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14. 환단고기에 매륵단군은 고죽국과 연을 정벌했으며, 산융은 고조선을 비하한 말이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08 |
한국고대사 단편적 자료들⑭ 환단고기는 ‘매륵단군’이 고죽국과 함께 연을 정벌했다고 기록했으며, 산융은 고조선을 비하한 말이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〇『환단고기』에는 매륵단군이 고죽국과 함께 연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개』에는 “36세 단군인 매륵(買勒)단군 52년(BC 653년) 임금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국(須庾國: 箕子國) 군대와 더불어 연(燕)나라를 정벌하니 연나라가 제(齊)나라에 위급을 고했다. 제나라가 대거 고죽(孤竹)으로 처들어오다가 아군의 복병을 만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친을 구걸하고 물러갔다(戊辰五十二年 (買勒)帝 遣兵 與須臾兵 伐燕 燕人 告急於齊 齊人 大擧入孤竹 遇我伏兵 戰不利 乞和而去)(안경전역 환단고기 161p).”
***참고: 이 기록은 제나라와 연나라 등 주나라 제후국의 연합군이 산융(山戎), 영지(令支), 고죽(孤竹)에 대항해서 싸워 BC 644년에 승리했다는 기록과 대비되는 『환단고기』의 기록으로 주나라 제후국 연합군이 이긴 것이 아니라, 패한 후 화친을 하고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개』에는 “고조선의 21세 소태단군(BC 1337-BC 1285) 당시 은(殷)나라가 아니라, 조선의 후국(侯國)인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왕위를 사양하고 달아나 동해 쪽 물가에 살면서 스스로 밭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고 하여 고죽국이 고조선의 후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시대 기록은 주 무왕 시대보다 다소 앞서고 있다(안경전역 환단고기 145p).
“고조선 22세 색불루(索弗婁)단군은 재위 20년(BC 1266년)에 이르러 후국(侯國)인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해져서 고죽국의 왕과 함께 모든 도적(중국 세력)을 쫓아 내셨다.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 엄독홀에 머무르시니 그곳은 은(殷)나라의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안경전역 환단고기 145p).”
***참고: 환단고기에는 ‘소태단군’, 색불루단군‘ 및 매륵단군’ 기에 고죽국이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참고: 수유(須臾)는 기자(箕子)의 이름을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라고 말했는데, 수유국은 기자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보이고 있으며, 고죽국 역시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 환단고기는 기록하고 있다. 제나라 관자(管子)가 BC 664년 고죽을 죽였다는 것과 달리 이보다 10년 후인 BC 653년 고죽국에게 패한 후 화친하고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〇『환단고기』에 영지와 고죽은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이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21세 소태단군 시기(BC 12991년)에 은나라 왕 무정(22세)이 전쟁을 일으켜 고조선의 후국인 삭도(索度)와 영지(令支)를 침범했다가 우리(고조선)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안경전역 환단고기 143p)
또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초대 번한(番韓)왕이 된 치두남은 요수(遼水: 난하) 주위에 12성을 쌓았는데(BC 2301), 그 중에는 영지(令支)와 험독, 개평, 대방, 백제, 탕지, 용도, 거용, 한성, 장령, 갈산, 여성 등이어서 영지(令支)는 번한에 속한 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안경전역 환단고기 463p)
〇중국 기록은 제환공이 고죽에서 회군했다고 하였고, 후에 고죽을 참했다고 기록으로 바뀌고 있다.
[史記(사기) 세가(世家)] 권32.
<제 환공(齊 桓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齊) 환공 23년(기원전 663년),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공격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급히 알려왔다. 제 환공이 연나라를 구하러 나서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孤竹)에 이르러 회군했다. 연 장공(莊公)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나라의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제 환공이 말했다.
“천자가 아닌 제후끼리는 국경을 벗어나 전송할 수 없으니, 내가 연나라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소.”
이에 연나라의 군주가 밟은 땅에 도랑을 파서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떼어주고, 연 장공에게 소공(召公)의 정치를 다시 가다듬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처럼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치라고 명했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를 따랐다.
(齊桓公 二十三年 山戎伐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 燕莊公遂送桓公入齊境 桓公曰 「非天子 諸侯相送不出境 吾不可以無禮於燕」
於是分溝割燕君所至與燕 命燕君復修召公之政 納貢于周 如成康之時 諸侯聞之 皆從齊)”
***참고: 위의 제 환공에 관한 기록은 제환공이 BC 644년 산융과 싸운 후 고죽국에 이르러 회군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관자(管子)』에는
「대광편(大匡篇)」에 ”
이에 제환공은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하효의 산에서 고죽을 참하고 산융과 닿았다(桓公乃北伐令支 下효之山 斬孤竹 遇山戎)“이라고 하였고,
「소광편(小匡篇)」에는
”북쪽으로 산융을 정벌하였고, 영지를 제압하였으며, 고죽을 참하고 이로써 구이(九夷)들에게 알렸다. 제환공이 말하기를 ‘북으로 고죽과 산융, 예맥, 구진하에 이르렀다(北伐山戎 制令支 斬孤竹 而九夷始聽 桓公曰 北至於孤竹 山戎 濊貊 拘秦夏)
***참고: 『관자』의 대광편(大匡篇)에는 고죽을 참하고 산융과 맞닿았다고 하여 제환공의 기록과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아무튼 산융과 맞닿았다(遇山戎)라고 하여 산융을 정복하지는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〇산융(山戎:산의 오랑케)는 중국인이 두려워한 고조선을 지칭한 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환단고기』에는 매륵(買勒)단군 52년(BC 653년) 조선이 연나라를 공격해서 물리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기록은 제환공이 산융(山戎)과 싸웠고(BC 644년) 고죽국에서 물러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산융(山戎)은 고조선을 비하해서 말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가 북한(北韓: 朝鮮)을 ‘북쪽의 허수아비(北傀儡)’라고 비하해서 칭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주나라 당시의 중국인들은 조선의 세력을 두려워하고 또 비하해서 표현하기 위해 ‘산에 사는 오랑케(山戎)’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공자(孔子)까지도 조선(朝鮮)을 오랑케로 비하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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