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중국의 북연과 고구려에 항복한 북연 글쓴이 이태수 날짜 2021-08-15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중국의 북연(北燕)과 고구려에 항복한 북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C%97%B0

위키백과 내용에 일부 참고자료를 첨부하여 올립니다)

 

북연(北燕, 407~ 436)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때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고운(모용운)이 후연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국가이다.

 

건국과 멸망

선비족들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희는 폭군이었다. 선비족화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은 고구려인인 모용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참고: 고구려 왕족 고운)은 선비족의 북조에서 황제라는 칭호로 쓰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

 

후연 시기(*참고: 후연(後燕, 384~ 407)은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연()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4개나 되기 때문에, 두 번째로 건국된 이 나라를 후연이라고 부르며 구별하였다. 후연은 고구려와 끊임없이 대립했으며, 훗날 고구려 왕족 출신의 고운(高雲)이 황위를 찬탈하고 북연(北燕, 407~ 436)을 세우면서 멸망하였다.)에 연나라는 고구려와 오랫동안 대치하거나 고구려에게 공격을 받았고 침략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08년에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으며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사실상 후연(後燕)은 고구려의 속국이 된다.

 

고운은 친한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강한 권력을 갖게 하였는데 이반과 도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이상 더 큰 권력을 주지 않는 고운을 원망하여 그들이 직접 군주가 되려고 409년에 고운을 공격해 암살하였다.

 

풍발은 고운이 암살된 뒤 일어난 혼란을 평정하려고 했고 이반과 도인을 주살했으며 스스로 고운의 뒤를 이어 천왕(복조의 황제 호칭)으로 즉위하였다.풍발이 즉위하고도 강대했던 고구려의 입김이 속국인 북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계속 화친하고 중국인들에게 야욕을 가지고 중국인들을 정복하며 등장한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와 대립하였다. 이 북위와의 대립은 풍발이 살아 있을 때만해도 서로 대등한 양상이었으나 풍발이 죽자 북위가 점차 우세해지게 된다.

 

풍발의 황태자와 풍발의 동생인 풍홍이 천왕(북조의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어 북연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결국 풍홍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연의 내전은 조정을 혼란과 동요케하여 국가의 위기로 이어졌으며 한편으론 북위의 침입을 쉽게 만들어준 결과를 낳았다.

 

내전 이후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에 종주국(宗主國)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기를 요청하였다.

 

결국 풍홍이 예측한 대로 436년에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 하였으며 이에 장수왕은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홍과 수많은 후연 귀족들과 여성들과 백성들을 끌고 갔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다가 장수왕에 반역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의 처제와 자식을 인질로 잡고 풍홍은 고구려의 외곽지역인 북풍으로 강제 이송시킨다.

 

그러자 풍홍은 남조의 유송에 망명요청을 했다. 이에 응한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를 고구려로 보내 풍홍을 망명시킬 것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풍홍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438년에 중국인 풍흥의 처와 모()만 남기고 풍흥을 사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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