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수탈收奪과 민족정신 말살抹殺
[사진으로보는역사]
지난 임진란에 일본 사람이 조선에 와서 성공치 못하여 세 가지 한이 맺혀 삼한당(三恨堂)이 있다 하나니 먼저 도성(都城)에 들지 못하였음이 일한(一恨)이요 인명을 많이 죽였음이 이한(二恨)이요 수종(水種)을 가르쳤음이 삼한(三恨)이라. 그러므로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먼저 도성에 들게 됨에 일한이 풀리고 인명을 많이 죽이지 않게 됨에 이한이 풀리고 3년 가뭄으로 백지(白地) 강산에 백성들이 추수하지 못하게 됨에 삼한이 풀리리라. (증산도 道典 5:286)
토지와 쌀 수탈
일본은 191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 식량조달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공출供出해 갔다. 한국에서 1932~36년의 평균 쌀 생산량은 1,700만 석이었는데 그 기간 일본으로 가져간 것은 그 절반이 넘는 876만 석이었다. 그 결과 한국인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1920년의 약 7두에서 4두 정도로 줄어들었다. 전쟁기에 우리나라 농민들은 스스로 생산한 쌀을 일제 당국에 부락 단위로 강제로 팔고, 필요한 식량을 배급받아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쌀 배급 받기가 극히 어려웠고,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으로 연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은 또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벌여 한국에 대한 토지 침탈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소유권과 가격 그리고 지적을 확정한다는 명분으로 실시한 것인데, 까다로운 신고 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이 신고 절차를 밟지 않아 토지를 빼앗기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역둔토驛屯土, 궁장토宮庄土 등을 비롯한 국유지, 동중洞中이나 문중門中의 공유지는 신고주가 없어 총독부나 유력한 친일 인사들에게 넘어갔다. 1930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소유한 토지는 전 국토의 40%를 차지했다. 이 사업의 결과 소수의 지주들만이 토지소유권을 획득했으나 자작농自作農이나 자작 겸 소작농自作兼小作農 등 소농들은 대부분 몰락하여 소작농과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거나 화전민이 되었고 중국 동북부 등지로 떠나가는 등의 사례도 많았다.
일본 독점기업의 진출로 경제 종속
일본은 민족자본의 발전도 억압했다. 1910년 12월 조선총독부에서는 제령制令 제13호로 ‘회사령’을 발포했다. 회사의 설립 운영에 관한 법령인데, 이때 발포한 회사령은 자본주의 꽃인 회사, 즉 기업 설립과 활동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는 법령이었다. 회사령 1조는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령 제12조는 “제1조의 허가를 받지 않고 회사를 설립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0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부실하게 신고해서 그 허가를 받은 자도 역시 동일하다.”고 규정했다. 이는 민족자본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일본 기업, 일본 자본이 식민지를 지배하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1920년부터는 회사령을 철폐하고 회사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완화했다. 이로써 일본인 자본가의 투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1930년 현재 회사 자본의 62.4%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일 합자가 30.8% 그리고 한국인은 6.4%에 불과했다. 투자 대상은 주로 상업, 공업, 운수업에 치중했는데, 풍부한 공업 원료와 수력 자원 그리고 값싼 노동력이 일제의 공업화 정책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1930년대 일본의 주요 독점기업인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稜), 노구치(野口) 등이 들어와 공업과 광업의 여러 분야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수력발전은 노구치, 섬유·방직·술·제분 화약은 미쓰이, 맥주는 미쓰비시가 담당했다.
그 밖에 일본은 목화재배를 장려해 헐값으로 가져가고, 누에고치 생산을 강매해 통제가격인 헐값으로 가져갔으며, 광업 생산의 80% 이상을 독점했다. 그리고 연초 전매 제도(1921)와 교통·체신의 관영사업을 통해 총독부 수입을 늘리고, 총독부 재정의 80%에 해당하는 액수를 각종 세금을 통해 충당했다. 총독부는 크게 늘어난 수입을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를 지원하고 각종 탄압기관을 운영하는데 지출했다.
일본의 사서 수거와 역사 왜곡
일본은 무엇보다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부추기는 역사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대대적인 사서 수거 사업과 역사 왜곡 사업이다. 백당 문정창文定昌(1899~1980) 선생은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년사』(박문당, 1967)에서,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가 어떻게 오늘의 우리 한국인의 영혼에 식민사학으로 족쇄를 채웠는지 고발하고 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한 1910년부터 1911년 말까지 약 1년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의 주도로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며 군경을 동원,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국 각지에서 51종 20만 권의 사서를 강탈하거나 소각했다.”
조선총독부의 기록에 따르면 1916년부터 3년 동안 『조선사』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사적을 거두어들였으며, 1922년에는 8명이 122일간, 1923년에는 17명이 204일간, 1924년에는 12명이 176일간, 1925년에는 15명이 200일간 전국을 누비며 총 259명의 전문 요원들이 2,800일 동안 사료를 색출, 탈취해 갔다. 뿐만 아니라 1937년 말까지 장기간에 걸쳐 고문헌古文獻을 빠짐없이 수거하여 중요 사책史冊 4,950권과 문서 기록 등 453점을 빼앗아 갔다. 극동 문제를 연구한 미국인 나다니엘 페퍼(1890~1964) 기자도 일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한국사를 파괴하려 했는지 생생하게 전했다.
“일본인은 곧바로 한국의 국사란 국사는 전부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한국의 문화를 한 글자, 한 획이라도 기록한 문서는 철저히 수색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한국사 문서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자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역사 기록을 모조리 파괴하고 강탈하였으며 새로운 조선사를 쓰기 위해 1925년 그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주도적으로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1937년 마침내 조선총독부 역사관으로 왜곡한 『조선사』 35권을 완간했다. 당시 돈으로 1백만 엔이란 거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편찬한 『조선사』 35권을 보면, 지금의 초·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와 너무나 닮아서 분노하게 된다. 한반도의 북쪽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이 지배한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의 남쪽은 임나일본부가 지배한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일제는 실증사학, 근대 사학이라는 현란한 말로 마치 자신들의 식민사관이 객관적이고, 고칠 수 없는 불변의 사실인 것처럼 한국인의 영혼에 주입했다.
일반 주민들의 생활도 철저히 통제
일제는 전시체제를 빙자해 일반 주민 생활도 철저히 통제했다. 중일전쟁 이후 1938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총독부 보익 기관으로 설치했는데, 이 단체는 도道에서 말단 리里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지방 조직을 망라하고 그 밑에 10호 단위의 애국반愛國班을 두어 정기적으로 반상회班常會를 열어 총독부 시책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더해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여 완전한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우선 1938년부터 모든 주민들로 하여금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을 일본어로 외우게 했는데,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이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忠義를 다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써 천황이 거하는 궁성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또한 학교교육과 관공서에서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일본어만을 사용하게 했다. 1939년에는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했다. 일본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학교 입학이나 공문서 발급이 금지되고, 식량과 물자배급에서 제외되었으며 우편물도 전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득이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전국민의 약 14%는 끝까지 이를 거부하는 기개를 보여 주었다.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근원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미 188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지만, 침략전쟁 이후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및 동조동근同祖同根론으로 바꾸어, 두 나라 주민을 민족도 하나이고, 국민도 하나라는 일체감을 심어 주려고 했다. 이어 일제는 그들의 종교인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를 위해 서울의 남산신궁을 비롯하여 각 학교와 면마다 신사(전국 1,141개)를 세우고, 각 가정에서도 일본 시조신의 신주를 걸어 놓고, 예배하도록 강요했다.
징병·징용 그리고 정신대 등으로 큰 고통과 상처 안겨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데 광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을 전쟁터로 몰아넣어 일본을 위해 싸우게 했다. 처음에는 군대 보충을 위해 ‘지원병 제도’(1938)를 실시하다가 뒤에는 ‘징병제도’(1943)#로 바꾸어 패전할 때까지 약 20만 명의 청년을 강제로 징집했으며, ‘학도 지원병 제도’(1943)를 실시하여 약 4,5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 이 밖에도 일본은 1939년부터 모집 형식으로, 1940년부터 알선 형식으로, 1944년부터는 ‘징용’형식으로 일제 말기까지 1백만 명 이상의 한국인을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끌고 갔다. 이들은 탄광·비행장·군수공장·철도 등의 공사장에 군대식으로 편제되어 강제수용된 가운데 노예처럼 혹사당했는데, 공사가 끝난 뒤에는 군대기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무더기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한편 ‘근로동원’이라 하여 어린 국민학생과 중학생들을 군사시설 공사에 끌어들이고 여성들도 ‘근로 보국대’란 이름을 붙여 토목공사에 끌어들였으며, ‘애국부인회’라는 어용 단체를 만들어 충성을 강요했다.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는 악명 높은 ‘여자정신대근로령’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12세에서 40세까지의 배우자 없는 여성 20만 명을 강제 동원했다. 이들은 일본과 조선 내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 인원을 중국과 동남아 지역의 전쟁터로 보내 군인 상대의 위안부가 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의 침략 전쟁과 그로 인한 한국인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커서 그 후유증은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일제가 우리 역사와 문화를 파괴·왜곡한 식민사학이 아직 청산되지 못하고 학교 교육현장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어 우리의 올바른 역사의식 정립이나 공동체 의식 함양, 새 역사와 문화 창달에 가장 큰 병적 장애가 되고 있다.
참고자료
이덕일 지음, 『근대를 말하다』, 역사의 아침, 2012한영우 지음,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14
안경전 지음,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사)대한사랑, 〈대한사랑 2호〉(계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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