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과 배려가 이끈 합심의 도방문화(이상열, 나은화 도생)

[가가도장]
경주노서도장 이상열, 나은화 도생


가가도장은 사람을 살려내고 양육하는 또 하나의 도장이다. 그러한 순기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도방의 구성원 간에 느끼고 교류하는 믿음과 신뢰의 밀도가 굳건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친숙하고 격의 없는 가족이라도 진리를 바탕으로 존속하는 가정도장의 의미를 망각하고 질서를 잃은 채 표류한다면 그 가가도장은 유명무실한 허울로 남을 뿐이다.

본래 상대방의 의사와 마음을 움직이려면 일정한 자기 희생과 양보가 따라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남에게 맞추기 전에 자기의 득실을 먼저 생각하면 진정으로 바라는 목적을 이루기는 힘들다. 특히 상대가 부부 사이라면 도방의 중심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더욱 조심스럽다. 그러므로 도방이 진정으로 훌륭한 케미스트리chemistry, 조화로운 어울림을 이루려면 도방 조직의 중심 역할자가 사랑과 배려 혹은 양보의 의식과 의지로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서로가 가진 열정과 감성은 일단 차치하고, 각자가 지닌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며 끊임없는 배려와 사랑으로 굳건한 신뢰의 도방을 형성한 경주노서도장 이상열(남, 43세, 교무녹사장), 나은화(여, 39세, 교무녹사장) 부부 도생의 이야기다. 이 도생은 식품 유통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나 도생은 가정주부이다. 이 부부는 슬하에 외동딸 이유리(여, 10세, 교무사감) 도생을 두고 있다.

지난 1월 둘째 주 일요일 오후 취재진은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에 위치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2층에 위치한 가정도장에 들어서서 밝은 웃음으로 반기는 이상열, 나은화 부부 도생과 딸 이유리 도생을 만날 수 있었다.

거실 옆쪽에 별도로 마련된 도방의 천신단은 순백색 벽면 상단 중앙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이 자리를 잡고, 좌측에는 태상종도사님 존영과 태을주 액자가, 우측에는 태사모님 존영이 위치해 있다. 아래쪽에 길게 놓인 청수 단 위에는 청수그릇과 함께 조상선령신위 등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정결하고 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도방은 그 밝은 색감이 주는 격조 또한 예사롭지 않다.

천신단에 예를 올린 후 빼곡한 책장과 검정색 소파, 백색의 바닥이 깔끔한 조화를 이루는 거실에 마주 앉아 상제님 신앙을 만난 계기와 오직 정성으로 모든 장애를 헤쳐 나간 신앙 과정, 살릴 생生 자의 순수한 열정을 불태웠던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회고와 신앙 복원에의 의지 등에 관련된 이 가족의 신앙 스토리를 차분히 경청해 보았다.


막내가 찾은 정성의 구도기


가족과 삶에 대해 배우다
이상열 도생은 경북 포항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으로부터 귀여움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인지 유년 시절 이 도생에게 있어 세상은 늘 해맑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7살 때 할아버지가 별세하시면서 이 도생은 처음으로 가족의 죽음과 이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도 큰 사랑을 주시던 할아버지가 돌연 곁에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이 도생은 마을 어르신들께 할아버지의 별세를 알리러 다녔는데, 문득 “할아버지는 저 하늘의 별로 계신다.”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조상에 대한 애착과 공경심이 신앙과 더불어 한결같이 유지되어 왔던 것은 어린 시절 정서에 깊이 새겨진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체험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도생은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인문계와 실업계를 선택하는 진로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가정 형편상 인문계보다 실업계로 가서 기술을 배워 바로 직장을 가지려고 했던 이 도생은 선생님과 상의를 거쳐 경주공업고등학교 요업과로 진학을 하였다. 그때 이 도생은 빠른 취업을 위해 실고생(학교 수업 이외에도 실습으로 계속 기술을 연마하는 학생들)에 지원하여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당시 학교 선후배 간에 군기를 잡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얼차려 등이 가해지면서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이 생겼다. 어린 나이에 혼자 타지에서 자취 생활을 하면서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꼭 이렇게 배워야 하는가 하는 고민과 함께 삶에 회의가 느껴지면서 실고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학교에서 진리를 만나고
그러다가 1학년 2학기 때 과학 선생님이 부임하셨는데, 수업 시간에 들려주신 특이한 얘기가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그것은 평이한 수업 내용이 아니라 신관이나 우주 1년 등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도생은 따로 선생님을 찾아뵙고서 자신의 상황들에 대한 고민들을 털어놓게 되었다. 선생님은 얘기를 잘 들어주신 다음 『한민족과 증산도』라는 소책자 한 권을 주셨다. 그리고 강연회도 있다고 소개해 주셔서 친구랑 갔었는데 그때 조금씩 증산도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2학년 때는 학교에 ‘증산도 동아리’가 개설되어 이 도생은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도장에도 출입을 하면서 정성 수행이라는 것을 해 보았다. 친구와 함께 21일 동안 매일 1시간 이상 수행을 시작했다. 정성 수행은 학교 실고생 수업을 마친 저녁 10시 이후부터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당시 선배들이 시킨 얼차려로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 이 도생에게는 젊은 패기와 순수한 정성이 있었다. 비록 몸이 아파 힘이 들더라도 친구와 서로 의지해 가며 도장에 가서 수행을 하곤 했었다. 다리는 많이 아프고 잠도 쏟아지고 했지만 21일간 빠뜨리지 않고 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친구와 열심히 수행을 했다.

이 도생은 그렇게 열정을 갖고 수행에 임하면서 많은 체험들도 하게 되었다. 제일 처음 경험한 것은 수행 시 눈앞에 밝은 빛이 보이는 광명 체험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한 순간 갑자기 수백 개의 조명을 켜 놓은 듯 확 퍼져 나가는 환한 빛이 열리면서 아주 온화하면서 편안한 느낌이 온몸에 가득 찼다. 말로는 표현이 어려운 체험이었다. 또한 영적인 귀가 열리면서 수행 도중 함께 따라 읽는 보호신명의 주송 등 신명들의 소리도 듣게 되었다. 특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주문을 함께 읽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깊은 감사와 사랑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하늘에서 아주 맑게 떨어지는 복록수 물소리 등도 들으며 수행에 점점 재미를 붙여 나갔다. 이렇게 21일 정성 수행을 마친 후 이 도생은 정식으로 친구와 함께 증산도 도문에 입도식을 올리게 되었다.

타인의 문제를 끌러 낸 상생의 수행
입도 후에 이 도생은 다시 한 번 21일 정성 수행에 도전했다. 그때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와서 매일 1000배례씩을 올린 후 밤잠을 물리쳐 가며 수행을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계수기가 없을 때라 콩을 한 알씩 옮겨 가며 횟수를 세며 진행했다고 한다. 매일 배례를 하는 시간이 최소한 4~5시간씩 소요가 되었는데, 피곤해서 배례를 올리다가 잠시 잠이 들 때도 많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일을 채워 21,000배례를 완료했다. 배례를 마치고 나면 등교할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바로 자취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세수만 한 다음 바로 등교를 하는 강행군을 했다.

“그때는 21일 정성 수행을 꼭 해 내고 말겠다는 마음뿐이어서 그렇게 피곤한 줄도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네요.” 이 도생이 당시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초발심을 감안하더라도 이 도생의 정성과 의지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배례 정성 공부를 통해 타인의 문제를 끌러 내고자 한 이타적 수행으로도 나타났다. 이 도생은 당시 도장 포정님의 가정사 문제를 끌러 드리고 싶은 마음에 7,000배례를 목표로 정성 수행을 완수했다. 그랬더니 그 문제가 기적같이 해결이 되는 것을 경험했다. 자신감을 가진 이 도생은 두 번째의 7,000배례 또한 도장 도생의 문제를 도와 드린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배례를 드렸고, 또다시 신기하게도 그 도생의 어려움이 끌러졌다. 마지막 7,000배례는 친한 친구를 포교하기 위해서 정성을 드렸는데 그 친구가 후에 입도를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저는 입도 전과 입도 후에 진행했던 두 번의 21일 정성수행을 통해서 정성을 드린 만큼 일들이 끌러짐을 확인했습니다. 당시 제가 어린 나이였지만 ‘정성’이라는 것이 아주 소중한 것임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이 도생은 담담히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본인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고 했지만,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 많은 또래 젊은 청년들의 일상에 비하면 그 발상과 마음을 쓰는 방식이 결코 예사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이 도생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했다. 당시에는 대학가의 젊은 일꾼들에 힘이 붙어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던 때라서 이 도생은 많은 지인들과 학교 선후배들을 입도시킬 수 있었다. 이 도생은 지금도 그때의 입도기록부와 포교일지 등을 자신의 귀중한 신앙의 역사로 잘 보관하고 있다.

부모에게 올린 큰절의 정성
『도전』의 상제님 말씀 중에는 가족 관계를 해결하는 방책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이 있다. 부부가 합심해야 천하사를 이루는데, 만일 뜻이 서로 달라 마찰이 생기고 마음을 돌리지 못할 때에는 더욱 굽혀 예를 갖추어 경배하기를 일과로 행하면 마침내 그 성의에 감동하여 순종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3편 245장). 이 도생이 신앙 문제로 염려하는 가족을 위해 이 말씀처럼 실천한 사례가 있어 소개한다.

이 도생이 16세부터 경주에서 혼자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모님께서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들이 증산도 신앙을 하는 것을 아시고, 사이비에 빠졌다고 크게 염려하셨던 적이 있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형과 누나들도 막내의 생소한 신앙에 대해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 도생은 아무래도 진리에 대한 이야기로 가족들을 설득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은 바로 부모님께 자신이 진리를 만남으로 인해 변한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주말에 부모님을 찾아뵐 때 큰절을 올리는 일이었다. 처음에 부모님은 갑자기 큰절을 하려고 하는 아들의 모습에 당황하셨던지 절을 안 받으려고 피하셨다. 하지만 아들이 빨래터에서도 경운기 앞에서도 가리지 않고 꿋꿋하게 절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제서야 받아 주기 시작하셨다. 이 도생이 진리를 만나 그 나이에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에게 효도할 수 있는 방법들은 집 청소를 솔선수범해서 하고, 절도 하고, 매일 전화도 드리는 게 거의 최선이었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27년간 이 도생은 부모님께 매일 안부 전화 드리는 걸 빠뜨리지 않고 있다.

이 도생은 당시 큰절을 올리는 한편으로 21일 동안 부모님을 위한 정성 수행을 병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마음이 굳게 닫혀 있던 아버지께서 자식이 어떤 진리를 배우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포항의 도장에 직접 방문하여 사배심고 및 태을주 수행을 하고 교육도 들으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비록 입도는 하지 않으셨지만 이후로는 이 도생의 신앙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가 없었고 이해하는 편에 서게 되셨다. 이 도생은 간절한 정성을 바탕으로 부친이 마음의 문을 열도록 만들었다. 이 체험을 통해 이 도생은 신앙의 바탕은 곧 ‘정성’이라는 것을 또다시 절감했다고 한다.


열정으로 채운 진리에의 안착


#사춘기에 느낀 ‘가정’이라는 울타리#>
나은화 도생은 대구 출신으로 1남 2녀 중 장녀이다. 어려서는 대가족으로 조부모님 등 일곱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았다. 맏이가 대체로 그렇듯이 장녀로서 성장한 나 도생은 개인적인 감수성과는 별개로 겉으로 표출하기 보다는 속으로 끌어안는 성향을 일정 부분 갖게 되었다. 열세 살 때에 부모님, 동생들과 같이 분가를 하여 따로 살게 되었는데, 당시에 약주를 많이 하셨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고, 그러한 상황에 동생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중간에서 다독이는 역할을 하면서 나 도생은 조금은 마음의 병이 들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부모님이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나 도생은 불안정한 사춘기를 보내면서 가정이라는 따뜻한 울타리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든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그들이 전한 충격의 메시지
이후 대학교에 진학한 나 도생은 증산도에 입도를 하기 전에 OO진리회를 먼저 접했다.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2학년 무렵의 어느 날, 교정을 걷고 있던 나 도생에게 어떤 여성이 다가와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잠시 하자고 했다. 나 도생은 그냥 별 선입견 없이 조용한 빈 강의실에 앉아서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1시간여 동안에 걸쳐 우주 1년에 대한 이야기, 조상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 천주교 신앙을 하는 가정에서 자란 나 도생은 장녀로 커 오면서 늘 제사 지내는 풍경들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조상 관련 이야기에 많은 관심이 갔고,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조상님의 운명이 바뀌는구나 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서 성금을 어느 정도 모시고 한복 입고 치성도 한 차례 모셨으며 몇 차례 복록수 물을 마셔야 좋은 기운이 온다고 해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진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자꾸 요구하는 게 느껴졌고, 그것이 싫었던 나 도생은 그들과 연락을 단절했다.

친구의 인도로 참진리를 만나고
그 사건 이후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나 도생에게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대구에서 좋은 강연회가 있다며 함께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무슨 행사인지 묻지도 않고 그냥 따라갔었는데, 나 도생은 그것이 종도사님의 개벽강연회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 강연 내용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연회 이후 도장이라는 곳에 가서 교육을 듣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일단 거절을 했는데, 데려간 친구가 다시 간곡히 부탁을 해서 나 도생은 미안한 마음에 당시 대구시지도장에 방문을 했다. 도장에 가서 보니 영남대학교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나 도생은 젊은 학생들이 많은 걸 보고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도장 책임자와 교정으로부터 수행에 관한 교육을 듣고서 당일에 성전에서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나 도생은 입문 과정을 거치면서 집에서 청수도 모시고 배례도 올리며 뭔가 모를 끌림에 열심히 도장에 다녔다. 그 당시 영남대 대학생포교회(이하 ‘대포’) 선배들의 여러 교육을 들어 보니 모두 다 맞는 말이기도 했고, 젊은 대학생들이 북적이는 그 느낌들이 좋아서 타 대학의 학생이었지만 열심히 참여했다고 한다. 학교 수업이 마치고 나면 버스를 타고 바로 도장에 가서 수행과 공부를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큰 방해나 거부감 없이 2001년 4월에 입도를 했다. 입도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상제님의 진리가 100% 맞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나 도생은 왠지 모를 강한 흡인력이 있었다고 표현했다.

너무도 뜨거웠던 열정의 나날
그 이후 나 도생이 다니던 대구대학교 동아리 쪽으로 연계가 되어 대포 생활을 하게 되면서 신앙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대포 활동이 아주 활발한 시기였기에 나 도생이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선배들이 참 많았다. 나 도생은 그때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 도생은 대포 생활을 통해 점점 진리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고, 그것은 참여에 대한 열정으로 나타났다. 당시에 외박은 상상하기 어려울 때라 1박 2일의 증산도대학교 교육에 참여하기 위해 토요일 대전에 올라갔다가 막차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일요일 첫차로 올라가 교육에 참석하고 내려오는 일을 반복했다. 교육 하나라도 놓치기 싫었기에 정말 열심히 참여했다고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나 도생은 본격적으로 상제님 천하사에 온전히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휴학하고 도장 상주를 시작했다. 동시에 본격적인 대포 활동이 전개되고 써클장도 맡아 고군분투를 하면서 지낸 그 시절은 나 도생의 신앙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고, 젊음과 열정을 분출하며 보낸 빛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후배들이 많이 생기면서 나 도생도 대포 생활을 마무리하고 2004년 즈음 자연스럽게 일반 계층으로 이동했고, 도장 상주를 계속하면서 집정 보직을 맡아 도장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리고 2년이 지난 2006년 봄 즈음 나 도생은 건강 및 가정사로 인해 5년여의 상주 생활을 마무리하고 잠시 본가로 들어가서 1년 정도 사회생활을 했다.


도반이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반려자를 만난 스토리
이 무렵 나 도생은 학교 선배의 소개로 인생의 반려자인 이 도생을 만나 6개월 만에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 스토리가 흥미롭고 신앙과 관련해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당시 28세가 된 나 도생은 결혼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도생을 만나자마자 별다른 큰 고민 없이 결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평소 이런 사람이랑 결혼이란 걸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딱 그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성실하고 자상하며 예의바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고도 했다. 생각과 느낌이 일치한 이상 두고 볼 여지가 없었다. 나 도생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연락처를 묻고 만남을 가진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 서로 만난 횟수가 6~7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 만나지도 않고 결혼했다는 게 너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만큼 제가 ‘결혼은 이 사람이다’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나 봐요. 사실 저는 술, 담배 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만나서 그것부터 물어본 것 같아요. 조금은 바른 생활의 사나이, 그런 스타일이 제가 추구한 남편상이었는데 그런 조건들이 다 부합돼서 끌린 것도 있지만, 사실 겉모습과 말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순수함에 많이 호감이 갔었어요.”

나 도생이 말하는 부부의 인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진리를 만날 때만큼 강한 임팩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 도생은 가끔 동네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한번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 뭐냐’라는 질문이 공통으로 주어졌고, 각자 나름대로 답변을 했을 때 나 도생은 “우리 신랑을 남편으로 만든 게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나 도생에게 있어서 증산도 신앙을 만난 것과 그 신앙 안에서 지금의 이 도생을 남편으로 맞이한 일은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만한 일이었다.

나 도생은 사실 어릴 때 많이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스타일이었고, 가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어두운 면모도 없잖아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대학교 때 상제님 신앙을 만나 배례를 통해 그런 어둡고 우울한 기운들이 걷힐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학교 때 계획을 세워 1,000배례를 지속적으로 올리면서 그런 기운들이 많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배우자인 이 도생은 본성 자체가 밝고 순수하며 착하고 활발한 편이라 나 도생 자신이 그런 기운에 많이 동화되고 밝아짐을 느낀다고 한다. 기운이 없거나 축 처져 있을 때 이 도생이 많이 일으켜 주는 편이라 평소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생활에 있어서 그런 느낌을 갖는다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나 도생의 표현대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 신앙적으로 더욱 탄탄해지고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모두 부부 사이에 조화가 잘 맞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에 서로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해 경제적인 부분에서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나 도생은 오히려 이 도생을 그냥 믿고서 이 또한 잘 지나가리라,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이 도생은 신중하게 생각을 거듭하며 고민한 끝에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이라서 나 도생은 남편이 무언가를 한다고 할 때 거의 전적으로 믿고 따라주는 편이다. “부부가 합심하지 못하면 천하사는 이루기 어려우니라.”라는 도전 성구 말씀처럼 도장 일이든 사회 일이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힘껏 도와주는 입장이라고 했다.

신뢰와 배려가 부른 사랑의 하모니
이렇게 두 도생의 결혼 이야기를 소상히 소개하는 것은 서로 간에 조성된 신뢰의 힘과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신앙생활과 삶의 과정에 있어서 강력한 동력이 된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나 도생은 이 도생에 대한 신뢰로 인해 어떤 일에 대해서든 아무 거리낌이 없고, 조금이라도 신앙의 정신이 흐트러지려고 할 때에는 정말 힘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을 잘하는 남편을 보며 다시 반성하고 마음을 잡는 계기로 삼는다고 한다. 그렇게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정성스럽고 열심히 해 나가는 이 도생의 모습을 보면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는 말도 했다.

이 도생에 대한 나 도생의 신뢰와 합심은 근원적인 조상 봉경 문제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결혼 이후 고락을 같이 겪어 나가는 모든 과정에서 이 도생은 한결같이 아내인 나 도생의 조상천도식 봉행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하나하나씩 실행해 나갔다.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이 도생의 사업이 조금씩 번창해 나갈 때도 이 도생은 늘 자신보다 나 도생의 조상천도식을 먼저 하도록 했다. 그 결과 나 도생이 138년 5월에 직선조, 143년 4월에 외선조, 147년 9월에는 진외가 천도해원치성을 모셨고, 이 도생은 결혼 후 직선조, 146년 10월에 외선조 천도해원치성을 모셨다. 나 도생이 신앙인과 결혼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 하는 이유는 이러한 배려와 사랑이 가정 안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의 이치와 도리를 아는 배우자가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은 진리의 당위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가정이라는 둥지에 견실한 사랑으로 리모델링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 것이다. 나 도생은 올해 무술년에는 부부가 아직 올려 드리지 못한 조상천도식을 모두 봉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도방이 성소가 돼야 하는 이유


3년의 불편을 감수하다
이 부부가 신혼 생활 때 마련한 첫 보금자리에서는 주거 면적이 좁았던 관계로 가정도장에 천신단을 모시는 별도의 도방 공간은 딱히 마련할 수가 없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조금씩 가세가 풀리면서 가족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 도생은 그때 방 한 칸을 전용 도방으로 만들게 되었는데, 하얀 방에 오로지 신단만을 꾸밀 수 있게 되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도방을 마련한 기쁨도 잠시뿐, 이 가족은 전혀 예상치 못한 ‘층간 소음’ 문제로 아랫집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아파트의 고질적인 단점이기도 한 이 문제로 인해 도장 도생님들을 모시고 가정치성을 하는 그날에도 어김없이 아랫집에서 항의가 시작될 정도로 많이 예민한 이웃을 만난 것이 문제였다. 이후 3년 동안이나 늘 불편한 생활을 하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도장 식구들이나 지인들을 초대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도방에서 도공을 한다거나 수행을 하는 것조차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속에서 진행해야 하는 상태였다.

드디어 마련한 도방 완전체
할 수 없이 사배심고를 하고 기도를 드릴 때마다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편하게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원을 드렸다. 부지런히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알아도 보고 다니던 차에 우연히 같은 아파트 옆 라인에 아랫집이 없는 필로티pilotis(건축물의 1층은 기둥만 서는 공간으로 하고 2층 이상에 방을 짓는 건축 방식) 집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이사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무위이화로 일이 끌러져 자연스럽게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집은 이미 인테리어를 새로 다 해 놓은 곳이라 크게 손볼 것도 없었고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고 가족들 힘만으로도 이사가 가능하다는 점, 특히 층간 소음의 스트레스가 전혀 없고 도방에서 마음 편히 도공과 수행이 가능하다는 점 등이 작용해 큰 고민 없이 이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마련된 보금자리에서 정말 편한 마음으로 도장 식구들을 모시고 가정치성을 했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운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지금의 도방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에게 가가도장이란
이 도생은 가정 도방이 언제든지 기도를 드리고, 정성을 모실 수 있고, 자신의 신앙을 매일매일 점검할 수 있는 그런 곳이며, 대상자들을 도장으로 인도하기가 부담스러울 때 편하게 집에서 차를 마시고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도방을 소개할 수도 있는 제2의 도장이라고 표현을 했다. 아직 도방으로 인도하여 대상자가 포교된 상황은 없지만 집으로 오는 지인들이 조금씩 증산도에 대한 인식이 편하게 스며드는 것을 종종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가정에 도방 하나가 생긴 이후 딸아이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이 방은 뭐하는 곳이에요? 유리는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라며 천진난만하게 질문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 도생은 자연스럽게 상제님 진리에 대해서 짧게나마 편하게 설명을 해 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리네는 신성한 무언가를 모시고 신앙을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나 도생의 지인들 또한 도방에서 수행도 하고 기도도 한다고 얘기를 하면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신비스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늘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나 도생은 집에 오는 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도방 문화를 소개하고 증산도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항상 도방을 깨끗하고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고자 더욱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다.

나 도생은 아직 구체적인 포교로 연계된 상황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진리를 전할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집안의 성소, 도방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도방이 생김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주과포 치성과 정성 기도를 자주 올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으며, 지난 동지 맞이 21일 정성수행을 할 때는 아침저녁으로 도복을 갈아입고 도방에서 청수를 모시고 수행을 하였더니 마음가짐부터 겸손해지고 경건해졌다고 했다.

서로를 빛내는 가족의 어울림
나 도생은 가정에 도방이 있으니 초립동 딸을 위해 신앙의 근본은 절대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유리 도생은 지난 동지 맞이 21일 정성수행을 집에서 스스로 하면서 조금씩 신앙 훈련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부모로서 자식의 신앙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 되었기에 두 도생은 더욱 솔선수범하여 신앙의 본보기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딸 이유리 도생은 영적 감수성이 있어 수행을 하면 체험도 곧잘 하는 편이다. 상생출판에서 발행된 도공수행 사례집 『태을주 도공으로 개벽된 나의 생명 4권』에 체험 사례가 실리기도 했다. 태을주를 읽고, ‘지기금지원위대강’ 주문을 송주할 때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커다란 용이 다가와 입 속에 있던 파란색 여의주를 손에 쥐어 주었고 용이 하늘로 사라지면서 만지던 구슬도 사라졌다는 내용이다. 평소 수행 시에도 파란색이나 초록색의 빛을 자주 보곤 하며, 2015년 겨울 본부 교육관에서 수행을 할 때는 신단 청수그릇에서 나무의 싹이 나고 점점 자라서 열매가 달리는 것을 보기도 했다.

지난번에는 한문화 중심 채널 STB상생방송에 방영된 도전퀴즈(제76회 경주노서도장 편)에 모녀가 함께 출연을 했다. 나 도생은 많이 떨리기는 했지만 딸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참여했다며 유리와 함께 좋은 신앙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든 것 같아 흐뭇하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느낀 사실이지만 이 가정도방은 세 명의 구성원이 서로를 빛나게 해 주는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속마음과는 달리 드러나는 행동으로 가족 간에 사랑과 정을 온전히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내외간은 물론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온화하고 애정 넘치는 대화가 오가는 걸 보면 이 도방의 정서를 읽을 수 있고, 그렇게 익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말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대하는 미세한 언행들이 서로를 빛내고 결속시키는 케미스트리로 작용하고 있음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참여하는 신앙에 필요한 것들


의지와 마음만 있다면
지난 2016년 6월에는 경주에서 〈환단고기 북콘서트〉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때 정말 적은 인원이었지만 합심하여 행사 홍보를 아주 열심히 했고, 역사 회복과 진리 홍보의 메시지가 널리 전해져서 콘서트가 원만히 잘 치러질 수 있기를 기원하며 도생 모두가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 도생도 작은 힘이나마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많이 했었는데, 여러 실무적 사항들을 처리해 나가는 가운데 행사 관련 비용 마련에도 서로의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때마침 이 도생이 현재의 집으로 세 번째 이사를 앞두고 있던 때라 자금 융통이 가능한 상태여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금을 마련해 헌성을 할 수 있었다. 이 도생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참여하려는 의지와 마음만 있다면 정성의 대소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저 관심과 정성을 갖고 상제님의 일을 인사로 풀어갈 수 있느냐에 집중하여 실천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도장의 여러 일을 대하는 이 도생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사례였다. 또한 이 도생은 콘서트 홍보 활동을 하면서 얻은 소득 중 하나로 주위 지인들 중에 의외로 환단고기를 스스로 읽고 있거나 상생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분들이 많음을 알게 된 점을 들기도 했다.

청소를 좋아하는 이유
이 도생은 도장에서 행사가 있거나 할 때 주로 ‘청소’ 부분을 맡아서 봉사를 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집안일을 도우면서 늘 쾌적한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므로 청소를 잘 한다고 한다. 이 도생은 원래 꿈이 ‘청소부’였을 만큼 청소를 좋아하고 즐긴다고 했다. 어릴 때 새벽 시간대에 골목을 청소하는 청소부를 보는 순간 저분들의 노력으로 우리가 맞는 아침이 늘 상쾌한 기운으로 다가왔구나 싶었다는 기억도 언급했다. 청소를 하는 순간은 나를 잊고 거기에 집중을 하게 된다고도 했다. 도장에서 청소를 하기 전에는 마음속으로 천지일월, 그리고 조상님에게 청소 신명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는데, 그러면 단순한 노동의 행위가 아니라 신명과 더불어 그 묵은 기운을 완전히 벗겨 내는 유쾌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청소를 좋아한다고 해서 생소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듣고 보니 청소에 대한 나름의 이유와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 도생은 예전에 도장 순방 행사 시 21일간 청소 책임을 맡아서 진행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직장이 끝나고 매일 밤늦게까지 도장에서 21일간 청소를 했는데, 묵은 기운이 걷히고 맑아진 도장 안에서 기분 좋게 도공 기운을 받았을 때는 21일간 힘들었던 육체적인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도생은 도장의 여러 도생 분들과 청소라는 수행을 함께 하면서 기운을 크게 받은 이 체험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린이포교회 포감 입문기
이 도생과 나 도생 사이에 태어난 10살이 된 초등학생 딸 이유리 도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붙임성과 애교가 있는 초립동이다. 그간 재롱둥이 딸로만 여겼는데, 아홉 살인 작년에 증산도 도문에 입도를 한 이후로는 왠지 더 의젓해졌다고 한다. 나 도생은 이제 전 가족이 모두 상제님 신앙을 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다고 했다. 사실 배 속에서부터 도장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다니는 상황이었고, 생활 속에서 신앙하는 모습을 자연스레 보고 자랐기 때문에 입도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사실 지금부터가 신앙의 첫 단추를 꿰는 시기라는 생각에 나 도생은 생각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2016년 봄 즈음, 경주노서도장 포정님께서 나 도생에게 도장의 어린이 도생들을 지도해 주는 역할을 맡아 주면 좋겠다고 몇 번 권했는데 엄두가 나지를 않아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딸아이가 입도하고 나서 아무런 교육이나 그런 역할을 해 주는 분이 없다면 안타깝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결국은 어포(어린이포교회) 포감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어포 도생들의 신앙 관리에 주목을 하던 나 도생은 자신이 대학생이나 일반 계층 때 관리하던 부분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보육의 개념과 신앙 훈련의 개념이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세우고 출발을 했다. 그래서 어포 구역은 치성 후에 신앙의 기초 예법 교육부터 하나하나씩 짧게 교육을 진행하다가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딸아이를 포함한 초등학생 어포 도생들 총 4명의 입도 교육을 진행하여 작년 1월에 입도를 시켰다. 모두 다 부모님들이 신앙을 하는 자녀들이어서 수월하게 입도 준비가 되긴 했지만, 입도 후 어린이 도생들의 신앙 정착 과정이 중요한데 나 도생은 아직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어포 도생들의 입도 이후 성지순례 및 도장 자체 교육, 광역 합동 어포 치성 등을 운영하였고, 현재는 이야기도전 1회 전체 봉독, 정성수행, 도전 원전 읽어 나가기 등을 진행하고 있다. 나 도생은 “우리 어포들이 나중에 크면 진정한 증산도 일꾼이 될 아이들이라는 걸 느끼며 뭔가 더 잘해 주고 싶고, 잘 이끌어 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올해는 더욱 체계적으로 잘 이끌어 나갈 수 있게 어포 포감으로서 소명을 다하도록 스스로 마음을 다지고 있습니다.”라고 심정을 전했다.

신앙의 부활, 도반의 귀환을 기원하며


도방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두 도생에게 진법도운을 여는 무술년 신앙 계획과 각오에 대해 물었다. 이 도생은 지역도장 이전과 과거에 경험했던 포교 기운의 부활, 가족포교와 신앙 동지들의 귀환 등을 주제로 삼았고, 나 도생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구도의 자세, 초발심 신앙의 복원, 포교에 대한 열망을 주제로 담담히 이야기를 쏟아 냈다.

먼저 이 도생이 말하는 올해의 신앙 계획이다.

“무술년을 맞이하여 저희 경주는 지역도장 이전을 목표로 정말 다시 한번 정성을 다해 활동을 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1994년 포교 기운이 고조됐을 때 육임 조직을 짰던 그 정성을 바탕으로 새롭게 달려 보고 싶습니다. 정말 저보다 더 신앙을 잘하는 참된 사람을 살리고자 제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같이 함께 동고동락하며 신앙한 도반들이 올해는 다시 신앙의 길로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제일 중요한 가족포교를 꼭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제게는 아버지가 참 큰 산 같고, 듬직하신 존재인데요. 사실 가족 포교가 이루어진다면 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입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한평생 자식들 뒷바라지하신다고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으셨고 연세가 드셔서도 늘 걱정을 해 주시는, 자식 사랑이 무척 크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십수 년 전 고등학생 막내아들이 무엇을 하느라 저렇게 열성적이 되었는지 궁금해서 포항도장을 방문하시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제가 좀 더 진리적으로 강력하고 나이가 더 든 상태에서 자신 있게 진리를 전할 수 있었다면 아버지를 상제님 도문으로 인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에 포항에서 지진이 났을 때 진앙지 부근에 저희 본가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지진이 발생하자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셔서 그 이후 가끔씩 ‘옛날부터 바닷가 부근에서 큰 지진과 해일이 일어난다는 그런 말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게 너희가 말하는 개벽인가 모르겠네~’라며 그냥 농담 삼아 흘려서 말씀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아버지, 어머니께서 제가 하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계속 두고 계신다는 걸 느꼈습니다. 올해는 부모님 입도를 위해 정성 수행을 간절히 드려 반드시 가족 포교의 물꼬를 틀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예전에 진리를 함께 신앙했던 도반들이 다시 한 번 상제님 진리를 깨닫고 그때처럼 같이 열심히 신앙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생각이 요즘따라 많이 듭니다. 세상일에 치이고 각자 먹고살기에 바빠서 그때 그 순수했던 신앙심이 지금은 많이 퇴색되고 빛바래져 있겠지만, 그때 그들이 보여준 열정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들도 마음 한편에는 상제님 진리에 대한 아쉬움과 여러 가지 마음이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계속 그들과 연락의 끈을 놓치지 않고 꾸준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반드시 함께 다시 신앙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벅찬 상상을 한번 해 봅니다.”

나 도생도 대담을 다시 정리하며 계획을 밝혔다.

“저는 ‘신앙은 진리를 닮아 가는 것이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가 부족한 것을 고쳐서 진리를 닮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신 태상종도사님 말씀이 먼저 떠오릅니다. 또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향한 의지와 올바른 삶을 향한 성실한 구도의 자세다. 누구나 자빠질 수가 있고, 흙탕물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를 넘어서려는 한 구도자의 강력한 의지 아닌가.’라고 역설하신 종도사님 말씀도 생생합니다. 이런 도훈 말씀을 요즘 많이 새기고 있습니다.

사실 가정생활과 육아를 하면서 이런저런 세상 풍속에 정신을 뺏기는 순간들이 많은데요, 그럴 때마다 그 기운에 휩쓸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나 자신을 바로 세우려고 이렇게 저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자신도 그럴 때는 혼자 도훈 말씀을 쭉 시청한다거나 기도를 더욱 간절히 한다거나, 어록을 읽어본다거나, 도방에서 수행을 하면서 나름대로 묵은 기운을 떨쳐 내고자 노력을 하곤 합니다. 올해 진법 도운의 해가 열리는 봉정 원년에는 신앙을 처음 만난 그 뜨거웠던 초발심을 되찾아 정말 살리고 싶은 지인들에게 진리를 제대로 전하는 태을랑이 되겠습니다.

포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육아를 하며, 가정주부로 살면서 희석이 되고 초심을 많이 잃어버린 채 신앙을 하지 않았나 스스로 반성을 해 봅니다. 하지만 살면서 누구를 만날 때마다 ‘저분에게 진리를 전하고 싶다’ 하는 그런 분들이 생기는데, 선뜻 자신 있게 진리를 전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현재 지인 중에 제가 증산도를 하고 있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고, 가끔씩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는 분이 계십니다. 저랑 가치관도 비슷하고, 여러 가지 배울 점도 많은 지인인데요, 이번 동지 등燈에 그분의 이름을 적어 올리면서 꼭 올해 포교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를 하였습니다. 집에도 종종 들리시는 분이기 때문에 가정 도방도 소개하고, 자료도 전해 주면서 진리를 전할 예정입니다.

또한 딸아이 친구 엄마인 지인은 정말 진리를 전하고 싶은 분인데요. 어느 날 경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아차 싶었어요. 농담 삼아 저보고 ‘자기는 왜 나한테 자기가 하는 신앙 이야기를 안 하는 거야?’ 이렇게 웃으면서 묻더라구요. 그때 사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을 받으며 ‘아 정말 내가 더 이상 미적거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올해는 책도 보내 줄 예정이며, 그분을 위해 간절한 정성 수행을 꼭 드려서 진리를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누구도 다 살고 싶어 한다. 호생오사는 인지상정이라.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다 똑같이 갖고 있는 마음이다, 그건 미물곤충도 마찬가지다.’라고 말씀하신 태상종도사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지금과 같은 문명의 극치 속에서 세상에 뭔가가 온다는 것은 누구도 다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배수진을 치고, 사상 무장을 하고 정성을 다하는 포교를 해서, 육임을 제대로 짤 수 있는 보은하는 태을랑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이라는 축으로 이어진 생활과 신앙
생활을 탓하지 않고 살다
이 도생은 큰절 실천하기 사건 이후, 신앙의 반대나 유사한 굴곡이 없이 신앙을 무탈하게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수호사님께서 대구에서 신앙하고 있는 여성 도생님 한 분이 계신데 한번 부담 없이 만나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이 도생은 큰 기대감 없이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던 이 도생으로서는 다소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나 도생의 적극적인 주도하에 자신도 모르게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앞서 나 도생의 말을 통해 언급한 바 있다.

평소부터 특별히 준비하며 결혼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던 두 사람은 결혼 후 사실상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태로 신접살림을 꾸려야 했다. 서로가 생활 조건을 따지며 신경을 쓰거나 줄다리기하기도 하는 여느 부부와는 달리, 이 부부는 신앙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삶의 방향에 공통점을 갖고 있었고 그 범주 내에서 맞춰 살아가는 부분에 공감대가 있었기에 생활하는 데에 불편은 있을지언정 불평을 하며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정성수행으로 위기에 맞서고
그래서 부부 둘이 있을 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신조로 서로가 받아들이고 격려하며 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면서 지출이 늘어감에 따라 조금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거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다니고 있던 직장을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 도생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 버렸다. 당시에는 정말 딸아이 분유 값이 없어서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리고 공과금도 밀리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상황이 1년여 동안 이어지자 이렇게는 더 이상 생활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신앙생활마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때 이런 상황을 알고 계셨던 도장의 포정님께서는 도장에서 새벽 수행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같이 하면서 정성을 들여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이 도생은 그 제안을 듣자마자 ‘아! 그래 이것을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서 새벽 수행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 도생은 새벽 수행을 시작할 때 마음속으로 서원을 세웠다. 이 수행을 통해 녹을 창출할 수 있는 여건이 반드시 마련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고, 이는 하늘이 응해 내려 주는 녹이니 반드시 일정 금액을 도문에 헌성을 하고 남는 녹으로 생활을 하겠다고 서원을 했다.

천지의 응답이 가져온 기적
새벽 수행은 딸아이를 돌봐야 하는 문제 등으로 거의 1년 동안 이 도생과 나 도생이 번갈아 가며 이어갔다. 1년이 다 되어 갈 즈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친한 사장님께서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식품 유통 사업장의 일부 지역을 맡아서 해 보겠느냐고 이 도생에게 권하는 일이 생겼다. 현실 이익이 눈에 보이는 멀쩡한 지역 사업장을 남에게 떼어 준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계약금 및 권리금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치 그런 상황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그분이 이 도생에게 일 하면서 갚아도 된다고 편하게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보다 더한 기회는 없었기에 이 도생은 그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고, 일단 시작한 사업은 점점 더 매출이 성장해 1년 만에 권리금 및 계약금을 다 갚고, 온전히 이 도생의 사업장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당시 이 도생은 처음에 서원을 한 그대로 매달 수입이 생기는 즉시 성금으로 먼저 헌성을 하고 남은 돈으로 생활을 했다. 그 성금의 숫자는 이 도생이 기도하며 서원한 금액과 같은 액수였다. 현재 이 사업을 7년째 진행해 오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거의 매달 서원한 그 금액 정도를 월성금 및 특성금, 도장지원금 등의 여러 목록으로 헌성하고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1년의 새벽 수행을 통해서 이 도생 스스로 많이 절박하기도 하였지만 천지에 서원을 하고 응답을 받은 생생한 체험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다시 한 번 ‘정성’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각성을 하게 된 뜻깊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나의 신앙재산 1호는 이것
한편 나 도생은 입도 이후 순수한 마음으로 그저 열심히 신앙을 했던 기억밖에 없기 때문에 이제 신앙을 한 지 17년차가 되었다는 게 너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나 도생의 자신의 17년 신앙을 돌아보며 조금은 평이했던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뭔가 가족의 신앙 반대나 제약이 있었다거나 개인적으로 신앙에 대해 의구심이나 회의를 가졌다거나 하는 돌출 요인이 전혀 없어 신앙에 큰 문제가 될 일이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입도를 하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는 왠지 모르게 늘 상제님 진리는 자신이 끝까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고,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진리에 순종하고 받아들이며 신앙을 해 왔다고 했다. 하지만 신앙의 그래프가 너무 평이해서 어떻게 보면 조금은 더 힘차게 신앙을 하는 데 있어서 힘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고 한다. 대학생 때는 정말 신앙 열정 하나로 힘든 거 모르고 열심히 했었고, 봉직자로 일반 계층 신앙을 할 때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주어져서 그 당시 도훈 말씀을 정말 열심히 받든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때 기록했던 도훈 노트는 나 도생의 신앙 재산 1호로 간직되어 있다. 그때는 오로지 태사부님, 사부님의 도훈 말씀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정말 무아지경 속에서 도훈을 받아 내려 적고 정리했었고, 그 말씀을 기록하면서 기운을 크게 받아 감사한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나 도생은 사실 그때 그 신앙의 흔적으로 인해 자신이 제대로 신앙에 정착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이번 호 가가도장은 정성과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역사를 만들었고 신뢰와 배려의 콘셉트로 가정의 기틀을 세운 이상열, 나은화 도생의 도방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이들은 각기 순수한 신앙력을 이타적으로 투여하거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동력으로 활용하면서 열심히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으로 살아왔다.

두 사람은 부부로 인연을 맺은 후에도 세상 풍속과는 달리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단순한 신뢰 이상의 견실한 가정도장을 구축했다. 그 기틀 속에서 마음을 안착시키고 합심과 조화의 노력이 더해지면서 두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굳건히 믿고 따르는, 무척 잘 어울리는 반려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쏟아 낸 신앙과 가정 이야기 속에는 숨은그림찾기처럼 많은 메시지와 신앙 표식들이 잠재되어 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고 타인을 위해 힘을 쏟았던 그들의 과거 이야기가 저마다 현재의 신앙 이야기로 승화되기를 희망한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도 두 분 도생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특별히 가슴에 묻어 둔 동료나 지인, 가족의 이야기에 애정을 담아 전하면서도 스스로가 좋았던 시절의 리듬을 되찾고 싶어 하는 마음도 강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불현듯 ‘전설의 부활’이라는 표현이 연상되었는데, 그만큼 이 부부의 신앙력 복원 의지에 간절함이 배어 있다는 비유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뜨겁고 아름다웠던 시절은 존재한다. 하물며 진리로 사람 살리는 일에 열정을 바쳤던 역전의 용사라면, 포교의 희열과 보람에 지칠 줄 모르던 그 시절이 더욱 그립고 간절하기 마련이다.
이제 이 부부의 경우처럼 무뎌진 칼날을 다시 꺼내 가다듬고, 사람을 살렸던 가슴 벅찬 경험까지 복원을 시켜 재기의 발걸음을 옮기는 도생이 늘어나고 있다. 나이 들어 성숙한 매는 예전처럼 강하고 날렵하지는 못해도 먹이를 찾고 포착하는 능력만큼은 출중하다. 생존의 루트와 본질을 잘 이해하는 경험과 많은 실전을 통해 단련하고 체득한 습득력 때문이다.

진법 도운의 새 시대를 맞은 지금 우리는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써 내려 갈 신화 못지않게 노련함과 정성으로 일을 이루어 내는 전설의 비상도 꼭 필요한 때다. 이상열, 나은화, 이유리 도생의 도방이 올 한 해 계획하고 서원한 바 이상으로 큰 성취를 이루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더불어 같은 역사와 경험에 공감하는 모든 도생들도 상제님 태모님의 성령과 조상선령 및 천지 성신의 가호로 묵은 먼지를 털어 내고 무술년을 새로운 도약의 한 해로 만드시기를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