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철학산책]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인식론 순서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2.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3. 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4.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의 인식론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2.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3. 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4.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의 인식론
“서양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幣)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道典』2:30:3-8)
근대가 시작되면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과학기술의 진보는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기술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 그 덕에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놀랍고도 정확한 지식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太陽系를 넘어서 우주의 신비를 속속들이 밝혀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우주여행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이러한 까닭에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전적으로 찬미하고 신앙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놀라운 과학기술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일까 아니면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진보하게 된 것일까?
과학기술의 진보는 ‘과학적 사실’을 탐구하는 일에서부터 발흥하기 시작한다. ‘과학적 사실’은 원초적으로 경험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경험적인 지식은 전적으로 자연에 대한 감각기관感覺器官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감각기관이 없었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얻어낼 수 있었을까?
경험적인 지식은 전적으로 감각에 의존한다. 이러한 감각적 경험주의 역사는 지성사의 전통에서 볼 때 꽤 오래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es)에서 출발하여 퀴레네 학파(Cyrenaics), 로마의 스토아학파(Stoicism),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 그리고 중세의 유명론(Nominalism)과 토마스주의(Thomism)로 이어진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주의가 철학의 한 분야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은 근대 영국에서다. 영국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이 그것이다. 영국의 경험론은 한마디로 “일차적으로 감각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지성 속에 없다(Nihil est intellectu, quod prius non fuerit in sensu)”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우리의 지성은 오직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세계에 대한 사실들과 사물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으로부터 시작하여 로크John Locke(1632~1704)에 의해 체계적으로 확립된다. 이후에 버클리George Berkely(1685~1753)에 이르러 극단적인 유아론적 관념론으로 전개되었다가 결국 흄David Hume(1711~1776)의 귀납적 회의론으로 매듭지어진다. 현대의 과학적 지식은 전통적인 귀납적 회의론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의 과학기술 혁명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1) 경험론의 선구자 베이컨
근대 인식론의 한 분야인 경험론을 처음으로 제창한 철학자는 영국의 베이컨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경험적 인식을 주창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진리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인류 사회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지식이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종래의 스콜라철학에서 탐구한 연역적 지식을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간주했다. 연역적 지식은 자연에 대한 유익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역적 지식은 비현실적이고 내용이 없는 무가치한 학문이라는 얘기다.
“아는 것은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는 슬로건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다. 학문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주요 가치는 자연에 대한 앎이고, 이것이 곧 인간에게 유익함을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유익한 지식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변화무상한 자연을 제대로 파악하여 가공할 줄 아는 힘을 말한다. 이는 원초적으로 감각을 통해 경험적 지식을 얻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반복적인 실험관찰을 통해 착실한 과학적 법칙을 찾아냄으로써 이루어진다. 과학적 법칙이 발견되면 우리는 이를 근거로 자연에 대한 가공은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변화를 예측할 수 있고, 또한 실생활에 유익한 문명의 이기利器를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엄정한 실험관찰을 통해서 경험적인 지식을 쌓고, 여기로부터 과학적 법칙(객관적인 귀납추리)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베이컨은 탐구 주체인 인간의 편견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앎의 혁신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한다. 인간이 범하는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탐구정신이 가지는 선입견이나 미망迷妄의 원인이 되는 우상(idola)이 파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을 둘러싸고 있는 선입견이나 우상은 경험적 사고가 그릇된 판단을 하도록 하거나 참된 지식의 획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말한 4가지 우상
사유의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나오는 우상은 어떤 것들일까? 베이컨은 경험적 관찰을 수행할 때 4가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시장의 우상(idola fori),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이 그것이다.
첫째, 종족의 우상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본성적으로 가지는 감각적 사고의 그릇된 성향을 뜻한다. 우리가 오관五官을 통해 사물을 감각할 때, 감각은 착각이나 환상을 제공하기도 하고, 또한 감각하는 정신은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개입된 상태에서 감각하기도 한다. 감각하는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감각하는 정신은 사물에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하여 사물의 본래의 모습을 굴절시켜서 받아들이게 된다. 심지어 감각하는 정신은 의인관擬人觀적인 사고에 매몰되기도 한다. 요컨대 정신의 사고방식이 목적론적인 것이라면, 사물을 관찰할 때 목적론적인 입장에서 감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베이컨은 자연적인 것들이란 원인과 결과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목적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둘째, 동굴의 우상이란 개별적인 인간이 각자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편견을 뜻한다. 주관적인 편견은 각 개인의 교육의 정도에 따른 지식의 차이, 기질의 차이, 성향과 기호의 차이,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느냐 혹은 어떤 교육을 받아 왔는가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미스코리아 미인美人을 선발한다고 할 때, 미인에 대한 선발 기준과 평가는 각자 저마다의 주관적인 편견에 따라 다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물 속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하늘의 전부라고 말하는 좌정관천坐井觀天이 동굴의 우상이라 볼 수 있다.
셋째, 시장의 우상은 언어의 잘못된 쓰임에서 비롯되는 편견을 뜻한다. 시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면서 친밀하게 이러저러한 말들을 주고받는데, 인간은 편의상 말을 만들어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말(언어)은 대상을 지시하는 표현 수단(기호)이다. 만일 대상에 대한 잘못된 언어나 부정확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사유하는 정신은 장애를 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그런 사례들이다. 세상에 떠도는 악성 루머는 물론이거니와 운명, 부동의 원동자, 운명의 여신 등이 존재한다고 믿고 숭배하는 것이 대표적인 시장의 우상이다.
넷째, 극장의 우상은 극장에서 연출되는 각본처럼, 사실과 다르거나 사실보다 더 그럴듯하게 꾸며진 것을 정신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릇되게 전승되어 온 전통적인 학설이나 이데올로기적인 체계가 대표적이다. 요컨대 역사적인 사건이나 학설 등은 극장에서 무대를 위해 그럴듯하게 꾸며진 각본처럼 기술되기도 하는데, 인간이 극장의 우상에 빠지는 까닭은 자신이 직접 탐구하거나 관찰하는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권위 있는 이론이나 전통적인 학설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극장의 우상은 그릇된 학설이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따르지 말고, 자신이 직접 탐구하고 실험 관찰하여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함을 경계한 것이다.
베이컨은 관찰을 통한 귀납추리(induction)에서 과학적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귀납추리란 반복된 사실들을 관찰하여 일반적인 지식을 창출하는 일이다. 이것이 철학이 가야 할 길이라는 얘기다. 그는 자신이 쓴 『신기관(Novum Organum)』에서 “참된 철학은 오로지 이성의 힘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박물학이나 실험을 통해서 수집한 것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기억 속에 저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변화시켜서 지성 속에 저장하는 것이 참된 철학이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학문적인 지식의 탐구는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험적 지식은 감각적인 실험관찰을 통해 사실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며, 이 사실들의 원인과 형식을 발견하여 일반적인 귀납추리를 수행해야 한다. 이와 같은 귀납추리만이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베이컨의 주장이다.
2) 로크의 소박한 실재론
성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성 속에는 너무도 많은 앎이 소장돼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지식의 기원에 대한 접근방식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있는데, 경험주의는 무엇보다도 합리주의 선각자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가 말한 “본유관념(innata idea)”을 배격하면서 시작한다. 본유관념이란 우리가 태어남과 동시에 선천적으로 구비하여 가지고 나온 지식이란 뜻이다. 그런데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도 그런 관념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본유관념과 같은 지식이란 없다는 것이 로크의 입장이다.
“백지설(tabula rasa)”
로크에 의하면 지식의 기원은 관념이다. 그럼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로크는 관념이란 전적으로 “생득적生得的”인 것이라고 말한다. 생득적이라 함은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면서 감각기관이 발달하고, 감각기관을 통하여 관념이 형성되어 소유하게 됨을 뜻한다. 한마디로 ‘지식의 기원은 모두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얘기다.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을 경험론자라 한다. 그래서 로크가 제창한 생득적 관념론은 곧 경험론자들의 기본 토대를 이루게 된다.
로크는 인간의 의식이란 처음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白紙”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의식의 하얀 백지에 처음으로 감각이 뭔가를 쓰기 시작할 때 관념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백지와 같은 의식에 뭔가를 기록하는 우리의 감각은 두 종류의 통로를 통해서다. 하나는 외적인 감관으로서의 5관(눈, 귀, 코, 피부, 혀)을 통한 감각感覺(sensation)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감관으로서의 반성反省(reflection)이다. 이들 두 감각능력을 통해 우리는 감각적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의식 속에 생겨난 관념은 곧 지식이 된다는 얘기다.
정신에는 어떤 관념들이 감관을 통해 형성되는 것일까? 우리가 사물을 보게 되면, 외적 감관을 통해 사물의 색깔이나 움직임 등과 같은 어떤 시각적 관념을, 높고 낮은 또는 조용하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들음으로써 생기는 청각적 관념을, 매끄럽고 까끌까끌한 느낌 등과 같은 촉각적 관념을, 고통스럽거나 향기로운 등과 같은 후각적 관념을, 혀에 의한 쓰고 달콤하며 떨떨함 등과 같은 맛의 관념을 가진다. 내적 감관을 통해 우리는 의지하고, 의욕하며, 의심하고 상상하는 마음의 활동으로써 여러 관념들을 가지기도 한다. 로크는 이를 반성적 관념이라고 했다. 이 각각의 것들을 그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단순관념(simple idea)”이라고 했다. 이처럼 감각능력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종류의 관념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곧 지각을 형성한다.
우리의 정신은 또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비교하고 추상하고 총괄하여 어떤 종류의 “복합관념(complex idea)”을 형성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물에 대하여 파악할 때 처음에는 감각 기관을 통해 직접적인 어떤 관념을 형성하고, 형성된 관념을 마음속에 보존하여 기억해 둔 다음, 기억된 관념들을 여러모로 상상하여 체계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다른 관념을 형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나 ‘인어人魚’ 등과 같은 개념이 그렇다.
‘사람’이란 관념은 우리가 사람을 체험하여 사람의 크기나 모습, 냄새, 소리 등의 감각관념을 형성하고, 이 관념들을 일정한 것으로 조직하여 ‘사람’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서의 관념을 가지게 되며, 이 관념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어人魚’라는 관념도 있는데, 이는 먼저 ‘사람’이라는 관념의 반쪽과 ‘물고기’라는 관념의 반쪽만을 떼어 가지고 지성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두 관념을 결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관념의 기원은 감각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지식이란 다양한 종류의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은 결국 직접적인 감각과 반성이라는 두 관문을 거쳐서 지성에 형성된 단순관념과, 이것들의 결합으로 형성된 여러 가지 복합적인 복합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적 “모사설(模寫說)”
로크의 인식론은 감각적 “모사설”을 따르고 있다. 감각적 모사설은 카메라에 찍힌 사진에 비유하여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카메라에 끼워진 필름은 백지 상태의 지성이고, 렌즈가 열려서 광선이 들어와 필름 위에 영상이 찍힌 것은 관념으로 볼 수 있다. 지성에 찍힌 관념이 곧 지식이다. 다시 말하면 일차적으로 지성 바깥에 감각 대상들이 주어지고, 다음으로 외적인 감각과 내적인 반성의 통로를 통해 우리의 지성에 대상들의 영상이 찍혀서 관념이 형성되고, 이 관념으로부터 지식이 나온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필름에 영상이 찍히는 것은 빛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반사되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영상이 찍힐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 밖에 있는 대상으로부터 영상이 지성에 관념으로 찍힌다면, 찍히도록 하는 어떤 힘 내지는 성질을 그 대상이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로크는 대상 자체가 가지는 그러한 성질을 관념의 제1성질(primary quality)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상이 실제적으로 소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주관적인 지성에서 생겨난 성질이 있는데, 이것을 관념의 제2성질(secondary quality)이라 했다. 객관적인 대상이 갖는 제1성질은 사물의 크기, 형태, 수, 운동, 정지, 견고성 등과 같은 관념들이다. 주관적인 지성에서 생겨난 제2성질은 사물의 색깔, 맛, 냄새, 소리, 접촉에 따른 차가움과 따뜻함, 단단함과 부드러움 등의 느낌들이다.
만일 책상 위에 빨간 사과 한 개가 놓여 있다고 해보자. 우리가 이것을 감각할 때, 우리는 사과의 모양은 둥글고, 크기는 주먹만 하고, 수적으로는 한 개이고, 책상 위에 정지한 채 놓여 있고, 어느 정도의 견고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질들은 사과 자체가 가지는 객관적인 제1성질들이다. 이러한 제1성질들은 우리의 지성 속에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 반영되어 감각적 지각의 관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철학에서는 감각적 모사설의 인식론이라 부른다.
반면에 사과는 빨갛고, 새콤한 맛이 나며, 만져 보면 차갑고 퍼석퍼석한 느낌의 관념을 가지는데, 이것들은 사과 자체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성질이 아니라 우리가 감각할 때 지성 속에서 생겨난 주관적 관념들이다. 왜냐하면 사과가 빨갛다고 의식하는 것은 사과 자체가 빨간색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빛의 파장에 의해서 지성이 느끼는 인간 나름대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질들은 지성의 주관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제2성질들이며, 감각적 모사설에 적용되지 않는 주관적 관념론의 단면이라 볼 수 있다.
3) 주관적 관념론(subjective idealism)에 빠져 버린 버클리
경험적 관념을 ‘제1성질’과 ‘제2성질’로 구분하여 놓은 로크의 인식론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물의 색깔, 맛, 냄새, 소리, 접촉으로 나오는 제2성질의 관념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주관적인 것이므로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물의 크기, 모양, 부피 등에서 비롯된 제1성질의 관념이 사물 자체에 객관적으로 속해 있다고 주장한 것은 문제다. 이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에서 진리인식의 근거로 삼았던,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적 인식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틈만 나면 아무데서나 책을 읽는, 독서광인 꼬마 아이가 있다고 해 보자. 눈이 나빠질까 봐서 아니면 허리가 뒤틀릴까 봐서 염려한 엄마가, “애야! 책상 앞 의자에 똑바로 앉아 책을 보렴?” 하고 말하자, 꼬마 아이는 얼른 책상 앞으로 달려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꼬마 아이는 눈앞에 놓인 책상을 보고서 ‘책상’이라는 관념을 분명히 갖고 있었을 게다. ‘책상’이란 관념을 꼬마 아이는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 로크는 지성 바깥에 책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이에 대응해서 감각을 통해 ‘책상’이라는 실체관념이 꼬마 아이의 인식주관에 형성됐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꼬마의 인식주관에 형성된 책상의 ‘관념’은 자기 앞에 놓인 ‘책상이라는 사물’과 일치하는가, ‘책상이라는 사물’은 정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가의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로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게 될까?
꼬마 아이가 책상 앞으로 달려갈 때는 이미 인식주관에 이미 ‘책상’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 관념은 ‘이러저러한 형태의 책상들’로부터 추상抽象(공통적인 성질을 뽑음)하여 형성된 추상관념이다. 추상관념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자기동일성이 확보되어 있다. 그런데 감각되는 객관적인 책상은 유사한 형태의 것들로 존재할 수도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간순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엄격히 말해서 조금 전에 본 ‘책상’의 관념과 조금 후에 본 ‘책상’은 명백히 다르다. 왜냐하면 시간의 흐름이 있었고, 그만큼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꼬마 아이의 인식주관에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책상’의 관념과 정신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책상’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로크가 주장한 관념의 ‘제1성질’은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객관적인 대상으로 실재하는 것인지, 또한 그런 관념의 성질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이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로크의 관념론은 버클리에 이르러 객관적으로 사물에 속한다고 했던 관념의 ‘제1성질’도 인식주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관적 관념론으로 들어가 버린다.
관념만이 존재한다는 버클리의 외침
버클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관념이나 제1성질의 관념은 추상관념을 단순히 실제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제1성질의 관념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각된 관념의 집합에서 추상화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소리가 있다는 것은 소리로 들려진 지각물이며, 물체에 색깔이 있다는 것은 색깔에 대한 지각물이 지성 속에 있다는 것이고, 사물의 형태나 모양이 있다는 것은 시각이나 촉각에 의해 지각된 지각물의 덩어리가 지성에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객관적인 사물은 모두 지각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
지각된 것은 감각을 통해 얻어 낸 관념들이다. 책상 위에 빨간 ‘사과’가 하나 있고, 우리가 그것을 감각할 때, 사과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과가 빨갛고, 둥글며, 먹으면 맛이 새콤하고, 씹으면 사각사각한다는 ‘관념들의 묶음(bundle of ideas)’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적으로 관찰하는 사과, 나무, 자동차, 사람, 의자, 집 등이란 각기 ‘관념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념들은 정신 밖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참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서 따져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다.
요컨대 우리의 눈앞에 실제로 ‘책상’이 존재할 때, 책상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책상이라는 관념이 지성에 형성돼 있어야 한다. 만일 책상에 대한 감각지각이 전혀 없다면 책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책상’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을 것이다. 또한 책상의 색깔, 매끈매끈한 표면, 사각형의 모난 모습 등은 마음속의 경험적 사실로부터 독립해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책상에 대한 관념이 마음으로부터 초월해서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도대체 ‘주장’될 수 없고, 오직 책상에 대한 관념으로서의 ‘앎을 소유하고 있는’ 한에서만 “책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들은 지각되는 한에서만 관념으로 존재한다. 인식주관에 그런 지각이 없다면,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조차도 아무도 모르게 된다. 즉 관념이란 감각지각을 수행하는 감각의 주체 속에 있고, 주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주관적 관념(subjective idea)’이라 한다. 따라서 주관적 관념론자는 감각지각된 관념이 주관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과 일치하거나 대응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주관 밖에 있는 객관적인 사물을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인식주관에 지각된 관념만을 인정한다는 얘기다. 이런 입장에서 버클리는 지식이란 단지 마음속에 있는 관념의 내용일 뿐이며, 이것만이 인식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버클리의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각된 것만이 존재한다는 논의는 ‘지각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꼬마 아이가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책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꼬마 아이가 책상을 지각하고 있는 한에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두 문제가 있다. 하나는 지각을 통해 책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꼬마 아이의 인식주체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고, 다른 하나는 만일 꼬마 아이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책상을 지각하지 않는다면 책상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이에 대해서 버클리는, 만일 어느 누구에게도 책상의 관념이 없다면, 전지전능한 신의 관념으로 있을 것이고, 꼬마 아이의 인식주체 또한 신의 관념으로 존재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종합해 보면, 버클리에게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무한정신으로서의 신과 유한정신으로서의 주관적 자아뿐이다. 만일 감각될 수 없는 미시적인 것이나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이것들은 인간이 지각하지 못할지라도 신이 지각하기 때문에 관념으로 존재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주장을 철학사에서는 주관적 관념론 혹은 유심론(spiritualism)이라 부른다.
지각된 관념의 ‘원인’은 무엇일까?
버클리는 사물의 색깔, 소리, 맛, 촉각 및 냄새와 같은 관념의 제2성질이란 사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사물의 ‘크기’, ‘운동,’ ‘모양’ 등과 같은 사물의 제1성질조차도 객관적으로 사물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색깔, 소리 등과 마찬가지로 지각된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감각지각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이 최소한 마음 바깥에 있는 사물들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서도 버클리는 관념의 ‘원인’이 객관적인 물체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마음 안에 있는 관념과 마음 바깥에 있는 물체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즉 마음속에 있는 관념은 비물질적인 것이고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므로, 물질이 비물질적인 관념을 산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는 상당히 논리적인 주장이다. 이 점에서 합리주의자 데카르트의 “심신 상호작용”론은 정면으로 부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마음속에 형성된 관념의 ‘원인’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버클리에 의하면, 인식주관 속에 형성된 관념은 내가 만든 것일 수도 없고, 다른 유한자에 의해서 산출된 것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유한적인 존재로서의 내 마음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은 그토록 다양하고 복잡한 엄청난 수의 지각적 관념들을 질서 있게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클리는 이들 관념의 ‘원인’이란 결국 무한하며 완전한 신神의 정신 속에 이미 존재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로부터 버클리는 무한정신으로서의 신이 지각하는 인간의 정신 속에 관념을 낳게 하고, 감각을 통해 인식주관이 받아들이는 관념이란 모두 신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버클리의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을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의 신체가 뜨거운 불에 닿았을 경우 고통이란 관념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버클리는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고통이란 관념의 원인이 신의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동일한 대상을 같은 조건하에서 감각할 경우 동일한 지각 내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물을 관찰할 때 관찰자의 경험은 눈 속에 들어온 정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망막에 맺힌 상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관찰자의 망막에 맺힌 상으로부터 나오는 관념은 관찰자의 지식의 정도나 문화적인 상황의 배경에 따라 다르게 형성될 수도 있다. 즉 관찰자가 어떤 대상을 볼 때 주관적인 경험은 외부의 대상이 사진기처럼 망막에 맺힌 상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관찰자의 경험, 지식, 기대, 내적인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자의 망막에 맺힌 상은 우리가 보는 것의 원인의 일부이며, 마음이나 의식 상태도 감각적 경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관찰자 각자가 동일한 대상을 본다는 것으로부터 동일한 감각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이러한 난관을 배경에 깔고서 흄의 새로운 경험적 인식론이 등장하게 된다.
4) 극단적인 경험론을 제시한 흄
영국 경험주의 인식론은 로크와 버클리에 이어 흄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흄은 ‘감각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지성 속에 없다’는 감각적 경험주의 슬로건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한 로크와 버클리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경험론을 새롭게 전개한다. 그는 특히 인식주관으로서의 경험적 자아가 실재한다고 주장한 버클리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주관적 관념론을 극단에까지 철저하게 밀고 나가 경험적 자아도 관념적인 존재임을 내세운다.
흄의 극단적인 경험론은,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을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으로 해소함으로써 종래의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확실한 인식론이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진리인식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지고 만다. 흄의 감각적 경험론은, 비록 진리인식의 회의론에 빠지게 됐을지라도, 독일의 칸트로 하여금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연상심리주의聯想心理主義와 독일 실증주의의 선구적 면모를 제시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감각적 경험은 ‘인상’과 ‘관념’
경험주의 인식론을 체계화한 로크는 관념의 기원을 외적인 ‘감각’과 내적인 ‘반성’을 통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여기로부터 흄은 감각을 통한 모든 지각 내용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다. 흄은 또한 버클리가 감각지각을 보유하고 있고, 관념들을 능동적으로 가공하는 능력으로서의 인식주관(주체적 자아)을 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흄에게 있어서는 인식주관이나 정신의 존재 따위란 없고 오직 감각을 통한 ‘인상’과 ‘관념’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상’은 감각에 의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지각하는 표상이고, ‘관념’은 직접적인 감각지각으로부터 나온, 즉 ‘인상’이 사라진 뒤에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보다 덜 생생한 지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지성에 최초로 나타나는 감각, 감정, 정서 등은 현재 마음에 직접적인 경험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인상이고, 반면에 관념은 이미 경험한 ‘인상’을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 마음에 모사해 둔 보다 덜 생생한 영상映像을 의미한다. 요컨대 식탁 앞에 놓인 사과를 직접 보고 있는 것은 직접적인 경험으로 ‘인상’이고, 눈을 지그시 감고 사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인상의 재현이나 잔상은 ‘관념’이다. ‘인상’과 ‘관념’은 항상 대응해서 나타나며, 모든 ‘관념’은 ‘인상’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흄은 ‘인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 내용으로 모든 지식의 기초라고 말한다. 만일 감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주어질 수 없고,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상’도 없고 ‘관념’도 없으며, 따라서 지식은 없다. 그런데 감각기관을 통해서 생겨난 ‘인상’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는 알 수 없고, 오직 ‘인상’과 ‘관념’만을 알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지식은 관념들 간의 연합
우리는 많은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식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흄에 따르면,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생생한 ‘인상’은 보다 덜 생생한 ‘관념’으로 지각 속에 머물게 된다. 지식은 바로 지각 속에 머물고 있는 “관념들 간의 연합(association of ideas)”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흄은 주장하게 된다.
관념들 간의 연합은 어떻게 가능한가? 버클리가 말한 것처럼, 인식주관이 있어서 관념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지식이 산출되는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흄에게 있어서 인식주체가 능동적으로 활동하여 관념들을 결합시키는 ‘자아의 존재’란 없고, 오직 생생한 ‘인상’과 보다 덜 생생한 ‘관념’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흄은 관념들 상호 간의 어떤 인력과 힘이 작용함으로써 지식이 형성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힘에 의한 관념들 간의 연합은 당연히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 계기적契機的이며 기계적機械的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마치 물체의 운동이 질량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와 같이, 이와 비슷한 심리적인 질량의 법칙이 깔려 있다. 관념의 심리적인 중력이 관념들 간의 연합작용을 일으키게 된다고 흄은 말한다. 관념연합의 법칙은 ①유사(resemblance) 법칙, ②인접(contiguity) 법칙, ③인과(cause and effect) 법칙이다.
①유사법칙 : 이는 유사한 관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법칙이다. 요컨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우리들 생각을 그려진 대상과 연결시켜 주듯이, 하나의 유사한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생각이 옮겨질 수 있다.
②인접법칙 : 이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인접해 있는 관념들 간의 결합이다. 요컨대 시골 마을의 어떤 초가집을 생각하게 되면, 이웃 마을의 초가집도 자연히 연상하게 되는데, 이것은 관념의 인접법칙 때문이다.
③인과법칙 : 이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관념 상호 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요컨대 상처를 보게 되면 육체의 고통을 연상한다든가, 혹은 연기를 보게 되면 거기에 불이 났음을 연상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관념들 간의 연합법칙에 따라서 형성된 관념들 간의 결합이며, 이러한 결합은 질서에 따라 언제나 계기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
지식은 학문을 구성한다. 흄은 학문의 대상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관념들 상호 간의 논리적 관계만을 따지는 학문으로 이성의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적 사실을 다루는 학문으로 사실의 진리이다. 이성의 진리에 속하는 것은 기하학, 대수학, 산술적인 것들을 다루는 학문으로 수학이고, 사실의 진리에 속하는 것은 자연적인 대상을 다루는 학문으로 과학이다.
수학은 자연적인 사물에 대한 사실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오직 관념 상호 간의 관계만을 다룬다. 이는 심리적으로만 이해하는 지식이라 볼 수 있다. 심리적으로 이해된 명제들은 모두 직관적으로 혹은 논증적으로 확실하다. 왜냐하면 논리적인 지식은 개념을 분석하여 그 속에 포함된 다른 개념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학적 지식은 분석적인 진리이고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다. 분석적 진리는 “모순률矛盾律”에 근거한다. 요컨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다”라는 수학적 진리를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보다 크거나 작다”로 바꾸면, 이 수학적 명제는 필연적으로 모순을 범하게 된다.
반면에 경험적 대상에 대한 사실에 관계하는 학문은 사정이 다르다. 왜냐하면 경험적 대상에 관계하는 학문은 관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제는 종합적이라고 한다. 종합명제는 반대의 명제도 타당하다. 요컨대,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경험적 사실을 “모든 까마귀는 검지 않다”고 부정하여도 필연적인 모순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험적 사실에 의존하는 과학적 진리는 항상 수정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개연적蓋然的이고 종합적인 지식이 된다. 하지만 이성에 의한 수학적 진리는 논증적으로 수정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분석적이고 절대적인 필연적 지식이 된다.
흄은 경험적 사실에 의존하는 과학적 지식을 다시 둘로 나눈다. ①경험적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는 기술적技術的 지식, ②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미래의 사실을 추리하는 보편적普遍的 지식이다. ①의 기술적인 지식은 관념연합의 인접법칙을 근거로 해서 사실을 시간적, 공간적 질서에 따라 기술하는 지식이다. “나무에 불이 붙었다.”와 “나무에 연기가 난다.”는 두 사실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연달아서 일어나는 것(“나무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을 직접 경험하여 기술하는 지식이 그것이다. ②의 추리하는 보편적 지식은 인과법칙을 근거로 해서 보편명제를 찾아내는 지식이다. “나무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는 지식은 불이 원인이고 연기가 나는 것은 결과로 주어진다고 믿고서 이러한 사실을 반복으로 경험하여 불과 연기가 나는 것을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믿는 보편적 명제의 지식이 그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주관적인 신념(귀납추리에 대한 흄의 회의주의)
흄은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되지 않는 사고 과정을 적은 책은 불 속에 던져라. 왜냐하면 그 책은 환상과 궤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흄이 감각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경험론자이고, 감각으로 확인될 수 없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진리를 환상이나 궤변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흄이 감각을 통한 경험적인 사실을 100% 확실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감각적 경험은 주관이 언제(시간) 어디서(공간) 직접 실험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경험적 사실에 관한 학문은 반복적인 실험 관찰을 통해 보편명제로 표기되는 것인데, 보편명제는 언제 어디에서나 누가 보아도 항상 타당한 사실로 존재해야 한다. 만일 인과적인 진리로서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는 보편명제가 있다면, 문제는 학문의 법칙인 보편명제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이며, 이 명제가 얼마만큼 확실성의 정도를 가지는가이다.
흄에 의하면 인과적 지식은 관념연합의 인접법칙에서 나온다고 했다. 불이 일어나고 연기가 나는 것을 감각적으로 몇 번이고 실험 관찰하면 경험적인 사실의 관념이 생기고, 경험적인 사실의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이 되면, 불의 관념이 떠오를 때 연기의 관념이 연상되고, 연기의 관념이 떠오르면 불의 관념을 연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불의 관념을 가지면 자연히 연기가 난다는 것을 습관적으로 기대하게 되고, 이것이 여러 번 되풀이하여 경험되면, 결과적으로 두 관념 간의 결합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불이 나면 반드시 연기가 난다.”는 인과적인 보편명제를 서슴없이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흄의 인과적 지식은 두 관념, 즉 불(원인)과 연기(결과)의 관념이 시간과 공간상에서 인접하여 연상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미래에도 그럴듯하게 기대하고 예상하는 경험적 신념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대감이나 신념은 꼭 같은 경험이 반복으로 일어난다는 확실한 인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즉 과거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고 해서 미래에 있어서도 ‘불이 붙으면’ 필연적으로 ‘연기가 난다.’는 사실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불이 붙으면 ‘아마도’ 혹은 ‘곧’ 연기가 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내지 주관적인 신념을 가지게 될 뿐이다. 따라서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하는 모든 사실과학이나 과학적 지식은 이성의 증명이나 필연적으로 논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껏해야 개연적인 지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 여기로부터 흄은 결국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진리 회의론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험적 지식에 대한 흄의 사고방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왔던 실체實體의 관념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실체관념은 심리적인 것이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물의 실체이니 정신의 실체이니 하는 관념은 양태(modus)관념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관념들이 상상에 의해 연결 지어지고, 이것들이 습관적으로 묶어짐으로써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 심리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흄은, 신의 존재니 영혼이니 자아실체니 하는 것도 내적인 관념들의 총화로서 습관적으로 믿고 확신하는 ‘지각다발’의 총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진리인식에 대한 철저한 회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5) 방황하는 과학적 탐구 법칙
사실의 지식에 관한 한, 현대과학은 경험론의 출현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진보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귀납추리歸納推理에 의거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정상적이고도 충분한 관찰과 진술을 통하여 귀납에 이를 수 있으며, 귀납추리 자체가 객관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과학의 탐구가 객관적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오늘날 우리가 상당히 많이 신뢰하고 있는 학문이란 바로 과학적 지식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다.
과학의 이론은 경험적 ‘사실’ 위에 세워진 구조물로서 감각을 통한 실험 관찰로부터 엄격한 방법을 통해 이끌어 내어진 지식이다. 실험 관찰을 통해 얻어낸 이러한 지식은 명제로서 진술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진술은 단칭명제이다. 사실에 대한 단칭명제는 개인적인 의견이나 기호가 개입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지식이다. 단칭명제의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는 정상적인 자라면 감각을 통해 관찰함으로써 검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납추리는 검증된 단칭명제들로부터 보편명제를 어떻게 추리해 낼 수 있는가를 주요 과제로 삼는다. 귀납추리에 의하면 단칭적인 관찰명제로부터 어떤 일정한 조건만 충족이 된다면 일반화된 법칙, 즉 보편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귀납추리는 과연 일반화된 법칙의 반열에 들어올 수 있을까?
귀납추리는 왜 문제일까
귀납추리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과학적 지식의 중요한 특징은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과학의 법칙이 확립되면 이를 토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명확한 예측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예측은 추리를 통해서 가능하다. 추리에는 연역추리와 귀납추리가 있는데, 연역적 논증은 두 전제가 주어지면 필연적으로 결론도 참이 나오지만, 그러나 귀납적 논증에서는 결론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필연적으로 참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귀납추리를 통해 확립되는 과학적 지식은 미래에 대한 명확한 예측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일까? 예컨대 다양한 조건하에서 개별적인 많은 까마귀들이 검은 것으로 관찰되었고, 지금까지 관찰된 까마귀가 예외 없이 모두 검다면, 귀납추리로 얻어낸 결과는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보편명제이고, 일반적인 과학적 지식으로 확립된다. 문제는 이 귀납추리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보편적인 법칙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줄 수 없게 된다. 만일 미래에 핑크빛 까마귀가 출현한다면 이 명제는 여지없이 거짓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납추리의 결론은 “아마 모든 까마귀는 검을 것이다”라든가 아니면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것은 아주 개연성이 높다”고 해야 마땅하다.
이런 근거에서 본다면 경험주의 탐구방식에서 확고한 원리로 도출한 귀납의 원리는 정당화될 수 없다. 만일 귀납의 원리를 정당화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온다면 경험주의자들은 당황하게 마련이다. 귀납의 원리 자체는 증명되지도 않았고 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귀납에 의해 도출해 낸 어떤 보편명제의 원리가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게 하는 것은 기껏해야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귀납의 원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의 과정이 항상 동일한 것을 반복해 왔다”는 것이지, “자연의 과정이 항상 동일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즉 자연적인 사건들의 진행 방식이 과거에는 어느 정도 한결같은 것이었으나 미래에는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난관들 때문에 귀납추리는 후에 “확률론”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경험에 의한 과학적 지식은 증명된 지식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참인 것을 나타내고, 사례가 많고 관찰 조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출된 일반적인 명제는 참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뿐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에 통용된 경험적 관찰에 의한 과학적 지식은 소박한 귀납추리라 불렸다.
반증주의反證主義의 출현
현대의 과학자들은 과거의 경험적 관찰에 바탕을 둔 소박한 귀납추리를 극복하고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제안이란 과학의 설명이 귀납에 근거한다는 입장을 버리고, 귀납에 의존함이 없이 사실을 확증하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새로운 보편명제에 대한 가설假說적 방법이 그것이다. 이 가설적 방법에 타당성을 주기 위해 “반증주의”가 도입되고 있는데, 최초의 반증주의는 포퍼K. Popper를 중심으로 제기된 이론이다.
가설적 방법은 무엇인가? 미지의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성은 가설적인 이론을 창안하여 설정하고, 그 이론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 엄격하게 테스트를 받도록 한다. 관찰이나 실험에 의한 테스트를 잘 견뎌 내지 못하면 그 이론은 폐기되고 다른 대담한 가설이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예를 들면 “모든 광선은 직진한다.”는 보편적인 가설적 명제가 설정되었다고 하자. 만일 태양에 접근하여 통과하는 광선이 태양의 중력 때문에 곡선으로 휘어 지나간다면(단칭적 관찰) 이 명제는 반박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적 명제로 대치된다. 이와 같이 과학은 시행착오 및 추측과 반박을 통하여 진보하며, 반박을 잘 견뎌야만 가설적 이론은 살아남는다. 이것이 포퍼를 중심으로 하는 반증주의 입장이다.
반증주의 입장은 어떤 과학법칙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참이란 없고 오직 더 나은 이론이 있을 뿐임을 말한다. 과학은 ‘관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서 출발하며, 이어서 대담한 가설적 이론으로, 가설적 이론에 대한 비판과 반증으로, 반증에서 또 새로운 문제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과학은 진보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면 가설이 주어지고, 그 가설은 엄정한 테스트를 받아 반증되지 않는 한에서만 참된 과학적 지식으로 남는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기원한 운동법칙이 뉴톤I. Newton(1642~1727)을 거쳐 아인슈타인A. Einstein(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까지 많은 반증을 거쳐 왔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잘 설명해 주지만 그 역은 아니다. 그렇다면 반증주의 입장에서 볼 때, 만일 상대성의 이론이 반증된다면, 새로운 물리학의 진보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는 역시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증주의가 절대적으로 올바른 과학적 탐구만은 아닐 것이다. 반증주의 과학이론에도 한계가 있다. 반증주의자들은 가설적 이론에 위배되는 관찰명제를 찾아내어 이론을 반증하려는 시도가 과학적 활동이라고 하지만, 여기에서 이론에 대한 반증이 성립하려면 반증할 확실한 관찰명제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확실한 관찰명제란 없다. 그렇다면 반증주의자들의 과학적 탐구활동의 핵심논의는 무의미해질 수 있다. 또한 어떤 가설적 이론이 실험을 통해 검증될 때, 실험에 사용되는 도구와 연관된 다른 이론과 법칙 등이 필요하다. 이때 사용되는 여러 가지 도구들의 조건과 법칙 등이 하나라도 잘못되었을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가설적 이론이 틀렸다고 성급하게 폐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반증주의의 부적합성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들은 많이 있다. 뉴턴의 ‘중력 이론’이나 맥스웰J. C. Maxwell(1831~1879)의 ‘동력학 이론’은 당시에 반증되는 것이 많이 있었지만 훗날에야 비로소 반증이 잘못되었음이 판명되었다. 마찬가지로 고대에 지구 중심의 운동을 전개한 프톨레마이오스C. Ptolemaeos(83~168)의 ‘천동설’을 뒤집어 놓은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1473~1543)의 운동 이론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1564~1642)의 ‘지동설’, 케플러J. Kepler(1571~1630)의 ‘행성은 태양 궤도를 회전한다는 것’, ‘태양에서 행성에까지 그은 선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린다는 것’, ‘행성이 태양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 등의 이론, 뉴톤의 ‘등속도’, ‘가속도’, ‘만유인력 법칙’ 등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증명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이론들은 귀납주의나 반증주의에 의해 나온 것도 아니다. 따라서 주의 깊은 실험 관찰에 의존하는 귀납주의나 대담한 추측과 반증에 의한 것만이 꼭 올바른 과학적 탐구는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과학적 탐구의 패러다임 전환
이런 까닭에 현대의 과학적 탐구의 방법론으로 포퍼의 반증주의를 개선하여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는데, 구조적 전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라카토스I. Lakatos(1922~1974)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 토마스 쿤T. S. Kuhn(1922~1996)의 “과학의 진보”라는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토마스 쿤에 의하면, 과학의 진보는 “전 과학-정상과학-정상과학의 위기-새로운 정상과학-새로운 위기-”라는 불연속적인 단계로 진행된다. 이를 요약하면 성숙한 과학은, 정상과학 집단의 ‘문제 풀이’ 활동이 한 패러다임의 지배하에 진행되다가, 문제에 대한 해결이 거듭하여 실패할 경우 심각성이 높아지면, 패러다임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여 기존에 있는 패러다임의 거부와 동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함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과학의 ‘위기’이다.
과학에 있어서 위기 시대의 특성을 분석하려면 역사가의 능력과 정신분석가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 변칙 사례가 패러다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면 문제 해결의 시도는 더욱 격렬해지고, 과학자들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벌이다가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이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이런 고조된 위기감이 결국 해소되고 만다. 과학자가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옮기게 되는 변화를 쿤은 ‘게슈탈트Gestalt 변화’라고 했다. 이와 같이 패러다임 A에서 패러다임 B에로의 교체는 심리학적, 사회학적 탐구가 요청되는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혁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결정적으로 반기를 든 학설이 또다시 등장한다. 파이어아벤트P. Feyerabend(1924~1994)의 “애너키즘적 인식론”(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과학적 탐구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소개된 과학적 탐구의 방법론은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과학자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적절한 규칙을 제시하는 데에 실패했다. 과학이 고정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과학 내부의 복잡한 상황과 과학 발전에 관한 미래가 예측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합리적인 과학자가 A라는 이론을 버리고 B라는 이론을 선택해야 하는지의 방법론을 희망하는 것은 부당하다. 과학적 탐구의 모든 방법론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갖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규칙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적 탐구의 방법론은 탐구 규칙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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