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균주의를 토대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한 독립운동의 이론가 소앙素昂 조용은趙鏞殷

[역사인물탐구]
김종우 객원기자 / 서울동대문도장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독립운동가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1919년에 기초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이은 것이다.
조소앙이 주창한 ‘삼균주의三均主義’는 단군조선 때 쓰인 서효사誓效詞의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면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하리라.”라는 대목에서 착안했다. 즉 머리와 꼬리가 균등하면 나라가 일어나고 태평하리라는 것이다. 삼균주의는 복국復國⋅건국建國⋅치국治國을 위한 소앙의 이론理論이자 철학이다. 더 나아가 지구촌 평화 세상을 지향하는 이념이다.

한평생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조소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당대 최고의 신지식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14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명실공히 독립운동의 명문가이다.

출생과 유년시절


조소앙趙素昻은 1887년 4월 10일(음력)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시) 월롱면에서 아버지 조정규趙禎奎(1864~1939)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1939) 사이에서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상도 함안이다. 본명은 용은鏞殷이고 자는 경중敬仲이며, 소앙素昻은 호이자 필명이다.
조소앙은 6세부터 16세까지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 동면 황방리 집에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는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한 유교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서를 두루 교육받음으로써 풍부한 유교 지식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조소앙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조소앙은 16세가 되던 1902년 성균관에 최연소로 입학하여 유학자로서의 전문적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대한 지식을 갖춘 개화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이 조소앙보다 각각 7년, 18년 연상인 신채호申采浩(1880~1936), 유인식柳寅植(1865~1928), 변영만卞榮晩(1889~1954) 등이다.
조소앙의 부모인 조정규와 박필양은 나라가 망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조소앙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1939년에 함께 작고하였다. 조소앙의 형제들 역시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6남매를 비롯 두 명의 부인과 세 명의 자녀 등 총 14명의 가족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다.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훌륭한 집안이다.


일본 유학 시절


조소앙은 황실특파유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하여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서 일본식 중등 교육을 받게 된다. 이어 중학교를 졸업한 후 메이지明治 대학 법학과에 입학한다. 1908년 3월부터 1912년 7월 졸업할 때까지 4년간 메이지 대학에서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프랑스 법학의 영향을 받아 국권주의를 비판하는 민권주의적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식민지 지배 체제를 뒷받침하는 조선총독부 관료의 길을 걷지 않고,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 데는 메이지 대학의 자유주의적 학풍이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조소앙은 메이지 대학에서 영국법 강의를 원서로 수강하였고 중국어를 선택과목으로 수강하였으며, 독일어는 개인적으로 학습하였다. 그는 한국어와 한문 외에도 일본어, 영어, 중국어, 독일어 등 외국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 8년 이상 유학하는 동안 소앙은 전문적인 법학 지식과 동서양의 근대 학문을 섭렵하고 4개 외국어를 익혀 국제적 시각의 문화 의식을 함양하였다. 이는 훗날 독립운동의 이론가이자 사상가로 활동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고 국제 무대에서 외교전을 펼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중국 망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


중국 망명과 동제사 가입
1913년에 조소앙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밀항을 결행하였다. 당시 상하이 한인 사회는 신규식申圭植이 박은식朴殷植, 신채申采浩호 등과 #동제사同濟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망명 즉시 조소앙도 동제사에 가담하였다. 동제사에서는 상하이 지역 한인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을 창설하여 청년 혁명가들을 육성하고,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당亞細亞民族反日大同黨 결성 작업에도 참여함으로써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동단결선언문서」⋅「대한독립선언서」 기초
조소앙은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申圭植,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를 비롯한 14인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기초하는 등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흐르면서 국제 정세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위해 통합적인 독립운동 지도 기관 즉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었다.
만주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1919년 2월 말에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무장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국내외에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조소앙은 부령을 맡았으며 조직은 물론 독립운동 전략 수립과 활동에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에서는 조소앙이 동생 조용주趙鏞洲 등과 함께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를 1919년 2월에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등 해외 각지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에는 단군檀君 숭배의 민족주의적 사고와 사해동포四海同胞 사상이라는 세계주의적 사고가 결합되어 한국의 독립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운동으로 정의되었다.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김신부로金神父路 60호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현순玄楯, 신익희申翼熙, 여운형呂運亨, 신채호申采浩, 이회영李會榮, 김동삼金東三 등 29인이 참석하였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어 일본 유학 시기에 학습한 법학 지식을 활용하여 임시정부의 법체계를 정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신익희, 이광수와 함께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기초하여 채택되도록 하였다. 이 헌장은 조소앙이 이전부터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제시했던 국민주권주의 원리, 평등사회의 건설 구상, 그리고 신 또는 하늘의 뜻에 따르는 세계평화의 실현이라는 이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유럽에서 독립 외교 활동
1919년 조소앙은 유럽에서의 외교 역량 강화와 독립 승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8월에는 스위스 루체른Luzern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참석하여 한국독립 승인안을 제출, 승인을 받았다. 한국독립승인 결의안은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한 25개국의 사회주의 정당 대표의 협의를 거쳐 8월 9일에 정식으로 통과되었다. 이것은 한국의 독립이 국제회의에서 최초로 승인받은 외교적 성과였다.
이어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회 만국사회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하였고 통과시켰다.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의 활약
조소앙은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서 미국과 중국, 영국 등의 연합국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중국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국에는 광복 이후 임시정부의 정통성 확립과 임시정부 승인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활약으로 우리나라는 ‘카이로Cairo 선언(1943.12)’과 '포츠담Potsdam 선언1945.7)’에서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삼균주의 이론 정립과 건국 강령


조소앙은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독립운동의 기본 방향과 미래 조국 건설의 지침으로 정하여 이를 제창하였다. 삼균주의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균등 생활을 이루고 이를 토대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균등 생활을 실현해 나아간다는 이론이다.

삼균주의 건국강령 제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에 선포한 첫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의 제7조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신神의 의사意思에 의依하야 건국한 정신精神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進하야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國際聯盟에 가입함”이다. 여기서 “신神의 의사意思에 의依하야 건국한”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 무엇인지는 1941년 11월 28일 조소앙이 작성하여 공포된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의 다음과 같은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建國精神은 삼균제도三均制度의 역사적歷史的 근거根據를 두었으니 선민先民이 명명明命한 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면 흥방보태평興邦保泰平」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각층社會各層 각급各級이 지력智力과 권력權力과 부력富力의 향유享有를 균평均平하게 하여 국가國家를 진흥振興하며 태평太平을 보유保維하리라 함이니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하자는 우리 민족民族이 지킬 바 최고공리最高公理임


조소앙은 일본 유학 중인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기도 했지만, 1912년 무렵에는 완전한 ‘단군민족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그는 “우리 배달겨레는 단군께서 개천 건국하신 이래 동방에 있어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민족”이라고 역설하였다.
조소앙이 1919년 4월에 그 초안을 작성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7조에서 “신神의 의사에 의하야 건국한”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바로 배달민족의 건국 시조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였다.



국혼⋅국맥 확립에 힘쓰다
소앙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와 국제법적 인정이라는 현실과 망명정부의 본토 수복이라는 과제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국맥國脈’과 같은 정신적 근거와 역사적 법통의 확립이 매우 긴요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1933년 망명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82인의 열전이 담긴 「유방집遺芳集」을 출판하였다. “열사의 정신은 뽑아 버릴 수 없으며 그것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맴돌면서 혁명동지로서 영원히 활약할 것임을 확신한다.” 소앙이 이 책 서문에 적은 말이다.

조소앙은 1936년 8월 29일에 한국독립당 명의로 〈한망韓亡 26주년 통언痛言〉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 중 국통맥에 해당하는 문장을 발췌한다.
 
환국桓國에서 삼한三韓이 끝나기까지 무릇 3천여 년, 삼국(신라⋅고구려⋅백제)에서 신라 말까지 무릇 1천 년, 왕씨 고려로부터 이씨 조선까지 각 5백여 년 지속되어 모두 5천 년이었다. 이씨 조선은 임신년(서력 1392년)부터 갑오년(서력 1894년)까지 조선이라 칭하였고, 갑오년부터 정유년까지는 대조선국, 정유년(서력 1897년)부터 경술년(서력 1910년)까지는 대한제국이라 칭하였다. 이처럼 환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까지 우리의 국맥은 상하 5천 년을 이어 오면서 단 한 차례도 단절됨이 없었다.


1942년 3월 1일 발표한 제23주년 3.1절 선언문에서도 서두에 국통맥에 대하여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 민족은 처음 환국桓國이 창립된 이래 단군檀君⋅부여扶餘⋅삼한三韓⋅삼국三國⋅고려高麗⋅조선朝鮮 및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거쳐 5천 년의 국가 주권은 한민족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한국 강토에 근거해 서로 물려주면서 큰 난리를 겪어도 우뚝하게 독립하였고 민족의 광채를 보전하며 백번 전쟁에 분발하여 시종일관하였고 전 국가全國家의 인격을 보전하였다.


서효사誓效詞와 신지비사神誌祕詞
소앙은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에서 삼균주의의 핵심 개념인 “균등均等”을 발굴하고, 전통 유학에서 삼균주의의 이론적 구조를 도출했으며, 당시 서구의 여러 사상을 수용하여 삼균주의의 살을 붙였다. 삼균주의는 대부분 서구 사상들을 수용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소앙은 한결같이 전통에 입각하여 자신의 이념을 정당화하였다. 이를 위해 소앙은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 가운데 자신의 신념과 부합되는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통을 원형과 달리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조소앙은 ‘삼균주의’ 아이디어를 과연 어디에서 발상하였을까? 소앙의 독서 목록에 『고려사高麗史』가 보인다. 또 그가 교유交遊한 인사들 중 신채호⋅박은식⋅김교헌 등은 한민족의 역사와 혼을 밝히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런 점에서 『고려사』에 나오는 「신지비사神誌祕詞」를 비롯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 조條, 그리고 「천부경天符經」이나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을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서효사誓效詞」는 단군조선 6세 달문 단군이 신지神誌 발리發理를 시켜 지은 것으로 삼신께 올린 제천문이다. 일명 「신지비사神誌祕詞」라는 이름으로 전해 오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신지비사」를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서”라고 평하기도 했다. 서효사의 구성은 전반 아홉, 후반 아홉 총 열여덟 구이며 글자 수는 180자다. 환국 배달 단군조선의 상고上古 역사 시대를 관통하는 국가 경영의 근본 사상은 한 마디로 “하늘에는 삼신三神, 땅에는 삼한三韓, 사람에게는 삼진三眞이 있다.”는 것이다.

서효사는 첫 구 삼신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구 삼신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환인, 환웅, 치우를 거쳐 왕검에 이르게 되었고 왕검의 선정에 의해 백성들의 삶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도덕적인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다음 삼한관경을 언급하는데 삼한의 수도를 저울판, 저울대, 저울추로 설명하고 있으며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유지해야만 나라가 흥성하게 될 것이고 천신을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채호는 단군세기에 나오는 서효사 전문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조선 태종이 「신지神誌」를 수거하여 분서焚書해 버린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면서, “고려사高麗史 김위제傳에 적힌 ‘우신지비사왈又神誌秘詞曰, 여칭추극기如秤錘極器 칭간부소량秤幹扶疎樑 추자오덕지錘者五德地 극기백아강極器百牙岡 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 뇌덕호신정賴德護神精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 약폐삼유지若廢三諭地 왕업유쇠경王業有衰傾’이라 한 것 열 짝만 전해지고 있는데 만일 그 전부가 다 남아 있으면 우리의 고사故事 연구에 얼마나 대력大力을 주리오.”라고 한탄한 것이다.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8월 7일 기미 2번째 기사 1412년 조 내용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중략… 「신비집神祕集」⋅「책부원귀冊府元龜」 등의 책이었다. 또 명하였다. "「신비집神祕集」은 펴 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 임금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들이다." 하고,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이를 불사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간직하게 하였다.


단재는 신지비사 전문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는데 놀랍게도 「단군세기」 6세 단군 달문達門 조條에 전문全文뿐만 아니라 지은이와 지은 장소, 지은 목적까지 상세하게 「서효사」라는 제목으로 기술되어 있다.

광복 후 환국과 납북


조소앙은 8·15 광복 후 귀국하여 건국 운동을 준비하던 중 모스크바 3삼상회의三相會議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信託統治反對 국민총동원위원회’에서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선거 25일 후 터진 6.25 전쟁 때 강제 납북되었다.
납북 인사들과 함께 독자적인 ‘중립화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58년 9월 10일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모셔져 있다.
조소앙 선생이 남긴 삼균주의 역시 전쟁 후 이념 대결 와중에 잊혔지만 그 기본 정신은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스며들어 민주공화국의 기본 정신으로, 지금의 헌법으로 이어졌다.
1989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追敍했다. 북한에서는 1990년에 조국통일장을 수여하였다.

글을 마치며


전통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의리 명분을 내세우며 근대 지식을 활용하고 세계적 보편성을 제시하는 데 한계점을 보인 것이나 일본 유학을 경험한 지식인들이 진화와 문명이라는 외식外飾에 기대어 ‘친일’의 길을 걸었음을 상기할 때, 소앙은 대전환기 내내 정치적, 이념적 진취성과 사상적 정통성을 잃지 않은 보기 드문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다.
소앙은 독립운동과 임정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이론가이자, 독립운동 세력의 대변인이었다. 소앙은 한문,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한 국제인으로 임정 외교 및 대외 입장 발표 등의 문필을 도맡았다.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때부터 대일 선전 포고와 건국 강령 선포까지 그의 손을 거쳐 간 역사와 문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소앙은 임정 요인 중 신문, 잡지 등의 출판과 저술 활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그의 손을 거친 수많은 공문서 외에도 중국어, 국한문체로 민족의 내력과 과제에 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저술가였다.
그는 민족의 뿌리 정신과 국통맥國統脈을 근간으로 독립을 쟁취하여 복국復國을 꿈꾸었고 삼균주의로 건국建國을 하고 홍익인간 이념으로 치국治國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 보편의 이념을 주창할 수 있는 이론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1945년 광복 후 환국還國하여 그가 꿈꾸었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시대 상황은 그의 뜻을 비껴갔다. 1958년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염념불망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였다.

<참고자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김기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론가 조소앙』, 역사공간, 2015
김병기,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이학사, 2019
김삼웅, 『조소앙 평전:삼균사상가』(채륜,2017,6)
김인식, 『조소앙 평전』, 서울: 민음사, 2022
신채호. 조선상고사. 서울: 비봉출판사, 2019.
임찬경, 독립운동가가 바라본 한국 고대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2020
조소앙, 『소앙집』, 김보성·임영길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9
조소앙, 『유방집』, 이정원 역, 한국고전벅역원, 2019
윤창열(Yun Changyeol). "환단고기 진서고(Ⅱ)." 세계환단학회지 2.2 (2015): 158-159.
이상익. (2010). 한국철학 : 조소앙(趙素昻) 삼균주의(三均主義)의 사상적 토대와 이념적 성격. 한국철학논집, 30(0), 87-121.

< 인터넷 자료 >
1) 조소앙기념관 홈페이지(http://www.chosoang.kr/page/02_02.php)
2)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홈페이지(https://db.history.go.kr/)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 사단법인 독립유공자유족회(www.815famil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