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장무이무덤의 벽돌은 고구려관리가 만들어준 것이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7-16 |
○ 장무이부덤의 벽돌은 고구려관리가 만들어준 것이다
인터넷에 장무이 부덤에서 나온 벽돌에 대한 기사가 있어서 올립니다.
http://www.kma18.org/thought/damul5.html
▲장무이전(張撫夷塼)
1912년 10월 15일 세끼노가 황해도 사리원역 동남방 1.5Km 지점에서 '漁陽張(어양장)'이란 명문이 있는 벽돌조각을 여러 개 얻었고, 그 부근 고분을 발굴하여 현실(玄室, 북쪽방)을 구축하고 있는 벽돌 중에 '帶方太守 張撫夷 (대방태수 장무이)'라 적힌 벽돌이 발견되어 그들은 이를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을 실었고, 그 해설에는 그 전편(全片)의 3개 문장을 실으면서 이를 근거로 황해도 일대가 한(漢)의 대방군(帶方郡) 지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① 「天人小人 供養君子 千人造塼 以葬父母 旣好旦堅 典覺說文 使君帶方太守張撫夷」
(천인소인 공양군자 천인조전 이장부모 기호단견 전각설문 사군대방태수 장무이)
하늘이 소인을 낳으시와 /군자를 공양하게 하였도다./
천명의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어 /부모로 장사지내나이다/
이미 좋고 또한 견고하니 /이에 글을 새겨 예를 밝히노라./
사군대장태수장무이시여
② 「哀哉大人 奄背百姓 子民憂戚 夙夜不寧 永則玄宮」
(애재대인 엄배백성 자민우척 숙야불녕 영칙현궁)
슬프다 대인이여 /문득 백성을 버리셨도다. /백성들이 슬퍼하여 /아침저녁 편안하지 못하나이다. /길이 현궁 곁에서 원통한 마음을 다할 바를 모르나이다.
③「趙主簿 令塼 懃意不臥○」
(조주부 영전 근의불와○)
조주부가 명령하여 이 벽돌을 만드니 은근한 뜻을 마지 아니 하도다
-③번 문장의 '주부(主簿)'는 그 당시 중국에는 없는 관직이며 고구려의 5등관의 하급관직명이다.
이러한 고구려 하급관리의 명에 의하여 천명의 인부가 무덤 축조에 쓸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방태수 장무이가 고구려의 포로가 되어 있다가 죽은 것이고, 벽돌을 만든 사람들도 포로들이었을 것이다.
- 좌씨전(左氏傳)에 따르면 양공 25년에 '최씨가 장공(莊公)을 북곽(北郭)에 매장(側)하였다가 정해(丁亥)일에 사손이란 마을에 장사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側(측)'은 장공이 시해를 당했기 때문에 예(禮)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임시로 그 곁(側)에 두었다는 뜻이다.
②번에서 '則(칙)’ 역시 장무이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구(柩:시체)를 북쪽 방(玄宮) 한쪽 곁(側)에 묻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대방태수 장무이가 자기가 다스리던 대방군에서 정상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이역 땅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죽었기 때문에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리원을 비롯한 황해도 지방이 장무이가 다스리던 한(漢)의 대방군이 있던 곳이 아니라 장무이를 비롯한 한의 천 여명의 군사들이 고구려에 포로가 되어 이 곳에 수용되었다가 장무이가 죽자 이곳 수용소의 고구려 관리 조주부가 명하여 포로 천여명으로 하여금 위 3개 문장을 새긴 벽돌을 만들어 고분 현실(玄室:세끼노가 발굴)을 쌓고 이곳에 곁 붙여 묻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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