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천하 사방에 다물多勿의 기상을 펼친 고구려 광개토태왕, 고담덕(下)
[역사인물탐구]
- 태왕의 남진 정책과 웅대한 비전
이해영 / 객원기자
*昊天不弔(호천부조) 卅有九(삽유구) 晏駕棄國(안가기국)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이갑인년구월입구일을유) 遷就山陵(천취산릉)
於是立碑(어시입비) 銘記勳績(명기훈적)
以示後世焉(이시후세언) 其詞曰(기사왈)
하늘이 돌보지 아니함인지 39세에 수레를 탄 채 세상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셨다. 갑인년甲寅年(서기 414년) 9월 29일 을유일乙酉日에 산릉에 모시고,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새겨 기록하여 뒷세상에 보이려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광개토태왕 훈적비문 중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이갑인년구월입구일을유) 遷就山陵(천취산릉)
於是立碑(어시입비) 銘記勳績(명기훈적)
以示後世焉(이시후세언) 其詞曰(기사왈)
하늘이 돌보지 아니함인지 39세에 수레를 탄 채 세상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셨다. 갑인년甲寅年(서기 414년) 9월 29일 을유일乙酉日에 산릉에 모시고,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새겨 기록하여 뒷세상에 보이려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광개토태왕 훈적비문 중
복수전의 시작 - 관미성關彌城 함락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제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광개토태왕은 20년 묵은 원한을 갚기 시작합니다. 391년 즉위하자마자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7월에는 백제의 10개 성을, 10월에는 백제의 주요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고국원제를 전사하게 한 백제百濟를 ‘해치다’는 뜻의 ‘잔殘’ 자를 써서 백잔百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철천지원수 백제에 대한 원한은 18세의 소년 광개토태왕의 과감한 공격으로 드러났습니다.
관미성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성 또는 강화도이거나 요서에 있던 백제의 진평군에 속한 황하 하류라고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관미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는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은 이곳을 20일간에 걸쳐 7개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백제는 한수漢水 이북을 내주었는데, 백제 진사왕辰斯王은 광개토태왕을 두려워하며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진사왕에 대한 원망이 높아지면서 진사왕의 형인 침류왕의 맏아들 아신왕阿莘王이 숙부인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백제와의 전쟁 - 패수浿水전쟁
광개토태왕이 단일 국가로 제일 많이 싸운 나라는 백제입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직접 전쟁을 수행한 곳도 백제였습니다. 그만큼 고구려에게는 백제를 비롯한 남방 전선이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미성의 함락은 백제가 겪어야 할 재앙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신왕은 즉위한 392년에 서둘러 반격을 시도했지만 보급에 문제가 발생해 성과도 없이 철군하고 말았습니다. 393년 백제군의 최고 책임자인 좌장左將 진무眞武가 1만 병력으로 관미성 탈환을 시도했다가 광개토태왕의 5천 친위 정예 기병에게 역습을 받아 참패하였습니다. 이듬해 재개한 공세 역시 수곡성에서 고구려의 역습을 받아 8천 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절치부심한 백제 아신왕은 394년 8월 진무로 하여금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공세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한수 이북의 여러 성을 되찾고 북진을 계속하였지만, 패수에서 기다리던 광개토태왕의 7천 군대와 싸워 8천 명이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전사자가 8천이면 포로도 수천 명이었을 것이고, 여기에 부상자도 상당하였을 것입니다. 백제의 총합 출전 병력은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칠 당시 병력이 3만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 정도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패수 전투의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아신왕은 그 복수를 하겠다면서 한겨울인 11월에 직접 7천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만, 엄청난 폭설과 혹한으로 수많은 병사만 잃은 채 회군해야 했습니다. 최정예 병력과 함께 백제가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력을 투입했을 이 두 차례의 공격이 실패로 마무리되자 백제군은 고구려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 군대의 위협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버린 사실입니다.
복수의 마무리 - 영원한 노객奴客으로 굴복시키다
광개토태왕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395년 우위를 점한 백제에 대한 공세를 잠시 멈추고, 북쪽으로 군대를 집결시켜 거란 일파로 알려진 패려稗麗 원정에 나섰습니다. 이는 북서 국경을 안정시킴과 함께, 고구려의 또 다른 숙적인 후연을 북쪽에서 견제하려는 전략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사이에 백제 아신왕은 자구책을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자 전지腆支를 왜倭에 보내 군대를 동원하도록 하는 한편, 한성에 집결한 백제군을 사열하며 고구려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굳건히 하고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와 흐트러진 전열을 복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396년 병신년, 백제군이 결집하고 다음 행동을 미처 취하기도 전에 고구려군은 전격적으로 백제 영내로 돌입하였습니다. 이제는 백제를 무릎 꿇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광개토태왕이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 전면적인 침공이었습니다.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밀리긴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백제에게서 대응할 시간을 빼앗기 위한 맹렬한 속도의 작전이었습니다. 고구려군 주력은 수군을 이용했습니다. 고구려가 수군을 공세의 주력으로 사용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신왕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지만, 58개의 성과 700개의 촌이 형성된 아리수 이북의 백제 땅이 모두 광개토태왕에게 복속되었습니다.
수도를 지켜 줄 주변 성곽이 모두 공격당하고 있거나 함락된 상태에서, 결국 아신왕은 남녀 1천 명과 다량의 공물, 그리고 자신의 형제와 대신 열 명을 고구려에 바치며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즉 신하가 왕에게 자신을 낮추는 말로 항복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를 피하여 사산蛇山(지금의 직산稷山)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新慰禮城이라고 칭하였다는 사실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재는 같은 책에서 ‘태왕은 야심이 충만하고 무략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실제로는 동족에 대한 사랑이 많았다. 그래서 백제를 공벌한 것은 백제가 왜와 결탁하는 것이 미워서 그랬던 것이지 그 땅을 빼앗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라며 광개토태왕이 백제 원정을 벌인 의미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근초고왕 이후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며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백제는 고구려의 신민이 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아신왕은 이런 치욕보다는 국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고 볼 일이었기 때문에 단호하고 영리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광개토태왕도 어느 정도 그 결단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숙적 후연을 상대해야 했기에 남쪽으로 쏠린 주력의 철군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광개토태왕은 관미성과 아단성 등의 전략 거점들에 대한 방비는 더욱 강화시켰고, 하평양下平穰(아래평양으로 현재 대동강변 평양으로 추정)을 건설하였습니다.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 신라를 공격하다
연이은 패배와 북부 완충지대의 상실로 백제에게 고구려는 넘지 못할 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초고왕 시기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백제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신왕은 치욕을 가슴에 안은 채 와신상담하며 제3의 공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기로 하였습니다. 제3의 공간은 바로 신라였습니다.
국력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백제는 신라의 팽창에 위기의식을 느낀 가야에게 신라 정복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제시하며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가야 연맹의 종주국 금관가야와 경쟁하면서도 신라에 대해서만은 이해관계를 같이했기 때문에, 대가야를 주축으로 한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아신왕의 책략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고구려가 서해의 제해권을 차지하면서, 중국으로 통하는 뱃길이 차단되었던 금관가야는 막대한 수입을 제공하던 무역 활동이 크게 위축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이에 금관가야는 일본 열도의 호족 연합체인 야마토 정권(현재 일본 긴키近畿 지역 야마토大和를 중심으로 한 호족 연합체)까지 끌어들이면서 전에 없던 대규모의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소국이 난립하던 왜 지역은 군사력의 근간인 철의 공급을 가야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병을 거부할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일종의 용병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영락 9년인 399년 고구려가 후연과 접전을 벌이던 때에, 모든 준비를 마친 금관가야의 이시품왕伊尸品王과 가야 연맹군 그리고 왜군은 양 방면에서 신라를 기습하였습니다. 전면적인 침공이었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을 「광개토태왕비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왜인이 나라 안에 가득하고, 성곽들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노객(신라왕)을 백성으로 삼으려 합니다.(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신라가 애꿎게도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군사력을 보유한 가야가 백제와 동맹을 형성한 일은 고구려에게도 심각한 사태였습니다. 만약 그들 손에 신라가 넘어가고, 남방 세력들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커다란 위기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서둘러 격파함으로써 화근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신라 구원과 남해안 대원정 - 가야전쟁
광개토태왕과 내물마립간 사이의 밀약
결심을 굳힌 광개토태왕은 하평양에서 신라 사신을 접견하고, 곧 파병하여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하며 작전 계획의 일부를 내물 마립간에게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언젠가 다시 일어서서 고구려의 숨통을 끊으려 할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 등의 동맹국들을 신라와 협공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멸망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주는 은혜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후연이 강하다고 하지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역시 백제였습니다.고구려 5만 대군 출병
원정을 위한 사전 준비는 매우 신중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단기전으로 치러져야 했기에 작전 지역의 지형과 적군의 동향을 완벽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패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그사이 신라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인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끝났고, 이제 신라를 분할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등 뒤로는 이미 돌이키지 못할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영락 10년인 경자년(400년)에 보기步騎 5만 명의 고구려 정예군이 신라의 영역으로 진입하였습니다.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의 개입을 이미 예견했지만, 광개토태왕은 교묘하게 병력의 이동을 은폐했을 뿐 아니라, 이미 수많은 기동전과 장거리 원정을 경험했던 고구려 군대의 속도가 백제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백제의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신라 영내로 쇄도한 광개토태왕은 내물 마립간의 신라군 주력을 남거성男居城에서 만났습니다. 이는 동맹군의 주목표인 금성 등 신라 중심부를 포기하고 고구려 군대와 접촉이 쉬운 북부 지역으로 전략적 퇴각을 단행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전장이 될 신라의 지리적 환경과 적군의 현황에 대한 제반 정보의 습득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은 동맹군에게 점령당한 신라 영토 내 촌락과 성곽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바뀌도록 신라를 정복하기는커녕 수도 금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예정에 없던 장기전의 늪에 빠져 긴장이 풀어진 가야군의 전열은 빠르고 거센 고구려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적이 배후에 출현한 것에 놀란 나머지 공황 상태에 빠져 소부대 단위로 각개 격파를 당하면서 처참하게 궤멸되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먼 길을 온 고구려군에게 자비는 없었습니다. 무서운 기동력으로 전의를 상실한 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동맹군을 추격하고, 마침내 그 주력을 대가야의 전략 거점인 종발성從拔城(지금의 대구로 추정)에서 포위한 뒤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종발성 점령 후 고구려군은 공세의 방향을 동쪽으로 전환하였고, 신라의 금성을 구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쟁 초기만 해도 곧 신라를 집어삼킬 듯 기세등등하던 가야군은 광범위한 지역에 병력을 분산시켜 배치했었습니다. 가야 자체가 강력한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휘권의 통일에서도 큰 곤란을 겪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분산된 소수의 병력을 집중되고 강력한 고구려 대군이 깨트리기는 용이했을 것입니다. 만약 신라를 굴복시키려 했다면 먼저 금성을 점령한 후, 주력과 함께 도주한 국왕을 추격하는 데 집중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태왕, 왜 열도를 정복하다.
이때 고구려군은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면서 대마도(임나)를 지나 왜 열도까지 정벌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熊津(현 충남 공주), 임천林川충남 부여군 임천면 지역), 와산蛙山(충북 보은), 괴구槐口(충북 괴산), 복사매伏斯買(충북 영동), 우술산雨述山(대전광역시 보문산), 진을례進乙禮(금산, 무주, 진안) 노사지奴斯只(대전광역시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백제, 신라, 가락(가야)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과 평량平涼(감숙성 평량형 서북)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任那(지금의 대마도), 이국伊國(이세伊勢라고 하며 지금 일본 오사카大阪 근처 미에현三重縣 지방), 왜倭(연나부부여의 왕이자 일본 15세 오진應神왕인 의라가 건설한 야마토 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海東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백제, 신라, 가락(가야)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과 평량平涼(감숙성 평량형 서북)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任那(지금의 대마도), 이국伊國(이세伊勢라고 하며 지금 일본 오사카大阪 근처 미에현三重縣 지방), 왜倭(연나부부여의 왕이자 일본 15세 오진應神왕인 의라가 건설한 야마토 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海東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영락 10년(400년)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倭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聯政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환단고기』는 임나에 대한 실체도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바로 이 기록만으로도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國尾城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對馬島(우리말 ‘두 섬’에서 유래)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큐슈仇州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三加羅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首邑]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佐護加羅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鷄知加羅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三加羅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首邑]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佐護加羅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鷄知加羅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임나가 지금의 대마도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대마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분할하여 다스렸다는 사실, 그리고 광개토태왕 이후 인위가라가 중심이 되었고 큐슈와 일본 열도 깊숙한 곳까지 고구려군이 정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결과
어쨌든 동방의 모든 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이 대전쟁은 막을 내렸고, 참전국들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습니다. 신라를 병합할 꿈에 부풀어 있던 가야 연맹국은 고구려에게 영토를 유린당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금관가야는 영토 상실과 함께 가야 연맹의 중심적 위치를 상실하고 고구려의 속국과 같은 신세가 되면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추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대가야가 가야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더 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적 자세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신라는 영토를 보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자주성을 잃고 고구려에게 조공하며 인질과 군사 기지를 제공하여야 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였습니다.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왕을 세우는 등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경쟁자였던 가야 연맹보다 앞서 성장할 수 있었고, 차분히 힘을 키운 신라는 진흥대제 때 본격적인 정복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백제는 전면에 가야와 왜를 내세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동맹국 군대가 지리멸렬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 때 벌어졌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누가 가장 강한 존재인지 확인시킨 고구려는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가야와 왜를 무력화시킴으로써 맞수 백제의 양 날개를 모두 제거했고, 신라를 손아귀에 넣어 남방을 경략할 든든한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더 나아가 일본 열도까지 정벌했으니, 이제 고구려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광개토태왕의 전술적 특징
고구려는 정복 전쟁 못지않게 방어 전쟁을 더 많이 치렀습니다. 고구려는 험한 곳에 산성을 쌓고, 성에서 농성하면서 적군이 식량을 확보할 수 없도록 성 주변의 모든 사람과 식량을 소개疏開하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쳤습니다. 여기에 혹독한 대륙의 추위는 침략군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고 패퇴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광개토태왕 시절에도 이런 청야전술은 기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광개토태왕은 전쟁 수행 능력 측면에서 크게 세 가지의 전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로 기습전입니다.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고 난 이듬해, 백제는 이를 되찾기 위해 고구려에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광개토태왕은 친위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관미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기습해 패퇴시켰습니다.
둘째는 수군水軍의 활용입니다. 즉위 초에 관미성을 함락시킬 때 광개토태왕은 육군만이 아니라 수군을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영락 4년에는 패수에서 백제와 겨루어 대파하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영락 6년에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복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영락 10년 신라를 침범한 왜를 격퇴하기 위해 5만 대군을 보낸 틈을 타서 후연 국왕 모용성이 침략해 700여 리의 영토를 빼앗고 고구려 5천여 호를 포로로 잡아가자, 이듬해 후연의 숙군성을 쳐서 빼앗은 것 등이 이를 말해 줍니다. 이렇게 도전에는 반드시 응징한다는 선례를 보여 줌으로써 적국에게는 두려움을 주고, 고구려 백성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신뢰를 주며, 군사들에게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효과를 거둔 것입니다.
광개토태왕의 웅대한 비전 - 단군조선을 다물하라!
광개토태왕은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공격하면서 동서남북으로 고구려의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는 고국원제 전사 후 20년간 충분히 내실을 다져 왔고, 광개토태왕의 카리스마와 강력한 의지에 위아래 모두가 다 함께 협력했기에 가능했던 고구려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렇게 내부의 단결력과 더불어 원래부터 강력한 고구려인의 힘은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외부의 위협을 물리치며 제국 내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에는 무모한 살육보다는 홍익인간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상생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광개토태왕의 1차 정복 활동이 일단락된 후, 고구려에 의해 동아시아는 100년에 걸친 평화의 시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 남방정책은 광개토태왕 때부터
광개토태왕은 후연을 격파한 뒤 주된 방향을 백제와 왜 쪽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비문」의 중요 기록 내용이 다릅니다. 「광개토태왕비문」에서 후연과의 싸움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비를 세운 아들 장수태왕의 시각에서 후연과 싸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반면, 백제를 위시한 남쪽의 나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기록과도 일치합니다.선대인 소수림제 때부터 고구려에서는 한 수 아래로 여긴 백제에게 고국원제가 전사를 당한 충격의 원인을 찾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남쪽 백제의 흥기 원인을 아마도 동진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의 활발한 해상 무역에서 찾은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사력은 경제력에 비례합니다. 그래서 즉위 초에 평양에 사찰 아홉을 창건하고, 하평양성을 설치하였으며,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이주하게 하는 등의 남방 정책을 실시한 것 같습니다(여기서 평양은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양遼陽 지역).
즉 장수태왕 때 있었던 남진 정책은 이미 광개토태왕 때 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광개토태왕은 남방 해상 무역의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1차적으로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를 정벌하여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해와 서해, 남중국해를 내해內海로 삼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북조에 비해 약한 남조의 힘을 기르게 하여, 중원 지역에서 남북조의 대립을 격화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당시 남북조의 북위나 동진은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차적으로 남조인 동진을 정벌하고, 이에 요동과 남쪽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화북 일대까지 평정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옛 영역을 완전하게 회복하는 게 광개토태왕의 웅대한 비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위 20년 만에 그동안의 위협을 제거하고 고구려 전성기의 발판을 마련한 태왕이기에, 10년만 더 재위하였다면 단군조선의 고토를 모두 회복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입니다.
태왕, 하늘로 돌아가다
광개토태왕은 변방이 안정된 영락 18년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으며, 평양 백성들을 동쪽의 독산 등 새로 쌓은 6개의 성으로 이주시켰습니다. 또한 백제로부터 빼앗은 남쪽 지역을 순회하며 그곳 백성들을 위무함으로써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주변 국가들을 모두 평정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한층 드높였고, 재위 말기에는 내정의 안정에 주력하며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고통을 받던 백성들의 삶을 진작시키는 데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412년에 세상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39세 되던 해였습니다. 태왕의 말년은 무엇인가 다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위기의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만들고, 동아시아 전역을 영토로 삼아 신교문화로 통일한 단군 이래 초유의 대제왕이 영면할 능陵은 국강상國岡上이라는 장지에 마련되었습니다.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약칭으로 영락태왕, 광개토태왕이라고 합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전쟁의 시대』(김대욱, 채륜, 2012)
광개토태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 천하관
* 광개토태왕릉비에 있는 소위 신묘년 조에 얽힌 논쟁은 영락 6년에 광개토태왕이 수군을 이용하여 백제 한성을 점령하고 이어 가야 연합을 격파한 사건의 보조 기사일 뿐입니다. 이 부분이 소위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원형이 된다는 점이 오히려 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일본서기』에 이를 기록하지 않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 문장의 자연적 맥락과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학자들 그리고 이에 부역하는 일부 넋 빠진 학자들의 학설은 판타지 소설보다도 못하기에 여기에서는 지면 사정도 있어 생략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환단고기』내용과 번역본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414년 장수태왕이 부황의 공적을 기리고 묘지를 지키는 연호烟戶들에 대한 규정을 남기기 위해 능의 동쪽에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바로 광개토태왕릉비입니다. 비문이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고구려 건국과 관련한 3대 재위 계승에 대한 것과 광개토태왕의 즉위에 대한 내용입니다. 둘째 부분은 광개토태왕의 치적으로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부여, 거란 정벌입니다. 마지막은 광개토태왕이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의 규정을 적고 있습니다.
예서체의 글씨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쳐나 강인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보여 주며 단아한 멋이 있습니다. 비문에서는 천하의 주인이 고구려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습니다. 첫머리는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하신 터다.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천제는 천하의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인 천신으로 상제님을 가리키며,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 즉 천자天子인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는 물의 신(하백河伯의 딸)이므로, 추모왕은 당연히 천하의 주인이고 이런 성스런 왕통을 이은 고구려 태왕들 역시 천자인 것입니다.
천하天下라는 말은 하늘 아래의 모든 세상을 뜻하는데, 천자의 통치 아래 있는 온 세상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온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자신의 나라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접 나라와 비교해 자신의 나라가 지니는 특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인식이 곧 천하관天下觀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을 천하의 주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고구려의 천하는 고구려 태왕의 지배력이 실질적으로 미치고 있거나 미쳐야 한다고 여기는 범위의 지역입니다.
이제 고구려인들은 광개토태왕 시기에 이르러 시조 추모성제 때부터 내려온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란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 주변의 모든 나라는 속국 형태의 조공국이었습니다. 조공국이 외침外侵을 받았을 때 실제로 원병을 보내 구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군사적으로 조공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조공국에 정치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고구려 중심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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