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성과 기도로 이룩한 불굴의 도방문화
[가가도장]
제주연동도장 허성철, 김선희 도생
허 도생이 제주를 떠나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삶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고교 시절에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란 구절에 감명을 받았던 허 도생은 부푼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해 가슴을 적실 만한 진리의 그 무엇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가 체험한 대학 생활은 주입식의 교육 방식과 취직에 혈안이 된 동료들의 애절한 모습뿐이었다. 그렇게 실망스런 마음을 안고 있던 허 도생은 우연히 어학연수차 영국에 갔다가 현지의 교육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고 의사소통에 능숙한 그들의 티칭teaching 방식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집안 대대로 교직과 연관이 깊은 직종에 종사해 온 탓에 상대적으로 교직에는 관심이 적었던 허 도생은 영국에서의 인상 깊은 체험을 통해 비로소 교직에 매력을 느끼며 적성을 찾은 느낌까지 갖게 되었다.
결국 허 도생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2003년도부터 영국 써리Surrey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그런데 이역만리 영국에서 혼자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배신을 당하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들지?’ ‘과연 인생의 의미는 뭘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지? 어떤 존재지?’ 등의 궁금증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고 한다.
첫 느낌에 제목이 참 생소하고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허 도생은 그날 이런 저런 책들을 찾아보다가 개벽실제상황 책이 수북이 쌓여 있는 코너에 들러 책을 살펴보았다.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고, 목차를 보면서 굉장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책을 구입해 단숨에 읽어 내려 갔다. 그런데 책을 훑어보고 나니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라 기존에 자신이 알던 세계관, 가치관이 한꺼번에 다 무너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했던 것은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셨는데 앞으로 한반도에서 인류 최후의 상씨름 전쟁이 벌어진다는 공사 내용이었다. 이 선천 상극 세상을 끝막는 천지전쟁이 이곳 우리나라에서 벌어진다는 내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고 믿기지도 않았다. 그때는 지식도 짧았고 무엇보다도 증산도 진리 자체를 잘 몰랐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상제님이 보신 천지공사를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증산도 홈페이지를 살펴보면서 여러 진리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상제님께서 종이에 태극 형상의 선을 그리시며 이것이 삼팔선이니라. 씨름판대는 조선의 삼팔선에 두고 세계 상씨름판을 붙이리라.”고 하는 도전 성구가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2006년 개벽 실제상황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와닿지 않았던 성구가 갑자기 허 도생의 전체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1900년대 초반에 보셨다는데 그때는 우리나라에 삼팔선도 없었고 남북 분단 상태도 아니어서 당연히 남조선 북조선이란 용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현듯 ‘정말 이 공사대로 한반도에 남북이 분단되고 이것이 인류 역사 최후의 상씨름이 전개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상제님께서 보신 천지공사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떻게 펼쳐져 왔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8년 2월 서울 남대문이 전소되는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허 도생은 상제님이 보신 천자부해상 공사 내용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7월에는 금강산 관광객 박OO 씨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사 논문 연구 주제와 직결되는 사건을 접한 허 도생은 앞으로 금강산 관광길이 끊기고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증산도와 상생방송 홈페이지를 드나들면서 증산도 진리를 연구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관광객 피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아, 정말로 상제님 천지공사처럼 남북관계가 대결 구도로 갈 수밖에 없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얀 도포를 입으신 어떤 분이 나타났는데 허 도생은 그분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명을 받고 그분을 따라갔는데 도착해 보니 집안에서 다니던 큰 절이 나왔다. 손님을 모시는 큰 사랑채 같은 곳에 갔는데 안에는 그 절 신도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스승님께서는 어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허 도생도 따라서 들어가는데 거기 모여 있던 신도들이 ‘저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데, 쟤는 어떻게 해서 저길 들어가려는 거지?’라고 수군거렸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절의 주지 스님이 있었는데, 스승님이 허 도생을 당신님 바로 옆에 세우시니 주지 스님이 일어나서 아주 공손하게 재배를 했다. 그러고 난 후 스승님께서 “됐다. 너는 나가 봐라~”고 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꿈은 허 도생에게 정말 놀라운 체험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스승님이라 불렀던 분이 누구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런데 불현듯 그분은 태상종도사님이나 종도사님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는 확신이 왔다. 그때는 증산도 진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북 상씨름의 공사 내용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에서 입도를 하라고 길을 보여 주시는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차에 증산도 홈페이지에 있는 태상종도사님 오디오 도훈을 듣게 되었는데, ‘이 대우주천체권이라는 것을 사람농사를 짓기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첫 마디 말씀을 듣자마자 전기에 감전된 듯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태상종도사님의 성음이 꿈에서 듣던 목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꿈에 오셨던 그분이 바로 태상종도사님이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동안을 우주 1년과 증산도 핵심 진리를 강의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인간농사 짓는 우주 1년’의 천지이법과 인류 구원을 위해 가을개벽을 앞두고 이 땅에 오신 ‘상제님의 강세’ 이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입도를 결심하고서 그 방법을 찾다가 다음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인도자인 이용진 도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도생은 친절한 상담과 더불어 그렇게도 읽고 싶었던 증산도 도전을 영국에 직접 우편으로 보내주는 등 큰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허 도생은 2006년 개벽실제상황 책을 처음 읽었지만 당시에는 증산도 진리도 잘 몰랐고 상제님께서 보신 천지공사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 영국에서 유학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상제님께서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나님이시며 온 인류와 천지신명의 아버지 하나님이란 것을 확신하고, 드디어 2008년 12월 28일 서울동대문도장에서 입도를 하게 되었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선배를 따라서 대학원 시험을 함께 보러 갔다가 합격하여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집을 떠난 것이 이때가 처음이라 낯설고 적응하기가 버거웠는데, 새로운 화풍까지 공부하려니 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아침 7시에 일어나 등교하고 밤 10시가 되어 제일 마지막으로 귀가해 쉬었다가 다시 학교에 가는 생활을 계속할 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때때로 화판을 좁은 방까지 가지고 들어가 옆에 두고 그리다가 잠들곤 하는 일도 많았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살았을 정도로 강한 집중과 몰입으로 나날을 보낸 것이다. 김 도생은 “그림을 그리며 붓을 쓸 때는 물아일체를 느낄 정도로 나 자신을 잊은 채였고, 그리고 있는 그 시간이 단지 행복했고 알아 가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림에 대해 얼마나 큰 애착과 정서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 도생은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과정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태이다. 자신의 재능에 열정과 노력이 더해진 만큼 김 도생은 미술 분야에서 대상, 우수상, 초대작가상 등 상이라는 상은 거의 다 받았을 만큼 상복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제주교육대학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 도생의 부친은 경찰 공무원이셨고 조부는 교장 선생님을 하신 교육자이셨다. 그리고 증조부 또한 교육자이셨는데 어머니께 듣기로는 소를 잡아서 잔치를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그런 행사를 자주 하셨다고 한다. 증조부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기가 1만 개 정도가 들어올 정도로 대단한 규모의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데, 아마도 증조부께서 보천교나 선도를 신앙하신 게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을 한다고도 했다.
현재 김 도생의 친정도 불교 신앙을 하는 집안이다. 그래서 증산도를 신앙하기 전에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절에 다녔었고, 대학 시절에는 신앙생활에 탄력이 붙어서 절에 있는 탑을 100바퀴 이상 돌고 108배를 매일하고 불경도 외우고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김 도생은 어린 시절 가끔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 외할머니께서 청수 그릇에 물을 떠 놓고 비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2014년 85세의 연세로 별세하신 후 친정어머니를 통해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옥황상제님께 기도를 하러 다니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선희 네가 믿는 옥황상제님을 외할머니도 믿으셨고 기도하러 다니셨다”고 했다.
김 도생 또한 맞선 장소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편하고 대화도 잘 통했으며 믿음직하고 느낌이 참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두 번째 만나면서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과 정신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며 너무 즐거웠고 차에서 들려주는 주문 소리에도 좋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서로가 처음부터 관심 분야가 비슷하고 대화가 잘 통해서 신기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 헤어짐의 소동이 있었던 날 허 도생은 잠을 자다가 새벽녘 꿈을 꾸었는데, 어떤 젊은 분이 허 도생이 있는 방으로 지금의 장인, 장모님을 아주 정중히 모시고 오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분은 젊은 나이에 작고하신 김 도생의 작은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정작 김 도생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있다가 자꾸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보았다. 허 도생은 구름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김 도생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지만 고개를 저으면서 거부를 했다. 그렇게 세 번을 거부하던 김 도생은 결국 다리를 건너 달려와 안기더니 미안하다고 울먹이며 사과를 했다. 이 모습을 끝으로 꿈이 끝났는데, 정말로 그로부터 이틀 만에 김 도생이 미안하다는 연락을 해 왔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련을 거쳐 단단한 인연을 만들려고 했는지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은 결별의 위기를 여러 번 겪었지만 잘 넘기곤 했다. 김 도생은 연애 과정에서 몇 번을 헤어지려 했으나 조상님의 뜻인지 여러 가지 상황이 다시 만나게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끝에 김 도생도 2009년 8월 말에 무사히 증산도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
허 도생은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부터 돌아가신 아버님과 조상님들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선친은 생전에 제주도 방선문 계곡과 관련된 책자도 만드셨고 연계된 방선문 계곡 축제 행사에도 깊이 관여하고 계셨다. 허 도생은 이 집을 처음 봤을 때부터 널찍한 거실과 집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집을 사기도 전에 태을주를 크게 틀어놓고 태을주 조화 기운을 돌리려고 노력했고 아버님과 조상님께 꼭 이곳에서 정착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허 도생과 김 도생은 살 집을 마련하고 천신단을 꾸미고 가정도장을 마련하려고 했던 이 모든 것들이 양가 조상님들이 원하시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집을 살 때도 김 도생이 아주 좋은 꿈을 꿨는데 나중에 방선문에 들어오면서 보니 이곳이 꿈에 나왔던 그곳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허 도생은 집을 구입하고 한두 달 정도 됐을 무렵 거실에서 낮잠을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지금의 천신단 모습을 보게 됐다. 황금색처럼 밝은 나무 재질에 신단 위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만들고, 특이하게도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말을 듣는 영적 체험도 했다. 허 도생은 영감으로 본 그대로 가정에 천신단을 만들었다. 천신단 제작은 도장의 김상진 도생이 도와주셨는데, 일주일 동안 정성 기도를 하면서 본인 일처럼 정성을 쏟아 잘 만들어 주신 것에 허 도생과 김 도생은 깊은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천신단을 제작하고 가정도장을 꾸미는 마지막 단계에서 허 도생이 천신단에 올릴 조상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사진을 옮겨 오는 날 새벽, 김 도생은 꿈속에서 남편과 자신의 양가 조상님들과 도장 도생님을 보았는데, 광산 김씨 조상님 중 큰아버지께서는 파란 제복을 입으시고 가슴에는 별 모양과 무지개색의 훈장 등을 여러 개 달고 계신 모습이었고, 한복을 입고 계신 허 도생의 할머니 같은 분께서는 “와, 여기 좋다 너무 좋다. 우리 이사 가자~~!”라고 외치며 이 부부의 집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허 도생은 무척 감격했고 아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천신단 제작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감사와 보은의 마음을 더욱 굳히고 보다 굳건한 신앙으로 가가도장을 만들어가게 되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한 3년 동안 꾸준히 기도와 정성을 올려 오는 과정에서, 이 부부 도생은 상제님과 태모님, 상원군님,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 양가 조상님들께서 항상 보살펴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큰 탈 없이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걸 깊이 느끼고 있다.
허 도생과 김 도생 부부는 일 년에 제사 4번, 추석과 설 명절 치성 2번 해서 6번은 제대로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올리는데, 그때마다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치성을 모실 때 음식과 막걸리 향기가 천신단 방에 그윽하게 맴돌 때면 ‘아, 오늘 치성은 잘 되겠구나!’라는 걸 미리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올해 3월까지 두 도생은 각자 4선조 천도식을 다 해 드렸다. 작년부터 진외가, 외외가 조상님들께서도 얼른 천도식을 올려 달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부부가 함께 기도하면서 순차적으로 천도식을 올리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들 부부는 가정 천신단에도 도장과 마찬가지로 4선조 조상님들 신위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천신단을 마련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치성을 모신 결과 조상님들께서 들어주시고 도와주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가정도장 신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취재진은 각자에게 가정도방이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 정리해 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허 도생에게 천신단과 가정도장은 제1의 하나님인 조상님들과 천지일월 4체 하나님께 자손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천지의 아들 딸로서 보은을 실천할 수 있는 출발점이면서 천하사 일꾼이 되기 위한 신앙의 성소이며, 천지일월 4체 하나님과 양가 조상님들께 제사와 치성을 올리는 신성한 기도 터와 같은 곳이라고 했다.
김 도생은 이러한 체험담도 들려주었다.
“제가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을 때 도장 치성에 참석하여 성전에 모셔져 있는 태상종도사님을 생각하며 ‘태상종도사님, 제가 너무 괴롭고 힘이 듭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태상종도사님께서는 답을 주십니다. 그때 도장에서 도전을 펴면 ‘나를 믿고 모든 근심 걱정을 풀어버려라’라는 성구가 접어놓은 듯이 펼쳐졌습니다. 다시 집에 와서도 또 물어보면 또 같은 성구를 보여주세요. 그러면 저는 정신을 다시 바짝 차리고 내려 주신 말씀을 의지하며 버티고 또 버텨냈습니다. 천지일월 사체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시며 꼭 도와주실 거라고 믿고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풀리지 않던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많이 부족한 저희를 늘 보살펴 주시고 도와주시는 은혜에 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늘 일심신앙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부부가 함께 상생방송 홍보지를 하루에 500장에서 700장 정도를 매일 꾸준히 지역을 정하여 집집마다 전달한 적이 있었고 주말에는 딸과 함께 셋이서 전단지를 돌리면서 활동과 더불어 가족끼리 좋은 추억을 남겼다. 지난 수능이 끝난 후 제주의 바람이 매우 차갑고 춥게 느껴진 어느 날 제주대학의 입학 설명회에 참석하고 나오는 학생들에게 상생방송 홍보지와 환단고기 소책자를 기증하였고 그 외에 개벽지, 생존의 비밀 책자, 증산도 신문 등의 기증 활동을 하였다.
허 도생은 2015년 9월부터 1년 3개월의 기간 동안 태전 본부에서 봉직을 한 적이 있다. 그 기간 동안 허 도생은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의 부족한 능력도 함양할 수 있었으며 봉직하고 있는 여러 도생님들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에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향후의 신앙 계획과 각오에 대해 물었다. 허 도생은 가족포교와 가가도장 문화의 확대, 그리고 9천년 신교 역사문화의 부활과 육태을랑 의통도체조직 완수라는 두 가지 계획을 언급했고, 김 도생은 신앙 자세와 도체 활동이라는 개인적 목표 외에도 친정 가족과 지역 주민 및 초립동을 대상으로 한 진리 포교에 폭넓은 관심을 피력했다.
허 도생은 가정도장 문화를 확대하고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장인, 장모님을 상제님 도문으로 인도하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두 분이 딸과 사위의 신앙을 존중해 주시면서도 개인적 선택이라는 이유로 신앙의 절실함을 느끼시지 못하고 계시므로, 부부가 함께 정성공부를 하면서 장인, 장모님을 상제님 도문으로 인도해 함께 신앙하면서 가가도장을 보다 견고히 성장시키고 싶다고 한다.
또한 종도사님께서 천부경의 천일, 지이, 인삼으로 포교하라고 말씀해 주신 바를 실천하기 위해 그 출발을 가정도장에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신화의 땅 제주에 서려 있는 삼신, 칠성문화, 신교문화를 해석하고 확대 재생산하여 지식인 계층 및 문화단체 등에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환단고기』와 『증산도의 진리』 책 공부가 절대적이므로, 부부가 함께 가정에서 9천년 신교 경당인문학 강좌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서 진리 메시지를 널리 전달할 계획이다.
김 도생은 친정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깊다. 부부 도생이 다소 시련을 만나 고생을 할 때 늘 함께 아파해 주시고 도움을 주신 친정 부모님이 딸자식 내외와 함께 신앙하여 함께 행복해지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보천교를 하시며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자손들을 찾아 상제님의 참동학 진리를 전하여 살려 내는 일과 제주도에 환단고기 역사 특강이 자리 잡히게 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또한 초립둥이들을 많이 살리고 싶다고 하는데, 김 도생은 10년에 걸쳐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에서 미술을 강의하면서 전통미술 이론 강의 시 상생방송 자료 등을 활용해 증산도 진리 및 신교 역사문화까지 설명을 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은 주로 강의 전달에만 그쳤으니, 앞으로는 단 한 명의 제자라도 수렴까지 완결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태상종도사님 말씀처럼 바르게 살며 천명을 완수하는 삶을 살고 싶고, 제주도 역사에 등장하는 김만덕 할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제주도민을 한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힘쓰겠으며, 태을주를 열심히 읽어 태을주 기운으로 육임을 짜고 태을핵랑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 도생은 다소 나약했던 예전과 달리 뼈 속까지 증산도인이 될 수 있게 돌봐 주신 천지일월 사체 하나님과 조상님께 깊이 감사를 드렸고, 부족한 자신을 도문으로 이끌어 주고 지금도 모든 것을 함께하여 주고 있는 남편 허 도생에게도 애정을 가득 실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김 도생은 예술적이고 순수한 심성을 가져서인지 영성이 밝은 편이다. 평소 일에 집중하며 열정을 불사를 때도 그렇고 남편인 허 도생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마음고생을 할 때나 입도 후 천도치성을 준비하고 그 기운에 감응하는 과정을 거칠 때도 늘 크고 작은 영적인 체험들이 따르곤 했다.
허 도생과 헤어지리라 마음을 먹고 허 도생의 논문과 책 등을 돌려주려고 했던 날은 차에서 한 발짝만 빨리 내밀었다면 달려오는 오토바이에 치어서 크게 다쳤을 가슴 철렁한 상황을 겪었는데, 이는 허 도생과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경고 내지 신호라는 강한 느낌이 왔다고 한다. 그러한 메시지는 같은 꿈이 반복되는 체험을 통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헤어지기를 단념하고 다시 만나기로 마음을 정한 김 도생은 편안하고 차분한 상태로 무심코 길 건너편을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김 도생의 집 앞 건너편에 있는 언덕에 타조만큼 아주 큰 학 두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듯이 한가롭게 앉은 채로 있었는데, 집안 마루에 앉아서 쉬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한참을 있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제주에서 그렇게 크고 신비로운 모습을 가진 학은 본 적이 없었기에 김 도생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뭔지 모를 영적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성명이 없는 위패가 보인 사연
김 도생이 증산도 신앙에 입문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허 도생과 만나서 가 보지 못한 제주도 각지를 여행하고 도장에 방문하여 105배례와 21일 정성 수행, 그리고 진리 공부를 하는 일정을 모두 거치면서 입문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정식 입도의 과정까지 완료하여 도생으로 함께하게 된 김 도생은 천도식을 준비해 올리는 과정에서 ‘진정 나는 왜 증산도를 신앙하게 되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자문을 한번 해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 도생의 꿈에 성명이 쓰여 지지 않은 위패와 제사 음식이 차려진 것이 보였다. 뭔가 신도의 감응이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자신의 광산 김씨 가문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천도식을 올려 드리려고 마음을 먹고 호적 관계 서류를 떼어 보니 과연 작은 할아버지의 성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들로 태어나셨지만 둘째 부인의 소생이셨고, 그 부인이 시기 질투가 심하여 집안을 어지럽히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둘째 부인의 제사도 못 지내게 하시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여 결국 둘째 부인은 제사밥도 못 얻어먹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깊은 한으로 남은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김 도생의 친정어머니가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제사를 아무도 모르게 지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드님이신 작은 할아버지가 김 도생을 도와 남편인 허 도생과 만나게 해 주셨고 증산도 도문에도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다. 김 도생은 이렇게 정리를 했다.
“저에게 닥친 여러 가지 방해와 고통스런 문제들 속에서도 남편인 허 도생과 헤어지지 못하게 하고 증산도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려 더욱 강력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돕고 계신 존재가 있다는 걸 늘 느껴온 게 사실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찾아내 제사를 지내 주시는 것을 둘째 할아버지도 감사해 하시고 늘 저를 보호하고 지켜 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늘 감사드리며 보은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4.3사건의 아픔에 감응한 천도식
천도식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제주도에는 4.3사건으로 불리는 가슴 아픈 역사가 존재한다.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이념 분쟁에 휩쓸려 제주도에서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한 이 사건은 당시 희생자들의 여러 사연들과 함께 그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안긴 사건이었다. 김 도생에게는 4.3사건 때 16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외외선조 유성진 할아버지가 계신다고 한다. 해마다 4.3기념일 때에는 제주도의 4.3공원에 가서 위령제를 지내는데 김 도생은 남편인 허 도생을 만나면서부터 함께 4.3행사에 참석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고 음식과 술을 올리며 인사를 드리고 온다고 한다.
김 도생은 한 5년 정도를 남편과 다니다가 2016년에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4.3 행사장에 갔다. 그날 행사장으로 가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길이 아닌 곳으로 막 올라가시는 게 아닌가. 이때 어머니께서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놀라서 따라가 보니 어머니께서 올라가 도착한 언덕 위에는 둥그렇게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데 몇 발자국 안 가서 바로 유성진 할아버지의 비석을 찾아냈다고 한다. 엄마와 김 도생은 깜짝 놀라며 “어머니를 기다리셨다가 길을 안내하신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해 간 음식과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기도를 드렸던 체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뵙고 집에 돌아온 김 도생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픈 마음이 들었으며, 자신이 유성진 할아버지의 천도식을 해 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천도치성 준비를 시작했다. 한여름 무더위가 찌는 듯 했으나 그냥 무더위 속에 도장에서 105배례, 200배례, 300배례, 400배례를 한 달 정도 하고 천도식을 올렸다. 김 도생은 배례와 주송이 너무 잘 되고 힘이 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천도식을 올리는 당일 새벽 김 도생은 하늘에서 세모나게 펄럭이는 청색 깃발들이 내려와 천도식이 있을 도장 건물에 꽂히는 꿈을 꾸었는데, 유성진 할아버지와 신장님들이 오신다는 환영의 표시로 느껴졌다고 한다.
이윽고 당일 천도식이 시작되자 김 도생은 할아버지가 오셔서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드시고 해원하셔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오른쪽에서 아주 밝게 빛이 반짝거리며 오셨다고 신호를 주셨다. 김 도생은 힘을 내서 더욱 정성껏 주문을 외우고 힘차게 도공하고 기도하며 젊은 시절 억울하게 돌아가신 원과 한을 반드시 푸시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상제님 태모님 태상종도사님 종도사님께 유성진 할아버지를 증산도에 받아 주시옵기를 기원했다.
허 도생은 자신의 가가도장에 대해 자평을 하면서 천신단과 성물, 진리 서적, 신앙 환경 등은 그런 대로 잘 갖춰져 있지만, 가가도장 운영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므로 많은 것을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가족 구성원은 각기 상태와 여건이 다른 경우가 많아 모든 것을 다 함께 똑같이 하면서 천하사 일꾼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정이라면서 조석 봉청수와 태을주 수행을 보다 철저히 할 필요가 있고 가족이 함께하는 21일 정성공부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도방에 들어오면 ‘아, 여기는 뭔가 다른 집이랑 다르구나, 참 좋구나, 뭔가 신성하구나!’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가가도장의 신앙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부부가 함께 노력해 온 것도 ‘제대로 된 가정도장 문화’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검증으로 이룬 다섯 가지의 도방 운영안
허 도생은 차후 가정도방 문화를 구축해 가기 위해 다섯 가지의 운영 방향을 제시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체험과 정성으로 검증을 거쳤거나 실천 중인 것이라서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그 운영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앙의 성소이자 증산도 진리와 신앙 문화의 기본 출발점이 되려면 조석 봉청수와 기도 문화가 강력히 정착되어야 한다.
가정이 도장 또는 도방이 되려면 증산도 신앙 문화가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구도와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천지일월 4체 하나님과 제1의 하나님인 조상님들께 청수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배례하면서 참회하고 감사드리는 생활을 보다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둘째로 신앙의 지성소인 가정에서부터 21일 정성기도 문화와 태을주 주송을 강화해서 태을주가 왜 천지조화 주문인지 보다 명확히 깨우칠 기회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오래 전부터 가가도장 문화를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러려면 태을주 주송을 더욱 철저히 해서 가정에 태을주의 신성한 조화기운이 늘 깃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로 한 달에 한 번 가정치성을 올림으로써 신앙하면서 겪는 많은 난관들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근본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허 도생은 천신단에 조상님들과 상제님과 태모님, 상원군님과, 태상종도사님, 도모님 등을 모시고 가정치성을 올리는 것은 지역도장에서 제물치성을 올리는 것과 똑같은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지역도장에서 천도식을 올리고 조상님 위패가 다 모셔져 있는 상태에서 다시 가정도장에 조상님들의 신위를 모시고 가정치성을 올려 드리면 천도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물치성을 하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큰 효과가 있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두 부부 도생이 각자의 4선조 조상님들 천도식을 다 올려 드릴 수 있었던 원동력도 가정에 천신단을 마련하고 꾸준히 가정치성을 올리면서 정성을 드린 결과라고 한다. 가정에서 치성을 올리다 보면 조상님들께서 자손에게 원하시는 것들과 자손이 조상님들께 부탁드리는 기도들이 서로 소통이 되어서 결국에는 해결되는 경험들을 많이 해 왔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9천년 신교 경당 문화를 가정에서부터 정착시켜 열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포교 대상자가 생기면 모든 교육은 지역 도장에서 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의 출발지인 가정에서부터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가정에도 가가도장의 신앙 역사, 가가도장 도사道史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경당 인문학 강좌를 할 때 사진도 찍고 강의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서 기록함으로써 가정 도사를 문서화하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다섯째로는 가가도장을 살릴 생 자 포교와 대상자 수렴의 직접적 장소로 잘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6.24 도전문화콘서트에 참석하기 전에 대상자를 집에 초대해서 사배심고와 가정 천신단 제작과 모셔져 있는 신위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준 적이 있는데, 대상자가 직접 가정 도방에 와서 천신단의 위엄과 경건함을 체험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밖에서 대화할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증산도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꼈던 체험도 덧붙였다.
이번 호 가가도장은 자손을 상제님 진리로 이끄는 과정을 통해 조상 선령이 원하는 도인의 삶과 역할을 이끌어 냈고, 그런 사람의 도반으로 만나 인생을 함께하도록 다리를 놓은 조상의 작용을 체험한 40대 부부 신앙인의 도방 스토리를 만나 보았다.
신도에서 조상 선령이 뜻을 세웠음에도 주변의 오해와 편견 등으로 굴곡을 겪었던 두 사람은 결국 조상의 영적 인도와 개입으로 결합하여 진리 속에서 뜻과 의지를 함께하는 동반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들은 깊은 정성과 바른 심법을 바탕으로 치성을 통해 조상 선령의 영적 메시지를 순수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여러 문제를 끌러내고 역동적인 도방 구축에도 성공하는 성과를 도출해 냈다. 특히 크고 작은 일을 천지일월 4체 하느님께 솔직히 고하고 진리 속에서 해결책을 구하는 이들의 신앙 태도는 진리 실현의 원리와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례라 할 수 있다.
매월 1회의 가정치성을 신앙생활의 기본 틀로 삼고 늘 감사와 보은의 자세를 견지하며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일을 풀어 나가는 인사의 해결 방식과 그렇게 진리 중심의 신앙생활 자체를 그대로 보여 주고 공감을 얻게 하는 포교의 방법 또한 잘 분석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허성철, 김선희 도생 부부와 그 부모의 순수함을 닮았을 허수영 예비도생 가족이 더욱 성숙한 정성과 의지로 굳건한 도방의 결실을 맺어 무한한 생명의 터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상제님과 태모님의 성령과 조상선령 및 천지성신의 가호 속에 성공적인 도방문화를 활짝 펼쳐 나가시기를 기원드린다.
증산도 신앙은 원시반본의 뿌리 진리를 생활문화로 승화시켜 조화로운 문명을 열어 나가는 새 시대의 무극대도이다. 진리의 근본 이념이 원시반본인 만큼 모든 신앙의 규준과 신앙 행위 또한 근본을 잊지 않고 뿌리와 조상의 기운과 융합되고 합치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바람직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이-신-사의 진리 법칙으로 보더라도 신도에서 조상 선령이 작용하여 자손의 인사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요 순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삼생의 인연과 조상의 음덕 여하에 따라 도문에 들어오는 일이 더디거나 무산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조상 선령의 뜻과 의도를 영성으로 느낄 수 있는 조금의 감성이라도 갖추고 있다면 스스로의 행실과 도문에서의 모든 인연 관계를 바라보는 눈과 발걸음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현실 삶에서 느끼는 아픔과 시련들은 상당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유발된다. 드러나 있는 인사 구조의 복잡성과 서로의 입장들이 달라서 균형을 잃거나 과불급의 경도가 생겨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 진리를 아는 사람은 현실에 무리와 충격을 주면서 해결을 꾀하는 것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신도의 메시지와 원인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소원하는 바를 이루고 난관을 헤쳐 나가려면 먼저 조상에게 빌고 간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모든 일에 교만하지 않고 제1의 하나님인 조상과 먼저 소통하고 진정한 해결책을 구하는 삶은 그래서 강력하고 위대한 것이며, 무척 숭고한 진리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조상에게 치성을 올리고 기도로써 소통의 다리를 놓는 자손의 삶에 불가능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제주연동도장 허성철(남, 45세, 종감), 김선희(여, 41세, 교무종감) 부부 도생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대의 섬 제주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양가 부모님의 소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외동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양가 모두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으나 증산도 신앙을 찾아 도문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와 편견 등의 요인으로 두 도생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얼마간의 시련을 거친 끝에 마침내 부부로 맺어진 사연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신앙의 본질을 깊이 자각하고 가가도장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치성과 기도 문화를 통해 주체적인 신앙문화를 창출해 가려는 의지를 보인 순간, 이 가정은 매우 역동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무엇이든 이뤄 내고야 말 것 같은 영적 기운으로 충만한 도방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는 이번 호 도방 스토리를 통해 도방의 중심을 형성하는 주인공들의 의식과 마음의 문제, 신앙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태도와 자세가 불러오는 도방 운영의 문제에 대해 하나씩 짚어 가며 그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지난 7월 첫 주 목요일 오후 취재진은 제주시 도남동에 위치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1층에 조성된 가정도장에 들어서서 허성철, 김선희 도생 및 외동딸 허수영(8세) 예비도생과 인사를 나누고 출입구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가장 안쪽 좌측 방에 독립된 공간으로 마련된 도방에서 천신단에 예를 올렸다. 도방은 세 명의 가족이 신앙문화를 이어가는 데에 충분한 공간이었으며 상당히 규모 있고 중량감이 느껴지는 천신단에서는 가족이 쏟아 온 정성과 담백한 기운이 어우러져 은은한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다.
상단 벽면에 위치한 신단 중앙에는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 태상종도사님 존영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에는 태을주 액자와 허성철 도생의 직선조, 외선조 조상선령신위가, 우측에는 김선희 도생의 직선조, 외선조 조상선령신위와 가택보호신위 및 관운장 액자가 모셔져 있다. 아래쪽에는 깔끔하게 조성된 청수 단이 품격을 발하는 청수 그릇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실로 이동해 마주 앉아서 이 가족이 걸어온 신앙의 형성 과정 및 정성과 간절함이 묻어나는 도방 중심의 신앙 스토리에 대해 차분히 들어 보았다.
물론 삼생의 인연과 조상의 음덕 여하에 따라 도문에 들어오는 일이 더디거나 무산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조상 선령의 뜻과 의도를 영성으로 느낄 수 있는 조금의 감성이라도 갖추고 있다면 스스로의 행실과 도문에서의 모든 인연 관계를 바라보는 눈과 발걸음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현실 삶에서 느끼는 아픔과 시련들은 상당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유발된다. 드러나 있는 인사 구조의 복잡성과 서로의 입장들이 달라서 균형을 잃거나 과불급의 경도가 생겨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 진리를 아는 사람은 현실에 무리와 충격을 주면서 해결을 꾀하는 것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신도의 메시지와 원인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소원하는 바를 이루고 난관을 헤쳐 나가려면 먼저 조상에게 빌고 간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모든 일에 교만하지 않고 제1의 하나님인 조상과 먼저 소통하고 진정한 해결책을 구하는 삶은 그래서 강력하고 위대한 것이며, 무척 숭고한 진리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조상에게 치성을 올리고 기도로써 소통의 다리를 놓는 자손의 삶에 불가능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제주연동도장 허성철(남, 45세, 종감), 김선희(여, 41세, 교무종감) 부부 도생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대의 섬 제주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양가 부모님의 소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외동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양가 모두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으나 증산도 신앙을 찾아 도문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와 편견 등의 요인으로 두 도생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얼마간의 시련을 거친 끝에 마침내 부부로 맺어진 사연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신앙의 본질을 깊이 자각하고 가가도장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치성과 기도 문화를 통해 주체적인 신앙문화를 창출해 가려는 의지를 보인 순간, 이 가정은 매우 역동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무엇이든 이뤄 내고야 말 것 같은 영적 기운으로 충만한 도방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는 이번 호 도방 스토리를 통해 도방의 중심을 형성하는 주인공들의 의식과 마음의 문제, 신앙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태도와 자세가 불러오는 도방 운영의 문제에 대해 하나씩 짚어 가며 그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지난 7월 첫 주 목요일 오후 취재진은 제주시 도남동에 위치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1층에 조성된 가정도장에 들어서서 허성철, 김선희 도생 및 외동딸 허수영(8세) 예비도생과 인사를 나누고 출입구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가장 안쪽 좌측 방에 독립된 공간으로 마련된 도방에서 천신단에 예를 올렸다. 도방은 세 명의 가족이 신앙문화를 이어가는 데에 충분한 공간이었으며 상당히 규모 있고 중량감이 느껴지는 천신단에서는 가족이 쏟아 온 정성과 담백한 기운이 어우러져 은은한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다.
상단 벽면에 위치한 신단 중앙에는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 태상종도사님 존영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에는 태을주 액자와 허성철 도생의 직선조, 외선조 조상선령신위가, 우측에는 김선희 도생의 직선조, 외선조 조상선령신위와 가택보호신위 및 관운장 액자가 모셔져 있다. 아래쪽에는 깔끔하게 조성된 청수 단이 품격을 발하는 청수 그릇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실로 이동해 마주 앉아서 이 가족이 걸어온 신앙의 형성 과정 및 정성과 간절함이 묻어나는 도방 중심의 신앙 스토리에 대해 차분히 들어 보았다.
영국에서 찾은 진리의 결론
유학으로 시작된 삶의 변화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는 온난한 기후 및 수려한 경치와 더불어 역사의 내면에 많은 사연과 흔적을 담고 있는 곳이다. 허성철 도생은 이곳 제주에서 출생하여 고교 시절까지 유소년기를 보냈다. 1남 2녀 중 막내였던 허 도생은 내성적이고 평범한 성격의 아이였다. 부친은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평생을 교직에 종사하셨고 사회 봉사 활동도 활발히 하신 분이셨다. 또 가족이 모두 불교 신앙을 했기 때문에 유년 시절 허 도생은 무난하고 안정적인 정서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허 도생이 제주를 떠나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삶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고교 시절에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란 구절에 감명을 받았던 허 도생은 부푼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해 가슴을 적실 만한 진리의 그 무엇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가 체험한 대학 생활은 주입식의 교육 방식과 취직에 혈안이 된 동료들의 애절한 모습뿐이었다. 그렇게 실망스런 마음을 안고 있던 허 도생은 우연히 어학연수차 영국에 갔다가 현지의 교육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고 의사소통에 능숙한 그들의 티칭teaching 방식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집안 대대로 교직과 연관이 깊은 직종에 종사해 온 탓에 상대적으로 교직에는 관심이 적었던 허 도생은 영국에서의 인상 깊은 체험을 통해 비로소 교직에 매력을 느끼며 적성을 찾은 느낌까지 갖게 되었다.
결국 허 도생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2003년도부터 영국 써리Surrey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그런데 이역만리 영국에서 혼자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배신을 당하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들지?’ ‘과연 인생의 의미는 뭘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지? 어떤 존재지?’ 등의 궁금증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고 한다.
개벽실제상황 책이 준 충격
그러던 중에 2005년 영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이듬해 휴식차 귀국을 한 허 도생은 고향 제주에서 진리와의 첫 번째 조우를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유학 생활을 통해 그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고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라는 의문에 대해 고민을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일환으로 제주시에 위치한 탐라도서에서 불교 관련 서적, 요가수행법,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는 일을 일과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유교, 불교, 기독교 관련 서적을 읽고 있었는데, 2006년 8월 탐라도서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개벽실제상황』 책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첫 느낌에 제목이 참 생소하고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허 도생은 그날 이런 저런 책들을 찾아보다가 개벽실제상황 책이 수북이 쌓여 있는 코너에 들러 책을 살펴보았다.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고, 목차를 보면서 굉장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책을 구입해 단숨에 읽어 내려 갔다. 그런데 책을 훑어보고 나니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라 기존에 자신이 알던 세계관, 가치관이 한꺼번에 다 무너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했던 것은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셨는데 앞으로 한반도에서 인류 최후의 상씨름 전쟁이 벌어진다는 공사 내용이었다. 이 선천 상극 세상을 끝막는 천지전쟁이 이곳 우리나라에서 벌어진다는 내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고 믿기지도 않았다. 그때는 지식도 짧았고 무엇보다도 증산도 진리 자체를 잘 몰랐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상제님이 보신 천지공사를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깨닫게 된 진리의 확신
2007년에 다시 영국으로 건너간 허 도생은 1월부터 써리대학교 관광경영학 박사 과정을 시작해 1년 동안은 아주 열심히 공부를 했다. 허 도생의 박사 논문 주제는 ‘금강산 관광 개발을 통한 남북의 화해 협력 방안’이었다. 그런데 2008년에 들어서면서 한반도 상황과 주변 정세가 박사 논문의 주제와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전개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개벽실제상황 책에서 읽었던 오선위기와 남북상씨름 전쟁이라는 내용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때부터 허 도생은 증산도와 상생방송의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리면서 증산도 진리에 대해서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그렇게 몇 달 동안 증산도 홈페이지를 살펴보면서 여러 진리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상제님께서 종이에 태극 형상의 선을 그리시며 이것이 삼팔선이니라. 씨름판대는 조선의 삼팔선에 두고 세계 상씨름판을 붙이리라.”고 하는 도전 성구가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2006년 개벽 실제상황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와닿지 않았던 성구가 갑자기 허 도생의 전체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1900년대 초반에 보셨다는데 그때는 우리나라에 삼팔선도 없었고 남북 분단 상태도 아니어서 당연히 남조선 북조선이란 용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현듯 ‘정말 이 공사대로 한반도에 남북이 분단되고 이것이 인류 역사 최후의 상씨름이 전개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상제님께서 보신 천지공사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떻게 펼쳐져 왔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8년 2월 서울 남대문이 전소되는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허 도생은 상제님이 보신 천자부해상 공사 내용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7월에는 금강산 관광객 박OO 씨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사 논문 연구 주제와 직결되는 사건을 접한 허 도생은 앞으로 금강산 관광길이 끊기고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증산도와 상생방송 홈페이지를 드나들면서 증산도 진리를 연구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관광객 피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아, 정말로 상제님 천지공사처럼 남북관계가 대결 구도로 갈 수밖에 없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태사부님께서 오신 영적 체험
허 도생은 영국 유학 생활 중인 2008년 3월부터 간간히 하숙집 방에 청수를 모시고 조상님께 기도를 올리면서 태을주 수행을 하고 있었다. 밖에 돌아다닐 때도 태을주와 운장주를 외우며 다녔을 만큼 그 당시 허 도생은 절박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 이제는 증산도를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으로 몇 달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하얀 도포를 입으신 어떤 분이 나타났는데 허 도생은 그분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명을 받고 그분을 따라갔는데 도착해 보니 집안에서 다니던 큰 절이 나왔다. 손님을 모시는 큰 사랑채 같은 곳에 갔는데 안에는 그 절 신도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스승님께서는 어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허 도생도 따라서 들어가는데 거기 모여 있던 신도들이 ‘저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데, 쟤는 어떻게 해서 저길 들어가려는 거지?’라고 수군거렸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절의 주지 스님이 있었는데, 스승님이 허 도생을 당신님 바로 옆에 세우시니 주지 스님이 일어나서 아주 공손하게 재배를 했다. 그러고 난 후 스승님께서 “됐다. 너는 나가 봐라~”고 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꿈은 허 도생에게 정말 놀라운 체험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스승님이라 불렀던 분이 누구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런데 불현듯 그분은 태상종도사님이나 종도사님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는 확신이 왔다. 그때는 증산도 진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북 상씨름의 공사 내용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에서 입도를 하라고 길을 보여 주시는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차에 증산도 홈페이지에 있는 태상종도사님 오디오 도훈을 듣게 되었는데, ‘이 대우주천체권이라는 것을 사람농사를 짓기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첫 마디 말씀을 듣자마자 전기에 감전된 듯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태상종도사님의 성음이 꿈에서 듣던 목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꿈에 오셨던 그분이 바로 태상종도사님이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을주와 운장주로 물리친 어두움
2008년 7월~8월경 허 도생은 증산도에 입도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 시기에 어느 날 영국 하숙집에서 잠을 자는데, 새벽에 문 쪽에서부터 이상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면서도 저건 안 좋고 어두운 기운이라는 걸 직감하는 그 순간 갑자기 온몸이 얼어붙으며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가위눌린 상태가 되고 말았다. 너무 놀라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태을주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주 힘들게 태을주를 몇 마디 외웠더니 신기하게도 어두운 기운이 약해지면서 몸이 조금 편해졌다. 그런데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로 문 밖에 그 기운이 남아 있었고 다시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장주가 흘러나왔다. 운장주를 시작하자마자 그 어둡고 무서운 기운이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순식간에 다 사라졌고 허 도생은 비로소 깊은 숙면을 할 수 있었다. 상제님 말씀대로 태을주와 운장주가 정말 강력하고 놀라운 주문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태상종도사님을 뵙고 태을주와 운장주의 권능을 확인한 두 가지 영적 체험은 허 도생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증산도에 입도해야겠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그리고 몇 달 동안을 우주 1년과 증산도 핵심 진리를 강의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인간농사 짓는 우주 1년’의 천지이법과 인류 구원을 위해 가을개벽을 앞두고 이 땅에 오신 ‘상제님의 강세’ 이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입도를 결심하고서 그 방법을 찾다가 다음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인도자인 이용진 도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도생은 친절한 상담과 더불어 그렇게도 읽고 싶었던 증산도 도전을 영국에 직접 우편으로 보내주는 등 큰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허 도생은 2006년 개벽실제상황 책을 처음 읽었지만 당시에는 증산도 진리도 잘 몰랐고 상제님께서 보신 천지공사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 영국에서 유학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상제님께서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나님이시며 온 인류와 천지신명의 아버지 하나님이란 것을 확신하고, 드디어 2008년 12월 28일 서울동대문도장에서 입도를 하게 되었다.
조상이 맺어 준 도반의 인연
미술에 재능을 보인 제주도 소녀
아내인 김선희 도생도 제주도에서 태어나 성장한 토박이이다. 김 도생은 외동딸로 출생하여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고 적성을 잘 살려 제주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이후 우연한 기회에 선배를 따라서 대학원 시험을 함께 보러 갔다가 합격하여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집을 떠난 것이 이때가 처음이라 낯설고 적응하기가 버거웠는데, 새로운 화풍까지 공부하려니 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아침 7시에 일어나 등교하고 밤 10시가 되어 제일 마지막으로 귀가해 쉬었다가 다시 학교에 가는 생활을 계속할 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때때로 화판을 좁은 방까지 가지고 들어가 옆에 두고 그리다가 잠들곤 하는 일도 많았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살았을 정도로 강한 집중과 몰입으로 나날을 보낸 것이다. 김 도생은 “그림을 그리며 붓을 쓸 때는 물아일체를 느낄 정도로 나 자신을 잊은 채였고, 그리고 있는 그 시간이 단지 행복했고 알아 가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림에 대해 얼마나 큰 애착과 정서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 도생은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과정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태이다. 자신의 재능에 열정과 노력이 더해진 만큼 김 도생은 미술 분야에서 대상, 우수상, 초대작가상 등 상이라는 상은 거의 다 받았을 만큼 상복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제주교육대학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 도생의 부친은 경찰 공무원이셨고 조부는 교장 선생님을 하신 교육자이셨다. 그리고 증조부 또한 교육자이셨는데 어머니께 듣기로는 소를 잡아서 잔치를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그런 행사를 자주 하셨다고 한다. 증조부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기가 1만 개 정도가 들어올 정도로 대단한 규모의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데, 아마도 증조부께서 보천교나 선도를 신앙하신 게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을 한다고도 했다.
현재 김 도생의 친정도 불교 신앙을 하는 집안이다. 그래서 증산도를 신앙하기 전에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절에 다녔었고, 대학 시절에는 신앙생활에 탄력이 붙어서 절에 있는 탑을 100바퀴 이상 돌고 108배를 매일하고 불경도 외우고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김 도생은 어린 시절 가끔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 외할머니께서 청수 그릇에 물을 떠 놓고 비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2014년 85세의 연세로 별세하신 후 친정어머니를 통해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옥황상제님께 기도를 하러 다니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선희 네가 믿는 옥황상제님을 외할머니도 믿으셨고 기도하러 다니셨다”고 했다.
맞선으로 만난 도반
허 도생에게는 아내인 김선희 도생이 진리를 전해 포교한 첫 번째 도제이다. 2009년 1월 초에 양가 부모님의 소개로 선을 보며 만난 두 사람은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서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서로 호감을 가지며 인연을 만들어 갔다. 허 도생은 처음 김 도생을 봤을 때 얼굴 주위로 환한 빛이 보였으며, 마치 조상님들이 아내를 자신에게 인도해 주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영국에 있을 때부터 청수를 모시면서 조상님에게 앞으로 어떤 여성을 만나든지 조상님께서 알아서 인도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었고, ‘이 자손이 너무 못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증산도에 입도하는 것도 알아서 잘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올렸기 때문이다.김 도생 또한 맞선 장소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편하고 대화도 잘 통했으며 믿음직하고 느낌이 참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두 번째 만나면서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과 정신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며 너무 즐거웠고 차에서 들려주는 주문 소리에도 좋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서로가 처음부터 관심 분야가 비슷하고 대화가 잘 통해서 신기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아내를 포교하면서 겪은 영적 체험
이후로 허 도생은 만날 때마다 태을주를 읽고 우주 1년도 얘기하며 김 도생에게 증산도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에는 척신 복마의 방해가 따랐다. 주변에서 허 도생의 신앙에 대해 오해와 편견을 갖고 부정적인 기운을 전하는 바람에 김 도생은 여러 차례 헤어질 마음을 먹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몇 차례 있기도 했다.언젠가 한 번 헤어짐의 소동이 있었던 날 허 도생은 잠을 자다가 새벽녘 꿈을 꾸었는데, 어떤 젊은 분이 허 도생이 있는 방으로 지금의 장인, 장모님을 아주 정중히 모시고 오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분은 젊은 나이에 작고하신 김 도생의 작은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정작 김 도생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있다가 자꾸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보았다. 허 도생은 구름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김 도생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지만 고개를 저으면서 거부를 했다. 그렇게 세 번을 거부하던 김 도생은 결국 다리를 건너 달려와 안기더니 미안하다고 울먹이며 사과를 했다. 이 모습을 끝으로 꿈이 끝났는데, 정말로 그로부터 이틀 만에 김 도생이 미안하다는 연락을 해 왔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련을 거쳐 단단한 인연을 만들려고 했는지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은 결별의 위기를 여러 번 겪었지만 잘 넘기곤 했다. 김 도생은 연애 과정에서 몇 번을 헤어지려 했으나 조상님의 뜻인지 여러 가지 상황이 다시 만나게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끝에 김 도생도 2009년 8월 말에 무사히 증산도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
반드시 이뤄 내는 도방 문화의 비밀
천신단을 만들기까지
허 도생과 김 도생은 가정도장 천신단을 규모 있게 잘 조성해 놓고 있다. 이들은 집을 구할 때부터 방 하나에는 천신단을 제작하고 집에서 봉청수와 기도, 태을주 수행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가족 단위의 가정도장에서 시작해서 도체 조직이 갖춰지면 나중에 도방 문화로 확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거실이 넓은 집을 구했고 지금의 방선문訪仙門 빌라에서 살게 되었다.허 도생은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부터 돌아가신 아버님과 조상님들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선친은 생전에 제주도 방선문 계곡과 관련된 책자도 만드셨고 연계된 방선문 계곡 축제 행사에도 깊이 관여하고 계셨다. 허 도생은 이 집을 처음 봤을 때부터 널찍한 거실과 집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집을 사기도 전에 태을주를 크게 틀어놓고 태을주 조화 기운을 돌리려고 노력했고 아버님과 조상님께 꼭 이곳에서 정착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허 도생과 김 도생은 살 집을 마련하고 천신단을 꾸미고 가정도장을 마련하려고 했던 이 모든 것들이 양가 조상님들이 원하시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집을 살 때도 김 도생이 아주 좋은 꿈을 꿨는데 나중에 방선문에 들어오면서 보니 이곳이 꿈에 나왔던 그곳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허 도생은 집을 구입하고 한두 달 정도 됐을 무렵 거실에서 낮잠을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지금의 천신단 모습을 보게 됐다. 황금색처럼 밝은 나무 재질에 신단 위에서 제사를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만들고, 특이하게도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말을 듣는 영적 체험도 했다. 허 도생은 영감으로 본 그대로 가정에 천신단을 만들었다. 천신단 제작은 도장의 김상진 도생이 도와주셨는데, 일주일 동안 정성 기도를 하면서 본인 일처럼 정성을 쏟아 잘 만들어 주신 것에 허 도생과 김 도생은 깊은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천신단을 제작하고 가정도장을 꾸미는 마지막 단계에서 허 도생이 천신단에 올릴 조상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사진을 옮겨 오는 날 새벽, 김 도생은 꿈속에서 남편과 자신의 양가 조상님들과 도장 도생님을 보았는데, 광산 김씨 조상님 중 큰아버지께서는 파란 제복을 입으시고 가슴에는 별 모양과 무지개색의 훈장 등을 여러 개 달고 계신 모습이었고, 한복을 입고 계신 허 도생의 할머니 같은 분께서는 “와, 여기 좋다 너무 좋다. 우리 이사 가자~~!”라고 외치며 이 부부의 집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허 도생은 무척 감격했고 아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천신단 제작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감사와 보은의 마음을 더욱 굳히고 보다 굳건한 신앙으로 가가도장을 만들어가게 되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가가도장과 신앙생활의 상관관계
이 부부가 가정에 천신단을 만들기 전에는 여러 여건상 집에서 청수를 제대로 모시기 힘든 환경이었다. 기존의 불교 신앙에서 증산도 신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오해와 그릇된 인식 등으로 다소 마음 고생이 있었지만 2013년 12월에 가정 도방을 조성하고 천신단을 만들면서부터는 모든 걸 극복하고 의연해지는 신앙의 진전을 이룰 수 있었고 한 달에 한 번씩 가정치성도 올리기 시작했다. 도장 성도님들을 모시고 가정치성을 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부가 둘이서 주과포를 올리고 축문을 읽으면서 가정의 문제 해결과 일심 신앙을 기원했고, 꼭 칠성도수 도체 조직을 짜서 사람 많이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서원하는 기도를 빼놓지 않았다.한 3년 동안 꾸준히 기도와 정성을 올려 오는 과정에서, 이 부부 도생은 상제님과 태모님, 상원군님,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 양가 조상님들께서 항상 보살펴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큰 탈 없이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걸 깊이 느끼고 있다.
보은과 신앙의 성소이자 출발점, 도방
허 도생의 기억에 의하면 그의 부친께서는 허 도생이 어릴 적부터 친가, 외가를 막론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에는 꼭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어릴 때는 조상님께 제사 올리는 보은의 의미도 잘 모르고 그저 아버님을 따라다녔었는데, 증산도 진리를 만나고서 과거를 회상해 보니 아버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제사뿐만 아니라 벌초까지 조상님께 감사하고 보은하는 방법을 모두 가르치고 전수해 주셨기 때문이다.허 도생과 김 도생 부부는 일 년에 제사 4번, 추석과 설 명절 치성 2번 해서 6번은 제대로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올리는데, 그때마다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치성을 모실 때 음식과 막걸리 향기가 천신단 방에 그윽하게 맴돌 때면 ‘아, 오늘 치성은 잘 되겠구나!’라는 걸 미리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올해 3월까지 두 도생은 각자 4선조 천도식을 다 해 드렸다. 작년부터 진외가, 외외가 조상님들께서도 얼른 천도식을 올려 달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부부가 함께 기도하면서 순차적으로 천도식을 올리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들 부부는 가정 천신단에도 도장과 마찬가지로 4선조 조상님들 신위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천신단을 마련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치성을 모신 결과 조상님들께서 들어주시고 도와주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가정도장 신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취재진은 각자에게 가정도방이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 정리해 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허 도생에게 천신단과 가정도장은 제1의 하나님인 조상님들과 천지일월 4체 하나님께 자손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천지의 아들 딸로서 보은을 실천할 수 있는 출발점이면서 천하사 일꾼이 되기 위한 신앙의 성소이며, 천지일월 4체 하나님과 양가 조상님들께 제사와 치성을 올리는 신성한 기도 터와 같은 곳이라고 했다.
기도와 감사, 그리고 성사의 자신감으로
김 도생은 가가도장과 도방이 자신을 지금까지 버티고 지탱하게 한 힘의 원천이자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 장소라고 했다. 여러 가지 삶의 시련이나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김 도생은 천신단이 있는 신단방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한참을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나온다고 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했을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어떠한 때는 생각이 정리되어 지혜가 생기기도 하고 문제가 좋은 쪽으로 해결되기도 하는 것을 늘 느낀다는 것이다. 상제님, 태모님께 가서 매달리고 하소연도 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심정을 그대로 전달하면 반드시 모든 근심과 걱정을 풀어버리라고 알려주고 도와주신다고 했다.김 도생은 이러한 체험담도 들려주었다.
“제가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을 때 도장 치성에 참석하여 성전에 모셔져 있는 태상종도사님을 생각하며 ‘태상종도사님, 제가 너무 괴롭고 힘이 듭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태상종도사님께서는 답을 주십니다. 그때 도장에서 도전을 펴면 ‘나를 믿고 모든 근심 걱정을 풀어버려라’라는 성구가 접어놓은 듯이 펼쳐졌습니다. 다시 집에 와서도 또 물어보면 또 같은 성구를 보여주세요. 그러면 저는 정신을 다시 바짝 차리고 내려 주신 말씀을 의지하며 버티고 또 버텨냈습니다. 천지일월 사체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시며 꼭 도와주실 거라고 믿고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풀리지 않던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많이 부족한 저희를 늘 보살펴 주시고 도와주시는 은혜에 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늘 일심신앙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삶의 모습을 신앙 문화로 전하다
생활신앙의 체험을 전하는 포교
개인사업 중인 허 도생은 다른 분들처럼 포교 활동에 집중해 많은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으나 생활 속의 신앙 체험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방식으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허 도생이 2003년에 영국 유학 중 만나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후배 한 분이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분은 대치성 시 교육문화회관에 인도된 적도 있는데, 결혼 생활이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 고민 상담을 해 주기도 하고, 허 도생 내외가 가정에서 청수를 모시고 조상님께 기도하고 치성을 모시면서 여러 어려움을 해결해 온 체험 사례를 전하며 생활 신앙의 모습 그대로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분도 지금은 집에서 청수 모시고 105배례를 하면서 조상님께 기도하고 참회하며 태을주와 운장주를 읽고 있다고 한다.소초동 홍보 활동과 본부 봉직
허 도생과 김 도생은 청소년과 대학생 포교에 관심이 많다. 상제님께서 보신 소초동 도수도 있지만 평소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태을주 읽는 소리와 기운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다. 올해 초에는 부부가 함께 제주대학교에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며칠 동안 상생방송 홍보활동과 한민족과 증산도, 개벽 다이제스트, 생존의 비밀 소책자를 서명을 받고 홍보를 했고, 제주도의 남쪽 서귀포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칠십리 축제에도 참가하여 진리 서적과 상생방송 홍보를 하기도 했다.작년 여름에는 부부가 함께 상생방송 홍보지를 하루에 500장에서 700장 정도를 매일 꾸준히 지역을 정하여 집집마다 전달한 적이 있었고 주말에는 딸과 함께 셋이서 전단지를 돌리면서 활동과 더불어 가족끼리 좋은 추억을 남겼다. 지난 수능이 끝난 후 제주의 바람이 매우 차갑고 춥게 느껴진 어느 날 제주대학의 입학 설명회에 참석하고 나오는 학생들에게 상생방송 홍보지와 환단고기 소책자를 기증하였고 그 외에 개벽지, 생존의 비밀 책자, 증산도 신문 등의 기증 활동을 하였다.
허 도생은 2015년 9월부터 1년 3개월의 기간 동안 태전 본부에서 봉직을 한 적이 있다. 그 기간 동안 허 도생은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의 부족한 능력도 함양할 수 있었으며 봉직하고 있는 여러 도생님들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에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살려 내는 도방 문화의 확산을 지향하며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향후의 신앙 계획과 각오에 대해 물었다. 허 도생은 가족포교와 가가도장 문화의 확대, 그리고 9천년 신교 역사문화의 부활과 육태을랑 의통도체조직 완수라는 두 가지 계획을 언급했고, 김 도생은 신앙 자세와 도체 활동이라는 개인적 목표 외에도 친정 가족과 지역 주민 및 초립동을 대상으로 한 진리 포교에 폭넓은 관심을 피력했다.
허 도생은 가정도장 문화를 확대하고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장인, 장모님을 상제님 도문으로 인도하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두 분이 딸과 사위의 신앙을 존중해 주시면서도 개인적 선택이라는 이유로 신앙의 절실함을 느끼시지 못하고 계시므로, 부부가 함께 정성공부를 하면서 장인, 장모님을 상제님 도문으로 인도해 함께 신앙하면서 가가도장을 보다 견고히 성장시키고 싶다고 한다.
또한 종도사님께서 천부경의 천일, 지이, 인삼으로 포교하라고 말씀해 주신 바를 실천하기 위해 그 출발을 가정도장에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신화의 땅 제주에 서려 있는 삼신, 칠성문화, 신교문화를 해석하고 확대 재생산하여 지식인 계층 및 문화단체 등에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환단고기』와 『증산도의 진리』 책 공부가 절대적이므로, 부부가 함께 가정에서 9천년 신교 경당인문학 강좌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서 진리 메시지를 널리 전달할 계획이다.
김 도생은 친정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깊다. 부부 도생이 다소 시련을 만나 고생을 할 때 늘 함께 아파해 주시고 도움을 주신 친정 부모님이 딸자식 내외와 함께 신앙하여 함께 행복해지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보천교를 하시며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자손들을 찾아 상제님의 참동학 진리를 전하여 살려 내는 일과 제주도에 환단고기 역사 특강이 자리 잡히게 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또한 초립둥이들을 많이 살리고 싶다고 하는데, 김 도생은 10년에 걸쳐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에서 미술을 강의하면서 전통미술 이론 강의 시 상생방송 자료 등을 활용해 증산도 진리 및 신교 역사문화까지 설명을 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은 주로 강의 전달에만 그쳤으니, 앞으로는 단 한 명의 제자라도 수렴까지 완결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태상종도사님 말씀처럼 바르게 살며 천명을 완수하는 삶을 살고 싶고, 제주도 역사에 등장하는 김만덕 할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제주도민을 한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힘쓰겠으며, 태을주를 열심히 읽어 태을주 기운으로 육임을 짜고 태을핵랑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 도생은 다소 나약했던 예전과 달리 뼈 속까지 증산도인이 될 수 있게 돌봐 주신 천지일월 사체 하나님과 조상님께 깊이 감사를 드렸고, 부족한 자신을 도문으로 이끌어 주고 지금도 모든 것을 함께하여 주고 있는 남편 허 도생에게도 애정을 가득 실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보은과 감응의 천도식 이야기
너희는 헤어져선 안 된다김 도생은 예술적이고 순수한 심성을 가져서인지 영성이 밝은 편이다. 평소 일에 집중하며 열정을 불사를 때도 그렇고 남편인 허 도생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마음고생을 할 때나 입도 후 천도치성을 준비하고 그 기운에 감응하는 과정을 거칠 때도 늘 크고 작은 영적인 체험들이 따르곤 했다.
허 도생과 헤어지리라 마음을 먹고 허 도생의 논문과 책 등을 돌려주려고 했던 날은 차에서 한 발짝만 빨리 내밀었다면 달려오는 오토바이에 치어서 크게 다쳤을 가슴 철렁한 상황을 겪었는데, 이는 허 도생과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경고 내지 신호라는 강한 느낌이 왔다고 한다. 그러한 메시지는 같은 꿈이 반복되는 체험을 통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헤어지기를 단념하고 다시 만나기로 마음을 정한 김 도생은 편안하고 차분한 상태로 무심코 길 건너편을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김 도생의 집 앞 건너편에 있는 언덕에 타조만큼 아주 큰 학 두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듯이 한가롭게 앉은 채로 있었는데, 집안 마루에 앉아서 쉬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한참을 있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제주에서 그렇게 크고 신비로운 모습을 가진 학은 본 적이 없었기에 김 도생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뭔지 모를 영적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성명이 없는 위패가 보인 사연
김 도생이 증산도 신앙에 입문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허 도생과 만나서 가 보지 못한 제주도 각지를 여행하고 도장에 방문하여 105배례와 21일 정성 수행, 그리고 진리 공부를 하는 일정을 모두 거치면서 입문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정식 입도의 과정까지 완료하여 도생으로 함께하게 된 김 도생은 천도식을 준비해 올리는 과정에서 ‘진정 나는 왜 증산도를 신앙하게 되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자문을 한번 해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 도생의 꿈에 성명이 쓰여 지지 않은 위패와 제사 음식이 차려진 것이 보였다. 뭔가 신도의 감응이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자신의 광산 김씨 가문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천도식을 올려 드리려고 마음을 먹고 호적 관계 서류를 떼어 보니 과연 작은 할아버지의 성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들로 태어나셨지만 둘째 부인의 소생이셨고, 그 부인이 시기 질투가 심하여 집안을 어지럽히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둘째 부인의 제사도 못 지내게 하시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여 결국 둘째 부인은 제사밥도 못 얻어먹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깊은 한으로 남은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김 도생의 친정어머니가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제사를 아무도 모르게 지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드님이신 작은 할아버지가 김 도생을 도와 남편인 허 도생과 만나게 해 주셨고 증산도 도문에도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다. 김 도생은 이렇게 정리를 했다.
“저에게 닥친 여러 가지 방해와 고통스런 문제들 속에서도 남편인 허 도생과 헤어지지 못하게 하고 증산도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려 더욱 강력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돕고 계신 존재가 있다는 걸 늘 느껴온 게 사실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찾아내 제사를 지내 주시는 것을 둘째 할아버지도 감사해 하시고 늘 저를 보호하고 지켜 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늘 감사드리며 보은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4.3사건의 아픔에 감응한 천도식
천도식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제주도에는 4.3사건으로 불리는 가슴 아픈 역사가 존재한다.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이념 분쟁에 휩쓸려 제주도에서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한 이 사건은 당시 희생자들의 여러 사연들과 함께 그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안긴 사건이었다. 김 도생에게는 4.3사건 때 16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외외선조 유성진 할아버지가 계신다고 한다. 해마다 4.3기념일 때에는 제주도의 4.3공원에 가서 위령제를 지내는데 김 도생은 남편인 허 도생을 만나면서부터 함께 4.3행사에 참석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고 음식과 술을 올리며 인사를 드리고 온다고 한다.
김 도생은 한 5년 정도를 남편과 다니다가 2016년에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4.3 행사장에 갔다. 그날 행사장으로 가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길이 아닌 곳으로 막 올라가시는 게 아닌가. 이때 어머니께서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놀라서 따라가 보니 어머니께서 올라가 도착한 언덕 위에는 둥그렇게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데 몇 발자국 안 가서 바로 유성진 할아버지의 비석을 찾아냈다고 한다. 엄마와 김 도생은 깜짝 놀라며 “어머니를 기다리셨다가 길을 안내하신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해 간 음식과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기도를 드렸던 체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뵙고 집에 돌아온 김 도생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픈 마음이 들었으며, 자신이 유성진 할아버지의 천도식을 해 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천도치성 준비를 시작했다. 한여름 무더위가 찌는 듯 했으나 그냥 무더위 속에 도장에서 105배례, 200배례, 300배례, 400배례를 한 달 정도 하고 천도식을 올렸다. 김 도생은 배례와 주송이 너무 잘 되고 힘이 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천도식을 올리는 당일 새벽 김 도생은 하늘에서 세모나게 펄럭이는 청색 깃발들이 내려와 천도식이 있을 도장 건물에 꽂히는 꿈을 꾸었는데, 유성진 할아버지와 신장님들이 오신다는 환영의 표시로 느껴졌다고 한다.
이윽고 당일 천도식이 시작되자 김 도생은 할아버지가 오셔서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드시고 해원하셔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오른쪽에서 아주 밝게 빛이 반짝거리며 오셨다고 신호를 주셨다. 김 도생은 힘을 내서 더욱 정성껏 주문을 외우고 힘차게 도공하고 기도하며 젊은 시절 억울하게 돌아가신 원과 한을 반드시 푸시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상제님 태모님 태상종도사님 종도사님께 유성진 할아버지를 증산도에 받아 주시옵기를 기원했다.
제대로 된 도방 문화를 위하여
도방 운영 방법에 대한 아쉬움허 도생은 자신의 가가도장에 대해 자평을 하면서 천신단과 성물, 진리 서적, 신앙 환경 등은 그런 대로 잘 갖춰져 있지만, 가가도장 운영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므로 많은 것을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가족 구성원은 각기 상태와 여건이 다른 경우가 많아 모든 것을 다 함께 똑같이 하면서 천하사 일꾼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정이라면서 조석 봉청수와 태을주 수행을 보다 철저히 할 필요가 있고 가족이 함께하는 21일 정성공부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도방에 들어오면 ‘아, 여기는 뭔가 다른 집이랑 다르구나, 참 좋구나, 뭔가 신성하구나!’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가가도장의 신앙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부부가 함께 노력해 온 것도 ‘제대로 된 가정도장 문화’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검증으로 이룬 다섯 가지의 도방 운영안
허 도생은 차후 가정도방 문화를 구축해 가기 위해 다섯 가지의 운영 방향을 제시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체험과 정성으로 검증을 거쳤거나 실천 중인 것이라서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그 운영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앙의 성소이자 증산도 진리와 신앙 문화의 기본 출발점이 되려면 조석 봉청수와 기도 문화가 강력히 정착되어야 한다.
가정이 도장 또는 도방이 되려면 증산도 신앙 문화가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구도와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천지일월 4체 하나님과 제1의 하나님인 조상님들께 청수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배례하면서 참회하고 감사드리는 생활을 보다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둘째로 신앙의 지성소인 가정에서부터 21일 정성기도 문화와 태을주 주송을 강화해서 태을주가 왜 천지조화 주문인지 보다 명확히 깨우칠 기회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오래 전부터 가가도장 문화를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러려면 태을주 주송을 더욱 철저히 해서 가정에 태을주의 신성한 조화기운이 늘 깃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로 한 달에 한 번 가정치성을 올림으로써 신앙하면서 겪는 많은 난관들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근본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허 도생은 천신단에 조상님들과 상제님과 태모님, 상원군님과, 태상종도사님, 도모님 등을 모시고 가정치성을 올리는 것은 지역도장에서 제물치성을 올리는 것과 똑같은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지역도장에서 천도식을 올리고 조상님 위패가 다 모셔져 있는 상태에서 다시 가정도장에 조상님들의 신위를 모시고 가정치성을 올려 드리면 천도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물치성을 하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큰 효과가 있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두 부부 도생이 각자의 4선조 조상님들 천도식을 다 올려 드릴 수 있었던 원동력도 가정에 천신단을 마련하고 꾸준히 가정치성을 올리면서 정성을 드린 결과라고 한다. 가정에서 치성을 올리다 보면 조상님들께서 자손에게 원하시는 것들과 자손이 조상님들께 부탁드리는 기도들이 서로 소통이 되어서 결국에는 해결되는 경험들을 많이 해 왔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9천년 신교 경당 문화를 가정에서부터 정착시켜 열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포교 대상자가 생기면 모든 교육은 지역 도장에서 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의 출발지인 가정에서부터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가정에도 가가도장의 신앙 역사, 가가도장 도사道史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경당 인문학 강좌를 할 때 사진도 찍고 강의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서 기록함으로써 가정 도사를 문서화하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다섯째로는 가가도장을 살릴 생 자 포교와 대상자 수렴의 직접적 장소로 잘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6.24 도전문화콘서트에 참석하기 전에 대상자를 집에 초대해서 사배심고와 가정 천신단 제작과 모셔져 있는 신위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준 적이 있는데, 대상자가 직접 가정 도방에 와서 천신단의 위엄과 경건함을 체험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밖에서 대화할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증산도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꼈던 체험도 덧붙였다.
이번 호 가가도장은 자손을 상제님 진리로 이끄는 과정을 통해 조상 선령이 원하는 도인의 삶과 역할을 이끌어 냈고, 그런 사람의 도반으로 만나 인생을 함께하도록 다리를 놓은 조상의 작용을 체험한 40대 부부 신앙인의 도방 스토리를 만나 보았다.
신도에서 조상 선령이 뜻을 세웠음에도 주변의 오해와 편견 등으로 굴곡을 겪었던 두 사람은 결국 조상의 영적 인도와 개입으로 결합하여 진리 속에서 뜻과 의지를 함께하는 동반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들은 깊은 정성과 바른 심법을 바탕으로 치성을 통해 조상 선령의 영적 메시지를 순수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여러 문제를 끌러내고 역동적인 도방 구축에도 성공하는 성과를 도출해 냈다. 특히 크고 작은 일을 천지일월 4체 하느님께 솔직히 고하고 진리 속에서 해결책을 구하는 이들의 신앙 태도는 진리 실현의 원리와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례라 할 수 있다.
매월 1회의 가정치성을 신앙생활의 기본 틀로 삼고 늘 감사와 보은의 자세를 견지하며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일을 풀어 나가는 인사의 해결 방식과 그렇게 진리 중심의 신앙생활 자체를 그대로 보여 주고 공감을 얻게 하는 포교의 방법 또한 잘 분석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허성철, 김선희 도생 부부와 그 부모의 순수함을 닮았을 허수영 예비도생 가족이 더욱 성숙한 정성과 의지로 굳건한 도방의 결실을 맺어 무한한 생명의 터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상제님과 태모님의 성령과 조상선령 및 천지성신의 가호 속에 성공적인 도방문화를 활짝 펼쳐 나가시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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