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18. 요령성지역 홍산문화는 고조선문화로 보아야 한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11 |
고대한국사 자료-⑱요령지역 홍산문화는 산융이나 예맥이 아닌 조선관련 문화라고 말해야 한다
〇신석기/청동기 요령지역 문화(홍산문화)와 주요 유적
문화명 | 기간 | 시대 | 지역 | 비고 |
신락문화 | BC 8000년 ~ BC 7000년 | 신석기시대 | 요령성 선양시(瀋陽市) 북부 지역 | 40여 채의 주거지, 석기와 도기, 옥 등 발굴 |
소서하문화 | BC 7000년 ~ BC 6500년 | 신석기시대 | 내몽골 츠펑시(赤峯市) 아오한기 지역 | 300여점의 토기, 뼈제품, 석기 발굴 |
흥륭와문화 | BC 6200년 ~ BC 5200년 | 신석기시대 | 내몽골 츠펑시(赤峯市) 아오한기 지역 | 빗살무늬 토기 발굴 |
부하문화 | BC 5200년 ~ BC 5000년 | 신석기시대 | 내몽골 츠펑시(赤峯市) 아오한기 부하 유역 | 150개 이상의 방과 짐승뼈로 점치던 복골(卜骨)발굴 |
조보구문화 | BC 5000년 ~ BC 4400년 | 신석기시대 | 내몽골 츠평시(赤峯市), 난하 계곡과 요서 북부 | 돌호미 등 마제석기와 도기출토 |
홍산문화 | BC 4500년 ~ BC 3000년 | 신석기시대 | 내몽골 츠평시(赤峯市), 요동, 요서 | 우하량에서 적석총, 여신묘, 대형제단 발굴 |
소하연문화 | BC 3000년 ~ BC 2000년 |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 내몽골 츠펑시(赤峯市) 아오한기 | 70여개소의 무덤과 38구의 인골 발굴 |
하가점하층문화 | BC 2000년 ~ BC 1500년 | 초기 청동기 | 내몽골 츠펑시(赤峯市) 아오한기 맹극하(孟克河)유역 | 비파형 동검이 다수(국내 소장량보다도 훨씬 많이?) 발견됨 |
하가점상층문화 | BC1200년∼ | 청동기시대 | 내몽골 동남부 昭烏達盟, 哲里木盟, 遼寧省 朝陽 및 요서(遼西)지방문화 | 1,2,3단계: 용두산층 3단계 |
***참고: 청동기시대 하가점 상층 문화 유적은 청동기유물만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대체로 제1단계 용두산(龍頭山)층 3단계(기원전 11세기∼BC 8세기)에는 무기류와 공구류 및 소형 장식물만이 공반하는 양상에서.....제5, 6단계 남산근(南山根), 손가구(孫家溝) 단계(기원전 6∼5세기)에는 하가점상층문화의 유물요소가 점차적으로 축소 변형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참고: 적봉지역은 중국 화하족(華夏族)과 관련이 없는 신시배달(神市倍達)과 고조선의 문명권이다. 특히 고조선은 BC 2333년에 해당하는 소하연문화 후기 및 하가점 하층 문화(BC 2000~1500), 하가점 상층 문화(BC 1200~500)와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하가점 하층 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적봉시 유적인 삼좌점(三座店) 석성(BC 2000년 경 축성)은 그 형식이 고구려의 축성 형식과 매우 유사하며 1. 평지성+산성 이중구조 2. 육합쌓기(축성시 돌 하나에 돌 6개가 맞물리게 지어 견고성을 높이는 방식) 3. 옹성의 전신인 '치'(평지성에서 15개, 산성에서 10개 발견) 4. 들여쌓기(지상 5~6m 정도는 사선으로 여러 겹(3겹 내외)을 쌓고 그 위로는 수직으로 쌓는 축성방식) 등 4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거대한 석성은 초기국가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참고: 고조선은 서기전 2333년, 즉 약 4천 300여년 전부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이 소하연문화(BC 3000년 ~ BC 2000년)의 중기부터 시작되어 하가점 하층문화(BC 2000년 ~ BC 1500년)와 하가점 상층문화(BC 1200년∼BC 500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BC 2000년 경 축조된 석성(石城)은 고조선 영역에 축조된 석성으로 보이며, 고대국가의 형성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 내몽골 적봉시(赤峯市) 맹극하(孟克河) 유역의 하가점 상층문화(BC 1200~BC 500)과 지역에서는 고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대다수(국내 소장량보다도 훨씬 많이) 발견되어 이 지역이 고조선과 분명히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본다.
〇중국의 고대국가와 우리나라의 고대국가 비교 및 홍산문화
중국 국명 | 연도 | 조선 국명 | 연도 |
요, 순(堯舜) | BC 2357-2208 | 단군조선(朝鮮) | BC 2333-315 |
하(夏) | BC 2205-17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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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殷=尙) | BC 1766-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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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 | BC 1122-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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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春秋時代) | BC 77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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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箕子朝鮮) | BC 323-194 |
전국시대(戰國時代) | BC 409-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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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 BC 22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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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西漢 | BC 202-AD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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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만조선(衛滿朝鮮) | BC 194-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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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高句麗) | BC 37-AD 668 |
〇홍산문화는 화하족(華夏族: 漢族)과 관련된 문명이 아니고 조선족(朝鮮族: 東夷族)과 관련된 문명이다.
위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홍산문화가 발흥된 적봉시(赤峯市)를 비롯하여 부근의 발해만 지역은 중국인이 황하문명을 이루었던 화하족(華夏族:漢族)과는 관련성이 극히 희박한 문명이며,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東夷族)의 문명권이며, 동이족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조선족(朝鮮族)이다. 중국인이 ‘동쪽의 오랑케(東夷)라고 지칭한 것은 조선족을 비하해서 말한 것이다.
***참고: 중국인들이 기록한 산융(산융: 산에사는 오랑케 또는 산도적)이나 예맥(濊貊: 더럽고 사나운 짐승)이란 표현은 중국인이 고조선을 심하게 비하한 표현이므로 이같은 이름을 버리고 중국에 접했던 이 지역은 조선(朝鮮)이나 번조선(番朝鮮) 또는 번한(番韓)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참고: 기자조선은 주 무왕(周武王: 1043년 경) 때 생존 인물이라는 기자(箕子)가 세운 조선이 아니라, 『환단고기』<번한세기(番韓世紀)>에 따르면 번한의 69대 수한(水韓)왕의 후계자로 수유사람 기후(箕詡)가 BC 323년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기자와는 700여 년의 차이가 있다.
〇하가점 하층문화 후기의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에 대한 인터넷 설명
요령남산근유적 [遼寧南山根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남산근 유적에서는 고조선의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다량 출토되어 고조선의 문명권임을 나타내고 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9101&cid=46619&categoryId=46619
<정의>
중국 요령성 영성현(寧城縣) 남산근촌(南山根村)에 있는 청동기시대 청동그릇·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된 돌덧널무덤. 석곽묘.
<개설>
노합하(老哈河)의 지류인 곤도하(坤都河) 상류의 남쪽산 아래에 있는 다섯 갈래의 구릉상에 있다. 1958년 이곳에 있는 2기의 무덤으로부터 사람뼈[人骨] 1구와 청동기 71점을 수습하였다. 1961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하였고, 1963년에도 청동기를 다수 포함한 돌덧널무덤[石槨墓] 1기를 발굴하였다.
<내용>
돌덧널무덤인 101호분은 타원형의 토광을 파고, 자갈돌로 벽을 쌓았다. 바닥은 작은 판석을 잇대어 깔았고 뚜껑돌[蓋石]에도 일부는 판석을 사용하였다. 바닥에 부식된 목질(木質)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나무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장법(葬法)은 단인장(單人葬)이다.
101호분에서는 모두500여 점에 이르는 청동유물을 출토하였다. 중원(中原)지역에서 사용한 예기(禮器)와 유사한 각종 청동그릇 11점과 함께 손칼·도끼·끌·화살촉·꺾창·투겁창·칼집·방패·투구 등의 공구와 무기들이 있었다.차마구로는 재갈·말방울·장식·고리·단추 등이 있었고,그밖에 거울 및 각종 장신구 등이 있었다.이와 함께 중원지역의 예기와는 양식이 전혀 다른 일상용 토기의 형태와 유사한 청동그릇도 다수 출토하였다.
102호분은 101호분보다 소형이고, 앙신직지장(仰身直肢葬)이며, 머리가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부장유물로는 청동손칼·끌·송곳·화살촉·말재갈·마구·거울 및 각종 장신구와 함께 돌도끼·뼈화살촉·구슬 등을 출토하였다.
남산근유적의 주요한 출토품인 고식(古式)의 비파형동검은 이곳을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표준유적으로 만들어 놓은 중요한 유물이다.이 유적의 연대는 유사한 모양의 다른 유적의 연대로 미루어보아 서주 만기(西周晩期)∼춘추 초기(春秋初期),즉 서기전9세기 중반∼8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특징>
남산근 유적은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이 깊다. 한국의 청동기시대 설정이나 문화를 언급할 때비파형동검은 어느 유물보다 중요한 유물이다.이 유물의 분포는 내몽고로부터 중국 동북지방,그리고 우리나라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여 송국리 등지에서 출토한 비파형동검의 조형(祖型)이 남산근에서 발견되었다. 또 남산근의 돌덧널무덤과 유사한 형식이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나아가서 요령지방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돌널무덤[石棺墓]도 한반도와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남산근유적을 통해 요령지방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 당시에 문화적 동질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요서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주민과 그 성격을중국학계에서는 동호(東胡)또는 산융(山戎)이라 보고,북한 학계와 일부 남한학계는 예맥(濊貊)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요서지방의 청동기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라 통칭하면서, 그 문화의 성격과 주민을 일괄적으로 해명하고자 함은 타당성이 희박하다.
즉 요서의 청동기문화는 노로아호산 이북의 남산근문화와 그 이남 대릉하유역의 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는 북방계, 십이대영자문화는 요동(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와 연계된 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참고: 남산근문화 시기는 우리나라 고조선의 후기에 속하는 문명이다. 당시의 고조선 중 번한(番韓: 番朝鮮)은 중국과 달리 요서지방과 난하부근, 적봉(赤峯)지역 일대에 걸쳐 있었으므로 고조선의 문명으로 말해야 한다.
***참고: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중국인들이 기록한 산융(산융: 산에사는 오랑케 또는 산도적)이나 예맥(濊貊: 더럽고 사나운 짐승)이란 표현은 중국인이 고조선을 심하게 비하한 표현이므로 이같은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나 번조선(番朝鮮) 또는 번한(番韓)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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