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만주원류고의 삼한 위치와 마한 치소인 개평(蓋平)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7-15 |
○만주원류고의 삼한위치와 마한 치소인 개평(蓋平)
청나라 고종(건륭제)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연원에 대하여 역사지리적으로 고찰하라는 명을 내림에 따라 청나라 건륭제 42년에 만들어진 역사지리서가 『흠정 만주원류고』이다.
『만주원류고』에는 삼한(三韓)뿐 아니라 숙신, 부여, 말갈, 신라, 발해 등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겼다. 삼한(三韓)에 대해 『만주원류고』는,
“삼한의 방위와 위치는 대개 지금의 봉천(심양) 동북에서 길림 일대에 준해 있었고, 조선에 접해 있던 땅이며, 우리나라의 국조(누루하치)가 처음 터를 잡았던 곳과 가까운 곳이다(方位準之蓋在 今奉天東北 吉林一帶 壤接朝鮮 輿我國始基之地相近)이라고 하였다.『滿洲源流考 卷二 部族二 三韓』
위의 기록을 보면 삼한(三韓)이 현재의 요동반도 요령성과 북쪽의 길림성 지역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만주원류고 강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생각하건데 삼한은 부여, 읍루 두 나라의 남쪽에 있었는데, 무릇 78개국을 통치했으며, 면적은 합해서 사방 4천리이었다. 마한은 진한의 서쪽에, 진한은 동쪽에,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었는데, 마한의 북쪽은 낙랑과 접해 있고, (마한의) 치소는 지금의 개평, 복주, 영해이다”(謹安三韓 在夫餘挹婁二國之南 所統凡七十八國 合方四千里 馬韓在西 辰韓在東 弁韓在辰韓之南 馬韓北與樂浪接 所轄則在今 蓋平復州寧海) 『滿洲源流考 卷八 疆域 三韓故地』
만주원류고에서는 마한을 통치한 수도의 위치를 현재의 요동반도에 있는 요녕성 개현(蓋顯)이고 복주는 현재의 복현(復衒) 서북부 지역이며, 영해(寧海)는 여순시와 대련시 보다 약간 위쪽에 있다.
또한 진수는 『삼국지』 ‘한(韓)’조에서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은 왜와 점경하니 면적이 사방 사천리(남북, 동서 각각 4천리)라고 했는데, 이 기록은 만주원류고를 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요동반도에 있는 마한의 통치 기소로 볼 때 사방 4천리가 서로 맞는 말이 된다.
○한서지리지의 평양왕검성은 요서 개마현(蓋馬縣)에 있었다고 기록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 注[一]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
위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느시 개마(蓋馬)에 대한 설명 중에 개마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한 땅일 뿐 아니라 이곳이 곧 평양와검성(平壤王險城)이라고 했으므로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만 정확히 안다면 평양왕검성의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유주와 계주 등지를 순행하면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요동과 갈석에서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계획을 밝힌다. 이듬해(AD 645),
“<四年 夏四月 世勣 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 進至遼東城下.> (4년 여름철 4월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서 현도에 이르렀다. 고루려의 성읍주민은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 갔다......오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모두 죽었다. 이세적은 더 나아가 요동성 아리에 이르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현도는 요하를 건넌 다음 고구려의 현도성에 다다른 것이며, 이후 진군한 요동성과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다. 다시 말해서 요하와 요동성의 중간에 현도성(玄菟城)이 위치해 있다. 또 개마현(蓋馬縣)이나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현도군에 소속된 것이므로 요하를 건너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평양 왕검성은 기록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드시 요하를 지나 요동성에 이르기 전에 위치되었던 현도군의 소속현 개마에 위치해 있었고, 현도와 가까운 위치이며, 결코 지금의 평양은 아니다.
○ 당의 이세적뿐 아니라 수양제도 현도군을 평양공격 루트로 삼았다.
위에서 당나라 이세적이 요하를 건넌 다음 바로 예전 평양왕검성이 있던 개마현(蓋馬縣)의 치소(治所)인 현도성을 공격하였고 이후 요동성을 공격하여 현도성은 요하와 요동의 중간에 위치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수양제 113만 군의 고구려 침략시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누방), 2) 장잠(장잠), 3) 명해(명해), 4) 개마(蓋馬), 5) 건안(건안), 6) 남소(난소), 7) 요동(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夫餘), 10) 조선(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라고 하여 평양왕검성이 있던 4)번의 개마(蓋馬)와 그 치소인 8)번의 현도(玄菟)를 침략루트로 지나고 있다. 아울러 한사군이었다는 12)번의 낙랑(樂浪)과 옥저(沃沮)를 침략루트로 지나고 있어서 이병도 같은 국사매국노가 주장하는 평양 낙랑설이나 함흥 옥저설은 가당치도 않은 매국노의 역사왜곡인 것이다.
○ 평양에 대한 다른 기록들
“11대 동천왕 21년(AD 247년)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리(*관구검의 침입)를 겪었으므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명은 본래 선인 왕검(王儉)의 택지였다고 하였고 또는 왕의 도읍지를 왕검이라 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이곳에 기록된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다. 지금의 평양성은 장수왕 때 옮긴 것이므로 다른 지역이다. 평양성을 선인 왕검의 택지이었다는 기록을 볼 때 앞서 기록된 현도군 개마현에 위치한 왕검성 평양일 가능성도 있다.>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의 기록에 볼 수 있드시 15대 미천왕 3년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범하여 8,000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여기에 나온 현도는 요동성과 서쪽의 요하 사이에 현도가 있었으므로(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고) 이곳에서 사로잡은 8,000명은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이 아니고, 현도군 개마현(예전의 평양성이며, 왕검성)으로 옮긴 것으로 확실히 이해하여야 한다.>
“16대 고국원왕 4년(AD 334년) 추 팔월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增築 平壤城). 5년 춘정월 축북국신성(築國北新城). 9년 연왕 황(모용황)이 침입하여 그 군사가 신성(新城)에 미치니 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돌아갔다.”
<*위의 기록에서 증축한 평양성은 신성(新城)과 더불어 연(燕)의 침입을 막고자 증축한 성이므로 지금의 평양성이 아닌 연나라와 국경지대에 있는 평양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전술한 평양왕검성과 동일지역일 것이다.>
“고국원왕 13년(AD 343년) 추 칠월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왔으니,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秋七月 移居平壤 東黃城 城在今西京東 木覓山中)”
<*위에서 왕이 옮겨 간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평양 동쪽에 동황성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또 지금의 평양은 장수왕 때 옮겼으므로 여기에 표시된 평양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이곳의 평양 역시 평양와검성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명은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1년(AD 371년) 동 시월에 백제왕(근초고왕)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와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아 이당 23일에 왕이 서거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지금의 평양과 같은 지역일 가능성이 높으나, 광개토대왕 이전에는 백제가 대륙에도 영토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광개토대왕은 아마도 대륙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여 58개의 성(城)과 700개 촌을 정복하였다) 근초고왕이 대륙에 있었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대 장수와 15년(AD 427년) 장수왕 15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十五年 移都平壤)”
여기에서 도읍을 옮긴 곳은 지금의 평양이 확실하다고 본다.
<참고>
https://blog.naver.com/wooyth/70089250594
https://blog.naver.com/hwarm/80168622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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