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34. 수경에 기록된 낙랑, 조선현, 안시현, 패수 등의 위치를 밝혀야 한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17 |
한국고대사 자료들-34-1. 수경에 나타난 낙랑, 조선현, 안시현, 패수등 위치를 밝혀야 한다.
수경주에 기록된 패수는 이병도가 말한 청천강이 아니다.
먼저 수경주(水經注) 권14-1 사이트를 소개한다.
http://egloos.zum.com/ragwangfal/v/1956108
https://blog.daum.net/elpaso57/8114019
『수경(水經)』 3세기 경에 쓰여진 책이며, 저자는 미상(未詳)이다. 이 책에 대하여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 활약한 북위(北魏)의 학자 역도원(郦道元, 472~527)이 『수경』에 자신의 견해를 자세하게 주석을 붙여서 쓴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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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수(濕水)와 습여수(濕餘水: 汕水), 열수(列水: 古河) 세 강이 합하여 흐르는 곳이 낙랑군 조선현이 있다고 하였다.
[水經]
<濕餘水>
又北屈, 東南至狐奴縣, 西入于沽河.
<습여수>는
또 북쪽으로 굽어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어양군 호노현(狐奴縣)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주(注)]
昔彭寵使狐奴令王梁, 南助光武起兵, 自是縣矣. 濕餘水于縣西南, 東入沽河. 故地理志曰, 濕餘水自軍都縣東, 至潞, 南入沽, 是也.
옛날 팽총(彭寵)이 호노령(狐奴令) 왕량(王梁)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광무제가 병사를 일으키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이 호노현에서 시작한 것이다. 습여수(濕餘水)는 호노현 서남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그래서 지리지에 말하기를 습여수(濕餘水)는 군도현(軍都縣) 동쪽으로부터 로하(潞河)에 이르러 남쪽으로 고하(沽河)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 올바른 것이다.
***참고: [사기] 조선전 집해集解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集解] 張晏曰 朝鮮有 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집해] 장안왈 조선유 습수열수산수, 삼수합위열수, 의낙랑조선취명어차야.
[索隱] 案 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색은] 안 조음조, 직교반. 선음선. 이유산수, 고명야. 산일음산.
[집해]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가 있고, 이 세 강물이 합하여 열수洌水가 된다. 낙랑樂浪·조선朝鮮이란 여기에서 취한 이름이라고 추정된다.」
[색은]에 조(朝)라는 소리는 조(潮)와 같고 直驕의 반절음이다. 또 선(鮮)은 선(仙)과 같은 소리이고, 산수(汕水)라는 옛 지명의 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汕은 다른 소리로 산(訕)과 같다.
***참고: 습수, 열수, 산수라는 강의 위치만 확인하면 이들의 강이 조선의 경내에 있는 강이라고 했으므로, 당시 중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번조선(위만조선)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또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인 낙랑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여기서 낙랑이란 조선과 별개의 지명이 아니며, 낙랑이 곧 조선이고 조선이 곧 낙랑이다.
그런데, 습수(濕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로 북경을 지나 천진으로 흘러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강으로 추정된다. 또 습수(濕水) 습여수(濕餘水)와 같은 강으로 습여수를 줄여서 부른 것이다. 습여수는,
[수경]
東流過軍都縣南, 又東流過薊縣北......又北屈, 東南至狐奴縣, 西入于沽河.
동쪽으로 흘러 군도현(軍都縣) 남쪽을 지나, 또한 동쪽으로 흘러 계현(薊縣) 북쪽을 지난다.....또 북쪽으로 굽어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어양군 호노현(狐奴縣)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참고: 습여수가 계현 북쪽을 지난다고 했는데, 게현(薊縣)은 1) 지금의 북경지역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2) 지금의 천진시 북쪽에 있었다고도 한다. 대조영이 왕위에 오른 곳도 계현이라고 환단고기는 기록하고 있다(안경전역 환단고기 667p).
전술한 [사기] 조선전 집해(集解)에서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 3강이 있는데, 이 세강이 합쳐져서 열수(洌水)가 되며, 낙랑 조선의 이름은 이 세강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集解] 張晏曰 朝鮮有 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라고 말한 것을 보면 습수와, 열수, 산수 3강이 합쳐져서 열수가 되므로 이들의 강은 동일한 강이다. 습여수가 천진(또든 북경)인 계현(薊縣)을 지나므로 이 강은 지금의 조백하(潮白河)로 추정함이 마땅할 것이다.
○『사기』에 기록된 위만이 건넌 패수(浿水)
『사기』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조선왕 위만(衛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 요동 밖의 순찰지역)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한나라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시황 진(秦)나라 영토였던 옛 비어 있는(秦故空地) 상하장(上下鄣: 낙랑군 雲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을 도읍으로 정했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 朝鮮蠻夷及故燕, 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참고: 연나라 전성기에 연나라가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는 것은 연나라의 진개(BC 311-279)가 진번조선을 공격하여 천여리를 점령하였는데, 그 땅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었고, 이곳은 모두 예전에 고조선의 땅이었다.
***참고: 위만은 BC 194년 번조선(番朝鮮)의 왕 기준(箕準)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운 사람이다. 사기에 조선왕 위만이라는 자(朝鮮王 衛滿者)라고 나오고, 위만이 천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었다고 했는데(魋結蠻夷服), 이는 위만이 본래 조선사람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개(BC 311-279)의 조선 침략과 위만의 왕위에 오름(BC 194년)은 진개가 죽은 후 85년 후이므로, 연나라가 빼앗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은 모두 연나라에 빼앗겼어도 조선인이 주로 살았던 땅이다. 그러므로 위만도 이 지역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 위만이 패수(浿水)를 건너 옛날 진나라의 영토였다가 한나라 때 패수를 경계로 그 동쪽에 조선이 있지만, 비어있던 땅 상하장(上雲鄣 및 下雲鄣)에 머물었다고 했는데, 이 상하장(上下 雲鄣)은 한서지리지에 낙랑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위만이 건넌 패수(浿水)는 『수경(水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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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 자료들-34-3. 수경주에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서 임패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림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는 어디인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이 패수를 건너와서 위만에게 복속하고 위만이 그들의 왕이 되었다고 했다. 패수는 연나라나 제나라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연나라와 제나라는 모두 진장성 안쪽에 있었던 나라가 아닌가? 이곳 사람들이 미쳤다고 XXX 이병도가 말하는 청천강까지 도망쳐와서 위만에게 귀속하겠는가?
XXX 이병도나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청천강이 결코 패수(浿水)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청천강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가 접했던 지역이 아니고, 중국인들은 알기도 어려운 조선에 있는 강의 이름이다. 어찌 위만이 청천강을 건너와서 기자조선을 멸하고 왕이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XXX들의 궤변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연나라와 번한 조선(番韓 朝鮮)의 국경은 갈석산이 있는 진황도시와 당산시에서 진장성이 시작되었으므로, 진장성 안쪽에 패수(浿水)가 있었다. 한(漢)이 진장성 안쪽의 땅도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으므로,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고 했는데, 이는 조하와 백하를 포함한 조백하(조백하)로 추정함이 마땅할 것이다.
***참고: 고대사 연구가 황순종씨의 『패수(浿水)᠂열수(列水)에 대한 고찰』 논문에 의하면 『사기』 조선열전에 “한나라가 일어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라고 한 사실과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고 한 패수(浿水)를 요동군과 낙랑군(지금의 북경과 천진)을 지나 발해로 들어간 강이며, 북경 지방을 흐르는 하북성 조백하(潮白河)가 패수라고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난하(灤河) 또는 대릉하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심백강도 패수는 조백하라고 하였다.
***참고: 한나라 초기 진장성 안쪽 땅을 너무 멀어서 포기하고 진장성 안쪽에 있는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리했다고 했으므로 요동고새는 진장성의 안쪽에 있는 성이며, 지금의 천진 북쪽에 있는 계현(薊城: 薊縣)으로 보고 있다. 또 이곳은 발해의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곳이다.(안경전역 환단고기 667p)
***참고: 진개는 서쪽의 조양(朝陽)에서 동쪽의 양평(襄平)에 이르는 성을 쌓아 동호(고조선)을 방어했다고 했는데,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後漢書 李賢이 註)
〇위만의 건넌 패수는 북경 북쪽 조백하, 수성현은 당산시, 왕험성은 진황도시 창려현으로 추정된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치자, 위만이 법령을 업신여기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머리에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나 패수를 건너(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 出塞渡浿水) 진나라의 옛땅이던 공지인 상하장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위만은 점차 진번조선의 만이들과 옛날 연나라 및 제나라 망명자들을 부하로 만들어 왕이 되었고,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집해〗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 고을의 이름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는데, 응소가 주를 달기를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현의 동쪽에 있다.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凟縣 廣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儉城在樂浪郡浿水之東).
위만조선의 수도가 요동군 험독현에 설치되었다고 했는데,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험독현(險瀆縣) 조에는 당시 광령현(廣寜縣) 동남쪽의 바다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다(險瀆故城 在今廣寜縣東南.....濱海之地).
***참고: 응소의 집해에서 “창려가 험독현이다”라고 했고, 서광도 “험독이 조선왕의 도읍지이고, 낙랑군 패수(조백하)의 동쪽에 있었다”라고 했다. 대청일통지의 험독의 왕험성도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지역으로 비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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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 자료들-34-4. 수경주에 기록된 조선현. 길삭신 기록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조선현 창려현 서남쪽 노룡현 동쪽 지역임을 나타낸다
조선현(朝鮮縣)
“한나라가 설치했는데 후한과 진나라는 그대로 했다.(괄지지)에 「고려 왕험성이고 즉 고 조선이다.⌟ 왕험성은 지금의 평양이다.
후위가 조선민을 옮겼다는 바로 그곳인데 조선현을 설치했다. 북제 때는 성으로 했는데 옛 성이 지금 직예 노룡현 동쪽에 있다.
(朝鮮縣 漢置. 後漢及晉因之. (括地志)『高麗王險城. 卽古朝鮮』王險城卽今平壤.
後魏徙朝鮮民於此. 置朝鮮縣. 北齊省. 故城在今直隸盧龍縣東)“
사고전서(四庫全書) 권18을 명통지(明通志)를 보면
”평주노룡현에 갈석산이 있다(通典)고 하였고, 갈석산의 창려현 서남쪽 50리 떨어져 있고, 바다에서 30리 떨어져 있다(明通志)고 하였는데, 이는 진황도시 창려현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고, 평주 노룡현에 속한 지역임을 나타낸 것이다.
○결론
위만이 연나라에서 건너온 패수(浿水)는 북경 북쪽을 흐르는 조백하이며, XXX 이병도나 XXX를 추종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청천강이 결코 아니다. 패수를 건너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사람도 위만조선으로 피난, 망명하였으며, 조선현과 왕검성은 진황도시 창려현에서 서남쪽 50리 떨어져 있고, 역시 진황도시 노룡현의 동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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