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낙랑과 관련된 25개현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국경부근에 있었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7-12 |
낙랑과 관련된 25개 현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국경부근에 있었다.
○전한서 지리지에 낙랑과 관련된 25개현
전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에 관련된 25개 현이 있다고 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朝鮮), 남함, 패수, 함자(含資), 점제, 수성(遂城),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방, 해명(해명), 열구, 장잠(長岑), 둔유, 소명, 누방,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 동이(東이), 불이, 잠대, 화려, 야두매, 전막, 부조 등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평양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지명은 (1)낙랑, (2)조선, (3)함자, (4)수성, (5)증지, (6)대방, (7)장잠, (8)제해, (9)혼미, (10)동이 등 10개 군현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지역은 모두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 부근 고구려 땅인 것이다. 낙랑이 평양일 수 없고, 수성이 황해도 수안일 수 없으며, 대방이 황해도와 경기도 땅일 수 없고, 동이가 함경도 덕원일 수는 더더욱 없다.
나머지 1)남함, 2)패수, 3)점제, 4)사방, 5)열구, 6)둔유, 7)소명, 8)누방, 9)탄렬, 10)불이, 11)잠대, 12)화려, 14)야두매, 15)전막, 16)부조 등이 있는데, 화려를 비롯한 이들 지역 역시 요하 부근의 고구려와 수나라 국경지대에 위치한 지역이지 결코 평양이나 평양 주면일 수 없다고 본다.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성현리에서 1914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古蹟調査團)에 의하여 발견되었다는 점제현 신사비는 왜인(倭人)들에 의해서 평안남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본인은 위에서 보인 여러 지역과 함께 점제현도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 부근에 있던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놈들은 역사왜곡과 역사조작을 위해서 갖은 악랄한 짓을 했어도 후대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이 점제현의 위치조차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점제현 신사비를 제책에 올려놓고 낙랑이 평양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하여 한국사매국노 짓을 한 이병도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 점제현 신사비에 대한 비평
https://blog.naver.com/10sunmusa/222059980389
(1)세키노 타다시 등 조선총독부의 ‘일사천리’의 유물 고증 소견
①“고아하고 투박한 서체”를 위진대 전후의 것으로 단정
②그 돌이 최초 발견된 지점을 점제현 관할지로 선포
③어을동 고성의 한대 와당 일부를 근거로 낙랑군 치소 터로 단정
④이상에 근거하여 인근을 흐르는 하천을 고대의 열수로 확정
(2)위당 정인보의 문제 제기:
“내가 그 각석을 보기에는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아서 그 길이가 너비보다 약간 긴 것 같다. 앞면에는 행을 나타내는 줄이 있고 테두리를 둘렀는데 그 테두리 밖은 다듬지도 않았고 두께도 얇은 편이다. 그리고 뒷면은 기록이 고르지 않은 것이 바로 암벽에 새겼던 것이지 받침을 대고 세워 놓았던 것이 아니다. 글은 일곱 행인데 그 첫 행과 6-7행은 위쪽 모서리가 모두 비스듬하게 떨어져 나갔으며, 그 나머지 부분들은 결을 따라 깨지고 모가 닳아 버린 부분이 많았다.” (졸역, 《조선사연구》, 상책, 제775-776쪽, 2012)
(3)정인보가 제기한 ‘점제현 신사비’의 문제점들:
①통상적인 비석보다 낮고 작고 얇다
②테두리 바깥을 전혀 다듬지 않았다
③앞면은 반반한데 뒷면이 울퉁불퉁 하다 (암벽에서 떼어낸 것?)
④위쪽 모서리 글자들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나갔다
⑤다른 부분도 결이 깨지고 모가 닳아 있다
(4)북한 학계의 과학적 분석 소견
①이른바 ‘점제현 신사비’ 기초부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
②돌의 화학성분이 인근 지역의 화강석과 큰 차이
③화학성분에 근거할 때 문제의 돌은 요하지방의 것과 유사
④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결과 인근지역과 2-3천년의 시차
⑤타 지역에서 만들어서 용강으로 옮겨 놓았다는 결론
[출처]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가짜? 왜?|작성자 어이무사10
(5)선사고고학의 아버지 손보기 교수 주장
점재현신사비도 지금 있는 곳은 2천년 전에는 물이 들어왔던 곳인데 어떻게 그곳에 비를 세울수 있겠어요 ? 옛 사람들은 비를 세우기도 하지만 산의 바위를 쪼아내고 그곳에다 꽉끼어 맞는 비를 세우기도 하였어요 갈석산에 보면 신사비 크기의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있으며 신사비의 돌을 조금떼어내고 갈석산의 돌을 떼어서 맞추어 보면 딱 맞아요 일본인들이 배로 실어다가 10리 밖에 못와서 그곳에 뉘어놓고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배경으로 비의 사진을 찍어서 그곳이 낙랑의 점제현이다. 그러니 확실히 낙랑군이 아니냐라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6) 이것이 진실이다 저자 이태룡 주장
열수는 서쪽으로 점선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8백 20리를 흘러가다. 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한서(漢書)』 권28하 지리지(地理志) 낙랑군(樂浪郡) 탄열현(呑列縣) 주(注 -<한서>에 나온 내용을 살펴보면 열수가 여선을 경계로 하여 나눠지고 점선현에 이르로 8백 20리를 흘러가다고 하였은데 평남 용강군은 바다와 불과 10리 길입니다.
* 참고 :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후한서) 그럼 그 서쪽에 점선현이면 어디쯤인가 가늠해보기 바란다.
(8) 개인적인 의견을 붙이자면
이병도는 점제현 신사비의 사진까지 국사교과서에 실으며
“낙랑은 420년동안 지배냈던 것이었다”라는 식으로 자랑스럽게 써놓았다.
정인성 교수는 선사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 손보기 교수도 재야사학이라고 말한다.
자신들과 다르면 누가 되었든지 재야사학이고 유사역사학이다.
임기환 교수 말마따나 진위여부에 관심이 없다.
진위여부를 연구를 안하고 그냥 점제현 신사비를 활용할뿐이다.
어떤 것을 활용하기에 앞서 진위여부를 판단해야 하는거 아닌가?
어떻게 가짜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우리나라 서예사의 최초 비석이라고
반열에 올려놓는단 말인가?
송호정 교수 일부러 조작할 능력은 안되는거 같다고? 그게 말이냐 방구냐?
그게 학자가 할말이냐?
“에이 머 그런걸 조작을 하겠어요?”
일본이 조작의 대가라는 것은 누구도 아는 사실인데 조작할 능력은 안된다고?
이문영이 말한거는 장거리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역사학계의 판단이라는거다. 비석의 규모? 점제현신사비는 높이 166㎝, 너비 108㎝, 두께 13.2㎝.이다 일제는 광개토태왕비문이 37톤인데도 옮길려고 했었다. 사람크기 정도의 점제현신사비를 배에 싣고 옮기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마음먹으면 이정도는 충분히 이동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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