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최씨 낙랑국 첫 번째 이야기
[역사X파일]
김용호 / 역사 스토리텔러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국 본기 대무신왕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옥저국 어느 곳에서 호동 왕자는 낙랑 왕 최리崔理를 만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낙랑 태수가 아니라 낙랑의 왕王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라는 호칭만 봐도 삼국사의 저자는 낙랑을 한나라 군현(행정구역)이 아니라 국가로 다루고 있습니다. 낙랑 ‘공주’라는 호칭도 태수의 딸이 아닌 공주라고 호칭합니다. 왕과 공주, 이것은 낙랑이 하나의 국가임을 전제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면 낙랑은 어디에 있던 나라일까요?
중앙박물관 1층에 들어서면 고조선 청동기 전시관을 지나 ‘낙랑의 대표 무덤’이라는 전시공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 전시 공간 안내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낙랑’을 중국식 발음 ‘Lelang’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중국식 발음 ‘르랑’, 한국어를 번역하면 한글 발음대로 써야 하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낙랑’이란 두 글자 때문에 한漢의 행정구역 ‘낙랑군’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박물관은 한漢나라 식민지 ‘한사군 낙랑’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석암리 9호분 유물들이 한나라 유물일까요? 찬찬히 들여다보면 중국 한족이 넘볼 수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 코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한나라에서 군현 태수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합니다. 용은 예로부터 천자의 상징입니다. 한 마리도 아니고 7마리 용이 담긴 허리띠 고리를 하사했다? 앞뒤가 안 맞는 논리입니다. ‘하사’가 아니라 황제께 ‘진상’해야 하는 상등품입니다. 만약 낙랑이 한나라의 일개 군현이었다면, 용 장식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일개 태수가 감히 제왕의 장식을 썼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천자를 꿈꾼다고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할 일입니다.
낙랑국은 고구려와 힘 싸움을 벌이다가 패하여 역사 뒤편으로 잊혀져 버렸지만, 열국 시대 강국 중 하나였습니다. 승자 중심 역사 서술에서 주목받지 못했을 뿐, 전성기 때는 요동반도와 평안도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백제와 신라를 위협하던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용 7마리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우리 선조들에게 아주 친숙한 숫자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언제나 북녘 하늘을 지키는 북두칠성에서 시작됩니다. 북두칠성은 우리 할머니들께서 정한수(청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어두운 밤길에 훌륭한 나침반이었습니다. 옥황상제께서 계시며 온 우주를 다스린다는 별자리가 바로 북두칠성입니다. 아주 오래전 환국 시절부터 치우천황(자오지환웅)께서 호령하던 배달국, 단군임검께서 다스리던 (고대)조선까지 북두칠성에 대한 사랑은 오랜 전통이자 우리 겨레의 특징입니다. ‘천자天子’를 주장하는 제왕에게는 정통성을 상징하는 별자리였습니다. 낙랑 사람들도 이러한 칠성 사상을 당당하게 7마리 용으로 표출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배달의 후예이자 (고)조선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천자 사상의 은근한 과시가 아닐까요?!
낙랑은 어떻게 시작된 나라일까요? 삼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중심으로 집필된 역사서이다 보니 낙랑 건국에 대해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한漢족들이 지은 역사서들에서도 낙랑 건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발해(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안쪽 바다)를 건너 멀리 한민족 국가들의 흥망성쇠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삼국사’에는 ‘낙랑’을 단편적이지만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열국시대 배경으로 낙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이야기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의 수도를 공격했던 이야기, 백제를 공격했던 말갈을 조종했던 이야기 등등. 분명히 존재했던 나라였으며 열국 시대를 장식했던 한 나라였습니다.
기원전 3~1세기는 고조선 말기로 단군의 통치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대륙의 정세가 아주 위태로웠던 시기입니다. 중국은 전국 시대 말기 진秦의 정복 전쟁 그리고 전한前漢으로 교체되는 극도의 혼란기입니다. 전쟁과 정치적 갈등을 피해서 수많은 한족들이 고조선 번한 지역으로 망명을 했으며, 진한과 마한의 붕괴와 더불어 위만이 ‘번한’의 수도를 강탈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러한 혼돈과 불안감은 수많은 고조선 연맹국들로 하여금 조금 더 안전한 동쪽으로의 이동(천도)을 촉발시켰습니다. 예濊 왕도 수십만 백성을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우리가 아는 동예가 됩니다. 낙랑 지역에 살던 무리들도 본래 살던 곳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마한 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번한 낙랑 지역에 살던 대부호 ‘최숭’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해모수단군 재위 45년(기원전 195년)에 백성들과 함께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발해(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안쪽 바다)를 건너, 마한 지역(평안도)으로 넘어와 대동강 유역에 기원전 195년경 ‘낙랑국’을 세웠습니다. 자신들이 본래 살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셈입니다. 어쩌면 낙랑 건국 이야기는 『환단고기』의 「북부여기」기록이 유일합니다. 다른 역사서에서 찾을 수 없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북부여 3세 고해사단군 치세 기록에 보면, 북부여 고해사단군께 조공(곡식 3백 석)을 바쳤다고 합니다. 북부여와 낙랑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낙랑국에 대한 유물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진 속 유물은 곰 장식 유물입니다. 언뜻 보면 개구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을 자세히 보면 개구리 발이 아니라 짐승의 발입니다. 개구리눈처럼 보이는 부분은 곰의 귀입니다. 짐승 얼굴 부분을 자세히 보면 곰 모습입니다
더 재밌는 유물은 벼루입니다. 3마리 곰이 으르렁거리는 모습이지만,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아기 곰이 장난치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3마리, 3수입니다. 3수라는 것은 천지인 삼재 사상에서 유래된 한민족 특유의 철학 사상 표시 체계입니다. 전통적 곰 토템과 3수가 만났으니 한민족 문화 특징을 부정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곰 장식이라고 하면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것이 있지요? 바로 삼국유사의 곰과 호랑이 이야기, ‘단군사화’입니다. 곰 상징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소재였습니다. 배달과 고조선 역사를 보여 주는 홍산 문화 유적에도 옥웅용, 제의에 사용된 듯한 곰 뼈 등 곰과 관련된 흔적들이 다수 발견됩니다. 고구려 벽화 각저총 벽화에도 곰이 그려져 있습니다. 백제 영역의 수많은 지명에도 ‘곰’을 지칭하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곰이란 단순한 토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특징이 석암리 낙랑 유물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漢족 지나인들은 곰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생태적으로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서 곰을 만날 일이 드물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곰 토템은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 영역이었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중국 정부의 입장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조선족 단군사화를 자신들 것으로 가공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곰’이란 동물에 엄청난 애정을 쏟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중화문명中華文明 탐원공정探源工程”입니다. 즉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홍산문명)을 중국문명으로 둔갑시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 수준의 문명으로 만들려는 역사 왜곡 프로젝트입니다. 곰 토템을 중국 한족의 문화 코드인 양 흡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습니다. 곰 토템은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 코드입니다. 발해와 황해를 주름잡았을 부유한 낙랑국은 지금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기에 곰 상징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우리는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신화로 변질시켜 ‘배달’과 ‘고대 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곰’의 상징을 허구로 부정하고 있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부족하지만 이 글을 통해 낙랑국에 대해서 조금 더 가까워지길 희망합니다. 한사군 낙랑보다 더 중요한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낙랑, 열국 시대의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한 낙랑, 우리가 조금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밝혀내야 할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미처 다 이야기하지 못한 낙랑 유물들의 한민족적 특성들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낙랑국은 어느 지역에 자리 잡고 흥망성쇠를 거쳤는지, 낙랑국은 주변 국가들과 어떤 대외 관계 속에 자리매김했는지를 황금허리 띠고리, 낙랑 향로 같은 유물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본국의 역사는 ‘紀’(기), 제후국이나 속국의 역사를 ‘記’(기)라 했던 중국의 사례에 따라 본국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의 ‘紀’에 대한 제후국의 역사책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記’를 붙여 ‘三國史記’로 왜곡했다”고 문정창 교수는 『광개토대왕훈적비문론』에서 주장했다.
움 속에 자갈과 같은 돌을 돌려 놓은 것은 먼 과거의 돌무덤, 즉 기원전 1천 년대 후반 고조선 시대 돌무덤의 잔재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 화장품 통, 청동 솥, 청동 단지, 칠반, 칠귀 잔을 비롯하여 무기류 및 마구, 수레부석품, 벽옥, 치렛거리, 옥도장, 질그릇 등 적지 않은 유물이 나왔다.
이 가운데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이 순금판 위에 7마리 용을 세련된 솜씨로 매우 율동적으로 장식한 순금띠고리이다. 우선 금실로 띠고리의 테두리를 장식한 다음 누금수법으로 용을 형상화하였는데 용의 등 부분에는 좀 굵은 금알을 붙이고 그 밖 부분에는 작은 금알을 붙였다.
그리고 용과 용 사이의 공간에는 꽃잎 모양이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푸른색 비취옥을 박아 놓음으로써 장식적 효과를 더욱 돋우었다. 띠고리 머리 부분은 걸쇠를 달아 혁대를 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형태의 띠고리는 낙랑 31호 무덤을 비롯한 덧날무덤에서도 나왔는데 이 모든 것들은 고조선 문화의 높은 수준과 고유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출처: 북한 지역정보넷
先時 崔崇 自樂浪山 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 都王儉城 是檀君 解慕漱 丙午冬也
고해사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신년이다.
정월에 낙랑 왕 최숭이 해성에 곡식 3백 석을 바쳤다. 이에 앞서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는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년 겨울이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 역주 안경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이야기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겁니다. 국가의 운명과 얽힌 위험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까요. 잘 아시겠지만, 호동과 공주의 결말은 비극적입니다. 공주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침입으로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되며 호동 왕자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 소설, 게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소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낙랑국’이란 나라는 별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공주의 나라, ‘낙랑국’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역사 왜곡의 단골 소재인 ‘낙랑군’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국 본기 대무신왕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옥저국 어느 곳에서 호동 왕자는 낙랑 왕 최리崔理를 만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낙랑 태수가 아니라 낙랑의 왕王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라는 호칭만 봐도 삼국사의 저자는 낙랑을 한나라 군현(행정구역)이 아니라 국가로 다루고 있습니다. 낙랑 ‘공주’라는 호칭도 태수의 딸이 아닌 공주라고 호칭합니다. 왕과 공주, 이것은 낙랑이 하나의 국가임을 전제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면 낙랑은 어디에 있던 나라일까요?
낙랑국의 자부심, 황금용
중앙박물관 1층에 들어서면 고조선 청동기 전시관을 지나 ‘낙랑의 대표 무덤’이라는 전시공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 전시 공간 안내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낙랑’을 중국식 발음 ‘Lelang’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중국식 발음 ‘르랑’, 한국어를 번역하면 한글 발음대로 써야 하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낙랑’이란 두 글자 때문에 한漢의 행정구역 ‘낙랑군’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박물관은 한漢나라 식민지 ‘한사군 낙랑’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석암리 9호분 유물들이 한나라 유물일까요? 찬찬히 들여다보면 중국 한족이 넘볼 수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 코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황금대구黃金帶鉤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금(Gold)판 위에 수천 개의 금 알갱이들을 붙여 만들어졌는데 53.9g(14.3돈) 순금 허리띠 고리입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금제 공예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죠. 크기는 10센티가 미처 안 되는 크기인데요, 전체적으로 금의 함량이 95~97%에 해당되는 순금 세공품입니다. 가장 작은 금 알갱이는 0.3mm , 가장 큰 알갱이는 1.6mm로 그 당시 엄청난 세공 기술을 자랑하던 작품이었습니다. ‘황금 대구’라는 명칭으로 부릅니다. 유물을 자세히 보면, 바다(혹은 구름)를 헤치며 굽이치는 7마리 용이 보입니다.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여섯 마리입니다. 금으로 용이 표현되어 있지만, 군데군데 옥색 보석 7개가 도드라져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옥색 보석은 터키석이며, 40여 개 자리가 있으나 유물 발견 당시 8개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역동적인 용의 묘사에 감탄하고 섬세한 가공 기술에 놀라게 됩니다.■용 장식 검
그 옆에는 검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검 손잡이도 역시 용입니다. 용 두 마리가 검날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허리띠 고리에 크고 작은 용이 일곱에 검(혹은 칼) 장식에도 용이 있습니다. 다른 짐승도 아니고 ‘용龍’을 사용했습니다. ‘용’이란 소재는 아무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오로지 제왕을 위한 상징입니다. 이러한 무덤 부장품들을 보니, 최씨 낙랑국 왕들은 자신감이 대단했다고 생각됩니다. 용을 한 마리도 아니고 7마리나 장식했으니 말입니다.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한나라에서 군현 태수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합니다. 용은 예로부터 천자의 상징입니다. 한 마리도 아니고 7마리 용이 담긴 허리띠 고리를 하사했다? 앞뒤가 안 맞는 논리입니다. ‘하사’가 아니라 황제께 ‘진상’해야 하는 상등품입니다. 만약 낙랑이 한나라의 일개 군현이었다면, 용 장식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일개 태수가 감히 제왕의 장식을 썼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천자를 꿈꾼다고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할 일입니다.
낙랑국은 고구려와 힘 싸움을 벌이다가 패하여 역사 뒤편으로 잊혀져 버렸지만, 열국 시대 강국 중 하나였습니다. 승자 중심 역사 서술에서 주목받지 못했을 뿐, 전성기 때는 요동반도와 평안도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백제와 신라를 위협하던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용 7마리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우리 선조들에게 아주 친숙한 숫자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언제나 북녘 하늘을 지키는 북두칠성에서 시작됩니다. 북두칠성은 우리 할머니들께서 정한수(청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어두운 밤길에 훌륭한 나침반이었습니다. 옥황상제께서 계시며 온 우주를 다스린다는 별자리가 바로 북두칠성입니다. 아주 오래전 환국 시절부터 치우천황(자오지환웅)께서 호령하던 배달국, 단군임검께서 다스리던 (고대)조선까지 북두칠성에 대한 사랑은 오랜 전통이자 우리 겨레의 특징입니다. ‘천자天子’를 주장하는 제왕에게는 정통성을 상징하는 별자리였습니다. 낙랑 사람들도 이러한 칠성 사상을 당당하게 7마리 용으로 표출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배달의 후예이자 (고)조선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천자 사상의 은근한 과시가 아닐까요?!
낙랑국의 건국
낙랑은 어떻게 시작된 나라일까요? 삼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중심으로 집필된 역사서이다 보니 낙랑 건국에 대해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한漢족들이 지은 역사서들에서도 낙랑 건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발해(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안쪽 바다)를 건너 멀리 한민족 국가들의 흥망성쇠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삼국사’에는 ‘낙랑’을 단편적이지만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열국시대 배경으로 낙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이야기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의 수도를 공격했던 이야기, 백제를 공격했던 말갈을 조종했던 이야기 등등. 분명히 존재했던 나라였으며 열국 시대를 장식했던 한 나라였습니다.
기원전 3~1세기는 고조선 말기로 단군의 통치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대륙의 정세가 아주 위태로웠던 시기입니다. 중국은 전국 시대 말기 진秦의 정복 전쟁 그리고 전한前漢으로 교체되는 극도의 혼란기입니다. 전쟁과 정치적 갈등을 피해서 수많은 한족들이 고조선 번한 지역으로 망명을 했으며, 진한과 마한의 붕괴와 더불어 위만이 ‘번한’의 수도를 강탈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러한 혼돈과 불안감은 수많은 고조선 연맹국들로 하여금 조금 더 안전한 동쪽으로의 이동(천도)을 촉발시켰습니다. 예濊 왕도 수십만 백성을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우리가 아는 동예가 됩니다. 낙랑 지역에 살던 무리들도 본래 살던 곳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마한 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번한 낙랑 지역에 살던 대부호 ‘최숭’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해모수단군 재위 45년(기원전 195년)에 백성들과 함께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발해(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안쪽 바다)를 건너, 마한 지역(평안도)으로 넘어와 대동강 유역에 기원전 195년경 ‘낙랑국’을 세웠습니다. 자신들이 본래 살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셈입니다. 어쩌면 낙랑 건국 이야기는 『환단고기』의 「북부여기」기록이 유일합니다. 다른 역사서에서 찾을 수 없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북부여 3세 고해사단군 치세 기록에 보면, 북부여 고해사단군께 조공(곡식 3백 석)을 바쳤다고 합니다. 북부여와 낙랑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한민족의 대표 토템, 곰 장식
낙랑국에 대한 유물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진 속 유물은 곰 장식 유물입니다. 언뜻 보면 개구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을 자세히 보면 개구리 발이 아니라 짐승의 발입니다. 개구리눈처럼 보이는 부분은 곰의 귀입니다. 짐승 얼굴 부분을 자세히 보면 곰 모습입니다
더 재밌는 유물은 벼루입니다. 3마리 곰이 으르렁거리는 모습이지만,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아기 곰이 장난치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3마리, 3수입니다. 3수라는 것은 천지인 삼재 사상에서 유래된 한민족 특유의 철학 사상 표시 체계입니다. 전통적 곰 토템과 3수가 만났으니 한민족 문화 특징을 부정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곰 장식이라고 하면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것이 있지요? 바로 삼국유사의 곰과 호랑이 이야기, ‘단군사화’입니다. 곰 상징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소재였습니다. 배달과 고조선 역사를 보여 주는 홍산 문화 유적에도 옥웅용, 제의에 사용된 듯한 곰 뼈 등 곰과 관련된 흔적들이 다수 발견됩니다. 고구려 벽화 각저총 벽화에도 곰이 그려져 있습니다. 백제 영역의 수많은 지명에도 ‘곰’을 지칭하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곰이란 단순한 토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특징이 석암리 낙랑 유물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漢족 지나인들은 곰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생태적으로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서 곰을 만날 일이 드물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곰 토템은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 영역이었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중국 정부의 입장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조선족 단군사화를 자신들 것으로 가공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곰’이란 동물에 엄청난 애정을 쏟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중화문명中華文明 탐원공정探源工程”입니다. 즉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홍산문명)을 중국문명으로 둔갑시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 수준의 문명으로 만들려는 역사 왜곡 프로젝트입니다. 곰 토템을 중국 한족의 문화 코드인 양 흡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습니다. 곰 토템은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 코드입니다. 발해와 황해를 주름잡았을 부유한 낙랑국은 지금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기에 곰 상징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우리는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신화로 변질시켜 ‘배달’과 ‘고대 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곰’의 상징을 허구로 부정하고 있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부족하지만 이 글을 통해 낙랑국에 대해서 조금 더 가까워지길 희망합니다. 한사군 낙랑보다 더 중요한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낙랑, 열국 시대의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한 낙랑, 우리가 조금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밝혀내야 할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미처 다 이야기하지 못한 낙랑 유물들의 한민족적 특성들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낙랑국은 어느 지역에 자리 잡고 흥망성쇠를 거쳤는지, 낙랑국은 주변 국가들과 어떤 대외 관계 속에 자리매김했는지를 황금허리 띠고리, 낙랑 향로 같은 유물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삼국사 vs 삼국사기
「고려사」‘인종 23년’ 기록에 “十二月 壬戌 金富軾進所撰三國史”라고 적혀 있다. “12월 임술에 김부식은 ‘삼국사’를 편찬해서 올렸다”는 의미다. 그런데 대부분 이를 “12월 임술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해서 바쳤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왜 ‘삼국사’가 ‘삼국사기’가 되었을까?“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본국의 역사는 ‘紀’(기), 제후국이나 속국의 역사를 ‘記’(기)라 했던 중국의 사례에 따라 본국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의 ‘紀’에 대한 제후국의 역사책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記’를 붙여 ‘三國史記’로 왜곡했다”고 문정창 교수는 『광개토대왕훈적비문론』에서 주장했다.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평양시 낙랑구역 낙랑일동에 있는 귀틀무덤. 1세기 초의 유적이다. 석암리 9호 무덤이라고도 한다. 이 무덤은 외방귀틀무덤이다. 무덤 바닥에 자갈을 한벌 깔고 그 위에 귀틀곽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움벽과 귀틀 바깥벽 틈새에도 자갈을 넣었으며 자갈과 귀틀 사이에는 숯을 더 넣었다움 속에 자갈과 같은 돌을 돌려 놓은 것은 먼 과거의 돌무덤, 즉 기원전 1천 년대 후반 고조선 시대 돌무덤의 잔재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 화장품 통, 청동 솥, 청동 단지, 칠반, 칠귀 잔을 비롯하여 무기류 및 마구, 수레부석품, 벽옥, 치렛거리, 옥도장, 질그릇 등 적지 않은 유물이 나왔다.
이 가운데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이 순금판 위에 7마리 용을 세련된 솜씨로 매우 율동적으로 장식한 순금띠고리이다. 우선 금실로 띠고리의 테두리를 장식한 다음 누금수법으로 용을 형상화하였는데 용의 등 부분에는 좀 굵은 금알을 붙이고 그 밖 부분에는 작은 금알을 붙였다.
그리고 용과 용 사이의 공간에는 꽃잎 모양이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푸른색 비취옥을 박아 놓음으로써 장식적 효과를 더욱 돋우었다. 띠고리 머리 부분은 걸쇠를 달아 혁대를 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형태의 띠고리는 낙랑 31호 무덤을 비롯한 덧날무덤에서도 나왔는데 이 모든 것들은 고조선 문화의 높은 수준과 고유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출처: 북한 지역정보넷
북부여기 원문 중 고해사단군 부분
壬申元年 正月 樂浪王 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城先時 崔崇 自樂浪山 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 都王儉城 是檀君 解慕漱 丙午冬也
고해사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신년이다.
정월에 낙랑 왕 최숭이 해성에 곡식 3백 석을 바쳤다. 이에 앞서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는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오년 겨울이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 역주 안경전.
단군사화檀君史話 vs 단군신화檀君神話
단군사화는 ‘단군 건국사화建國史話’의 줄임말이다. 풀이하자면 ‘단군께서 건국했던 역사 이야기’이다. ‘사화’라는 단어는 실재성에 중점을 둔다. 단군사화라는 표현 속에는 환인 환웅 단군이 실존 인물이며, 고대 조선과 환웅께서 다스리던 배달(신시)과 환인께서 통치하시던 환국이 있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한민족 역사를 왜곡하기 전에는, 상고 시대부터 대한제국 시절까지 왕조사나 문집, 어떤 고전에도 단군신화라는 표현이 사용된 적이 없다. 물론, 실존 인물과 관련된 실재 사건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승되면서 살이 붙고 부풀려지기도 하고 재구성된 결과물이 신화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신화’는 허구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단군의 후예이다. 고대 조선과 단군이 허구라면, 지금 우리도 허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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