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Holocaust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대저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道)요, 재민혁세(災民革世)는 웅패(雄覇)의 술(術)이라.

이제 천하가 웅패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 오랜지라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만민을 교화하여 세상을 평안케 하려 하노라. (도전 2편 75장)


역사상 유례없는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Holocaust[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Shoah(히브리어: השוא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 명으로 추정한다. 그 수치는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3분의 2에 해당한다. 사람들을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 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등에 세워졌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히틀러는 1933년 1월에 나치당의 대표로 독일의 총리가 되자마자 유대인 박해를 시작했다. 박해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단계는 유대인을 폭행하거나 유대 상점 불매 운동, 유대 상점 약탈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2단계는 1935년 제정한 튀른베르크법에 따라 독일인과 유대인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 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3단계는 유대인을 대규모로 체포해서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것이었다. 4단계는 1939년 9월 2차 대전이 터진 이후 유대인들을 대규모로 게토ghetto에 수용시킨 것이었다. 5단계는 1941년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후에 강제 수용소의 목적을 구금에서 살인으로 바꾼 것이었다. 이때 집단학살 수용소의 가스실 안에서 대량 살상이 자행되었다. 학살은 독일 점령 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는데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대인이 죽었다.

학살에 침묵했던 유럽 사회


당시 유대인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럽 사회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침묵했다. 카톨릭 교회와 교황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폴란드의 유대인 랍비 바이스만텔이 로마 교황청에 무고한 어린 유대인들만이라도 살려달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교황청의 답장은 냉정했다. “이 세상에 무고한 유대인 어린이의 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유대인의 피는 죄악이다. 당신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 것이다. 당신들은 죽어 마땅하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 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 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 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이렇게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을 꼽았다.

학살의 배경


유대인 학살의 원인으로 히틀러 개인의 삶의 경험이 지목되기도 한다. 히틀러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는데, 그는 미술학교의 유대인 심사위원들이 자신을 불합격시켜서 꿈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산과 연금으로 생활하던 히틀러는 독신자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하층 시민의 열악한 생활을 알게 되면서 당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유대인을 혐오하는 독일 민족주의자, 반유대주의자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동시에 당시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는 의견도 많다.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 정책으로 독일이 크게 부흥하게 되는데 이때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독일로 대거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제조업과 금융산업, 해상무역업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며 독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히틀러가 활동하던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했다.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유럽의 반유대 정서는 뿌리가 깊다. 특히 중세에 반유대주의가 강했던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교리 차이 때문이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아직 구세주가 오지 않았고, 자신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중세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유대인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고, 개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박해를 가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반유대주의 정서를 키웠고 종교적 살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유대인의 역사』의 저자 폴 존슨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천 년에 걸친 기독교도와 성직자들, 평민들, 세속인들, 이방인들의 반유대주의적 증오가 히틀러에 의해 하나의 거대한 괴물로 합쳐져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


유대인들의 역사의식歷史意識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나치의 민족말살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인식하고 전범들을 색출해 법정에 세웠다. 독일은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폴란드, 프랑스와 함께 공동 교과서를 집필하고, 철저한 역사 교육으로 나치의 만행을 참회하고 있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며 과거사 청산을 계속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역사를 절대 잊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독립기념일 전날을 쇼아의 날로 정해서 독립을 기뻐하기 전에 민족의 고난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예루살렘의 쇼아 추모관에 있는 글귀가 유대인들의 역사의식을 대변해 주고 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참고자료
폴 존슨, 김한성 옮김,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로버트 S. 위스트리치 지음, 송충기 옮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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