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31. 수경14권 습여수, 고하, 포구수를 펌함(하)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16 |
한국고대사 자료들-31. 수경주(水經注) 14권의 습여수, 고하, 포구수를 펌했습니다.
[수경]
又南至雍奴縣北, 屈東入于海
(포구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옹노현(雍奴縣) 북쪽에 도달하여 굽이돌아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주]
鮑丘水自雍奴縣故城西北, 舊分笥溝水東出. 今笥溝水斷, 衆川東注, 混同一瀆,東逕其縣北. 又東與泃河, 合水出右北平無終縣 西山 白楊谷. 西北流逕平谷縣, 屈西南流獨樂水入焉. 水出北抱犢固, 南逕平谷縣故城東. 後漢建武元年, 光武遣十二將, 追大槍 五幡, 及平谷, 大破之于是縣也. 其水南流入于泃. 泃水又左合盤山水, 水出山上, 其山峻險, 人跡罕交. 去山三十許里, 望山上水, 可髙二十餘里, 素湍皓然, 頺波厯溪, 沿流而下, 自西北轉注于泃水. 泃水又東南逕平谷縣故城東南, 與洳河㑹. 水出北山, 山在傂奚縣故城東南. 東南流逕博陸故城北, 又屈逕其城東, 世謂之平陸城, 非也. 漢武帝璽書封大司馬霍光為侯國. 文穎曰..博大陸平, 取其嘉名而無其縣. 食邑北海 河東. 薛瓉曰..按漁陽有博陸城, 謂此也. 今城在且居山之陽 處 平陸之上, 帀帶川流, 面據四水, 文氏所謂無縣目嘉美名也. 洳水又東南流, 逕平谷縣故城西, 而東南流注于泃河.
포구수(鮑丘水)는 옹노현(雍奴縣) 옛 성의 서북쪽으로부터 옛날에는 나뉘어져 있었던 사구수(笥溝水)의 동쪽을 나온다. 지금 사구수(笥溝水)는 끊겼는데, 여러 하천들이 동쪽으로 물을 대고 하나로 섞여서 하나의 도랑(瀆)이 되어 동쪽으로 옹노현(其縣) 북쪽을 지난다.
또한 동쪽에서 구하(泃河)가 (포구수로) 합류한다. 구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서쪽에 있는 산의 백양곡(白楊谷)에서 나온다. (구하는) 서북쪽으로 흘러 어양군 평곡현(平谷縣)을 지나, 굽이돌아 서남쪽으로 흘러 독악수(獨樂水)가 (구하로) 들어간다. 독악수(水)는 북포독고(北抱犢固)에서 나오는데, 남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난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원년 광무(光武)가 12 장군을 보내 대창(大槍)과 오번(五幡)을 쫓았는데 평곡에 이르러 크게 그들을 파한 곳이 이 縣이다. 독악수(其水)는 남족으로 흘러 구하(泃河)로 들어간다.
구수(泃水)는 또한 왼쪽에서 반산수(盤山水)와 합류하는데 반산수(水)는 산 위에서 나온다. 그 산은 험준하여 인적이 드물다(罕交). 산에서 30리 정도 가면 망산(望山) 위에 물이 있는데 높이가 가히 20여리 이다. 흰 여울이 일어 물결이 떨어져 시내(溪)를 지나 그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서북쪽으로부터 돌아서 구수(泃水)로 들어간다.
구수(泃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 옛 성의 동남쪽을 지나서 여하(洳河)와 합류한다. 여하(水)는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북산은 (어양군) 치해현(傂奚縣) 옛 성 동남쪽에 있다. 여하는 동남쪽으로 흘러 박륙(博陸) 옛 성의 북쪽을 지나고, 굽이돌아 박륙의 성 동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평륙성(平陸城)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한(漢) 무제(武帝)가 새서(璽書)를 내려 대사마(大司馬) 곽광(霍光)을 후국(侯國)에 봉하였다.
문영(文穎)은 말하기를 ‘넓고 큰 육지가 평평하니 그 아름다움을 취하여 이름하였으므로 그러한 현의 이름은 없다. 북해(北海)와 하동(河東)을 식읍으로 하였다’고 하였다. 설찬(薛瓉)은 말하기를 ‘생각해보니, 어양(漁陽)에는 박륙성(博陸城)이 있는데 이것을 말함이다. 지금 성은 차거산(且居山)의 남쪽에 있는데 평평한 육지 위에 위치하여 하천들이 띠처럼 두루 돌아 흐르며 (차거산의) 면들이 4개의 물에 의지하였는데 문영이 말하는 그러한 현은 없고 아름다운 이름을 취한 것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여수(洳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서, 동남쪽으로 흘러 구하로 들어간다.
泃河又南逕紻城東, 而南合五百溝水, 水出七山北, 東逕平谷縣之紻城南, 東入于泃河. 泃河又東南, 逕臨泃城北, 屈而歴其城東, 側城南出. 竹書紀年, 梁恵成王十六年, 齊師及燕戰于泃水, 齊師遁, 即是水也. 泃水又南, 入鮑丘水.
구하(泃河)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앙성(紻城)의 동쪽을 지나서 남쪽으로 흘러 오백구수(五百溝水)와 합류한다. 오백구수(水)는 칠산(七山) 북쪽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의 앙성(紻城) 남쪽을 지난 후에 동쪽으로 흘러 구하(泃河)로 들어간다.
구하(泃河)는 또한 동남으로 흘러 림구성(臨泃城) 북쪽을 지나 굽이돌아 그 성의 동쪽을 지난 후 성 옆의 남쪽으로 나온다. 죽서기년에 말하기를 량혜성왕(梁恵成王) 16년, 제(齊)의 장수(師)가 연(燕)에게 가서 구수(泃水)에서 전쟁하였는데 제(齊)의 장수가 피하였다고 하였은 즉 이 물이다. 구수(泃水)는 또한 남으로 흘러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간다.
鮑丘水又東合泉州渠口故瀆, 上承滹沱水于泉州縣, 故以泉州為名. 北逕泉州縣東,又北, 逕雍奴縣東, 西去雍奴故城百二十里. 自滹沱北入, 其下厯水澤百八十里, 入鮑丘河, 謂之泉州口. 陳夀魏志曰..曹太祖以蹋頓擾邉, 將征之, 從泃口鑿渠, 逕雍奴泉州以通河海者也. 今無水.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천주거구(泉州渠口) 즉 옛날 도랑(瀆)과 동쪽으로 합류하는데, 호타수(滹沱水)를 천주현(泉州縣)에서 위에서 이어받기에(上承) 그래서 천주(泉州)를 강이름으로 하였다.
***참고: 전주현(泉州縣)은 천진시(天津市) 북쪽 지역이다. 포구수는 천진시 부근을 흐르는 강임을 알 수 있다.
(천주거구)는 북쪽으로 흘러 천주현(泉州縣) 동쪽을 지나며, 또한 북쪽으로 흘러 옹노현(雍奴縣) 동쪽을 지나는데, 옛 옹노성(雍奴城)이 서쪽으로 120리 떨어져 있다. (천주거구는) 호타하(滹沱河)로부터 북쪽으로 들어가는데 그 아래로 수택(水澤)을 지나 180리를 간 후에 포구하(鮑丘河)로 들어간다. 이것을 말하기를 천주구(泉州口)라고 한다. 진수(陳夀)의 삼국지 위지에서 말하기를 조태조(曹太祖)가 답돈(蹋頓)이 변방을 어지럽히므로 그를 정벌하러 갈때에 구하(泃河)의 구(口)로부터 도랑을 팠는데 옹노(雍奴)와 천주(泉州)를 지나 강과 바다를 통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그런 도랑은 없다.
鮑丘水又東, 庚水注之. 水出右北平徐無縣北塞中, 而南流, 厯徐無山, 得黒牛谷水, 又得沙谷水, 竝西出山, 東流注庚水. 昔田子泰避難居之, 衆至五千家. 《開山圗》曰..山出不灰之木, 生火之石. 按注云, 其木色黒, 似炭而無葉, 有石, 赤色如丹, 以二石相磨, 則火發, 以然無灰之木, 可以終身, 今則無之. 其水又逕徐無縣故城東, 王莽之北順亭也. 魏土地記曰..右北平城東北百一十里有徐無城. 其水又西南, 與周盧溪水合, 水出徐無山, 東南流, 注庚水. 庚水又西南流, 灅水注之.水出右北平俊靡縣, 王莽之俊麻也. 東南流, 世謂之車軬水. 又東南流, 與温泉水合. 水出北山温溪, 即温源也. 養疾者不能澡其炎漂, 以其過灼故也. 魏土地記曰..徐無城東有温湯, 即此也. 其水南流百步, 便伏流入于地下, 水盛則通注灅水. 又東南逕石門峽, 山髙嶄絶, 壁立洞開, 俗謂之石門口. 漢中平四年, 漁陽張純反, 殺右北平太守劉政, 遼東太守陽紘. 中平五年, 詔中郎將孟益率公孫瓉討純, 戰于石門, 大破之. 灅水又東南流, 謂之北黄水, 又屈而為南黄水, 又西南逕無終山, 即帛仲理所合神丹處也, 又于是山, 作金五千斤以救百姓. 山有陽翁伯玉田, 在縣西北, 有陽公壇社, 即陽公之故居也.《搜神記》曰..雍伯, 洛陽人, 至性篤孝, 父母終殁, 葬之于無終山. 山髙八十里, 而上無水, 雍伯置飲焉. 有人就飲, 與石一斗, 令種之, 玉生其田. 北平徐氏有女, 雍伯求之, 要以白璧一雙. 媒者致命, 伯至玉田, 求得五雙. 徐氏妻之, 遂即家焉. 《陽氏譜叙》言..翁伯是周景王之孫, 食采陽樊. 春秋之末, 爰宅無終, 因陽樊而易氏焉. 愛人博施, 天祚玉田. 其碑文云..居于縣北六十里翁同之山, 後潞徙于西山之下, 陽公又遷居焉, 而受玉田之賜. 情不好寳, 玉田自去, 今猶謂之為玉田陽. 干寳曰..于種石處, 四角作大石柱, 各一丈, 中央一頃之地, 名曰玉田, 至今相傳云..玉田之掲, 起于此矣, 而今不知所在, 同于《譜敘》自去文矣. 藍水注之, 水出北山, 東流屈而南, 逕無終縣故城東.故城, 無終子國也. 春秋襄公四年, 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 因魏絳納虎豹之皮, 請和諸戎. 是也, 故燕地矣. 秦始皇二十二年, 滅燕, 置右北平郡治此, 王莽之所謂北順也. 漢世, 李廣為郡, 出遇伏石, 謂虎也, 射之飲羽, 即此處矣. 魏土地記曰..右北平城西北百三十里, 有無終城. 其水又南入灅水, 灅水又西南, 入于庚水. 地理志曰..灅水出俊靡縣, 南至無終, 東入庚水. 庚水 世亦謂之為拓水也. 南逕燕山下, 懸巖之側, 有石鼓, 去地百餘丈, 望若數百石囷, 有石梁貫之, 鼓之東南, 有石援桴, 狀同擊勢, 耆舊言, 燕山石鼓鳴則土有兵. 庚水又南, 逕北平城西, 而南入鮑丘水, 謂之拓口.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경수(庚水)가 포구수(之)로 들어간다. 경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서무현(徐無縣) 북쪽 새(塞) 가운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서무산(徐無山)을 지나다가 흑우곡수(黒牛谷水)와 만나고 또한 사곡수(沙谷水)와도 만나는데 (이 두 개의 강은) 모두 서쪽으로 산을 나와(竝西出山) 동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 옛날 전자태(田子泰)가 난을 피하여 그곳에 살았었는데 같이 온 무리가 5000가구이다.
《개산도》에서 말하기를 ‘산에서는 재가 되지 않는 나무가 나오고 불을 내는 돌이 난다’고 하였다. (그 책의) 按注에서 말하기를 그 나무의 색은 검으며 숯과 비슷하고 잎이 없다고 하고, 돌이 있는데 색이 붉어 주사와 같고 두 개의 돌을 서로 갈면 불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以然無灰之木, 可以終身, 今則無之.
경수(其水)는 또한 우북평군 서무현(徐無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방의 북순정(北順亭)이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우북평성(右北平城) 동북쪽 110리에 서무성(徐無城)이 있다’고 하였다. 경수(其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주로계수(周盧溪水)와 합류하는데 주로계수(水)는 서무산(徐無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
경수(庚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류수(灅水)가 경수(之)로 들어간다. 류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준미현(俊靡縣)에서 나오는데 왕망이 준마(俊麻)로 고쳤다. (류수는)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세간에서는 거분수(車軬水)라고 한다
(류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온천수(温泉水)와 합류한다. 온천수(水)는 북산(北山) 온계(温溪)에서 나오는데 즉 온원(温源)이다. 養疾者不能澡其炎漂, 以其過灼故也.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서무성(徐無城) 동쪽에는 온탕(温湯)이 이다고 했는데 즉 이것(온원 온천수)이다.
온천수(其水)는 남쪽으로 100보를 흐르다가 물길을 아래로 바꾸어 지하로 흐르며 물이 많자져서 통하여 류수(灅水)로 들어간다. (류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석문(石門)의 골짜기(峽)를 지나는데, 산이 매우 높아 절벽같고, 절벽은 통로처럼 열려 있으니 세간에서 말하기를 석문구(石門口)라고 한다. 한(漢) 중평(中平) 4년에 어양(漁陽)의 장순(張純)이 배반하여 우북평 태수 류정(劉政)과 요동태수 양굉(陽紘)을 죽였다.
중평(中平) 5년에 중랑장(中郎將) 맹익(孟益)에게 공손찬(公孫瓉)을 거느리고 장순(純)을 토평하라고 조서를 내려 석문에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류수(灅水)는 또한 동남으로 흐르는데 북황수(北黄水)라고도 한다. (류수는) 또한 굽이돌아 남황수(南黄水)가 되어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우북평군 무종현의) 무종산(無終山)을 지나는데, 즉 백중리(帛仲理)가 신단(神丹)과 합한 곳이 있는데 곧 이 산이다.
(백중리는) 금 5천근으로 백성을 구했다. 무종산(山)에는 양옹백(陽翁伯)의 옥전(玉田)이 무종현(縣)의 서북쪽에 있고, 양공(陽公)의 단사(壇社) 즉 양공(陽公)이 옛날에 거하던 곳이 있다. 《수신기》에서 말하기를 ‘양옹백(雍伯)은 락양(洛陽) 사람으로 지극한 효성에 도달하여 부모가 죽으매 무종산(無終山)에 장사지냈다.
무종산(山)은 높이가 80리로 그 위로는 물이 없어 양옥백이 마실것을 설치하였다. 사람이 물을 마시러 가서 돌 1되로 파종하매 옥이 그 밭에서 생겨났다. 북평(北平)의 서씨(徐氏)에게 딸이 있었는데 양옥백이 그 딸을 구하니, (서씨는) 백벽(白璧) 1쌍을 요구하여 중매자를 보내었다. 양옥백이 옥전에 이르러 5쌍을 구하여 얻어서 서씨의 딸을 아내로 삼아 드디어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양씨보서》에 말하기를 ‘양옥백은 주(周) 경왕(景王)의 자손인데 양번(陽樊)을 식읍으로 삼았었는데 춘추시대 말기에 무종(無終)에서 살았다. 그래서 양번(陽樊)을 성씨로 삼았다. 사람을 사랑하기를 널리 베푸니 하늘이 옥전을 지어줬다’고 하였다.
그 비문에 말하기를 ‘(양옹백은) 무종현 북쪽 60리 옹동산(翁同之山)에 살았었는데 후에 서산(西山)의 아래로 이사하였고 양공(陽公)은 또한 옮겨 살았는데 옥전(玉田)을 부여받았다. 보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옥전이 스스로 (그에게) 갔기에 지금 오히려 그것을 이름하여 옥전양(玉田陽)이라 한다’고 하였다. 간보(干寳)가 말하기를 ‘돌을 파종한 곳에 4각형의 근 돌기둥을 세웠는데 각기 1장이고 (돌기둥) 중앙은 1경의 땅이며 이름하기를 옥전이라 하였다. 지금 전하기를 옥전(玉田)의 게(掲)라 하는데 여기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위치를 알 수 없는데 《양씨보서》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람수(藍水)가 류수(之)로 들어간다. 람수(水)는 북산(北山) 나와서 동으로 흘러 돌아 흐르다가 남쪽으로 흘러 무종현(無終縣) 옛 성을 지나는데, 옛 성은 무종자국(無終子國)이다. 춘추(春秋) 양공(襄公) 4년에 무종자국(無終子國)의 가부(嘉父)가 맹악(孟樂)을 진(晉)으로 보내어 위강(魏絳)을 매게로 하여 범과 표범의 가죽을 공납하게 함으로써 모든 융(戎)과 화친하게 하도록 했던 나라가 이것이며, 옛 연(燕)의 땅이다.
진(秦) 시황(始皇) 22년에 연(燕)을 멸하고 우북평군을 두어 그곳을 다스렸는데 왕망은 북순(北順)이라 고쳤다. 한(漢) 때에는 리광(李廣)으로 우북평군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우복석이 나는데 호(虎)라고 하며 그것을 쏘며 깃털을 바신다고 하는 바로 그곳이다(出遇伏石, 謂虎也, 射之飲羽, 即此處矣).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우북평성(右北平城) 서북쪽 130리에 무종성(無終城)이 있는데 그 강줄기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류수(灅水)로 들어가며, 류수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류수(灅水)는 우북평군 준미현(俊靡縣)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무종에 이르러 동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경수는 세간에서 척수(拓水)라고도 한다. (경수는?) 남쪽으로 흘러 연산(燕山) 아래를 지나는데, 매달려 있는 바위의 옆에 돌로된 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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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은 땅에서 100장(丈)정도의 높이에 있고 100개의 돌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이 보이며 돌을 들보로 뚫어 (매달아) 놓았다. 돌로된 북의 동남쪽에는 돌로 된 원부(援桴)가 있는데 모양이 격세(擊勢)와 같다. 노인들이 예부터 말하기를 연산(燕山)의 돌북이 울면 땅에 병사들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경수(庚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북평성(北平城) 서쪽을 지난 후에 또 남쪽으로 흘러 포구수로 들어가는데 이 곳을 척구(拓口)라 한다.
鮑丘水又東, 逕右北平郡故城南. 魏土地記曰..薊城東北三百里有右北平城.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옛 성 남쪽을 지난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계성(薊城) 동북쪽 300리에 우북평성(右北平城)이 있다고 한다.
鮑丘水又東, 巨梁水注之. 水出土垠縣北陳宫山, 西南流逕觀雞山, 謂之觀雞水.水東有觀雞寺, 寺内起大堂, 甚髙廣, 可容千僧. 下悉結石為之, 上加塗塈. 基内疎通, 枝經脈散. 基側室外, 四出爨火, 炎勢内流, 一堂盡温. 盖以此土寒嚴, 霜氣肅猛, 出家沙門, 率皆貧薄, 施主慮闕道業, 故崇斯構, 是以志道者多栖託焉. 其水又西南流, 右合區落水. 水出縣北山, 東南流入巨梁水. 巨梁水又南, 逕土垠縣故城西, 左㑹寒渡水. 水出縣東北, 西南流至縣, 右注梁河. 梁河又南, 澗于水注之. 水出東北山, 西南流, 逕土垠縣故城東, 西南流, 入巨梁水. 巨梁水又東南, 右合五里水, 水發北平城東北五里, 山故世以五里名溝. 一名田繼泉, 西流, 南屈逕北平城東, 東南流注巨梁河, 亂流入于鮑丘水. 自是水之南, 南極滹沱, 西至泉州 雍奴, 東極于海, 謂之雍奴藪. 其澤野有九十九淀, 枝流條分, 往往逕通, 非惟梁河, 鮑丘歸海者也.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거량수(巨梁水)가 포구수(之)로 들어간다. 거량수(水)는 우북평군 토은현(土垠縣) 북쪽 진궁산(陳宫山)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관계산(觀雞山)을 지나며 (이곳을 지나는 거량수를) 관계수(觀雞水)라고 한다. 관계수(水) 동쪽에는 관계사(觀雞寺)가 있는데 관계사 안에는 대당(大堂)이 솟아 있어 심히 높고 넓으며 가히 1000명의 중들이 살고 있다. (대당)의 아래는 모두 돌로 엮어 만들었고 위는 흙으로 벽을 만들었으며 대당의 바닦(基) 안에는 소통하게 하여 (소통하는) 가지(枝)가 서로 흩어져 있다. (대당의) 바닦(基) 옆의 실외에 사방으로 불을 때어 나가는데 불줄기가 안으로 흘러 모든 대당이 따뜻해진다. 盖以此土寒嚴, 霜氣肅猛, 出家沙門, 率皆貧薄, 施主慮闕道業, 故崇斯構, 是以志道者多栖託焉.
거량수(其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구락수(區落水)와 합류한다. 구락수(水)는 토은현(縣) 북산(北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거량수(巨梁水)로 들어간다. 거량수(巨梁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토은현(土垠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 왼쪽으로 한도수(寒渡水)와 모인다. 한도수(水)는 토은현(縣) 동북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토은현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량하(梁河)로 들어간다. 량하(梁河)는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간우수(澗于水)가 량하(之)로 들어간다. 량하(水)는 동북쪽 산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토은현(土垠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거량수(巨梁水)로 들어간다.
거량수(巨梁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오리수(五里水)와 합류한다. 오리수(水)는 북평성(北平城) 동북 50리에서 발하는데, 산이 옛날에 5리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며 또다른 이름은 전계천(田繼泉)이다. (오리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남쪽으로 돌아 북평성(北平城) 동쪽을 지나고, 동남쪽으로 흘러 거량하(巨梁河)로 들어가는데, 난류가 일어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간다.
이 물(포구수와 거량하가 합하여 지는 곳)의 남쪽으로부터 남쪽의 끝은 호타하(滹沱河)이고 서쪽으로는 천주(泉州)와 옹노(雍奴)에 이르며 동쪽 끝은 바다인데 이 곳을 옹노늪(雍奴藪)라고 한다. 옹노늪의 벌판은 99개의 얕은 물(淀)이 있고 작은 물줄기가 곁가지로 나뉘어 이따금 서로 합쳐 흐르기도 하는데 거량하(梁河)라고 하지는 않고 포구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非惟梁河, 鮑丘歸海者也).
***참고: 전주현(泉州縣)은 천진시(天津市) 북쪽 지역이다. 포구수는 천진시 부근을 흐르는 강임을 알 수 있다. 포구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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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 고대사자료119. 서기 200년 초기 평양보성리 고구려 벽화무덤은 낙랑이 평양에 없었음을 증명한다 | 이태수 | 2057 | 2023-03-31 |
204 | 고대사자료118. 동북공정으로 한강 이북땅이 모두 고대중국 땅으로 되었다 | 이태수 | 1866 | 2023-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