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마麻 씨
[한국의 성씨]
역사는 곧 나라의 혼이다. 나라에 역사가 있듯 각 가문에도 역사가 있으니 곧 성씨의 역사이다. 지난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중 인구수 1000명 이하의 희귀 성은 112개이며, 이 가운데 마麻성은 우리나라에 99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상곡上谷 마麻씨 대종회 기록에 따르면 마씨는 춘추 시대 제나라 대부인 마영麻嬰의 후손이라고 한다. 시조는 회회왕국回回王國*의 왕이었던 마립麻立이다. 1512년 회회왕국이 망하게 되었을 때 6세 태자 마록麻祿이 신하의 등에 업혀 안남국安南國(월남)으로 망명하여 왕에게 의탁 성장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다. 그 뒤 1522년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여 총병관摠兵官(총사령관) 및 포정사布政司(명, 청시기 성의 정치를 관장하는 지방관) 등을 지냈다고 하며 그의 자는 윤집允執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마록의 아들 마귀麻貴 제독이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군으로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
마귀 장군은 하북성 상곡 사람으로 자는 명회溟回 호는 이천而泉,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대장군, 병부상서兵部尙書(국방장관) 등을 지내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제독으로, 용장 36명, 철기 1천명, 기병 1만 6천명을 거느리고 손자 마암麻巖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들어왔다. 마귀장군의 아들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으며, 손자 마암은 할아버지 마귀 제독과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한 후 1619년에 후금後金과의 심하 싸움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하다 순절하였다. 마귀제독은 뛰어난 용병술로 도처에서 왜적을 무찔러 국가 위기 회복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울산 서생포의 왜군을 대파하고 성을 탈환했다. 마귀 장군은 1599년 3월에 본국으로 귀국했다. 그 뒤 중국에서는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마암이 청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쟁했기 때문에 마씨 일가는 큰 수난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암의 아들이자 마귀제독의 증손인 마순상麻舜裳이 우리나라에 귀화하게 된다.
마귀의 증손 마순상은 남경통판南京通判(지부知府 아래에서 세금으로 걷은 양곡을 운반하거나 농사일, 수리水利, 소송訴訟 등의 사무를 담당했다) 겸 조병독량사調兵督糧使로 산동성 등주登州(봉래)의 군량을 배를 타고 순찰 감독하다가, 1627년 9월에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 만에 황해도 풍천에 이르렀는데 함께 탔던 29명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귀화하였다. 그 후 마순상은 풍천서 홍주를 거쳐 전라남도 광주군에 이주하여 의병장 강덕룡姜德龍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봉직蓬直공을 두었다. 후손들이 회회국왕 마립을 원조로, 마귀를 중시조로 받들고 중국의 관향인 상곡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으며, 우리나라 마씨의 실질적인 1세조는 마순상이다.
조선 헌종 때 조정에서 마귀장군의 9세손 마시가麻時可에게 ‘삼(麻)’은 여름비단이란 뜻이므로 하백夏帛이란 이름을 내리고 비단에는 베틀이 제격이라면서 기장機張 현감을 제수하고 이어 후주도호부사厚州都護府使를 제수하였다. 그의 아들 마두원麻斗元도 과거에 급제하여 1890년 곽산군수가 되고 이어 강화부중군에 봉직하던 중 일본이 침략하였다. 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의병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서 활약하다가, 1919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끌려가 옥고를 치르고 세상을 떠났다. 현대 인물로는 포항시 정책보좌관 마호형麻鎬瀅, 경상대학교 마호섭麻鎬燮 교수 등이 있다. 상곡 마씨의 후손들은 합천, 함안, 창원, 거창, 함양 등지에 살고 있다. 상곡 마씨는 경남 지역에 많이 살고 있고 합천陜川에 종가가 있어 합천 마씨로도 불린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위키백과
마씨의 기원
상곡上谷 마麻씨 대종회 기록에 따르면 마씨는 춘추 시대 제나라 대부인 마영麻嬰의 후손이라고 한다. 시조는 회회왕국回回王國*의 왕이었던 마립麻立이다. 1512년 회회왕국이 망하게 되었을 때 6세 태자 마록麻祿이 신하의 등에 업혀 안남국安南國(월남)으로 망명하여 왕에게 의탁 성장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다. 그 뒤 1522년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여 총병관摠兵官(총사령관) 및 포정사布政司(명, 청시기 성의 정치를 관장하는 지방관) 등을 지냈다고 하며 그의 자는 윤집允執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마록의 아들 마귀麻貴 제독이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군으로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
*회회왕국:중국 남부에 있었던 작은 왕국으로 추정된다. 회회는 회흘回紇(回忽), 회골回鶻 등으로 불렸는데 몽골 고원 및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투르크계系 민족으로 대부분이 이슬람을 신봉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후이족(回族)으로 불린다. 인구 약 900만 명의 후이족은 주로 닝샤후이족(寧夏回族) 자치구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감숙성, 길림성,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운남성 등지에 규모는 다르지만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구역이 있다.
조선을 도와 준 마귀장군
마귀 장군은 하북성 상곡 사람으로 자는 명회溟回 호는 이천而泉,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대장군, 병부상서兵部尙書(국방장관) 등을 지내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제독으로, 용장 36명, 철기 1천명, 기병 1만 6천명을 거느리고 손자 마암麻巖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들어왔다. 마귀장군의 아들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으며, 손자 마암은 할아버지 마귀 제독과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한 후 1619년에 후금後金과의 심하 싸움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하다 순절하였다. 마귀제독은 뛰어난 용병술로 도처에서 왜적을 무찔러 국가 위기 회복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울산 서생포의 왜군을 대파하고 성을 탈환했다. 마귀 장군은 1599년 3월에 본국으로 귀국했다. 그 뒤 중국에서는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마암이 청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쟁했기 때문에 마씨 일가는 큰 수난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암의 아들이자 마귀제독의 증손인 마순상麻舜裳이 우리나라에 귀화하게 된다.
우리나라 마씨 1세조 마순상
마귀의 증손 마순상은 남경통판南京通判(지부知府 아래에서 세금으로 걷은 양곡을 운반하거나 농사일, 수리水利, 소송訴訟 등의 사무를 담당했다) 겸 조병독량사調兵督糧使로 산동성 등주登州(봉래)의 군량을 배를 타고 순찰 감독하다가, 1627년 9월에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 만에 황해도 풍천에 이르렀는데 함께 탔던 29명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귀화하였다. 그 후 마순상은 풍천서 홍주를 거쳐 전라남도 광주군에 이주하여 의병장 강덕룡姜德龍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봉직蓬直공을 두었다. 후손들이 회회국왕 마립을 원조로, 마귀를 중시조로 받들고 중국의 관향인 상곡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으며, 우리나라 마씨의 실질적인 1세조는 마순상이다.
마씨 주요 인물
조선 헌종 때 조정에서 마귀장군의 9세손 마시가麻時可에게 ‘삼(麻)’은 여름비단이란 뜻이므로 하백夏帛이란 이름을 내리고 비단에는 베틀이 제격이라면서 기장機張 현감을 제수하고 이어 후주도호부사厚州都護府使를 제수하였다. 그의 아들 마두원麻斗元도 과거에 급제하여 1890년 곽산군수가 되고 이어 강화부중군에 봉직하던 중 일본이 침략하였다. 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의병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서 활약하다가, 1919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끌려가 옥고를 치르고 세상을 떠났다. 현대 인물로는 포항시 정책보좌관 마호형麻鎬瀅, 경상대학교 마호섭麻鎬燮 교수 등이 있다. 상곡 마씨의 후손들은 합천, 함안, 창원, 거창, 함양 등지에 살고 있다. 상곡 마씨는 경남 지역에 많이 살고 있고 합천陜川에 종가가 있어 합천 마씨로도 불린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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