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권으로 읽는 논어+역경
[이 책만은 꼭]
『논어』와 『역경』,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인류의 미래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그 흐름 속에서 나와 내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잘돼야 할 것인가? 사는 게 여전히 힘든 요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색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 나왔다. 바로 동방인의 지혜와 동양 사상의 원천을 오롯하게 한 권에 담은 책이다.
동양의 지식인이라면 필수적으로 습득해야만 했던 『논어論語』와 약 1만 년 전의 인류 시원 경전 『천부경天符經』에서 발원한 우주 변화의 원리를 다룬 『역경易經』 전체를 단 한 권에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이 책은 인류 고전의 최고봉인 두 문헌을 독자 누구든지 21세기적 감각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저자는 책이 출간되는 이 시점을 우리 민족의 역사가 위기와 불안, 도덕적 해이와 자본의 횡포 속에 놓여 있으며, 전 세계적인 정치적 리더십의 총체적 난국이 드러나고 있는 때로 보고 있다. 동시에 우리 문명의 창발적인 개화와 희망, 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대이기도 한데, 이 절묘한 시점에 순결한 우리말 경전이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역해자가 『논어』와 『역경』, 불경과 기독교 복음서 그리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역해 작업들을 통해서 잘 드러내 온 관점이다.
왜 하필 지금 『논어』 + 『역경』인가?
동방인들의 삶과 사유의 근원으로 존숭받아 온 경전으로 우리는 예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꼽았다. 이 사서四書의 대표작이 『논어』이고, 삼경三經 중의 가장 어려운 문헌이 바로 『역경』이다.
저자에 의하면 『논어』는 모든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의 기록이다. 그것은 이론의 전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삶들의 영상이다. 『논어』는 삶의 원형이요 전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점占치는 책으로만 알려진 『역경』에 대해서는 인간 삶의 중용적 목표를 가늠케 하는 동적 사유의 전개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역易』은 변화의 경전이지만,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인류가 그려 가는 역사의 비전을 명료하게 만드는 심볼의 체계라고 하였다. 그래서 『논어』가 삶의 장면들이라면, 『역』은 그것을 엮어 내는 논리적 결구라고 선언한다.
『논어』는 우리에게 사람 되기를 가르치고 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문답에서 살아 있는 삶과 고뇌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2,500년 전의 사람들이나 현대인들이나 다 똑같은 욕망의 존재들이고, 삶에 대한 고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게 잘 사는 것인지 등에 관한 고충의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에 맞춰 다르게 답을 전하면서도, 스스로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전하는 공자는 스승으로서 삶의 도리를 보여 주고 있다.
역해자는 이 책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논어』와 『역경』은 어떤 신념이나 신조나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논어』와 『역경』은 우리가 왜 도덕적이어야만 하는가, 그 사람됨의 이유를 가르쳐 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적 지식이나 사회과학적 창안이 아니다. 새로운 도박이 아니라 상식적 세계에 관한 도덕의 회복이다.
도덕은 공자가 말하는 인仁으로 우리가 회귀할 때만 세워지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논어』와 『역경』이 제시하고 있으며, 그 도덕의 총집결판이 바로 이 한 권의 책이라 말하고 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난세 속에도 삶의 길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삶의 인간적 현장은 논어에서, 삶의 철학적 원칙은 역경에서 그 지혜의 순금 부분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해자는 결론지어 말한다. 공자는 결코 중국 사람이 아니고, 유교는 결코 중국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기독교가 이스라엘 종교가 아닌 것과도 같다. 공자는 고조선 영향권 속에 있는 작은 제후국 노魯나라 사람이고, 유교는 교단에로의 예속을 강요하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상식이다. 유교는 한국인의 도덕적 심성의 바탕이고, 한국인의 혈관에는 논어의 가치관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논어는 삶이고 역경은 사유의 근원이다. 역은 점이 아니라, 물음이고, 삶의 철학이라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
이 책의 역해자 도올은 한국의 대중들에게 『논어』와 『역경』을 긴 시간에 걸쳐 강의해 왔다. 『논어』는 “도올의 논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KBS 1 TV의 황금시간대를 활용하여 2000년 10월부터 64회에 걸쳐 방영되었고, 『역경』은 『도올 주역 강해』라는 주석서가 출간되면서 유튜브 도올 TV에서 2022년 7월 24일부터 강론이 시작되어 현재 진행 중이다. 『논어』와 『주역』은 모두 역사적으로 공자와 관련이 있어서 유교의 핵심 경전으로 꼽힌다.
그동안 역해자 도올은 사반세기에 걸쳐 『논어』와 『주역』 모두 방대한 주석본을 내놓았다. 이번에 출간한 #『단 한 권으로 읽는 논어+역경』은 지금까지 정성 들인 주석을 다시 내면화시켜 소화된 언어로, 가장 평이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새로운 버전을 창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원전과 번역이 친절한 우리말 독음과 함께 완벽하게 실려 있다. 과거 역해자가 『노자도덕경』을 『길과 얻음』이라고 하는 한글 번역본만으로 냈던 전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는 『논어』와 『역경』의 한문 원문과 한글 독음, 그리고 필생을 통하여 갈고 다듬은 군더더기 없는 우리말 역해가 체계적으로 실려 있다.# 그래서 한문 실력이 없는 그 누구라도 읽을 정성만 있다면 능히 읽어 낼 수 있다. 역해자는 논어에 등장하는 인물과 공자가 살았던 그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논어 사전」을 싣고 있다. 여기에는 『논어』에 나오는 주요한 고유명사(인명, 지명, 나라 이름, 역사적 군주나 인물, 공자 제자들의 이야기)와 추상명사가 세밀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객관적인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는 무미건조한 내용이 아니라, 『논어』를 읽는 데 꼭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공자가 그의 삶에서 느끼는 방식으로 해설되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공자의 연표가 없으면 공자를 이해하기 어렵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전관展觀할 수 없으므로 『공자 연표』도 함께 실었다. 이 『공자 연표』를 만드는 작업은 역사 문헌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요구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공자 연표』가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지식에 의하여 『공자 연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한국 한학계의 새로운 이정표라고 역해자는 말한다.
『논어』와 『역경(주역)』
『논어論語』는 유교 사서四書의 하나다.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이다.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高弟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 함축성 있게 기재되어 『장자莊子』 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함께 3대 문장으로 한문 학습의 필수 교재로 사용되었다.
『역경易經(주역周易)』은 8괘八卦와 64괘, 그리고 괘사卦辭와 효사爻辭, 십익十翼으로 되어 있다. 약 5,700년 전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가 처음으로 팔괘를 긋고 하도河圖를 그렸고, 4,300여 년 전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 임금님께서 우임금에게 낙서洛書를 그려 주신 이후, 주周나라의 문왕이 주역 64괘의 괘명과 괘사를 붙였고 문왕팔괘文王八卦를 그었다. 또 공자는 『역경(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그 원글을 해석하고 이치를 밝힌 『십익』을 저술하였다. 십익은 단전彖傳 상⋅하편, 상전象傳 상⋅하편, 계사전繫辭傳 상⋅하편,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이 그것이다. 이 주역은 동방의 이 땅에 태어난 김일부金一夫(1826∼1898) 대성사가 편찬한 『정역正易』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지은이 도올 김용옥
우리 시대와 호흡하며 살아온 철학자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신학대학교, 대만대학, 동경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엄밀한 학문의 훈련을 받았다. 인류의 고전을 살아 있는 우리말로 바꾸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작품들은 배움에 뜻을 두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던져 주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전학의 기본 텍스트로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경전들이다.
이 책은 논어와 역경에 관한 저자 도올 김용옥의 학술적 성과를 총망라한 것이다. 저자는 하버드 대학에서 주역과 관계된 〈왕부지의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그동안 『도올 논어』 전 3권, 『논어 한글 역주』 전 3권, 『도올 주역 강해』 등을 펴내면서 논어, 역경에 관한 연구를 최근까지 치열하게 해 왔다. 그러므로 단 한 권에 그 정수를 담은 이 책은 『논어』와 『역경』에 대한 저자 도올 김용옥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다.
짓거나 역해한 책은 『논어 한글 역주 1.2.3』, 『중용한글 역주』, 『맹자, 사람의 길』 상⋅하, 『대학⋅학기 한글 역주』, 『도올 주역 강해』 등의 동양 고전과 『동경대전 1 - 나는 코리안이다』, 『동경대전 2 - 우리가 하느님이다.』, 『용담유사 - 수운이 지은 하느님 노래』 등의 국학 경전, 그리고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인도로 가는 길』 1⋅2,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기독교 성서의 이해』, 『도올, 시진핑을 말하다』, 『논술과 철학 강의』 1⋅2, 『난세 일기 -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되돌아본다』 등이 있다.
태상종도사님 어록 속에 인용된 논어, 역경 구절들
증산도의 뿌리이신 태극제 안운산安雲山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재세 시에 도생들을 교육하실 때, 상제님 진리 외에 가끔 동양 고전을 인용해 주실 때가 있었다. 그중 『논어』와 『역경』을 언급하신 부분이 꽤 된다.
마침 3월 12일(음력 2월 3일)은 태상종도사님 어천 12주기가 되는 날이어서, 태사부님께서 내려 주셨던 도훈 중 논어와 역경에 대한 부분을 정리해 보았다. 도훈 내용은 증산도 홈페이지에서 발췌했으며, 번역문은 도올의 문장으로 하였다. 도올의 책에는 별다른 현토가 달려 있지는 않다. 아마 공자가 위편삼절韋編三絶하며 보았던 원형 그대로의 『역경』을 드러내고자 한 것 같다.
●불치하문不恥下問
“옛말에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이 있다. 아닐 불 자, 부끄러울 치 자, 아래 하 자, 물을 문 자. ‘아랫사람에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손자한테 말 배우기가 참 쑥스러운 일일 것이다. 너희들끼리도 서투른 것은 서로 배우고, 교육시키는 데에 자꾸 쫓아다니다 보면 가르쳐 달라고 안 해도 자연 들으면 배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족한 건 보충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교육을 시켜라.그리고 간부들은 신입 신도가 들어오면 상제님 진리를 환하게 꿰뚫을 만큼 교육을 시켜라. 자꾸 얘기도 하고. 또 ‘상제님 태모님, 상제님 태모님, 상제님 태모님’을 주문 읽듯 자꾸 찾고, 태을주도 몸뚱이에서 냄새가 나도록 읽어라. 태을주 냄새가 나도록 주문 읽고, 상제님의 혼이 돼서 신앙을 해라. 교육을 많이 시켜서 나보다 더 잘 믿는 사람을 만들고, 또 교육을 시키다 보면 자연 내가 모르는 것도 알아지고 진리도 늘게 돼 있다. 그렇게 해서 그저 상제님의 혼이 돼야 된다. 천지의 마음을 가져야 된다.”
자공문왈 공문자하이위지 문 야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 ‘文’也?”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 문야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 ‘文’也”
자공이 여쭈어 말씀드렸다. “공문자(孔文子, 공문자는 위나라의 중신重臣으로 성姓은 공孔, 명名은 어圄, 문자文子는 시호)를 어찌하여 문文이라 시호하였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영민한 사람인데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문이라 일컬은 것이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 (45쪽)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 ‘文’也?”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 문야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 ‘文’也”
자공이 여쭈어 말씀드렸다. “공문자(孔文子, 공문자는 위나라의 중신重臣으로 성姓은 공孔, 명名은 어圄, 문자文子는 시호)를 어찌하여 문文이라 시호하였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영민한 사람인데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문이라 일컬은 것이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 (45쪽)
●인지장사人之將死에 기언야선其言也善
“조지장사鳥之將死에 기명야애其鳴也哀하고, 인지장사人之將死에 기언야선其言也善이라. 새 새끼, 짐승도 죽을 때는 슬프게 운다. 아무리 못된 사람도 죽을 때는 “아이구, 내가 잘못했구나. 잘 살 걸. 산 세상에 참 너무나 잘못했다.” 하고 뉘우치면서 죽는단 말이다.생사 양로밖에 없는, 요 말세의 기로에서 우리는 다행히도 조상의 음덕으로써 좋은 하나님 진리를 만났으니 우리 능력이 허락하는 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심만 가지면 암만 몹쓸 병에 걸려도 천신이 감동해서도 다 나을 수가 있다. 낫는 데까지가 일심이다. 기적이 일어나서도 산다.
왜 태을주를 읽으면 차 타고 가다가 차가 납작쿵이 돼서도 그 안에서 살아나는가? 차가 납작쿵이 됐는데 차를 뜯어내고 보면 허물 하나도 안 벗어졌다. 잘 믿은 사람은 다 그렇게 되어져 있다. 그건 사실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걸 기적이라고 한다. 상제님 신앙을 잘할 것 같으면 말로써 형언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앙을 잘해서 그런 기적을 받아라. 꿈에도 바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도 없는 기적! 천신天神이 감동해서 천은天恩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을 해라.”
증자유질 맹경자문지 증자언왈 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기언야선
曾子有疾 孟敬子門之.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其言也善.
군자소귀호도자삼 동용모 사원폭만의 정안색 사근신의 출사기 사원비배의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 出辭氣 斯遠鄙倍矣
변두지사즉유사존
籩豆之事則有司存”.
증자가 병환이 깊었다. 맹경자가 병문안을 왔다. 이에 증자는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 새도 죽으려 하면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아름답고, 사람도 이 세상을 하직함에 그 말이 착하여 들을 만한 것이라오.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도道가 세 가지가 있다오. 용모를 움직일 때는 반드시 폭력과 태만을 멀리하시오. 얼굴빛을 바르게 할 때에는 반드시 신실信實함에 가까워야 하오. 말을 입 밖에 낼 때에는 비루함과 거역함을 멀리하시오. 예라는 것은 사소한 규정이 아니라오. 제기를 어떻게 진열할까 하는 일 따위는 유사有司에게 맡기시오.
- 『논어』 「태백泰伯」 (71쪽)
曾子有疾 孟敬子門之.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其言也善.
군자소귀호도자삼 동용모 사원폭만의 정안색 사근신의 출사기 사원비배의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 出辭氣 斯遠鄙倍矣
변두지사즉유사존
籩豆之事則有司存”.
증자가 병환이 깊었다. 맹경자가 병문안을 왔다. 이에 증자는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 새도 죽으려 하면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아름답고, 사람도 이 세상을 하직함에 그 말이 착하여 들을 만한 것이라오.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도道가 세 가지가 있다오. 용모를 움직일 때는 반드시 폭력과 태만을 멀리하시오. 얼굴빛을 바르게 할 때에는 반드시 신실信實함에 가까워야 하오. 말을 입 밖에 낼 때에는 비루함과 거역함을 멀리하시오. 예라는 것은 사소한 규정이 아니라오. 제기를 어떻게 진열할까 하는 일 따위는 유사有司에게 맡기시오.
- 『논어』 「태백泰伯」 (71쪽)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
“증산도 신앙을 잘하려면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고, 양심 속이지 말고, 진실되게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정의를 바탕으로 정의롭게 생활을 해야 한다. 이 증산도 종도사는 정의에 어긋난 것은 몸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절대 허락을 하지 않는다. 진리의 바탕 위에서 생사존망을 행위하는 사람인데 흔들릴 수가 있나. 또 정의롭게 사는 사람은 누가 건드리지도 못한다.옛 고고학에 이런 말이 있다.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敬이면,’ 말이 충성스럽고 믿음성이 있으면서 행실이 돈독하고 조심성이 있을 것 같으면, ‘수만맥지방雖蠻貊之邦이라도 행의行矣어니와’ 비록 오랑캐의 땅에서 산다 하더라도 행세, 행동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언불충신言不忠信 행불독경行不篤敬이면,’ 말이 충성스럽고 믿음직하질 않고, 행실이 돈독하고 조심성 있지 않을 것 같으면 ‘수주리雖州里나 행호재行乎哉아’ 비록 제 마을, 제 동네에서도 행세를 할 수가 없다.
사람이 정의롭게 거짓 없이 신용 지키고 남에게 믿음을 주고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아무 데 가서 살아도 잘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못돼 먹고 충실치 못하고 남에게 믿음성도 안 주고 행실도 고약하고 그럴 것 같으면 제 동네에서도 배길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은 지가 제 행동을 뜯어먹고 산다. 저하기에 매여 있다. 하니까 사람은 신앙을 떠나서도 우선은 정의롭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 남을 용서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위하는 봉사 정신, 내 에너지를 남에게 나누어 주는, 남의 걱정을 잘해 주는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인자仁者는 무적無敵이라, 착한 사람은 적이 없다.”
언충신 행독경 수만맥지방 행의 언불충신 행불독경 수주리 행호재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어린 제자 자장子張이 도道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것에 대하여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이 충신忠信하고 그 행동이 독경篤敬하면 비록 만맥蠻貊의 색다른 나라라 할지라도 도가 행하여질 수 있거니와, 말이 충신하지 못하고 그 행동이 독경하지 못하면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도 도는 행하여지지 않는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 (147쪽)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어린 제자 자장子張이 도道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것에 대하여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이 충신忠信하고 그 행동이 독경篤敬하면 비록 만맥蠻貊의 색다른 나라라 할지라도 도가 행하여질 수 있거니와, 말이 충신하지 못하고 그 행동이 독경하지 못하면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도 도는 행하여지지 않는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 (147쪽)
●적덕지가積德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
“사람 종자, 알캥이를 맺는 것은 조상에서부터 생활을 잘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지구 일 년에 곡식 종자가 70프로 열매 맺기도 하고, 80프로 열매를 맺기도 하고 알캥이를 꽉 차게 맺는 것과 같다. 조상에서 사회생활을 잘못하면 그 자손들은 가을철에 가서 빈 쭉정이밖에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은 조상들이 행위를 잘해서 덕을 쌓고 공을 쌓아 자손들에게 그 업적을 물려주는 것이다. 그게 혈통으로 물려지는 것이다. 그 진리를 알아야 한다.그래서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된다. 바르게 살면 그 업적이 자손에게로 간다.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면 “적덕지가積德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덕을 쌓은 집은 반드시 남은 경사, 남은 복이 있고’, 즉 좋은 복이 자손에게 물려진다는 말이다. 또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 ‘악한 것을 쌓는 집은 남은 악이 있다’, 조상에서 지은 악업이 자손에게 돌아간다는 소리다. 남에게 잘해 주고 적덕을 하면 자손에게 그 업적과 덕이 물려져 그 복이 자손에게 돌아가고, 못되게 생활하면 그 남은 악이 자손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사람이 좋게 살아서 좋게 사회생활을 하면 그 자손에게 복이 돌아간다. 그렇게 천지에서 사람 농사를 지어 가을이 되면 사람 씨알을 추린다.”
문언왈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文言曰 ···(중략)··· 積善之家, 必有餘慶 ;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선을 대대로 쌓는 집안에는 항상 그 후손들에게까지 남아돌아가는 축복이 있고, 불선을 대대로 쌓는 집안에는 항상 그 후손들에게까지 남아돌아가는 재앙이 있다. -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
文言曰 ···(중략)··· 積善之家, 必有餘慶 ;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선을 대대로 쌓는 집안에는 항상 그 후손들에게까지 남아돌아가는 축복이 있고, 불선을 대대로 쌓는 집안에는 항상 그 후손들에게까지 남아돌아가는 재앙이 있다. -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
도올의 책에는 수식하는 아름다운 말이라는 뜻의 문언文言을 비롯한 전傳(=십익)이 아쉽게도 없다. 실제 우리가 『주역周易』을 읽는다든가, 『주역』에 대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 “역경”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전易傳”에 관한 것이라고 역해자의 또 다른 저서인 『도올 주역 강해』에서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점으로서의 역이 아닌 학學으로서의 역은 공자가 지었다고 하는 십익十翼이라는 전傳의 세계에 쌓아 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적선지가”는 문언전에 나오는 내용이라 부득이 『도올 주역 강해』 154쪽 부분을 인용하였다.
여기에서 불선不善은 좋지 못하다는 뜻으로 실체적인 “악惡(the Evil)”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악을 싫어하다, 추하다는 의미의 오惡로 본다면 비슷한 뜻이 되기는 한다. 역해자는 불선을 쌓을 수 있는가 하면 선을 쌓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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