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정조의 효심이 어린 창경궁

[한문화]
이해영 / 객원기자

이번에는 효심으로 빚어졌고 수많은 왕실 가족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봉황의 궁궐 창경궁과 낙선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효심으로 빚은 궁궐, 창경궁昌慶宮


본래 창경궁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이 거처할 곳의 터를 잡았던 수강궁壽康宮에서 시작합니다. 원래는 이곳에 고려 시대의 궁궐이 있었다고 합니다. 창경궁이 궁궐의 모습을 갖춘 것은 9대 성종 때입니다. 경사스러운 일이 창성하라는 의미의 창경궁은 성종의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생모인 소혜왕후昭惠王后(인수대비仁粹大妃), 예종의 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등 세 분의 대비를 모실 공간으로 수리하고 확장함으로써 궁궐다운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창경궁의 수난사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습니다. 그러다 광해군 8년인 1616년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이후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고 재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융희隆熙 원년인 1907년 이후 일본의 침략 의도에 따라 원래 모습을 잃어 갔습니다. 1908년에는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 등이 들어서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도 심어져 일본식 시민 공원으로 개조되었습니다. 더욱이 국권이 피탈된 1911년 4월 이후에는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일반 시민의 놀이 공간으로 개방되어 왕궁의 기능과 위엄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해방 이후 동물원과 식물원을 철거하고 옛 궁궐의 모습을 찾아 가고는 있지만 2,379칸의 위대한 위용을 지녔던 창경궁의 본모습을 보기에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천지조화의 이치를 널리 펴다, 홍화문弘化門 일대


창경궁 정문은 홍화문입니다. 창경궁 자체가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홍화의 뜻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周官’ 제6장에 나옵니다. ‘신하들이 좌우에서 임금을 보필하면서 천지를 공경하고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편다’는 뜻입니다. 남송 시대 유학자 채침蔡沈(1167~1230)은 자신이 지은 서경에 대한 주석서인 『서경집전書經集傳』에서 ‘홍弘은 넓혀서 키움(張而大之)’이고 ‘화는 천지의 운용이니 운행하되 흔적이 없는 것이다(化者, 天地之用, 運而無迹者也)’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창덕궁의 돈화문의 ‘돈화敦化’가 조화가 쉬지 않고 유행하여 만물이 돈독하게 동화同化한다는 자연의 이치 그 자체를 말했다면, 창경궁의 ‘홍화弘化’는 그러한 이치를 실제로 널리 편다는 실천의 덕목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홍화문은 원래 도성 동북쪽 문의 이름이었다가,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짓게 되자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중종 때 동소문을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홍화문은 임금이 백성의 이야기를 직접 듣거나, 무과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영조英祖가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백성들의 의견을 듣고 따랐던 소통의 마당이기도 합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비극의 장소


홍화문에서 왼쪽으로 따라가다 보면 ‘인을 널리 편다’는 선인문宣仁門이 있습니다. 한때 서린문瑞麟門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창덕궁 금호문처럼 조정의 신하들은 이 문을 통해 출입하여 실제 사용 빈도는 정문인 홍화문보다 높습니다. 바로 이 문 안쪽이 무더운 여름 땡볕 아래 사도세자를 가둔 뒤주가 있던 곳입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비명에 돌아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창경궁 후원인 함춘원含春苑 경모궁景慕宮(지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자리)에 봉안된 사도세자의 신주를 배알하기 위해 홍화문 북쪽 담장에 ‘매월 찾아뵙는다’는 뜻의 월근문月覲門을 설치하였습니다.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


명정전이 동향인 이유
홍화문을 지나 안쪽에 있는 옥천교玉川橋를 지나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을 만나게 됩니다. 명정전은 근정전이나 인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입니다. 큰 의례보다는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는 행사를 벌이는 장소로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이후 큰 수리나 고쳐 짓는 일 없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궁궐 정전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입니다. 명정전은 특이하게도 동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함춘원의 남쪽 기슭이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종묘의 내청룡 맥이 되기 때문에 명정전을 남향으로 하면 그 맥을 절단할 우려가 있어 불길하다는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것입니다.

명정明政의 의미
‘명정’이란 뜻은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임금의 덕을 흠欽(공경하고), 명明(밝으며), 문文(문채가 빛나고), 사思(생각이 자연스럽다) 등으로 칭송한 데서 유래합니다. 조선의 궁궐에는 이 덕목을 궁궐 전각 이름에 반영하였습니다. 경복궁의 흠경각과 사정전 그리고 창경궁의 명정전과 문정전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봉황이 날고 있는 명정전
명정전 어좌는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3면에 4단의 나무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 기둥머리에 연꽃 봉오리 모양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앉는 상탑인 어탑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이 펼쳐져 있고, 어좌 위에는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닫집이 가설되어 있습니다. 닫집 장식 문양은 바람이 불어 날아가는 구름 모양인 비운문飛雲紋을 사용하였습니다. 어좌 바로 위 닫집 천장에는 구름 속을 나는 두 마리 봉황 장식이 되어있습니다.

이 명정전 장식 중 단연 뛰어난 것은 천장 중앙에 장식된 목재 봉황 장식입니다. 섬세하게 짜 올린 명정전 봉황 장식은 하늘 위 구름 모양의 닫집 속에 오색구름 사이로 봉황 한 쌍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봉황은 날개를 활짝 편 모습으로 하나는 꼬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다른 하나는 둥글게 뭉쳐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머리를 뒤로 홱 돌려 상대를 바라보는 모습은 자연스럽고 환상적입니다. 명정전이 현존하는 궁궐 정전 중 제일 오래된 17세기 초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봉황 장식도 그 시기가 가장 앞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경궁은 동쪽 봉황의 궁궐


동궐인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명정전에는 천장에 봉황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과 경운궁 중화전, 경희궁 숭정전은 황룡이 장식되어 있는데 왜 이 두 정전에만 봉황이 장식되어 있을까요?

봉명조양鳳鳴朝陽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궁의 위치가 법궁인 경복궁에서 볼 때 동쪽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양 도성에서 경복궁은 북쪽에 있어서 ‘북궐’이라고 했습니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해서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쪽에 있어서 ‘동궐東闕’이라고 불렀고, 인왕산 자락에 있는 경희궁은 ‘서궐西闕’이라고 했습니다.

동방은 만물이 생하여 변화가 처음 발동하는 곳으로 자연과 문명의 새로운 출발점을 상징하는 방향입니다. 봉황은 동쪽을 상징하는 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봉황이 운다, 저 높은 산등에서. 오동이 자란다, 저 산 동쪽에서(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 여기에서 천하가 태평해질 상서로운 조짐과 뛰어난 행위를 뜻하는 봉명조양鳳鳴朝陽(봉황이 산의 동쪽에서 운다)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봉황은 ‘동쪽의 새’로 관념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궐 정전의 가장 중요한 정전을 봉황으로 장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천자 문화의 상징, 용봉이 있는 조선 궁궐
이렇게 본다면 한양 도성 궁궐은 북궐 경복궁과 서궐 경희궁, 경운궁, 원구단 황궁우는 황룡으로, 동궐은 봉황으로 장식되어 있어 용봉龍鳳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용봉은 천자天子를 대표하는 상서로운 동물(길상물吉祥物)로 여겨졌습니다. 천자는 하나님(상제님)의 아들로 온 우주를 주재하는 상제님께 제를 올리는 제사장인 동시에 상제님의 덕화와 가르침을 받아 내려 백성을 보살피고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입니다. 본래 동방 한민족은 천자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제후국을 자처하고 비록 명에 사대하였지만, 천자 문화의 원줄기와 전통은 궁궐에 반영되어 내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천자 문화를 부활한 것이 고종 때 천제를 올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본 문정전


창경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같은 정치 중심 공간이라기보다는 왕족들의 생활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궁궐입니다. 그래서 사람 냄새가 나면서, 사람들 사이의 애증에 얽힌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명정전 남쪽으로 거의 명정전과 지붕이 닿을 정도로 근접한 편전 문정전文政殿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조선 후기 왕실의 최대 비극이 일어난 곳입니다. 바로 아버지 영조英祖가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둬서 죽인 사건, 이른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있던 곳입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가 영조 33년에 타계하자 문정전에 위패를 모셔 혼전으로 삼았습니다. 그때는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렀는데, 당시 경희궁에 머물던 영조는 자주 이곳에 들러 창경궁에서 대리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와 더불어 참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영조 38년인 1762년 5월 13일 영조가 휘령전에 들렀을 때 세자가 병을 핑계로 늦게 나타나자, 그렇지 않아도 평소 비행을 일삼는 세자를 불신하던 영조는 노여움이 치솟아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 때문에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도록 명했습니다. 그로부터 8일 후인 5월 21일 세자는 창경궁 남문인 선인문 부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소 정성왕후는 사도세자의 생모는 아니지만, 모후로 세자의 성장을 지켜보고 매우 아꼈다고 전합니다. 그런 모후의 신주를 모신 곳에서 세자를 죽게 한 정황은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세 건물


창경궁에서 또 하나 중요한 공간은 환경전과 경춘전 북쪽에 있는 집들로, 이 공간은 대비의 처소입니다. 대비전은 임금의 편전 바로 뒤에 있어서 임금이 수시로 문안할 수 있게 배려했습니다. 대비전의 하나인 연경당延慶堂은 임금의 침전인 환경전 바로 북쪽에 남향하고 있습니다. 연경당 서북쪽에 연희당延禧堂이 동향으로, 동북쪽에는 연춘헌延春軒이 있어서 세 건물이 ㅁ 자형을 이룹니다. 건물 이름 모두 ‘이끌다’ 또는 ‘잇다’는 뜻의 연延 자가 들어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경사를 이끌다, 기쁨을 잇다, 봄을 이끌다는 뜻으로 어른들의 장수를 비는 효심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중 연희당은 정조 19년 6월에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벌인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해 윤 2월에는 회갑을 앞당겨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에 가서 사도세자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화성 행궁 봉수당奉壽堂에서 회갑 잔치를 벌였습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을묘생 동갑내기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조가 수원 화성에 사도세자 능행을 한 ‘을묘원행乙卯園行’입니다. 그리고 실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일인 6월 18일 연희당에서 회갑 잔치를 다시 치렀습니다. 그러면서 이 기쁨을 백성들과 나누기 위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1,000석이 넘는 쌀을 홍화문 앞에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잔치 모습과 쌀을 나누어 준 과정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혜경궁에 올린 음식 차림표가 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개고기찜(구증狗蒸)이 눈에 띕니다. 현재 이 연희당, 연춘헌, 연경당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통명전의 의미와 역사


왕비의 침전 통명전通明殿에 담긴 뜻
창경궁의 왕비 침전은 통명전입니다. 통명은 성聖과 통합니다. 성은 귀 이耳와 ‘드리다, 바친다’는 뜻의 정呈을 합한 형성 문자입니다. 바깥세상의 소리가 귀에 들려 마음속으로 통하니, 소리를 듣고 사정을 아는 것(문성지정聞聲知情이 성聖)입니다. 결국 통명은 일월과 같이 밝고 덕과 천지의 이치에 두루 통하는 경지를 묘사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왕비의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이유
일반적으로 목조 건축물은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용마루를 설치하고 거기에 길상 장식물이나 화마를 억제할 벽사상辟邪像 같은 것을 얹어 놓습니다. 하지만 경복궁 교태전이나 창덕궁 대조전처럼 이곳도 용마루가 없습니다. 이들 건물 모두 왕비의 침전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왜 왕비의 침전에는 용마루가 없을까요? 일반적으로는 왕을 용으로 비유하기 때문에 굳이 또 다른 용마루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조금 다르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왕비 침전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면, 교태전의 교태는 음양이 서로 통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로 태泰는 주역의 ‘지천태괘地天泰卦’를 말합니다. 창덕궁 대조전의 대조大造는 큰 공 또는 위대한 창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천지를 대신하여 남녀가 교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함으로써 인류가 영속하도록 합니다. 남녀의 교합은 음양의 교합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우주의 근원적 원리이며 궁극의 세계라 할 수 있죠. 통명전의 ‘명’은 하늘의 밝음, 즉 해와 달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해와 달은 음양의 다른 표현이고 통명이라 함은 음과 양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로 여기서 ‘통通’은 ‘교交’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비의 침전은 왕의 침전이 됩니다. 길일을 택하여 왕비의 침전을 찾은 왕은 왕비와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이렇게 해서 태어난 왕자는 다음 세대 왕위에 오르는데 이를 ‘등극登極’이라고 합니다. 우주의 중심은 북극성北極星입니다. 등극이란 극성의 자리, 곧 천지 사방의 중앙에 오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지의 중앙에 오를 왕자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잘 통하고 음과 양의 정기가 이상적으로 조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지붕 제일 높은 곳에서 음양 간 조화를 방해할 수 있는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암투한 장소
이곳에는 가끔 대비들도 거처했다고 하니, 창경궁 전각 중에서 이용도가 가장 높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중요한 정치적 전각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무대로 한 권력 투쟁도 일어났습니다. 바로 숙종肅宗 때 있었던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의 암투 장소였습니다. 남인을 배경으로 하여, 노론과 연계된 인현왕후를 모해하여 폐위시킨 희빈 장씨는 왕비를 죽이기 위한 저주를 이곳 통명전 일대에서 서슴지 않고 행했습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사극에서 주로 다루는 단골 소재이기도 합니다.

제자리 모를 유물들과 쓸쓸하게 드넓은 잔디밭의 의미


창경궁에는 전각 외에 제자리가 어디인지 모를 유적들이 많습니다. 광대한 하늘의 운행을 살피는 ‘관천대’가 있고, 세상에 절후를 알려 주기 위해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여 그 내용을 백성들에게 알린다는 흠경欽敬 철학과 관련된 ‘풍기대’도 있습니다. 그리고 명당에 있던 성종의 태실이 뜬금없이 궁 안에 있습니다. 유교 국가를 지향한 조선에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불교 석탑들도 있습니다.

수난과 혼란의 시대가 지나가고 창경원이었던 시절도 지났습니다. 보수 정화 사업으로 어지럽게 피었던 벚꽃이 뽑혀 나간 자리에는 소나무가 심어지고, 동물원과 표본실 자리는 잔디로 덮여 버렸습니다. 본래 이름인 창경궁도 되찾아 고궁의 편안한 적막함은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사라져 간 그 많던 전각이나 누각들은 지금 그 모습을 찾을 길 없고 넓은 잔디밭들이 봉분 없는 무덤처럼 창경궁의 슬픈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이 생활했던 낙선재


낙선재樂善齋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선에 있습니다. 원래 창경궁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낙선재는 왕비의 침전처럼 격이 높지 않고, 왕의 거처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모습의 전각입니다.

낙선은 ‘선을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맹자』 「고자告子 상」에 보면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 게으르지 않은 것(樂善不倦)’을 천작天爵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천작은 하늘에서 받은 벼슬의 뜻으로, 존경받을 만한 선천적 덕행을 의미합니다.

낙선재는 원래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와 후궁의 처소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고종高宗 때부터 임금의 정치 공간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종 때 경복궁에 불이 나 내전이 거의 타 버리자 창덕궁 중희당에서 주로 정사를 보았는데, 가끔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편전으로 이용했습니다.

특히 고종 21년인 1884년 10월 갑신정변 직후에는 주로 낙선재에서 집무했습니다. 일본공사나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한 장소가 여기입니다. 순종純宗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주로 낙선재에 거주하였습니다. 순종뿐 아니라 순종의 계후繼后인 순정효 황후 윤씨(윤택영의 딸)도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고종과 엄귀비 사이에 태어난 영친왕 이은李垠과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德惠翁主 등도 여기서 살았습니다. 낙선재는 망국의 왕족이 살면서 망국의 한이 서려 있기는 했으나,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있었고 정갈한 집 맵시와 잘 정돈된 정원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을 잃은 채 과거의 환상만 간직한 그냥 유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참고문헌>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홍순민, 눌와, 2017)
『서울의 고궁산책』(허균, 새벽숲, 2010)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한영우, 열화당, 2006)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