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의리더십] 끝까지 백제를 지킨 충혼聖傑 계백 장군
[역사인물탐구]
박 창 / 이천중리도장
641년, 무왕武王이 죽고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리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으나 신라와의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하자 자아 도취되어 향락과 사치에 빠져들게 된다. 좌평佐平이었던 성충이 나라를 위해 충언忠言을 올리지만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656년 성충은 외적의 침입이 있을 시 육로에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백강白江을 막아 험한 곳에 의거하여 싸워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다. 탄현은 보은報恩의 탄현(신채호)이고 백강은 흥수가 말한 바 기벌포伎伐浦이다. 성충을 이어서 흥수가 좌평이 되지만 역시 충언을 올리다가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것을 주장했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귀양 중이던 흥수가 왕의 요청에 응해,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출발해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른 뒤,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있었다. 탄현을 진수進守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기를“ 고구려의 안시성주 양만춘은 5천의 군사로써 당나라 군사 70만을 깨뜨렸는데, 우리 5천의 군사들이 한사람당 10명을 당해낸다면 신라의 5만 명을 어찌 겁내겠는가.” 라고 하였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 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해서 소정방이 신라독군新羅督軍인 김문영金文穎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하니,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계백장군은 무너져 내린 백제의 운명을 알면서도 배수진의 자세로 깨끗하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의忠義를 지킨 장군이었다.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은 계백장군은 삼국의 충신 중 가장 으뜸이라고 평한 바 있다. 처자식을 죽인 것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이 행동은 전쟁 후 포로로 끌려가 노비가 되어 비참한 생애를 사느니 죽어 백제를 지키고 수호했던 충혼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온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나라가 무너져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백제의 대장군으로서 5천 결사대에게 보일수 있는 최후의 결의였을 것이다. 계백장군은 백제를 가슴에 품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가장 비극적인 장군이었다.
첫째로 계백 장군의 충의정신이다. 일신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계백이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여러가지 있었겠지만 그는 의연히 죽음의 길로 나아갔다. 비록 방탕한 군주였고 무너지는 나라였지만 국록을 먹은 중신重臣으로서 의리를 다한 것이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과 조직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충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전세를 뒤바꾼 젊은 화랑들의 희생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는 4전4패의 상황에서 다시 사기를 충전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16세의 화랑이었던 반굴과 관창의 역할이 컸다. 이 나이 어린 화랑들의 충의로운 희생에 신라군 모두는 큰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었다. 묵은 조직에는 젊은 피가 필요하다. 젊은이의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에너지가 타성에 젖은 조직을 새롭게 일깨워 한단계 더 도약시킨다. 상제님의 초립동이 도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셋째로 국가와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리더의 역할이다. 백제의 의자왕과 왕자들의 모습에서는 군주君主로서의 솔선수범, 책임감, 통솔력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에 신라는 태종무열왕 대에서 문무왕까지 일관되게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나라의 지도층에서도 먼저 솔선수범하고 희생하였다. 항상 윗물이 밝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조직의 중심에 있는 리더Leader의 역량과 덕성에 따라 조직의 운명과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은 잠시도 경책과 계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계백장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열전에 황산벌 전투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 남아있고 다른 전해오는 기록은 없다. 「대동지지大東地志」라는 책에“ 階伯 名升 百濟同姓”(계백의 이름은 '승'이며 백제와 동성이다)이라는 기록이 있다. 성은 부여씨이고 계백을 별칭으로 추측한다. 흥수興首, 성충成忠과 함께 백제의 삼충신三忠臣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말기의 정세
641년, 무왕武王이 죽고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리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으나 신라와의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하자 자아 도취되어 향락과 사치에 빠져들게 된다. 좌평佐平이었던 성충이 나라를 위해 충언忠言을 올리지만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656년 성충은 외적의 침입이 있을 시 육로에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백강白江을 막아 험한 곳에 의거하여 싸워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다. 탄현은 보은報恩의 탄현(신채호)이고 백강은 흥수가 말한 바 기벌포伎伐浦이다. 성충을 이어서 흥수가 좌평이 되지만 역시 충언을 올리다가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황산벌 전투 상황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것을 주장했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귀양 중이던 흥수가 왕의 요청에 응해,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출발해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른 뒤,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있었다. 탄현을 진수進守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기를“ 고구려의 안시성주 양만춘은 5천의 군사로써 당나라 군사 70만을 깨뜨렸는데, 우리 5천의 군사들이 한사람당 10명을 당해낸다면 신라의 5만 명을 어찌 겁내겠는가.” 라고 하였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 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해서 소정방이 신라독군新羅督軍인 김문영金文穎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하니,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계백에 대한 총평
계백장군은 무너져 내린 백제의 운명을 알면서도 배수진의 자세로 깨끗하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의忠義를 지킨 장군이었다.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은 계백장군은 삼국의 충신 중 가장 으뜸이라고 평한 바 있다. 처자식을 죽인 것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이 행동은 전쟁 후 포로로 끌려가 노비가 되어 비참한 생애를 사느니 죽어 백제를 지키고 수호했던 충혼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온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나라가 무너져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백제의 대장군으로서 5천 결사대에게 보일수 있는 최후의 결의였을 것이다. 계백장군은 백제를 가슴에 품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가장 비극적인 장군이었다.
계백장군과 황산벌 전투가 주는 교훈
첫째로 계백 장군의 충의정신이다. 일신의 안위를 생각했다면 계백이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여러가지 있었겠지만 그는 의연히 죽음의 길로 나아갔다. 비록 방탕한 군주였고 무너지는 나라였지만 국록을 먹은 중신重臣으로서 의리를 다한 것이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과 조직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충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전세를 뒤바꾼 젊은 화랑들의 희생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는 4전4패의 상황에서 다시 사기를 충전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16세의 화랑이었던 반굴과 관창의 역할이 컸다. 이 나이 어린 화랑들의 충의로운 희생에 신라군 모두는 큰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었다. 묵은 조직에는 젊은 피가 필요하다. 젊은이의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에너지가 타성에 젖은 조직을 새롭게 일깨워 한단계 더 도약시킨다. 상제님의 초립동이 도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셋째로 국가와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리더의 역할이다. 백제의 의자왕과 왕자들의 모습에서는 군주君主로서의 솔선수범, 책임감, 통솔력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에 신라는 태종무열왕 대에서 문무왕까지 일관되게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나라의 지도층에서도 먼저 솔선수범하고 희생하였다. 항상 윗물이 밝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조직의 중심에 있는 리더Leader의 역량과 덕성에 따라 조직의 운명과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은 잠시도 경책과 계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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