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9. 고조선과 관련된 고대기록(산해경, 사기 및 위략 등)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03 |
한국고대사 단편적 자료들⑨ 고조선 관련 기록들(산해경, 사기 및 위략 등)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고조선에 관련된 기록들(산해경, 사기 및 위략 등)
〇『산해경 해내경(산해경 海內經)』의 조선에 대한 기록들
산해경(山海經)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4세기 전후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해경 해내경(山海經海內經)에는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는 조선과 천독이 있는데 그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 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또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주1. 조선(朝鮮)은 지금의 낙랑현(樂浪縣)으로 기자가 봉해진 땅이다.
*주2. 열양(列陽)은 지금의 대방 유구현(大方有口縣)이 이것이다. 열(列)은 물이름(列水)이다.
***참고: 동해는 황해(黃海)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며, 북해(北海)는 발해만 지역으로 보인다. 낙랑은 진장성 부근에 위치한 곳이며, 대방도 마찬가지이다. 낙랑과 대방은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평양이나 황해도가 결코 아니다. 수양제가 평양을 향한 침략경로 중 낙랑은 좌12군의 12번째, 대방은 우12군의 11번째 침략경로에 위치한 땅이었다.
〇 사마천의 사기(史記: BC 108-91) 소진열전(蘇秦列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진이 연국(燕國)으로 간지 몇 해가 지나서 연문후(燕文侯)를 만난 후 연무후에게 말하였다. “연(燕)의 동쪽에는 조선(朝鮮)의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림호(林胡)와 루번(樓煩)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호타수(嘑沱水)와 역수(易水)가 있어 지방(地方) 2천여 리입니다.
무장군사(帶甲)가 수십만이고 600승의 병거와 6000필의 기병과 수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가졌습니다. 남쪽으로는 갈석(碣石)과 안문(鴈門)의 비옥함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이익으로 백성들이 비록 경작하는 수고가 있을지라도 대추와 밤의 이익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위 천부(天府)라고 하는 것입니다.”
(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 第九
(去游燕嵗餘, 而後得見, 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嘑沱易水, 地方二千餘里, 帶甲數十萬, 車六百乗, 騎六千匹, 粟支數年.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참고: 소진은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의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이 당시 요동은 조선의 영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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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신지(神誌)의 조선에 대한 기록
신지(神誌)는 고조선 때 부족의 군장(君長)을 이르던 말이라고 하며, 환단고기(桓檀古記 111p)를 보면 3세 단군인 가륵단군(加勒檀君: BC 2183-BC 2138년) 때 신지(神誌) 벼슬을 하는 고설(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케 하였다. 이를 보면 신지는 옛 고조선의 역사서로 볼 수 있다. 신채호는 ‘신지’를 수석대신(首席大臣)이라고도 하였다.
이조 태종(太宗)이 유학을 중심으로 삼고, 그 밖의 일체를 배척하여 이단(異端)으로 간주되는 서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는데, <신지(神誌)>도 그 때 불태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지의 내용 중 <고려사(高麗史)> 김위제전(金謂磾傳)에 다음 글자가 적혀 있다.
“조선은 마치 저울대, 저울추 및 저울판(접시)과 같은데, 저울대는 부소량(扶疎樑)이고, 저울추는 오덕지(五德地)이며, 저울판은 백아강(百牙岡)에 해당한다. 조공하고 항복한 나라가 70국이다. 그 덕에 의지하여 단군의 정신을 지켜나갔다. 우두머리와 말미가 같은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니 나라가 흥성하고 태평을 이루었다. 그러나 만약 이들 삼경(三京) 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왕업은 쇠하여 기울어질 것이다.”라고 한 10구절만 전해졌다.
김위제는 삼경을 평양과 개성과 한양으로 말하고 있으나, 신채호는
“대단군의 삼경(三京)은, 그 하나는 지금의 하얼빈이니, 고사(古史)에 부소가(扶蘇岬) 혹은 비서갑(非西岬) 혹은 아사달(阿斯達)로 기록된 곳이며, 두 번째는 지금의 요령성 해성(海城)᠂개평(蓋平) 등지로서 고사에 오덕지(五德地) 혹은 오비지(五備旨) 혹은 안지홀(安地忽) 혹은 안시성(安市城)으로 기록된 곳이며, 세 번째는 지금의 평양(平壤)이니, 고사에 백아강(伯牙岡), 혹은 낙랑(樂浪), 혹은 평원(平原) 혹은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라고 말하여 하얼빈과, 개평과 평양을 삼경(三京)이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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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사기 흉노열전의 진개(BC 311-279)에 대한 기록
사기 흉노열전(『史記』卷一百十, 匈奴列傳第五十)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BC 311-279)가 있어 호(胡: 고조선)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1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연나라는 또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서 동호의 침략을 막았다.(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참고: 연(燕)나라는 동호(조선)에 왕자와 진개를 인질(볼모)로 보낼 정도로 약소국이었으나, 진개의 침략으로 1000여리의 땅을 잃었는데, 그곳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이며, 이 지역은 고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연나라는 또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이다. 양평은 하북성 당산시로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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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에 기록된 진개의 고조선 침략
삼국지 위서(『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韓)에는 다음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다.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참고: 진개가 볼모(인질)로 가 있던 나라를 전술한 『사기(史記)』에서는 동호(東胡)라고 기록했는데, 후술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는 조선후(朝鮮侯)가 자칭 조선왕(朝鮮王)이라고 하였고, 진개가 이 조선을 침략하였다고 하였다.
***참고: 전술한 바와 같이 연장성의 동단 양평(襄平)은 『後漢書 李賢의 註』에 의하면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후한서』「원소유포열전(袁紹劉表列傳)」의 주석에서도 “양평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해있다. 그 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襄平縣 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라고 하였다. 노룡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며, 이보다 서남쪽에 있는 양평(襄平)이란 곳은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 상술한 위략(魏略)에서 진개가 조선을 침략한 땅이 2천리라고 한 것은 위략을 기록한 진(晉)나라 당시 한사군땅을 함께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한사군 땅을 포함한 면적으로 보인다. 일부는 사방 천리씩 2천리라고도 하고, 일부는 만번한이 개평(蓋平), 해성(海城) 지역으로 보고 이 이내 지역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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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의 조선에 대한 기록
사기 진시황 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재위 246-210년)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종식시키고 마침내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스스로 자신이 삼황오제(三皇五帝)에 견줄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했던 인물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나누어 36개의 군으로 만들고 郡(군)에는 守(수)와 尉(위)와 監(감)을 두었다. 백성(民)을 黔首(검수)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영토는 동쪽으로 海(해:발해)와 朝鮮(조선)에 다다르고, 서쪽으로는 臨洮(림도)와 羌中(강중)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北嚮户(북향호)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황하(河)에 의지하여 요새(塞)로 하였고 隂山(음산)을 아울러 遼東(요동)까지이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第六
分天下以為三十六郡, 郡置守 尉 監. 更名民曰黔首 地東至海曁朝鮮,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户, 北據河為塞, 並隂山至遼東)”
사기정의(史記正意)는 아래와 같이 주석하였다.
“바다는 발해 남쪽의 양주, 소주, 태주의 동쪽 바다를 말한다. 기(曁)는 ‘다다르다’의 뜻이다. (조선은) 동북쪽 조선국이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의 왕검성이다. 바로 고조선이다”
(海謂渤海南至楊,蘇,台等州之東海也 曁及也 東北朝鮮國 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漢樂浪郡 王險城 卽古朝鮮也)
***참고: 사기에 진시황 “영토가 동쪽으로는 바다(海)와 조선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동쪽은 조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괄지지에 “바다는 남쪽 양주에서 소주 태주 등의 동쪽 바다”라고 하였다. 이 설명은 진나라의 바다가 지금의 발해만으로 추정되고, 고조선의 영토는 만리장성의 기점인 갈석산을 기준으로 현 중국의 하북성 일대까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본래 한(漢)나라의 낙랑군 왕검성이라고 하였고, 옛날 고조선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낙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수양제가 고구려 평양을 향해 진격하는 우12군 12번째 침략로에 낙랑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접경지대 고구려 땅에 있는 낙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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