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명량

[영화산책 ]
홍승수 / 본부

성도님! 잘 지내시지요?


벌써 입추와 말복이 들어왔네요. 주위에서는 본격적인 더위는 지금부터라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리네요. 저는 영화 관람으로 피서를 대신하였습니다. 7월 30일 개봉 첫날 영화 〈명량〉을 보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니 바닷가에 못 가본 아쉬움을 달래기엔 딱 적격이었죠. 며칠 전 신문에서‘한국영화 사상 최단시간 내 천만 관객 돌파’라는 기사를 봤는데 극장에서 느낀 영화의 열기도 예사롭지 않더군요. 천만 관객이라면 우리 국민 중 활동 인구를 4천만으로 잡으면 4명 중에 1명꼴로 영화를 봤다는 이야기네요. 이쯤 되면 명량이 한 시대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죠. 크게 흥행몰이를 하는 영화들에는 공통적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문화 코드가 들어가 있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영화를 보셨다니 한번 만나서 여기에 대한 심도 깊은 도담을 나눠보길 기대합니다.

어쨌든 명량의 개봉 시점은 가히 절묘한 타이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요. 그러고 보니 명량鳴梁의 바다와 세월호의 바다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네요. 아마도 사람들은 세월호의 바다에서 느꼈던 상실감을 명량의 바다에서 보상받고자 하는 기대심리가 있었을 겁니다. 국제정세는 또 어떻습니까? 동지나해와 남지나해에서 중국과 이웃 나라들 간의 해상 힘겨루기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고 일본의 독도 도발은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약소국의 국민으로서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순신과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성도님, 설마 영화의 말미에 이순신의 최후를 예상한 것은 아닐 테지요.


그건 명량해전이 아니고 노량해전이랍니다.^^ 저도 사실 영화의 말미에 이순신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질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어요. 결국 저의 무식이 탄로 나서 내심 뜨끔했답니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의 역사 배경은 알아야겠더라고요. 1592년의 조일朝日전쟁, 임진년에 일어나서 임진왜란이라 하는 이 전쟁은 정유년의 재침(정유재란)과 연결되어 장장 7년간 계속됩니다. 명량해전은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9월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명량의 바닷길을 열어 수륙병진 전략을 완성하느냐, 조선 입장에서는 적의 병력과 군량 수송로를 틀어막아 향후 전쟁의 판도를 유리하게 이끄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양국 수군의 최대 병력이 명량에서 맞닥뜨린 것입니다.

임진왜란 하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남쪽에서부터 핏빛 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는데 조선 조정은 이를 전혀 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국가 차원의 대재앙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징후가 나타나고 또 현실의 경고도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온 조선통신사의 결과보고는 조선이 전쟁을 대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죠. 당파가 달랐던 두 사람은 전혀 상반된 보고를 올리고, 조정은 애써 전쟁이 몰고 오는 불길한 기운에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놈의 당파가 무엇인지, 곧 나라가 망해도 상대 당을 이기겠다는 그 무서운 정신은 지금의 정치권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네요. 분단국가에서 세계 최고의 군사 밀집지역인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도 정쟁에 여념이 없는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은 420년 전 조선 조정의 모습과 판박이입니다. 그나마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인사로 이순신을 정6품의 정읍 현감에서 정3품의 전라좌수사로 발탁한 것은 조선 조정이 무의식 속에서 7년 전쟁의 가장 큰 방어벽을 친 것이지요. 이순신을 장차 있을 역사의 소용돌이, 그 중심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위치에 있어야 역사가 제대로 굴러가는 법입니다. 이순신의 발탁은 조선의 멸망을 지켜볼 수 없었던 하늘의 보살핌이라 해야겠죠.

성도님‘!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라는 말이 있죠.


영화 제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성공은 캐스팅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개인적으로
캐스팅된 배우들 중 최민식과 유성룡의 이름을 보는 순간 저는 평균 이상의 성공을 예상했습니다. 물론 호불호好不好가 갈리겠지만 충무로에서 최민식 만큼 무게감 있게 이순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몇 있을까요? 그와 라이벌 구도로 그려지는 구루지마 역의 유성룡 역시 티켓 파워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배우죠. 전작들에서 보여준 웃음기와 더티 섹시 이미지를 싹 빼고 강렬한 눈빛으로 거친 존재감을 작렬시키더군요. 영화에서는 구루지마가 복수의 화신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구루지마의 형은 당포해전에서 이순신에 의해 바다의 제물로 수장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순신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해적 출신으로 물길과 약탈에는 능했겠지만 이미 육전과 수전을 두루 겪어 싸움의 달인이 돼 있었던 이순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요.

드라마틱한 백의종군에, 모친상까지 당한 슬픔을 딛고 오직 백성을 향한 충忠의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는 이순신과의 인격대결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고요. 결국 구루지마 집안은 7년 전쟁에서 이순신에 의해 풍비박산이 나지요. 영화에서는 구루지마의 목을 베고 돛에다 효수하는 걸로 나왔으나 사실史實에서는 죽은 구루지마의 시체를 끌어올려 토막 내어 돛에다 매달았답니다. 그렇다고 누가 감히 이순신을 잔인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롭던 나라에 7년 동안 피바람을 일으킨 그 응보에 비한다면 오히려 모자란다 하겠습니다.

성도님, 그즈음 이순신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정유년 4월부터 이순신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에서 백의종군은 많았지만 과연 이순신만큼 처절했던 백의종군은 또 없을 겁니다. 백의종군 시작 직후 이순신은 홀로 남은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이 때 자연인 이순신의 절망감은 어떠했을까요?‘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난중일기 기록은 어쩌면 피눈물을 흘리며 적은 기록이겠지요. 다시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고 그 해 7월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칠천량 앞바다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때 비로소 이순신의 진가를 알아보지요. 8월에 다시 그를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임명합니다. 다시 돌아간 조선 수군의 상황은 말이 아닙니다. 남은 것은 12척의 배와 패배감과 두려움에 젖은 패잔병들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충무공은 선조의 교지를 받습니다. “고단한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에서 싸우지 말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서 육군과 함께 싸워라.” 이에 충무공은 붓을 들어 임금께 장계를 올립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선조에게 얼마나 할말이 많았을까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고 앞으로 충분히 예견되는 패전에 대한 구실과 변명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나가서 사력을 다해 싸운다면 그래도 해볼 만합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충무공은 짧은 몇 자의 글 속에 회한, 자책, 억울 등의 감정들을 다 묻어버렸습니다. 역사적으로 큰일을 이룬 위대한 사람들의 언사言辭는 대체적으로 짧습니다. 이순신의 인격과 심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글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고의 명문이라 하겠습니다.‘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이 문구는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곱씹어도 좋은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성도님, 이순신 역시 명량의 바다에서 두려웠을 겁니다.


수군의 2인자 배설도 도망갔으니 당시 군관과 병사들이 느꼈던 두려움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이순신이 택한 것은 정공법正攻法이었습니다. 병사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리라必死則生 必生則死”는 그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이어 “여기 울돌목은 한 사람이 능히 천 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다”라고 지형의 유리함을 역설합니다. 또 엄정한 군율을 세워 달아난 부하를 직접 목을 베고 달아나는 군관의 배를 불화살로 태워버립니다. 저는 명량해전을 앞 둔 이순신은 두려움 속에서도 한편으로 승리의 냄새도 맡고 있었다고 자신합니다. 단언컨대 명량의 해협을 답사하면서 평생을 전장에서 누빈 군인의 직감으로 이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싸움이 일어나기 전날 밤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승리에 대한 신교를 받지 않았을까요? 상제님을 지극히 섬기고 수시로 제祭를 올리며 기도를 올렸던 신실信實한 분이기에 하늘로부터 충분히 계시를 받고도 남음이 있지요. 이순신 입장에선 이기기로 예정된 싸움을 이기는 쪽으로 집행하는 것만 남은 셈이었지요.

성도님, 영화의 해상 전투신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더군요.


헐리웃 영화도 아니고 한국 영화도 저런 장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장면의 정교
함은 미국보다 떨어지지만 리얼리티는 그들을 능가하더군요. 영화에서 보여 주는 전투 당일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지요. 아무리 신도神道에서 도와준다 하더라도 인사는 복잡하게 얽히기 마련입니다. 우선 조류는 불리한데 대장선을 제외한 배들은 두려움에 얼어붙어 호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이순신과 대장선만의 외로운 전투가 계속됩니다. 대장선의 고군분투에 용기를 얻은 후방의 전선들이 하나둘씩 합세하면서 결국 전세가 뒤집히지요. 적장의 머리가 효수되자 완전히 승기를 잡게되고 이후 장면은 13척의 조선 수군이 패퇴하는 적을 뒤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역사적인 명량의 전투 상황을 근처의 바다와 산에서 조선의 백성들이 숨죽이며 지켜봤다는 것을요. 13척에 맞서는 수백 척 적선을 헤아리면서, 또 전투 초기에 이순신 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조바심은 어떠했을까요? 영화는 전투 장면의 근접촬영과 먼 거리 촬영모습을 번갈아 보여주어 당시 참관했던 백성들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싸움이 가열되면서 자욱한 화염연기로 피아구별이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되다 마침내 연기가 걷히고 바다의 전황이 드러납니다. 우리 전선들이 도망가는 적선에 불벼락을 안기며 추격하는 광경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은 감격에 겨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의 눈물을 흘리지요. 극장에 앉아 있었던 저의 심정도 그들과 꼭 같았습니다.

드디어 명량해전은 이순신의 승리요 조선 수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조선 수군은 12척이 아니고 13척이다, 적군의 배가 130척이다, 아니 330척이다 하는 논란은 의미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불가능의 싸움을 승리로 만든 것이요, 절망의 바다를 희망의 바다로 만든 것입니다. 전쟁의 향방을 바꾼 것이지요. 이순신은 명량의 승리를 천행天幸이라 하였는데 그건 천행이 아니었습니다. 이순신은 철저하게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길 수 있는 완벽한 준비를 하고 나서야 전투에 나섰습니다.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해협에는 적들이 수적 우세를 이용하기 힘들고 적들도 똑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초기에 잘 버텨내고 조류의 흐름을 타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과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지혜, 명량의 바다에는 있었고 칠천량의 바다에는 없었습니다.

성도님, 우리 모두는 도장에서 가정에서 각자 선장船長입니다.


선장의 도道를, 그것도 난파 직전의 배를 모는 선장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이 바로 이순신입니다. 그는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소통과 창의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무거운 책임감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앞장서서 싸우고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 안타깝게도 세월호의 바다에서는 그런 책임감이 없었습니다. 다시 세월호로 돌아가 봅시다. 온 국민이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채 피워보지도 못한 아까운 목숨들이 수장되었습니다. 끼리끼리 챙기는 패거리 의식만 있었고 책임감, 용기, 인간애는 낙제점이었던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야 그렇다 칩시다. 구조에 나선 경찰들의 안일하고 수동적이고 형식적인 행동은 우리를 분통 터지게 하더이다. 몇 발자국 떨어진 선실로 달려가 적극적으로 외치는 그 한 사람이 있었다면 어린 생명들이 그리도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겠죠. 우리 사회 전체가 도덕불감증과 함께 무사안일주의, 적당주의, 수동주의의 깊은 늪에 빠져있다면 이건 저만의 억측일까요?

천하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사업이라 당연히 두려움과 외로움의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래도 이순신이 마주해야 했던 명량의 바다만큼 험악한 상황은 아닐 겁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되는 방법을 찾고, 항상 긍정하고, 과감하게 실천한다면 결국은 우리도 명량의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일은 천지에서 기원하고 천상의 신명들과 조상님들이 함께 소원하는 일이 아닙니까? 막바지 더위 잘 이겨내시고 큰 승전보를 울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밝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부
족한 글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