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세계사 | 대마도에 살아있는 『환단고기』의 숨결
[세계사]
안병우 / 충북대 교수
지난 1월 말에 2박 3일 일정으로 규슈(九州)와 대마도對馬島에 다녀왔습니다. 대마도와 규슈 땅에 남아있는 우리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자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촉박하여 몸은 적잖이 힘들었지만 답사 결과는 자못 의미가 컸던 여행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마도 하면 먼저 뭐가 떠오르나요? 덕혜옹주? 면암 최익현 선생?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저는 『환단고기』입니다. 대마도에 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작년 6월에 당신 표현대로 ‘뜬금없이’ “가야사 복원”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사학계에서는 갑자기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 반응이 제게는 매우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고 그저 가려져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을 연구해서 밝히라는 어찌 보면 대통령으로서 지극히 당연히 할 수 있는 주문이건만 학자들이 그런 대통령의 말에 곧바로 토를 달고 나서는 게 여간 뜨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테지요? ‘한사군漢四郡 재한반도설在韓半島說’과 더불어 일제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날조한 대표적인 역사 조작 사례가 바로 ‘임나일본부설’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정벌군이 서기 369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그 자리에 임나任那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가지고 쓰에마스 야스카즈(末松保和)를 중심으로 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가 한반도 남부 땅인 가야伽倻 지역에 있었으므로 당시에 한반도 남부 지역을 식민 통치를 한 것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합니다. 『일본서기』 내용을 전후로 살펴보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에도 문제가 많지만 그 기록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임나를 가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임나가 가야라면 가야 지역에 임나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었어야 하지만 한반도 남부에는 아무리 뒤져도 임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임나=가야’라는 것이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이 땅의 많은 사학자들은 이것을 상당히 신봉하고 있는 듯합니다. 겉으로는 폐기된 학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쓴 논문이나 서책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폐기되기는커녕 더욱 공고한 학설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하 불신론)’은 들어보셨나요? 일본이 가야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그런 엄청난 주장이 사실이라면 『삼국사기』에 그런 내용이 조금이라도 나와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삼국사기』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적반하장, 본말전도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지경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자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쓰다 쏘우키치(津田左右吉)가 조선총독부를 통한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날조한 것인데 우리 현 강단사학계의 태두泰斗라고 하는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는 아무런 검토 없이 덥석 받아들이면서 정설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국사 교과서를 보면 고구려는 6대 태조왕(재위 53~146)부터,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부터, 신라는 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 진정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사에 기록된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우리 손으로 싹둑 잘라 버린 것이죠. 사이비사학(유사역사학)의 전형을 그들에게서 봅니다.
‘임나일본부설’과 ‘불신론’은 이렇게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임나일본부설이 폐기된 학설이라고요? 불신론을 신봉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국민을 모두 바보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임나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 가진 진실의 핵심이겠죠. 과연 쓰에마스의 주장대로 가야 지역에 있었을까요? 한심한 것은 우리나라 주류사학자 대부분이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여 임나를 가야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주류사학자들이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으니 많은 학자, 언론인들도 덩달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숭신崇神 65년조 부분을 잘 읽어보면 임나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임나는 축자국(오늘날의 후쿠오카)에서 2천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任那者 去 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崇神六十五年 秋七月)”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라는 이 구절만 가지고도 임나는 절대 가야 지역이 될 수가 없죠. 육지에 있는 가야가 북쪽이 바다로 막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같이 명확한 구절은 애써 외면한 채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만 강조하는 게 식민사학자들의 특징입니다. 어찌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무튼 이 조건에 부합되는 지역은 대마도對馬島(쓰시마섬)입니다. 후쿠오카(福岡)’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으니까 임나는 바로 대마도이거나 대마도의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신공황후 관련 기록은 연대기상으로도 많은 모순이 있지만, 임나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정벌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임나가 대마도라고 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학자는 부산대 이병선 교수님, 단국대 윤내현 교수님을 비롯하여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임나와 관련하여 놀라운 기록이 나옵니다.
任那者(임나자)는 本在對馬島西北界(본재대마도서북계)하니 北阻海(북조해)하고 有治曰國尾城(유치왈국미성)이오 東西(동서)에 各有墟落(각유허락)하야 或貢或叛(혹공혹반)이러니 後(후)에 對馬二島(대마이도)가 遂爲任那所制故(수위임나소제고)로 自是(자시)로 任那(임나)는 乃對馬全稱也(내대마전칭야)라 自古(자고)로 仇州對馬(구주대마)는 乃三韓分治之地也(내삼한분치지지야)오 本非倭人世居地(본비왜인세거지)라. 任那(임나)가 又分爲三加羅(우분위삼가라)하니 所謂加羅者(소위가라자)는 首邑之稱也(수읍지칭야)라. 自是(자시)로 三汗(삼한)이 相爭(상쟁)하야 歲久不解(세구불해)하니 佐護加羅(좌호가라)는 屬新羅(속신라)하고 仁位加羅(인위가라)는 屬高句麗(속고구려)하고 雞知加羅(계지가라)는 屬百濟(속백제)가 是也(시야)라.
永樂十年(영락십년)에 三加羅(삼가라)가 盡歸我(진귀아)하니 自是(자시)로 海陸諸倭(해륙제왜)가 悉統於任那(실통어임나)하야 分治十國(분치십국)하니 號爲聯政(호위연정)이라. 然(연)이나 直轄於高句麗(직할어고구려)하야 非烈帝所命(비열제소명)이면 不得自專也(부득자전야)니라.”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요는 대마도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등분하여 통치하였고 각기 인위가라仁位加羅, 계지가라雞知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였습니다. 이 기록대로 대마도에 이런 지명, 즉 좌호, 인위, 계지 같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혹은 없다면 과거에 그런 지명을 사용한 흔적이라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대마도에 가서 직접 보자’라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죠. 대마도에 갔더니 놀랍게도 계지雞知, 인위仁位, 좌호佐護라는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학교 이름, 우체국 이름, 지도, 버스 표지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현지인의 안내에 의하면 이런 지명이 사용된 것은 천 년도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마도에 계지, 인위, 좌호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은 오직 『환단고기』에만 나옵니다. 다른 어떤 역사 기록물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대마도는 일본말로 ‘두 섬’이라는 뜻의 ‘쓰시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어는 참 이상한 데가 많습니다. 한자로 대마도對馬島라고 써 놓고 나서 일본식으로 읽으면 어떻게 읽어도 쓰시마가 될 수 없는데도 쓰시마라고 합니다. 말이 안 되죠. 나름대로 일본어에 능통하다고 하는 사람 누구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아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환단고기』를 읽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마도는 크게 보면 남섬과 북섬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딸린 수많은 작은 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어 보니 남섬과 북섬은 원래 하나의 섬으로 붙어 있었는데 러일전쟁 무렵에 운하를 뚫어서 두 섬으로 나누어 놓았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남북 두 섬을 잇는 다리가 있는 곳에 내려서 운하 부분을 잘 살펴보았더니 인위적으로 약간의 공사를 하기도 했겠지만 자연 지형이 협곡 형태로 형성된 곳이라 원래 자연적으로 두 섬으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환단고기』에서는 대마도를 대마이도對馬二島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마이도에서 대마를 생략하고 이도二島만 읽으면 바로 쓰시마가 됩니다. 대마도를 왜 쓰시마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환단고기』 기록이 정말로 소중하구나’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 기록이 하도 철저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계지는 남섬의 북부에 위치한 가장 큰 도시입니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우리나라 작은 면 소재지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는 북섬의 남부에 있는 인위, 북부에 있는 좌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보면 “길이는 4백 리 정도 되는데 토지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고 대마도의 지리에 관한 기사가 조금 나옵니다. 그리고 농지가 없어서 해물을 먹으며 식량은 배를 타고 시장에서 구입한다고 나옵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별로 살 곳이 못되는 지역이라는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실제로 가 본 대마도는 삼국지의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남북을 관통하는 외길을 따라 계지에서 인위를 거쳐 좌호까지 둘러보았는데 시속 50킬로 정도의 느릿한 속도 때문에 다소 여유로운 버스 관광이었다고 할까요?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한쪽은 멈추어야 할 정도로 길이 좁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달리기가 어려워 보였습니다. 현지인들도 답답해할 정도로 비좁은 길이지만 지형이 험준해서 넓고 시원하게 뚫린 길을 놓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도로라는 것이 예전부터 있었던 작은 길, 즉 산과 산이 맞닿는 골짜기를 겨우 다듬어서 만든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처럼 험준한 이 작은 섬에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평지가 있었으니 바로 계지, 인위, 좌호라는 세 마을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논과 밭을 볼 수 있었는데 섬 주민들이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면적의 농지였습니다. 그러니 식량은 무역을 통해서 얻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수긍이 됩니다. 도중에 박물관을 들렀는데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토기가 전시되어 있더군요. 토기를 사용할 정도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원시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문명을 누리면서 생활했던 집단이라고 봐야 하겠죠. 흥미로운 점은 인위 마을에서 본 토기는 고구려 토기와 흡사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저야 고고학 전공이 아니니 박물관에 전시된 토기 파편을 보고 그 특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안목이 없지만 동행한 전문가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서 나름의 식견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계지에서는 고분군을 보았는데 고분古墳이라는 게 대개 왕의 무덤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대마도는 원래 왕이 통치한 독립 국가였다는 의미가 되겠죠. ‘아니 사람이 살기 어려운 이 척박한 곳에 국가가 도대체 존재할 수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환단고기』 기록대로라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었습니다. 계지가라는 백제가 통치했고, 인위가라는 고구려, 좌호가라는 신라가 통치를 했다는 기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는 왜 서로 다투면서도 사이좋게 대마도를 나누어 가지려고 했을까요? 대마도는 사람 살기에는 별 볼 일이 없는 땅이지만 배를 타야만 일본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에는 험한 파도를 헤치고 많은 군사들이 이동하려면 중간 기착지로서 더없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입니다.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삼국이 그토록 기를 쓰고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임진왜란 때 부산으로 대군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쳐들어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대마도를 거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군사적 요충지였음이 분명합니다. 대마도에서 부산은 지척이고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확실하게 보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말하면서 “이것이 소위 삼한이다(是所謂之三韓也).”라고 하였습니다. 임나를 삼한이라고 하니까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해석을 한 모양인데 여기에 바로 결정적인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입니다. 임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이라면 그것은 가야가 아니라 마·진·변 삼한의 넓은 지역이 됩니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임나 지명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소위 삼한이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삼한은 일본 말로 ‘상가라’라고 읽습니다. 일본 말이 어려운 이유는 한자 말 독음의 자유자재함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韓國을 ‘간꼬꾸’라고 읽으면 오늘날 우리나라를 말하지만 한국韓國은 ‘가라쿠니’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규슈(九州)에 가면 ‘한국악韓國岳’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때 한국을 바로 ‘가라쿠니’라고 읽습니다. 가라쿠니는 역사서에 나오는 한국을 말합니다. 한韓을 일본어로 ‘가라’라고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서기』의 삼한은 삼가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한, 변한, 마한의 삼한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되겠죠? 그럼 『일본서기』는 왜 임나를 삼한(삼가라)이라고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대마도가 계지가라, 인위가라, 좌호가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공황후가 임나를 정벌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왜가 본래 한반도 부속 섬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마도의 역사, 유래, 영토권 문제를 비롯하여 『환단고기』 기록의 진실성을 역으로 증명해 주는 엄청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환단고기』를 세상에 처음 공개한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직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는 일만 하느라 평생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참으로 어렵게 사셨던 분이 감히(?) 대마도에 가서 보고 이런 스토리를 지어냈을까요?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대마도 가시거든 이런 것을 꼭 보세요. 『환단고기』의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큰마음 먹고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볼 게 하나도 없더라’고 푸념하는 동료 교수의 말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는 말
지난 1월 말에 2박 3일 일정으로 규슈(九州)와 대마도對馬島에 다녀왔습니다. 대마도와 규슈 땅에 남아있는 우리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자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촉박하여 몸은 적잖이 힘들었지만 답사 결과는 자못 의미가 컸던 여행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마도 하면 먼저 뭐가 떠오르나요? 덕혜옹주? 면암 최익현 선생?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저는 『환단고기』입니다. 대마도에 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작년 6월에 당신 표현대로 ‘뜬금없이’ “가야사 복원”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사학계에서는 갑자기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 반응이 제게는 매우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고 그저 가려져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을 연구해서 밝히라는 어찌 보면 대통령으로서 지극히 당연히 할 수 있는 주문이건만 학자들이 그런 대통령의 말에 곧바로 토를 달고 나서는 게 여간 뜨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테지요? ‘한사군漢四郡 재한반도설在韓半島說’과 더불어 일제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날조한 대표적인 역사 조작 사례가 바로 ‘임나일본부설’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정벌군이 서기 369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그 자리에 임나任那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가지고 쓰에마스 야스카즈(末松保和)를 중심으로 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가 한반도 남부 땅인 가야伽倻 지역에 있었으므로 당시에 한반도 남부 지역을 식민 통치를 한 것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합니다. 『일본서기』 내용을 전후로 살펴보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에도 문제가 많지만 그 기록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임나를 가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임나가 가야라면 가야 지역에 임나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었어야 하지만 한반도 남부에는 아무리 뒤져도 임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임나=가야’라는 것이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이 땅의 많은 사학자들은 이것을 상당히 신봉하고 있는 듯합니다. 겉으로는 폐기된 학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쓴 논문이나 서책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폐기되기는커녕 더욱 공고한 학설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하 불신론)’은 들어보셨나요? 일본이 가야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그런 엄청난 주장이 사실이라면 『삼국사기』에 그런 내용이 조금이라도 나와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삼국사기』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적반하장, 본말전도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지경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자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쓰다 쏘우키치(津田左右吉)가 조선총독부를 통한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날조한 것인데 우리 현 강단사학계의 태두泰斗라고 하는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는 아무런 검토 없이 덥석 받아들이면서 정설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국사 교과서를 보면 고구려는 6대 태조왕(재위 53~146)부터,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부터, 신라는 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 진정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사에 기록된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우리 손으로 싹둑 잘라 버린 것이죠. 사이비사학(유사역사학)의 전형을 그들에게서 봅니다.
‘임나일본부설’과 ‘불신론’은 이렇게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임나일본부설이 폐기된 학설이라고요? 불신론을 신봉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국민을 모두 바보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임나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 가진 진실의 핵심이겠죠. 과연 쓰에마스의 주장대로 가야 지역에 있었을까요? 한심한 것은 우리나라 주류사학자 대부분이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여 임나를 가야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주류사학자들이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으니 많은 학자, 언론인들도 덩달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임나는 대마도
그런데 『일본서기』에 숭신崇神 65년조 부분을 잘 읽어보면 임나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임나는 축자국(오늘날의 후쿠오카)에서 2천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任那者 去 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崇神六十五年 秋七月)”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라는 이 구절만 가지고도 임나는 절대 가야 지역이 될 수가 없죠. 육지에 있는 가야가 북쪽이 바다로 막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같이 명확한 구절은 애써 외면한 채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만 강조하는 게 식민사학자들의 특징입니다. 어찌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무튼 이 조건에 부합되는 지역은 대마도對馬島(쓰시마섬)입니다. 후쿠오카(福岡)’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으니까 임나는 바로 대마도이거나 대마도의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신공황후 관련 기록은 연대기상으로도 많은 모순이 있지만, 임나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정벌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임나가 대마도라고 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학자는 부산대 이병선 교수님, 단국대 윤내현 교수님을 비롯하여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임나와 관련하여 놀라운 기록이 나옵니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다.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락 10년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任那者(임나자)는 本在對馬島西北界(본재대마도서북계)하니 北阻海(북조해)하고 有治曰國尾城(유치왈국미성)이오 東西(동서)에 各有墟落(각유허락)하야 或貢或叛(혹공혹반)이러니 後(후)에 對馬二島(대마이도)가 遂爲任那所制故(수위임나소제고)로 自是(자시)로 任那(임나)는 乃對馬全稱也(내대마전칭야)라 自古(자고)로 仇州對馬(구주대마)는 乃三韓分治之地也(내삼한분치지지야)오 本非倭人世居地(본비왜인세거지)라. 任那(임나)가 又分爲三加羅(우분위삼가라)하니 所謂加羅者(소위가라자)는 首邑之稱也(수읍지칭야)라. 自是(자시)로 三汗(삼한)이 相爭(상쟁)하야 歲久不解(세구불해)하니 佐護加羅(좌호가라)는 屬新羅(속신라)하고 仁位加羅(인위가라)는 屬高句麗(속고구려)하고 雞知加羅(계지가라)는 屬百濟(속백제)가 是也(시야)라.
永樂十年(영락십년)에 三加羅(삼가라)가 盡歸我(진귀아)하니 自是(자시)로 海陸諸倭(해륙제왜)가 悉統於任那(실통어임나)하야 分治十國(분치십국)하니 號爲聯政(호위연정)이라. 然(연)이나 直轄於高句麗(직할어고구려)하야 非烈帝所命(비열제소명)이면 不得自專也(부득자전야)니라.”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요는 대마도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등분하여 통치하였고 각기 인위가라仁位加羅, 계지가라雞知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였습니다. 이 기록대로 대마도에 이런 지명, 즉 좌호, 인위, 계지 같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혹은 없다면 과거에 그런 지명을 사용한 흔적이라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대마도에 가서 직접 보자’라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죠. 대마도에 갔더니 놀랍게도 계지雞知, 인위仁位, 좌호佐護라는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학교 이름, 우체국 이름, 지도, 버스 표지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현지인의 안내에 의하면 이런 지명이 사용된 것은 천 년도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마도에 계지, 인위, 좌호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은 오직 『환단고기』에만 나옵니다. 다른 어떤 역사 기록물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쓰시마의 유래와 자연 환경
대마도는 일본말로 ‘두 섬’이라는 뜻의 ‘쓰시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어는 참 이상한 데가 많습니다. 한자로 대마도對馬島라고 써 놓고 나서 일본식으로 읽으면 어떻게 읽어도 쓰시마가 될 수 없는데도 쓰시마라고 합니다. 말이 안 되죠. 나름대로 일본어에 능통하다고 하는 사람 누구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아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환단고기』를 읽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마도는 크게 보면 남섬과 북섬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딸린 수많은 작은 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어 보니 남섬과 북섬은 원래 하나의 섬으로 붙어 있었는데 러일전쟁 무렵에 운하를 뚫어서 두 섬으로 나누어 놓았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남북 두 섬을 잇는 다리가 있는 곳에 내려서 운하 부분을 잘 살펴보았더니 인위적으로 약간의 공사를 하기도 했겠지만 자연 지형이 협곡 형태로 형성된 곳이라 원래 자연적으로 두 섬으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환단고기』에서는 대마도를 대마이도對馬二島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마이도에서 대마를 생략하고 이도二島만 읽으면 바로 쓰시마가 됩니다. 대마도를 왜 쓰시마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환단고기』 기록이 정말로 소중하구나’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 기록이 하도 철저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계지는 남섬의 북부에 위치한 가장 큰 도시입니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우리나라 작은 면 소재지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는 북섬의 남부에 있는 인위, 북부에 있는 좌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보면 “길이는 4백 리 정도 되는데 토지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고 대마도의 지리에 관한 기사가 조금 나옵니다. 그리고 농지가 없어서 해물을 먹으며 식량은 배를 타고 시장에서 구입한다고 나옵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별로 살 곳이 못되는 지역이라는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실제로 가 본 대마도는 삼국지의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남북을 관통하는 외길을 따라 계지에서 인위를 거쳐 좌호까지 둘러보았는데 시속 50킬로 정도의 느릿한 속도 때문에 다소 여유로운 버스 관광이었다고 할까요?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한쪽은 멈추어야 할 정도로 길이 좁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달리기가 어려워 보였습니다. 현지인들도 답답해할 정도로 비좁은 길이지만 지형이 험준해서 넓고 시원하게 뚫린 길을 놓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도로라는 것이 예전부터 있었던 작은 길, 즉 산과 산이 맞닿는 골짜기를 겨우 다듬어서 만든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처럼 험준한 이 작은 섬에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평지가 있었으니 바로 계지, 인위, 좌호라는 세 마을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논과 밭을 볼 수 있었는데 섬 주민들이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면적의 농지였습니다. 그러니 식량은 무역을 통해서 얻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수긍이 됩니다. 도중에 박물관을 들렀는데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토기가 전시되어 있더군요. 토기를 사용할 정도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원시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문명을 누리면서 생활했던 집단이라고 봐야 하겠죠. 흥미로운 점은 인위 마을에서 본 토기는 고구려 토기와 흡사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저야 고고학 전공이 아니니 박물관에 전시된 토기 파편을 보고 그 특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안목이 없지만 동행한 전문가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서 나름의 식견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계지에서는 고분군을 보았는데 고분古墳이라는 게 대개 왕의 무덤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대마도는 원래 왕이 통치한 독립 국가였다는 의미가 되겠죠. ‘아니 사람이 살기 어려운 이 척박한 곳에 국가가 도대체 존재할 수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환단고기』 기록대로라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었습니다. 계지가라는 백제가 통치했고, 인위가라는 고구려, 좌호가라는 신라가 통치를 했다는 기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는 왜 서로 다투면서도 사이좋게 대마도를 나누어 가지려고 했을까요? 대마도는 사람 살기에는 별 볼 일이 없는 땅이지만 배를 타야만 일본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에는 험한 파도를 헤치고 많은 군사들이 이동하려면 중간 기착지로서 더없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입니다.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삼국이 그토록 기를 쓰고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임진왜란 때 부산으로 대군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쳐들어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대마도를 거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군사적 요충지였음이 분명합니다. 대마도에서 부산은 지척이고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확실하게 보입니다.
대마도를 삼한이라고 기록한 이유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말하면서 “이것이 소위 삼한이다(是所謂之三韓也).”라고 하였습니다. 임나를 삼한이라고 하니까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해석을 한 모양인데 여기에 바로 결정적인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입니다. 임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이라면 그것은 가야가 아니라 마·진·변 삼한의 넓은 지역이 됩니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임나 지명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소위 삼한이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삼한은 일본 말로 ‘상가라’라고 읽습니다. 일본 말이 어려운 이유는 한자 말 독음의 자유자재함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韓國을 ‘간꼬꾸’라고 읽으면 오늘날 우리나라를 말하지만 한국韓國은 ‘가라쿠니’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규슈(九州)에 가면 ‘한국악韓國岳’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때 한국을 바로 ‘가라쿠니’라고 읽습니다. 가라쿠니는 역사서에 나오는 한국을 말합니다. 한韓을 일본어로 ‘가라’라고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서기』의 삼한은 삼가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한, 변한, 마한의 삼한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되겠죠? 그럼 『일본서기』는 왜 임나를 삼한(삼가라)이라고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대마도가 계지가라, 인위가라, 좌호가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공황후가 임나를 정벌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왜가 본래 한반도 부속 섬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마도의 역사, 유래, 영토권 문제를 비롯하여 『환단고기』 기록의 진실성을 역으로 증명해 주는 엄청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환단고기』를 세상에 처음 공개한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직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는 일만 하느라 평생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참으로 어렵게 사셨던 분이 감히(?) 대마도에 가서 보고 이런 스토리를 지어냈을까요?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대마도 가시거든 이런 것을 꼭 보세요. 『환단고기』의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큰마음 먹고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볼 게 하나도 없더라’고 푸념하는 동료 교수의 말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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