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36. 위만조선의 역사와 왕검성 및 패수의 위치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19 |
한국고대사 자료들-36-1. 위만조선의 역사와 왕검성 및 패수는 어디인가?
- 한무제 원봉3년 여름 니계의 대신 참은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해 왔다. 그래도 왕검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우거의 대신 성기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관리를 공격해 왔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대신 로인의 아들 최에게 명해 백성을 달래게 하는 한편 성기를 주살했다. 그리하여 조선을 평정한 한나라는 그 땅에 4군을 설치하였다.
참은 훼청후에 봉하였고, 한음은 적저후에 봉하였으며, 왕겹은 평주후에 봉하였고, 장항은 기후에 봉하였다. 최는 그의 아비가 죽기로 공을 세웠다고 하여 온양후에 봉해졌다.
좌장군(순제)은 불려와서 공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여 계책에 어긋나게 했다는 죄를 받아 기시형(棄市刑: 시중에서 목을 잘리는 형)을 받았다. 누선장군(양복)은 역시 군사가 열구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신의 멋대로 공격하다가 많은 군사를 잃어 주살에 해당 되지만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 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己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훼淸候 陰爲荻苴候 唊爲平州候 長爲幾候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候 左將軍 徵至坐功相嫉 乖計 棄市 樓船將軍 亦坐兵至列口 當待左將軍 檀先縱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참고: 위만조선은 서기전 108년 한무제에게 망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기록했으나, 사마천은 사기에 사군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한사군의 설치 및 소멸과 추정 위치의 부정확함
위의 사기 조선열전은 사마천(B.C145~86)이 한 무제(B.C 141~87)의 명으로 기록한 중국 최초의 정사로 원문에 보이는 밑줄 친 글자는 사마천이 기록한 글자이고 집해(集解)는 약 560년 후 송나라때(420 - 479) 배인(裴駰)이 추가로 보충 설명한 내용이다. 사기를 쓴 사마천은 위만조선이 서기전 108년 한무제에게 망하자 한무제가 4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사기에는 한사군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사기(史記)』원문에 표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1909년 판본).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정벌하여 사군을 삼았다(以故遂定朝鮮 爲四郡).
[집해] (4군은)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이다."라 했다.
[集解] 眞番, 臨屯, 樂浪, 玄菟也.
***참고: 사마천(BC 145-86)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한 BC 108년 생존해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고만 하였을 뿐 명칭을 기재하지 않았다. 이후 약 560여 년이 지나 송나라 때 배인이 집해에서 4군은 [集解] 眞番, 臨屯, 樂浪, 玄菟也라고 기록하여 한사군의 소멸과 추정위치가 매우 부정확하게 되었다.
○위만이 건너고, 한무제 군사가 공격한 패수는 어데인가?
***참고: 위만이 패수(浿水)를 건너 옛날 진나라의 영토였다가 한나라 때 패수를 경계로 그 동쪽에 조선이 있지만, 비어있던 땅 상하장(上雲鄣 및 下雲鄣)에 머물었다고 했는데, 이 상하장(上下 雲鄣)은 한서지리지에 낙랑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위만이 건넌 패수(浿水)는 『수경(水經)』에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림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는 어디인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이 패수를 건너와서 위만에게 복속하고 위만이 그들의 왕이 되었다고 했다. 패수는 연(燕)나라나 제(齊)나라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XXX 이병도나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청천강이 결코 패수(浿水)가 될 수 없다. 어떻게 제(齊)나라 사람들이 청천강을 건너 망명했겠는가?
더구나 청천강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가 접했던 지역이 아니고, 중국인들은 알기도 어려운 조선에 있는 강의 이름이다. XXX들은 어찌 위만이 청천강을 건너와서 기자조선을 멸하고 왕이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XXX들의 궤변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연나라와 번한 조선의 국경은 갈석산이 있는 진황도시와 당산시에서 진장성이 시작되었으므로, 진장성 안쪽에 패수(浿水)가 있었다. 한(漢)이 진장성 안쪽의 땅도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으므로,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고 했는데, 이는 조하와 백하를 포함한 조백하(조백하)로 추정함이 마땅할 것이다.
***참고: 고대사 연구가 황순종씨의 『패수(浿水)᠂열수(列水)에 대한 고찰』 논문에 의하면 『사기』 조선열전에 “한나라가 일어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라고 한 사실과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고 한 패수(浿水)를 요동군과 낙랑군(지금의 북경과 천진)을 지나 발해로 들어간 강이며, 북경 지방을 흐르는 하북성 조백하(潮白河)가 패수라고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난하(灤河) 또는 대릉하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심백강도 패수는 조백하라고 하였다.
***참고: 한나라 초기 진장성 안쪽 땅을 너무 멀어서 포기하고 진장성 안쪽에 있는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리했다고 했으므로 요동고새는 진장성의 안쪽에 있는 성이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與記要)에 의하면 섭하가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도망친 새(塞)가 산해관의 서쪽 40리라고 하였다.
***참고: 진개는 서쪽의 조양(朝陽)에서 동쪽의 양평(襄平)에 이르는 성을 쌓아 동호(고조선)을 방어했다고 했는데,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後漢書 李賢이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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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 자료들-36-2. 위만조선의 역사와 왕검성 및 패수는 어디인가?
〇위만의 건넌 패수는 북경 북쪽 조백하, 수성현은 당산시, 왕험성은 진황도시 창려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점차 위만은 진번조선과 만이들을 복속시키고 예전의 연(燕)나라나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부하로 만들어 왕이 되었고, 왕검성(李가 말하기를 지명이라고 하였고,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을 도읍으로 하여 군사의 위엄으로 그 이웃의 작은 고을들을 공격하자 진번(眞番), 임둔(臨屯)등이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의 땅이 되었다.
(稍役屬 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 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在樂浪郡 浿水之東) 以兵威侵 降其方小邑 眞番臨屯來復屬 方數千理)
〖집해〗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 고을의 이름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는데, 응소가 주를 달기를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현의 동쪽에 있다.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凟縣 廣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儉城在樂浪君浿水之東).
***참고: 위만조선의 수도가 요동군 험독현에 설치되었다고 했는데,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험독현(險瀆縣) 조에는 당시 광령현(廣寜縣) 동남쪽의 바다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다(險瀆故城 在今廣寜縣東南.....濱海之地).
***참고: 응소의 집해에서 “창려가 험독현이다”라고 했고, 서광도 “험독이 조선왕의 도읍지이고, 낙랑군 패수(조백하)의 동쪽에 있었다”라고 했다. 대청일통지의 험독의 왕험성도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지역으로 비정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조선현 창려현 서남쪽 노룡현 동쪽 지역임을 나타낸다
조선현(朝鮮縣)
“한나라가 설치했는데 후한과 진나라는 그대로 했다.(괄지지)에 「고려 왕험성이고 즉 고 조선이다.⌟ 왕험성은 지금의 평양이다. 후위가 조선민을 옮겼다는 바로 그곳인데 조선현을 설치했다. 북제 때는 성으로 했는데 옛 성이 지금 직예 노룡현 동쪽에 있다.
(朝鮮縣 漢置. 後漢及晉因之. (括地志)『高麗王險城. 卽古朝鮮』王險城卽今平壤. 後魏徙朝鮮民於此. 置朝鮮縣. 北齊省. 故城在今直隸盧龍縣東)“
사고전서(四庫全書) 권18을 명통지(明通志)를 보면
”평주 노룡현에 갈석산이 있다(通典)고 하였고, 갈석산의 창려현 서남쪽 50리 떨어져 있고, 바다에서 30리 떨어져 있다(明通志)고 하였는데, 이는 진황도시 창려현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고, 평주 노룡현에 속한 지역임을 나타낸 것이다.
○결론
위만이 연나라에서 건너온 패수(浿水)는 북경 북쪽을 흐르는 조백하이며, XXX 이병도나 XXX를 추종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청천강이 결코 아니다. 패수를 건너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사람도 위만조선으로 피난, 망명하였으며, 조선현과 왕검성은 진황도시 창려현에서 서남쪽 50리 떨어져 있고, 역시 진황도시 노룡현의 동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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