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요령성 금서시 태집둔에서 발굴된 임둔태수 인장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7-14 |
○요령성 금서시 태집둔에서 발굴된 임둔태수 인장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5&key=20080903.23021211227
한민족의 뿌리 - 단군조선을 찾아서 <4> 잠든 임둔군을 깨우다
요서땅 `임둔군`은 고조선 유물의 寶庫
고조선→위만조선→한나라 한사군…
요서 태집둔 일대는 한사군 임둔군 자리
이곳 토성 유적서 태수직인 '봉니' 출토 인근지역서 쏟아진
청동거울·질그릇 등 중국의 학계에서도고조선 계통 인정
중국 금서시 태집둔 =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 입력 : 2008-09-02 21:18:49
랴오닝성 금서시 태집둔에 있는 고조선시대의 토성터. 가운데 둔덕처럼 솟아난 부분이 토성이다. 옛 고조선의 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국 땅의 솟대
두엄 냄새가 후룩 끼쳐왔다. 농도가 진하다. 중국의 농촌 두엄은 한국보다 더 독한 것 같다. 사람이 다르고 음식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을 지 모른다. 그런데 '중국산 농산물'에 대한 선입견만 아니라면, 풍토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길가의 포도밭과 나지막한 산지의 밭을 차지한 콩과 옥수수는 길손을 편안하게 한다.
비온 뒤라 땅이 질척거린다. 답사단이 가는 곳은 랴오닝성(遼寧省) 금서시(錦西市) 태집둔(邰集屯) 소황지(小荒地). 요서(遼西)의 중서부로 발해만에서 약 30㎞ 떨어진 곳이다. 요서 땅은 남북으로 길게 누운 노노아호(努魯兒虎) 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광활한 평원지대가, 서쪽으로는 해발 500m 이상의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역사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인후부 역할을 한 곳이다.
"어, 솟대다!"
답사단의 누군가가 장대를 발견하고 놀라 소리친다. 높이 4m 가량의 장대 끝에 새 모양의 조형물이 올라앉아 있다. "중국땅에도 솟대가 다 있네…." 궁금증이 발동했지만 누구도 섣불리 해석을 못한다. 소황지 마을 주민에게 슬쩍 물었더니 "오래전부터 믿음으로 세워져 있던 것"이라고만 짧게 얘기한다.
솟대문화는 시베리아 만주 몽골 일본 등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나 대부분 소멸되고 한국에만 토착화돼 남아 있다. 기원은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시대에는 소도(蘇途)에 솟대를 세워 신성구역임을 표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가 나왔죠." 금서시 태집둔 유적에서 복기대 교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임둔군의 존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아래 사진은 봉니에 찍힌 인장.
2000년만에 찾아낸 '임둔'
소황지 마을 주민들은 두엄 냄새에 파묻혀 살면서도 표정들이 순박했다. 20여 명의 답사단이 질퍽해진 포도밭과 콩밭을 가로질러 걷는데도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잔잔한 미소를 돌려준다. 얼굴 가득 팬 주름들이 밭이랑을 닮은 듯 했다. 철길을 건너고 포도밭을 지나자 들판의 개활지에 나지막한 둔덕이 나타났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러한 둔덕이 곧 천연의 성벽이 될 것 같았다.
"이곳이 토성터예요.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갑니다. 여러 시기의 유물이 나왔는데,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것도 적지 않았어요. 바로 고조선 문화죠. 자, 땅도 보면서 걸으세요. 아주 이른 시기의 토기편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복기대 교수가 현장 강의를 한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복 교수는 7년 간 요서-요동지방에서 고고학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다. 걷다보니 그의 말대로 곳곳에 토기 쪼가리가 눈에 띈다. 토성은 둔덕의 자연지형을 이용한 것으로 높이가 2~4m 정도였다. 지형탓인지 보호조치가 되지 않아 일부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둔덕을 따라난 토성을 돌아나오자, 잡풀이 무성한 언덕빼기가 눈앞에 나타난다. 복 교수가 답사단을 불러 모았다. "이곳에서 봉니가 나왔어요. 역사적인 자리예요. 사진이라도 한판씩 찍어두세요."
그의 말 속에는 실로 엄청난 역사적 무게가 실려 있다.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임둔군(臨屯郡)의 새로운 입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정적 유물이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 적힌 봉니(封泥)다. 봉니는 고대 중국이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예외없이 직인이 찍혀 사료가치가 아주 높다. 그런 봉니가, 그것도 '임둔'이란 직인이 찍힌 채 나왔다고 하니 역사적일 수밖에.
한사군은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고조선(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영역에 설치했다는 낙랑·임둔·현도·진번 등 한의 4개 행정구역을 말한다. 이는 한국 고대사의 뇌관이자 아킬레스건이었다. 그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고조선사가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임둔군이 요서 땅에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으니….
서한(西漢)의 인장이 확실
태집둔 토성 유적은 지난 1993~94년 지린대(吉林大)박물관과 랴오닝성 고고문물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발굴됐다.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14세기의 하가점 하층문화를 비롯해, 후대의 요나라 시대까지 크게 4개로 구분되는 문화층이 확인된 것이다.
이 중 '임둔태수장' 봉니는 가로 세로 크기가 3x3㎝로, 중심 연대가 서한(西漢)에 해당하는 제3기 문화층에서 출토됐다. 요서지방의 청동기를 집중 연구해온 복 교수의 심안이 봉니를 놓칠 리 없었다.
"이거구나 싶었죠. '임둔' 봉니는 문헌이나 비교 자료로 볼때 규격과 서체, 문장 등이 서한의 규정과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한나라 조정에서 임둔군 태수(군 우두머리)에게 보낸 것으로 봐야 합니다."
지난 2002년 복 교수가 쓴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라는 논문을 보면, 논증이 구체적이고 치밀하다. 봉니의 글씨는 전서체로 한대(漢代)의 관가 또는 묘지에 쓰는 서체와 같고, 재질과 제작 방식도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한(漢)은 2000석 이상의 녹을 받는 관리는 은인(銀印)을 사용하게 했다. 태수(太守)는 은인 사용자에 해당하므로, 임둔군 태수 인장에 '臨屯太守章(임둔태수장)'이라 적은 것은 서한의 중앙정부 규정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복 교수의 논문이 발표됐을 때 국내 언론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한사군의 위치를 재검토하게 하는 결정적 자료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단 사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하 내용 생략: 인터넷에서 본문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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