삼의 며느리가 된다. 그녀는 1989년 망명 77년 만에 만주를 떠나 고국에 돌아왔다. 이해동이 남긴 회고록 『만주생활 77년』에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동삼 선생의 가족사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가슴 시린 이야기다.
또 한 권의 책은 김동삼의 손자 김중생이 남긴 『험난한 팔십인생 죽음만은 비켜갔다』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생애뿐만 아니라 한⋅중⋅일 3국 사이에 펼쳐진 동아시아의 역사를 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은 삼대三代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일송 김동삼 선생 집안은 삼대가 몰락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2022년 4월 13일에는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모식을 겸해 〈일송 김동삼 선생 기념사업회〉 발족식이 열렸다. 앞으로 기념사업회를 기점으로 다양한 기념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기대된다. ■
일송 김동삼 선생에 대한 주요 인사들의 인물평
김동삼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은 상해 임정을 지도한 김구 선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는 근대사의 대표적인 지도자다. - 『한국독립사』를 저술한 독립운동가 김승학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이분이 아니고는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일송을 잃은 우리 민족은 큰 불행이고 손실이다. - 만해 한용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의 3대 명장은 김동삼, 오동진, 김좌진 장군이다. -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만주 한인 사회에서 이념이나 지역적인 차이를 넘어 비난받지 않은 지도자가 드문데, 김동삼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은 큰 인물이었다. - 이강훈 전 광복회장
광복 직후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회식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고 가장 성과를 많이 낸 분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고 하면 과연 누구였겠느냐?”라는 어떤 학자의 질문에 좌중은 모두 “그는 일송 김동삼이다.” 하고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
1969년부터 10년간 독립운동편찬위원회 활동 시 수많은 독립운동가 증언을 통해 “공사公私 간에 흠결이 없는 분은 오직 일송 선생 한 분뿐”이라는 소리를 거듭 들었다. - 조동걸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이분이 아니고는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일송을 잃은 우리 민족은 큰 불행이고 손실이다. - 만해 한용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의 3대 명장은 김동삼, 오동진, 김좌진 장군이다. -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만주 한인 사회에서 이념이나 지역적인 차이를 넘어 비난받지 않은 지도자가 드문데, 김동삼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은 큰 인물이었다. - 이강훈 전 광복회장
광복 직후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회식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고 가장 성과를 많이 낸 분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고 하면 과연 누구였겠느냐?”라는 어떤 학자의 질문에 좌중은 모두 “그는 일송 김동삼이다.” 하고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
1969년부터 10년간 독립운동편찬위원회 활동 시 수많은 독립운동가 증언을 통해 “공사公私 간에 흠결이 없는 분은 오직 일송 선생 한 분뿐”이라는 소리를 거듭 들었다. - 조동걸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참고자료>
김병기. 『만주지역 통합운동의 주역 김동삼』. 서울: 역사공간, 2012.
김중생. 『험난한 팔십인생 죽음만은 비켜갔다』. 서울: 명지출판사, 2013.
김희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경기도: 지식산업사, 2009.
이시종. “일송 김동삼의 역사인식과 독립투쟁”. 일송김동삼선생 기념사업회, 2022.
대한사랑 계간지 3호, 2020.
< 인터넷 자료 >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815gb.or.kr)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홈페이지(https://db.history.go.kr/) /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순국선열유족회 홈페이지(www.soongo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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