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5대 역사조작극⑤]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성
[역사광복이야기]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배은 역사
임나일본부설은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치할 역사적 근거를 임나일본부설에서 구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이란 당시 일본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 조정이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직접 지배했고, 이를 기반으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는데 그 지배기구가 바로 임나일본부라는 주장이다.
▶일본의 고대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임나일본부가 나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 천황가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개변하고 윤색하였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임나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주장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사료적 근거는 광개토대왕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한반도에 왜병이 다수 파견되어 있었으며 이를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사료를 통해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접근해 보자.
▶우리나라 기록에도 임나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가장 이른 기록이 앞에서 언급한 광개토대왕 비문이다.
▶그 외에도 신라 문무왕 때의 문장가 강수의 전기를 실은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강수가 ‘임나가랑任那加良’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신라말의 「진경대사탑비」에도 진경대사가 임나왕족의 후손이라 하면서 그 선조가 김유신이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김유신은 김수로 왕이 세운 가락국 즉 금관가야 사람이다. 그러므로 임나는 금관가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기에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서 멸망시켰다는 언급을 하면서 그 주에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합해서 10국이다.”라는 중요한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임나가 가야를 통틀어 일컫는 지명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외에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임나는 특정한 가야를 말하는 것으로 김해가야(금관가야)를 지칭한다. 김해가야가 가야연맹*을 주도하던 나라라서 임나가 가야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고령가야를 지칭하는 경우도 더러 보이는데 이는 금관가야는 4세기초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약화된 뒤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을 주도하게 되면서 고령가야를 가야를 대표하는 대가야로 부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는 추아이(仲哀) 천황의 비妃로서 남편이 죽은 후 69년 동안 섭정을 한 여인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재위기간이 201~269년이지만 『일본서기』가 이 시기의 연대를 의도적으로 2주갑周甲 올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321~369년이 그 섭정기간이 될 것이다.
『일본서기』는 추아이 천황이 신이 명한 신라정벌을 거부했기 때문에 신벌神罰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후는 남편이 죽자 임신한 몸으로 곧 바로 신라정벌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정벌 기사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어 현실 사건을 기술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겨울 10월 3일 화이진에서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속의 큰 물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어 범선은 파도에 따라 나아갔다. 노를 쓸 필요없이 곧바로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 안까지 미쳤다. 이로써 천신지기天神地氣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였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 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 『일본서기』
이 뒤에는 신라왕이 일본을 상전으로 모시고 해마다 빠짐없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신라 왕의 이름을 파사매금婆娑寐錦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왕(파사이사금)은 재위연도가 80~112년으로 신공황후 시대보다 250년 이전의 사람이다.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가공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강진)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제주)를 백제에게 주었다. 백제왕 초고(근초고왕)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들과 만나 김제에서 회맹會盟하였다. 회맹에서 백제왕은 이후 항상 서번西蕃을 칭하고 봄가을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다는 기록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 기록을 사실로 보고 일본이 임나를 직접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간접 지배했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가 일본 장군이 아니라 백제 장군이었다는 점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장수라는 아라타와케와 카가와케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점 등으로 판단할 때 이 원정은 백제의 원정이었는데 이를 『일본서기』가 일본의 원정으로 왜곡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일본이 아니라 백제가 가야 7국을 평정한 후 가야에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를 파견하여 경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일본서기』는 목만치가 일본에 귀화한 것을 근거로 일본이 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이 기록은 야마토 조정이 파견한 키노오히하노스쿠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삼한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기록인데 내용을 살펴보면 백제에 대한 반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제가 임나를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이 기록은 일본현읍이 아니라 ‘○○현읍’이었을 것이다. 일본이라는 명칭이 백제가 망하고(660) 7세기 후반(670)에야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나의 현읍에 백제의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은 임나의 경영을 백제가 했음을 의미한다.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기 원년(539)에 실려 있는 기사가 바로 임라재건회의에 대한 기록이다.
“성명왕(성왕-필자)이 말했다.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근초고왕-필자), 귀수왕(근구수왕-필자)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旱岐-가야소국들의 왕의 칭호)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고 지냈다. 자제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에 속임을 받고, 천황의 노여움을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중좌평下部中佐平 마로, 성방城方 갑배매노 등을 보내어 가라에 가서 임나일본부에 모여 서로 맹약을 맺게 하였다. 이후 다른 일에 얽매였으나 임나를 재건하는 것을 조석으로 잊은 적이 없다”.
이 뒤에도 백제성왕의 말이 실려 있는데 안라가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백제가 근초고왕 때부터 임라 지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에 의해 금관가야와 녹기탄(녹국), 탁순 등이 망하자 백제 성왕이 가야연맹의 여러 나라 지도자들을 모아서 대책회의를 연 것이다.
회의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열렸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임나일본부의 유지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백제가 임나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회의였다. 회의의 주도자도 임나일본부가 아닌 백제성왕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통해 임나 즉 가야를 직접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간접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사실과 거리가 먼 허구임을 보았다.
562년 신라에 의해 대가야가 망하고 임나는 신라에 합병되었다. 『일본서기』에는 야마토 조정이 대장군 키노오노마로스쿠네(紀男麻呂宿禰)를 파견하여 임나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고 하는데 실은 이는 백제가 임나를 구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펼친 것이다. 『일본서기』는 더 나아가 그 원정을 기록한 긴메이 천황기 23년조에 신라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든가, 또 대장군 사테히코를 보내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왕이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는 허구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는 부활하지 않았다. 긴메이 천황은 중병으로 죽는 자리에서 유언을 하였는데 황태자에게 ‘그대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사람들이 임나를 멸망시킨 신라와 그 동맹 고구려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이러한 사실왜곡으로 나타났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서기』는 임나에 있던 야마토 정권의 외교기구를 ‘내관가둔창’이라는 천황의 직할영토로 둔갑시키고 삼한의 지배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서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도 일본부에 대한 주석을 ‘어사지御事持’(미코토모치)로 달고 있는데 이는 왕의 사신使臣이라는 뜻이다. 또 일본이라는 국명 역시 임나일본부가 없어진 562년보다 100여년 뒤에 사용되기 시작한 국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가 얼마나 허구성을 띤 것인지 알 수 있다.
『일본서기』 응신應神천황기 25년조에는 『백제기』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목만치를 목라근자의 아들이라 하였다. 이 목만치는 또 『삼국사기』 개로왕蓋鹵王 조에도 나온다. 개로왕이 당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될 처지에 처하자 왕자(후일의 문주왕文周王)와 함께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협만치가 목만치를 가리킨다. 목도 성이고 협도 성으로서 목협만치는 복성複姓이었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 기록에 의하면 이 목만치는 부친의 세력을 이용하여 임나 일을 전담하였다. 백제와 임나에서 권세자 역할을 하던 그는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포악한 것을 보고 천황이 그를 불러들였다고 되어 있다.
비문에서 보이는 왜는 단순한 해적인 왜구倭寇가 아니라 당시의 일본정부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파병한 왜의 군대였다. 그런데 왜 백제는 왜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였을까? 백제는 고구려와 한 세대 전인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부터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원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신왕(재위 392~405)은 397년 야마토정권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태자 전지腆支를 인질로 일본에 보냈다. 백제는 왜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왜병이 들어왔는데 이들의 근거가 임나가라였다. 당시 백제는 임나가라를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왜군에게 제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 10년조에 의하면 고구려군은 임나가라까지 왜군을 추격하여 그 성을 함락하였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기록은 ‘구주대마仇州對馬’가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이라고 한 기록이다. 여기서 구주대마는 오늘날의 대마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곳에 신라와 고구려, 백제에 속한 ‘삼가라三加羅’가 있다고 하면서 그 가라 이름을 좌호가라, 인위가라, 계지가라라고 하였다. 이는 가야가 대마도에 먼저 진출하고 삼국의 주민들이 그 뒤를 따라 이주하였음을 시사한다.
『환단고기』의 이러한 기록은 가야를 필두로 한반도의 삼국이 큐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로 진출하여 그 분국을 세웠다는 북한 역사학자 고故 김석형 선생의 삼한분국설과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1. 임나일본부 주장의 두 가지 사료근거
임나일본부설은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치할 역사적 근거를 임나일본부설에서 구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이란 당시 일본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 조정이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직접 지배했고, 이를 기반으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는데 그 지배기구가 바로 임나일본부라는 주장이다.
▶일본의 고대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임나일본부가 나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 천황가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개변하고 윤색하였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임나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주장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사료적 근거는 광개토대왕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한반도에 왜병이 다수 파견되어 있었으며 이를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사료를 통해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접근해 보자.
2. 임나는 가야에 대한 총칭
▶우리나라 기록에도 임나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가장 이른 기록이 앞에서 언급한 광개토대왕 비문이다.
▶그 외에도 신라 문무왕 때의 문장가 강수의 전기를 실은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강수가 ‘임나가랑任那加良’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신라말의 「진경대사탑비」에도 진경대사가 임나왕족의 후손이라 하면서 그 선조가 김유신이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김유신은 김수로 왕이 세운 가락국 즉 금관가야 사람이다. 그러므로 임나는 금관가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기에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서 멸망시켰다는 언급을 하면서 그 주에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합해서 10국이다.”라는 중요한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임나가 가야를 통틀어 일컫는 지명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외에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임나는 특정한 가야를 말하는 것으로 김해가야(금관가야)를 지칭한다. 김해가야가 가야연맹*을 주도하던 나라라서 임나가 가야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고령가야를 지칭하는 경우도 더러 보이는데 이는 금관가야는 4세기초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약화된 뒤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을 주도하게 되면서 고령가야를 가야를 대표하는 대가야로 부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삼국유사』에는 가야국이 모두 6국으로 나온다. 아라가야(경남 함안), 고령가야(경북 함령 즉 함창), 대가야(경북 고령), 성산가야(경북 성주), 소가야(경남 고령), 그리고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이다. 그러나 가야연맹에는 6가야 외에도 반독립적인 소국들이 많이 있었다.
3. 『일본서기』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은 거짓
기록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는 추아이(仲哀) 천황의 비妃로서 남편이 죽은 후 69년 동안 섭정을 한 여인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재위기간이 201~269년이지만 『일본서기』가 이 시기의 연대를 의도적으로 2주갑周甲 올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321~369년이 그 섭정기간이 될 것이다.
『일본서기』는 추아이 천황이 신이 명한 신라정벌을 거부했기 때문에 신벌神罰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후는 남편이 죽자 임신한 몸으로 곧 바로 신라정벌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정벌 기사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어 현실 사건을 기술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겨울 10월 3일 화이진에서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속의 큰 물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어 범선은 파도에 따라 나아갔다. 노를 쓸 필요없이 곧바로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 안까지 미쳤다. 이로써 천신지기天神地氣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 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였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 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 『일본서기』
이 뒤에는 신라왕이 일본을 상전으로 모시고 해마다 빠짐없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신라 왕의 이름을 파사매금婆娑寐錦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왕(파사이사금)은 재위연도가 80~112년으로 신공황후 시대보다 250년 이전의 사람이다.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가공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삼한이 천황가의 직할영토라고 조작
『일본서기』는 계속해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왕이 신라가 항복했다는 것을 듣고는 스스로 군영으로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일본의 번국蕃國으로서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래서 신공황후는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을 정하였는데 이것을 삼한三韓이라고 하였다. 내관가둔창은 천황가의 직할 영토라는 뜻이다. 『일본서기』는 삼한이 천황가의 영토라는 엄청난 역사왜곡을 자행한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실린 신라정벌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백제의 가야원정을 일본의 원정으로 왜곡
그러나 신공황후 49년조에는 목라근자木羅斤資(모쿠라콘시)의 가야7국 평정 기사가 실려 있다. 아라타와케(荒田別), 카가와케(鹿我別) 등이 이끄는 일본 군대가 목라근자의 증원군과 함께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창녕), 남가야(김해), 녹국㖨國(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 7국을 평정하였다는 기록이다.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강진)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제주)를 백제에게 주었다. 백제왕 초고(근초고왕)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들과 만나 김제에서 회맹會盟하였다. 회맹에서 백제왕은 이후 항상 서번西蕃을 칭하고 봄가을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했다는 기록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 기록을 사실로 보고 일본이 임나를 직접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간접 지배했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가 일본 장군이 아니라 백제 장군이었다는 점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장수라는 아라타와케와 카가와케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점 등으로 판단할 때 이 원정은 백제의 원정이었는데 이를 『일본서기』가 일본의 원정으로 왜곡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일본이 아니라 백제가 가야 7국을 평정한 후 가야에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를 파견하여 경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일본서기』는 목만치가 일본에 귀화한 것을 근거로 일본이 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4. 백제의 임나재건 노력을 일본의 것으로 둔갑
백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키노오히하노스쿠네’
“키노오히하노스쿠네紀生磐宿禰가 임나를 점거하고 고구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삼한의 왕 노릇을 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이라 칭했다. 임나의 좌로, 나기타갑배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爾林에서 죽였다. 대산성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다.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백제군대가 굶주려 고생하게 하였다. 백제왕이 크게 화가 나서 영군領軍 고이해와 내두內頭 막고해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키노오히하노스쿠네는 군대를 맞받아쳤는데 담력이 더욱 왕성하여 행하는 곳마다 모두 깨뜨렸다. 한 사람이 백명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뒤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임나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이 좌로, 나기타갑배 등 300명을 죽였다.” - 『일본서기』 겐조(顯宗) 천황기 3년조(487)이 기록은 야마토 조정이 파견한 키노오히하노스쿠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삼한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기록인데 내용을 살펴보면 백제에 대한 반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제가 임나를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임나에 살았던 백제의 백성들
“임나의 일본현읍日本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 중 도망해온 자와 호적이 끊어진 지 3, 4대가 되는 자를 찾아내어 백제에 옮겨 호적에 올리게 하였다.” -게이타이 천황기 2년조(508년)이 기록은 일본현읍이 아니라 ‘○○현읍’이었을 것이다. 일본이라는 명칭이 백제가 망하고(660) 7세기 후반(670)에야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나의 현읍에 백제의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은 임나의 경영을 백제가 했음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의 임나재건회의
백제 성왕(재위 523~554)은 가야를 포함한 사국사四國史에서 중요한 왕이다. 『일본서기』는 그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아마 백제의 유민들이 남긴 백제사서들에 기록이 상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고구려와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가야를 포함해 열국들 사이의 긴장사태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532년 신라가 금관가야를 쳐서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안라국, 탁순국 등 가야연맹의 여러 소국들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가야세력은 이 위급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 하나가 임나 재건을 위한 국제적 대책회의였다.『일본서기』 긴메이 천황기 원년(539)에 실려 있는 기사가 바로 임라재건회의에 대한 기록이다.
“성명왕(성왕-필자)이 말했다.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근초고왕-필자), 귀수왕(근구수왕-필자)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旱岐-가야소국들의 왕의 칭호)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고 지냈다. 자제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에 속임을 받고, 천황의 노여움을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중좌평下部中佐平 마로, 성방城方 갑배매노 등을 보내어 가라에 가서 임나일본부에 모여 서로 맹약을 맺게 하였다. 이후 다른 일에 얽매였으나 임나를 재건하는 것을 조석으로 잊은 적이 없다”.
이 뒤에도 백제성왕의 말이 실려 있는데 안라가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백제가 근초고왕 때부터 임라 지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에 의해 금관가야와 녹기탄(녹국), 탁순 등이 망하자 백제 성왕이 가야연맹의 여러 나라 지도자들을 모아서 대책회의를 연 것이다.
회의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열렸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임나일본부의 유지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백제가 임나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회의였다. 회의의 주도자도 임나일본부가 아닌 백제성왕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5. 임나를 합병한 신라에 대한 적개심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를 통해 임나 즉 가야를 직접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간접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사실과 거리가 먼 허구임을 보았다.
562년 신라에 의해 대가야가 망하고 임나는 신라에 합병되었다. 『일본서기』에는 야마토 조정이 대장군 키노오노마로스쿠네(紀男麻呂宿禰)를 파견하여 임나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고 하는데 실은 이는 백제가 임나를 구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펼친 것이다. 『일본서기』는 더 나아가 그 원정을 기록한 긴메이 천황기 23년조에 신라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든가, 또 대장군 사테히코를 보내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왕이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는 허구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는 부활하지 않았다. 긴메이 천황은 중병으로 죽는 자리에서 유언을 하였는데 황태자에게 ‘그대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사람들이 임나를 멸망시킨 신라와 그 동맹 고구려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이러한 사실왜곡으로 나타났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서기』는 임나에 있던 야마토 정권의 외교기구를 ‘내관가둔창’이라는 천황의 직할영토로 둔갑시키고 삼한의 지배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서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도 일본부에 대한 주석을 ‘어사지御事持’(미코토모치)로 달고 있는데 이는 왕의 사신使臣이라는 뜻이다. 또 일본이라는 국명 역시 임나일본부가 없어진 562년보다 100여년 뒤에 사용되기 시작한 국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가 얼마나 허구성을 띤 것인지 알 수 있다.
백제장군 목라근자와 그 아들 목만치(=목협만치)
백제장군 목라근자에게는 목만치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신라를 공격할 때 현지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일본서기』 응신應神천황기 25년조에는 『백제기』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목만치를 목라근자의 아들이라 하였다. 이 목만치는 또 『삼국사기』 개로왕蓋鹵王 조에도 나온다. 개로왕이 당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될 처지에 처하자 왕자(후일의 문주왕文周王)와 함께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협만치가 목만치를 가리킨다. 목도 성이고 협도 성으로서 목협만치는 복성複姓이었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 기록에 의하면 이 목만치는 부친의 세력을 이용하여 임나 일을 전담하였다. 백제와 임나에서 권세자 역할을 하던 그는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포악한 것을 보고 천황이 그를 불러들였다고 되어 있다.
백제가 왜를 끌어들인 이유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신묘년(391) 이래 왜가 매년 바다를 건너왔으며 백잔(백제)이 왜와 화통하여 친선을 맺어 왜인들이 신라 영토에 가득 들어왔고 (399) 또 404년에는 왜가 백제 군대와 함께 대방지역을 침략했다는 기록이 있다.비문에서 보이는 왜는 단순한 해적인 왜구倭寇가 아니라 당시의 일본정부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파병한 왜의 군대였다. 그런데 왜 백제는 왜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였을까? 백제는 고구려와 한 세대 전인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부터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원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신왕(재위 392~405)은 397년 야마토정권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태자 전지腆支를 인질로 일본에 보냈다. 백제는 왜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왜병이 들어왔는데 이들의 근거가 임나가라였다. 당시 백제는 임나가라를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왜군에게 제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 10년조에 의하면 고구려군은 임나가라까지 왜군을 추격하여 그 성을 함락하였다.
대마도의 삼가라 [그림 대마도]
『환단고기』에 실린 『태백일사』의 「고구려국본기」에 나오는 임나 기록에 따르면, 대마도는 임나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대마도가 부산에서 5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가야의 지배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대마도도 임나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또 하나 주목할 만한 기록은 ‘구주대마仇州對馬’가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이라고 한 기록이다. 여기서 구주대마는 오늘날의 대마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곳에 신라와 고구려, 백제에 속한 ‘삼가라三加羅’가 있다고 하면서 그 가라 이름을 좌호가라, 인위가라, 계지가라라고 하였다. 이는 가야가 대마도에 먼저 진출하고 삼국의 주민들이 그 뒤를 따라 이주하였음을 시사한다.
『환단고기』의 이러한 기록은 가야를 필두로 한반도의 삼국이 큐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로 진출하여 그 분국을 세웠다는 북한 역사학자 고故 김석형 선생의 삼한분국설과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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