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땅에 옥황상제님이 강세하셨다 외
[입도수기]
조선 땅에 옥황상제님이 강세하셨다
강정희(46) / 애틀란타도장 / 145년 음1월 입도
저는 2년 전 약간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여 해외에서 거주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꿈같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알리바마 주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에 남편 김태연 성도님으로부터 증산도를 신앙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증산도가 어떤 종교인지 아느냐?”고 물어서 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뜻밖의 말을 들어서 약간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증산도가 어떤 종교지?’ 하는 호기심은 생겼었지만 낯선 이국생활에 적응하고 신혼살림 가꾸기에 모든 관심이 쏠려서 증산도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매일 새벽에 지극정성으로 봉청수하고 수행하는 남편을 보면서 그냥 ‘참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단꿈에 젖어 있던 1달 후 남편을 따라 집에서 차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한 애틀랜타도장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상제님 성탄치성을 앞둔 날이라 다른 성도님 가족 한 팀(3명)도 와 있었습니다. 도장에서 포감님을 뵙고 도담을 나누는데 포감님께서 저에게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에 조선 땅에 옥황상제님이 인간으로 강세하셨다.’는 실로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또 우주1년과 지구1년의 의미, 춘생추살의 의미, 괴질 병겁, 신명 등등 생소한 말씀들을 많이 들려주셨는데 무섭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해서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다음날은 상제님 성탄치성 날이었는데 집에서 제사 준비를 할 때보다 더 엄숙하고 경건하게 준비하는 모습에 또한 많이 놀랐습니다. 성탄 치성에 참석하여 다른 성도님들과 함께 주문을 송주하는데 의외로 처음 접하는 생소한 주문들이었지만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짐을 느꼈습니다. 그 후 도장에 올 때마다 포감님께서 진리 말씀들을 해 주시고 도전읽기, 도전 CD 전체 3번 듣기, 태사부님 말씀 CD 전체 3번 듣기, 소책자들 읽기 등 이해하기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숙제를 내 주셨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면 한 달 동안 열심히 숙제를 하였습니다. 또한 남편이 한결같이 새벽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봉청수, 수행하는 모습, 태사부님 사부님 말씀을 빠뜨리지 않고 받들고 상생방송도 늘 시청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저도 큰 목적의식은 없었지만 그냥 당연히 같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교육과 수행에 참여하였습니다. 천하사 신앙의 대의와 사명감을 가지고 본인의 진실되고 확고한 의지로 입도를 해야만 올바르게 변치 않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는 포감님의 지론에 동의하여 차근차근 천천히 준비해서 입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달 만에 도장에 갈 때는 피붙이 하나 없는 나에게 도장은 친정집 같았고, 그런 친정집으로 가는 즐거운 기분과 편안한 마음으로 치성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한 2년을 열심히 예비신도로 도장을 다니고 태사부님 사부님 진리말씀을 받들고, 여러 진리서적들을 읽는 횟수가 점점 늘어갈수록 진리 말씀들이 더욱 깊이 몸으로 각성되고 깨달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무지하고 안일한 나 자신에 대해 비로소 많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천하지세자知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생기有天下之生氣하고, 암천하지세자暗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사기有天下之死氣니라.”는 도전 성구는 제가 특히 좋아하는 성구 가운데 하나인데 ‘이 중요하고 급박한 시기에 나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문득 초등학교 때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으로 끝인가?’ 하는 생각들이 자주 들어서 어린 마음에 너무 두려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또 친정 어머니(40년 이상을 절에 지극정성으로 다니심)와 같이 다녔던 절에서 불공드리면서 부처님이라고 기도 드려야하는데 언젠가부터 무의식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와서 ‘이상하다, 절에서 왜 하느님을 찾지, 불경스럽게……’라고 생각했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또 수행을 할 때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는데 대부분이 요리에 대한 사념들이어서 ‘우리 집 조왕신의 기운이 너무 강력한가? 아니면 식신食神이 수행할 때마다 방해를 하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혹시나 제가 아직 입도를 하지 않아서 저의 조상선령님들이 멀리서만 저를 보고 계셔서 수마, 복마를 물리쳐주지 못 하시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안일하고 나태한 생각들이 저를 사로잡아서 성경신이 삼위일체가 되지 못했다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릴 때 해결하지 못했던 인생 본질문제에 대한 고민도 다 나를 증산도로 이끌기 위한 조상님의 강력한 힘이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도 입도를 통해 하루 빨리 완전한 증산도 신도가 되어 남 살리는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신 시부모님과 하루 반나절을 절에서 보내시는 친정어머니, 그런 어머니로 인해 반강요로 절에 다니시는 친정아버지, 다른 시댁 식구들, 친정의 형제 자매들, 친구들, 나아가 진리에 인연 있는 세상 사람들을 상제님 품으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지만 도전 말씀과 태사부님 사부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성경신을 다해 신앙하는 증산도의 순수하고 진실한 일꾼이 될 것을 서원합니다. ◎
내가 와야 할 자리에 와서 앉아 있구나
이영란(53) / 마산회원도장 / 145년 음1월 입도
상제님 품에 들어오는 입도식을 앞두고 있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50평생 참 멀고도 험한 길을 돌고 돌아서 그 끝에 고향의 부모님 품 안에 안긴 듯합니다.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제님 신앙을 갓난아기 때부터 지켜보며 자라왔습니다. 이른 아침이면 안방 아랫목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 고수부님 진영을 모셔놓은 자리에 청수를 떠 놓고 늘 기도를 하셨습니다. 늘 일심으로 평생 상제님을 받들고 또 그 뜻에 따라 진실한 삶을 사신 분이셨기에 저희 자식들은 한결같이 청빈하지만 덕망 높으셨던 아버지를 존경하며 살아왔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신심이 깊으셨던 만큼 아마도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밝혀 주시는 일을 하고 계실 거라는 것을 가족 모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네에서는 아버지 묘비 앞에 작은 추모비를 세워서 아버지의 삶을 공경하고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 9남매는 아버지 자식임을 지금도 자랑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늘 기도하시고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태을주와 운장주를 제 삶의 기본 기도문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주문과 기도로써 이겨내곤 했습니다. 늘 말씀해주시던 “척을 짓지 마라, 근본을 알고 조상을 잘 섬겨야 한다, 돈을 탐하지마라, 은혜는 꼭 갚아라, 남에게 기대지 마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희 집 냉장고에는 붙여놓고 즐겨보는 글이 있는데 ‘부모 된 사람들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다. 부모 된 사람들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신들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그런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부모님 품 안에서 유복하게 유년시절을 별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반대하던 결혼을 하면서부터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결혼 후 천주교 신자인 남편을 따라 성당을 다니며 영세도 받았고 혼배성사도 하였지만, 첫 고해성사 날 밤에 꾸었던 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검은 도복 차림을 한 사람이 꿈에 나타나서 허튼짓 한다며 얼마나 엄하고 혹독하게 꾸짖고 나무라시는지 너무 무서워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 이후로 천주교는 내가 모실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두 번 다시는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어렵게 시작한 결혼 생활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IMF 때에는 하던 일마저 망해서 풍비박산이 되어 빈털터리로 마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살면서 빚도 청산하고 좀 살만 하니까 나이는 벌써 50줄에 닿았고, 부부의 연이 다하여 이혼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불행은 연달아서 온다고 하던 말이 있듯이 근래 2년 동안 이혼, 실직, 친정 모친 사망, 병으로 인한 입원과 대수술 또 한 번의 입원으로 건강마저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사람은 아픔을 통해 성숙한다고 하더니 그 힘든 길을 지나오고 나서야 상제님을 모시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정의 셋째 오빠는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증산도 신앙생활을 해오셨기 때문에 늘 만날 때마다 상제님을 모시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나 오빠처럼 일심으로 신앙생활을 할 자신도 없었고, 그냥 맘속에서 평소처럼 힘들면 주문을 외우고 기도만 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제가 상제님을 모시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몸도 마음도 나약해지니까 저한테 신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신神 바람이 들어왔다고 신을 모시는 무당이 되라고 권하였는데,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평생 맘속에 상제님을 품고 살아왔는데 무당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길은 자식한테도 떳떳하지 못하고 존경받는 엄마가 될 수 없는 길임을 알기에 마음의 중심을 잡고 친정 오빠에게 의논하여 입도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10년 전 쯤 마산에 내려와 어렵게 살던 시절에 상제님 신앙을 하려고 입문을 하였지만 공부만 조금 하다가 포기하였는데, 이제야 본격적으로 입도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증산도 신앙은 다 때가 되어야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증산도 도장에 무턱대고 찾아가서는 공부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조금은 당혹스러우셨을 포정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그래도 친절히 조력자도 만들어 주시고 친히 입도 교육도 날마다 해주셨습니다. 기도하는 법, 수행하는 법, 공부하는 법을 어린 아기에게 가르쳐 주시 듯 하나에서 열까지 세세히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셔서 편안한 맘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어렵기도 하지만 재미도 있었습니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후천 5만년 세상을 알게 되고, 진리 공부를 통해 100여 년 전 상제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천지공사를 펼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일꾼 참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도장에 나올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있었는데, 조금은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내가 와야 할 자리에 와서 앉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고마움이었습니다.
삶에 지치고 힘들어 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조상님께서 이 못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 자식만은 반듯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고, 험한 세상에서도 상처받은 맘을 잘 다독여 심성을 크게 다치지 않고 거칠지 않게 보살펴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첫걸음 뗄 때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은 욕심에 하나하나 배우고 익히는 데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거의 일 년 동안을 집에서 쉬면서 빈둥거리던 게으름이 습관이 돼버려서 도장에 나와서 공부와 수행을 하는 것이 처음엔 힘들고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늘 곁에서 끈을 놓지 않게 챙겨주시고 함께해주시는 포정님과 조력 성도님의 도움으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도전道典 책을 처음 읽던 날 꾸었던 꿈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온몸에서 고름 주머니가 터져 나와 새 이부자리가 흠뻑 젖을 정도로 방안이 온통 고름으로 가득 찼습니다. 너무 놀라서 양동이와 쓰레받기로 고름을 퍼내다가 깼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꿈이었습니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수요치성, 일요치성에도 적극 참여하여 정공 수행도 해 보고 도공도 해 보고, 105배례를 통해 지극정성으로 상제님을 받드는 기도도 해 보고, 천도식에 참여하여 봉사활동도 해 보고, 외부에 전단지를 붙이는 포교활동에도 참여해 보면서 많이 배우고 익히고 있습니다. 앞으로 상제님의 뜻에 따라 정성껏 신앙하고 공부하여 개벽되는 세상에서 ‘나는 자식으로써는 열매요 부모로써는 씨종자’임을 깊이 깨달아 참 신앙인이 되어 일심으로 상제님의 뜻을 받들고 생활할 수 있기를 늘 염원해봅니다.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저를 상제님 신앙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상제님과 부모님 전에 감사를 드립니다. ◎
지금은 천지가 원한이 맺힌 시대
이정연(61) / 서울관악도장 / 144년 음12월 입도
저는 어려서부터 신병身病으로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학교공부는 물론 운동회를 하거나 수학여행을 갈 때면 몸에 열이 나거나 기침, 편도선염이 생겼습니다. 23세 되는 해에 친구를 통해 묘법연화경을 신앙하게 되어 38세까지 17년을 다녔습니다. 1992년에는 한국야쿠르트 배달 아주머니를 통해 오행생식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황제내경을 학문으로 정리하신 김춘식 선생님의 책을 받아 2년 동안 공부하고 1994년 3월부터 18주 강의를 받았습니다. 실습할 때 빈혈이 심해 팔의 혈穴 자리 세 곳에 침을 꽂고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 해 8월에 4명이 동업하여 오행생식원을 개업하였습니다. 1년 후 한 분이 따로 개업하였고 또 한 분은 신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때 제 몸은 등이 꼽추처럼 꺾일 정도로 굽었는데 몸이 굳은 상태라 똑바로 누워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펴진 편입니다.
1994년이었습니다. 신림사거리에서 안양 쪽으로 가는 길가에서 태을주를 읽으며 포교하는 모습을 보고 『다이제스트 개벽』이라는 작은 책자를 받아왔습니다. 책 내용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에도 자체적으로 나온 종교 교주님이 계시네.’ 하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2001년부터 불교신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하여 앉는 자세를 하기가 힘들어 절에 가서 법문을 자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개월 전에 TV를 보다가 상생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상생방송은 3년 전에도 어느 집에서 잠깐 본 적이 있었습니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상생방송이 보였고 아래 자막에 책 기증이라고 되어 있어서 방송국에 전화로 신청하였습니다. 다음날 『한민족과 증산도』를 비롯한 여러 책이 도착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오행 원리로서의 우주이치 설명과 우주일년 인간농사를 짓는 주기가 있다는 설명, 그리고 선령의 해원에 대한 내용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나의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증산도를 알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상황이 되지 않아 망설여졌습니다. 여러 문제들을 걸림 없이 깨끗하게 청산한 다음에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올해 1월 19일에 관악도장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통화 후 관악도장 수호사님께서 이름 소개와 함께 시간이 되실 때 편하게 한번 도장에 오시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메시지 내용에 진솔함과 차분한 배려를 해주신 것이 느껴져서 그날 저녁에 도장에 찾아가 뵈었습니다. 첫인상이 단정하시고 깔끔한 마스크에 아주 선하시고 부드러운 말씀에 믿음이 갔습니다. 매주 화, 목, 토요일 오전에 진리공부를 하기로 하여 그 다음 날부터 도장에서 팔관법 교재로 진리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상태라서 앉아 있는 게 어려웠지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진리 공부가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4주간을 보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열정과 정성을 다하여 진리공부를 시켜주신 수호사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진리공부를 하면서 특히 ‘지금은 천지가 원한이 맺힌 시대’라고 하신 증산상제님 말씀이 저에게는 진실한 감동으로 와 닿았습니다. 모든 신명들의 한을 해원시켜 풀어주지 않으면 천지에 평온이 올 수 없기 때문에 우주 하느님이신 상제님께서 오셔서 이러한 원과 한을 풀어주신다는 말씀에서 확신을 갖고 신앙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의 원한은 물론이고 우리 조상님들의 원한도 해원이 되면 나의 건강은 물론이고 가정의 복록도 열리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진리공부를 해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일심으로 시종일관 신앙하겠습니다. 앞으로 5만년 인연줄을 놓치지 않으려면 생사를 걸고 정진하겠습니다. 사람 살리는 포교를 실천하여 지속적으로 매진하겠습니다. ◎
그토록 찾아다니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
손은비(20) / 대구시지도장/ 145년 음3월 입도
저는 처음에 대학교 동아리 모집 때 관심이 있어서 증산도 동아리에 입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동양철학이나 수행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선배들에게 증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도장 방문, 수행, 대학 홍보 활동을 같이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점을 바탕으로 해서 단순히 개인적으로 도를 깨우치고 수행하는 것만이 다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큰 마음을 지니고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입도를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원시반본原始返本, 내 자신의 뿌리를 되찾자는 가르침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이때까지 부모님에게 소홀히 했던 것, 우리 한민족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증산도를 만날 수 있게끔 도와주신 조상님들의 은혜를 모르고 살았다는 점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마음을 바르게 먹고 겸손한 자세로 더 배워나가야겠다 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도장에서 진리공부를 하면서 포정님이나 포감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들이 저에게는 그토록 찾아다니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100권 이상의 철학 도서를 읽어도 느껴지지 않았던 삶의 목적, 존재의 근원과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훤히 비춰지는 듯했고 잡다한 지식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묶여 상제님 진리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되는 해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그 지식을 현실세계에 적용하면서 사는 지혜로운 삶을 살라고 말씀해 주셨던 포감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앞으로 증산도인으로서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 저의 입도를 위해 무한한 기도와 정성을 드리셨을 조상님,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의지가 되어주셨던 인도자와 동아리 선배님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상제님 말씀을 잘 받들고 사람 살리는 데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내외면적으로 자신을 가꿔나가고 노력하는 참된 일꾼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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