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상생人 | 가가도장을 찾아서 - 군산조촌도장 곽용삼, 최영미 도생 편
[STB하이라이트]
「가가도장을 찾아서」는 가족이 화합하며 함께 신앙하고 있는 도생의 가정도장을 찾아가 신앙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소개해 드릴 상생人은 군산조촌도장에서 신앙하고 있는 곽용삼, 최영미 도생입니다. 진리의 바탕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면 늘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진리를 전하기 위해 활동하는 부부 도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Q: 신앙의 계기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곽: 결혼 전 최영미 도생의 막내 오빠인 최학우 도생이 곽용삼 도생에게 「다이제스트 개벽」 책자를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기까지는 5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두 번의 회사 진급 심사에서 부당한 대우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 건강마저 심각하게 나빠졌습니다. 병원에서 쉬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야기에 집에서 쉬면서 읽을 책을 찾다가 책꽂이에 꽂혀 있던 「다이제스트 개벽」이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이제스트 개벽」을 보고 개벽 소식과 우주 1년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보고 상제님을 신앙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천에 있다가 의정부도장에 찾아가서 1992년 상제님 성탄절에 온 가족이 다 입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Q: 입도 후 먼저 제사를 다시 모셨다죠?
곽: 제가 4대 장손인데요, 언젠가부터 제사를 안 모시게 되었습니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상제님 진리를 만난 후 더욱 제사를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조부님, 증조부님, 조부모님까지 제사를 꾸준히 모셨습니다. 제가 제과점을 운영했는데 가게를 운영하면서 늦게 퇴근해도 제사를 준비해 새벽 3시에도 모시고 했습니다.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Q: 외조부모님과 어머니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셨나요?
최: 친정 어머니가 평안북도 출신인데 출가하시기 전 10살 무렵에 보천교 신앙을 하셨습니다. 외조부님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셨거든요. 어머니께서 남한에 내려오셔서는 항상 물을 떠 놓고 청수를 모시고 기도하는 것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자 기독교 신앙을 잠시 하셨는데, 막내 오빠(최학우 도생)가 증산도를 알게 되어서 “어머니 증산도를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천교잖아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태을주도 기억하시고 증산도 신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군산에서 계속 신앙하시다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위패를 도장에 모셨습니다.
곽: 장모님이 저희 신앙의 뿌리죠. 장모님의 깊은 은혜를 느낍니다. 장모님께서 보천교 씨앗을 가지고 남한에 내려오셔서 열매를 맺은 것이 막내 처남과 저희라고 생각합니다.
Q: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 아버지 공덕비가 있으시다구요?
최: 아버지께서 평안북도에서 부유한 막내아들로 태어나시어 외지에서 공부를 하시고 군산시 옥구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터전을 잡으시면서 농장을 운영하는 농감으로 계셨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숟가락까지 주실 정도로 많이 베푸셨습니다. 6.25전쟁 발발 시 잠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아버지께서 끌려가셔서 죽임을 당하실 뻔했는데 마을 사람 모두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진정서를 내서 살아나셨다고 들었습니다.
Q: 신앙을 물려주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궁금합니다.
최: 어머니께서 군산에 오실 때 몸이 많이 약해지셨을 때라서 2년 아프다 돌아가셨는데 태을주만은 읽으셨어요. ‘오래 아파서 미안해’라고 하시고. 어머니께서 도장에 사다 두신 찜통이 있어서 찜통을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요.
Q: 자녀들도 함께 신앙하시죠?
곽: 믿고 따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제가 똑똑하고 잘나서 상제님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된 것이고 저 또한 덕을 쌓아서 조상님들과 상생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진심으로 상제님 진리를 알려 주고 싶어요. 바르고 참된 진리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나를 믿고 근심을 놓으라(도전 3편 12장)고 하신 상제님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25년간 병마와 고난을 극복하면서 신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부부의 확고한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에 있었습니다. 보은.
소개해 드릴 상생人은 군산조촌도장에서 신앙하고 있는 곽용삼, 최영미 도생입니다. 진리의 바탕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면 늘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진리를 전하기 위해 활동하는 부부 도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Q: 신앙의 계기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곽: 결혼 전 최영미 도생의 막내 오빠인 최학우 도생이 곽용삼 도생에게 「다이제스트 개벽」 책자를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기까지는 5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두 번의 회사 진급 심사에서 부당한 대우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 건강마저 심각하게 나빠졌습니다. 병원에서 쉬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야기에 집에서 쉬면서 읽을 책을 찾다가 책꽂이에 꽂혀 있던 「다이제스트 개벽」이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이제스트 개벽」을 보고 개벽 소식과 우주 1년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보고 상제님을 신앙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천에 있다가 의정부도장에 찾아가서 1992년 상제님 성탄절에 온 가족이 다 입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Q: 입도 후 먼저 제사를 다시 모셨다죠?
곽: 제가 4대 장손인데요, 언젠가부터 제사를 안 모시게 되었습니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상제님 진리를 만난 후 더욱 제사를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조부님, 증조부님, 조부모님까지 제사를 꾸준히 모셨습니다. 제가 제과점을 운영했는데 가게를 운영하면서 늦게 퇴근해도 제사를 준비해 새벽 3시에도 모시고 했습니다.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Q: 외조부모님과 어머니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셨나요?
최: 친정 어머니가 평안북도 출신인데 출가하시기 전 10살 무렵에 보천교 신앙을 하셨습니다. 외조부님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셨거든요. 어머니께서 남한에 내려오셔서는 항상 물을 떠 놓고 청수를 모시고 기도하는 것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자 기독교 신앙을 잠시 하셨는데, 막내 오빠(최학우 도생)가 증산도를 알게 되어서 “어머니 증산도를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천교잖아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태을주도 기억하시고 증산도 신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군산에서 계속 신앙하시다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위패를 도장에 모셨습니다.
곽: 장모님이 저희 신앙의 뿌리죠. 장모님의 깊은 은혜를 느낍니다. 장모님께서 보천교 씨앗을 가지고 남한에 내려오셔서 열매를 맺은 것이 막내 처남과 저희라고 생각합니다.
Q: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 아버지 공덕비가 있으시다구요?
최: 아버지께서 평안북도에서 부유한 막내아들로 태어나시어 외지에서 공부를 하시고 군산시 옥구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터전을 잡으시면서 농장을 운영하는 농감으로 계셨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숟가락까지 주실 정도로 많이 베푸셨습니다. 6.25전쟁 발발 시 잠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아버지께서 끌려가셔서 죽임을 당하실 뻔했는데 마을 사람 모두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진정서를 내서 살아나셨다고 들었습니다.
Q: 신앙을 물려주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궁금합니다.
최: 어머니께서 군산에 오실 때 몸이 많이 약해지셨을 때라서 2년 아프다 돌아가셨는데 태을주만은 읽으셨어요. ‘오래 아파서 미안해’라고 하시고. 어머니께서 도장에 사다 두신 찜통이 있어서 찜통을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요.
Q: 자녀들도 함께 신앙하시죠?
곽: 믿고 따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제가 똑똑하고 잘나서 상제님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된 것이고 저 또한 덕을 쌓아서 조상님들과 상생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진심으로 상제님 진리를 알려 주고 싶어요. 바르고 참된 진리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나를 믿고 근심을 놓으라(도전 3편 12장)고 하신 상제님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25년간 병마와 고난을 극복하면서 신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부부의 확고한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에 있었습니다.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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