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112. 옥저가 함흥이라는 이병도등의 주장은 폐기되야한다. 옥저는 요서에 있었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3-26 |
고대사112. 옥저가 함흥이라는 이벙도등의 주장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옥저는 요서지방에 있었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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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들이나 이병도 등 왜놈들의 식민사관 추종자들은 함흥지방을 옥저라고 비정하여 아직까지 한국사 XXX 짓을 계속하고 있다. 옥저는 함흥지방이 아니라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위의 삼국사기 영양왕조 기록을 볼 때 옥저(沃沮)는 수양제의 대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하는 고구려의 서쪽 국경지대에 있던 땅이지 결코 함흥지방이 될 수 없음에도 이병도같은 한국사 XXX나 그를 추종하는 왜색 식민사학자들에 의하여 아직까지 옥저(沃沮)를 함흥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수양제가 평양을 향해 진격하면서 그 중간 지점에 함흥을 거쳐 진격하라고 명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놈들이나 왜놈들의 주장을 추종한 한국사 XXX 이병도같은 자들의 주장인 함흥(咸興) 옥저설(沃沮說)은 반드시 폐기되고, 고구려의 서쪽 국경지대에 옥저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이에 따라 옥저의 위치도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북옥저나 남옥저에 대한 한서(漢書)와 『삼국지』의 기록이 있지만, 옥저가 함흥이라는 것은 왜놈들이나 이병도같은 놈의 주장을 추종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습이 모두 남옥저와 같다. 경계는 남으로 읍루이고, 읍루 사람이 배 타는 것과 노략질을 즐기니,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여 늘 여름에는 바위구멍에 숨어있다가 겨울에 이르러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와 읍락에서 살았다. 한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서 베옷을 하나 얻었는데 그 모양은 보통사람 옷과 같으나 양 소매가 삼장이나 되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언덕 위에서 보니 한 사람이 부서진 배를 타고 오는데 목 복판에도 얼굴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죽었다. 또 말하길 바다 가운데에 여인국이 있어 남자가 없다. 혹 전하기를 그 나라에는 신의 우물(神井)이 있어 이를 보면 쉽게 아이를 낳는다. [주: 위지(魏志)에 관구검이 왕기를 파견하여 구려왕 '궁'을 쫓아 옥저 동쪽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어 전한 것이다.]
○네이버지식백과 문화원형용어사전에 올려진 북옥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지역으로 여겨진다. 『삼국지』 권28 구검전(丘儉傳)에는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가 왕기의 추격을 받고 옥저(沃沮)에서 천 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까지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 매구(買溝)를 남옥저의 일부로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삼국지』 권30 위서 옥저전에 ‘宮(位宮으로 곧 東川王--주석자)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買溝) 去南沃沮八百餘里’라 한 것에 의거하여 동천왕이 북옥저 지역 곧 간도(間島)지방으로 도망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위의 주장을 보면 위나라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 동천왕을 남옥저에서 800리 떨어진 숙신의 남쪽 간도지방(北沃沮)까지 도망을 쳤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자는 함경남도 문천(文川)까지 도망쳤다고 하는데,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주장이다. 삼국사기에도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XXX들은 서슴치 않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동천왕조 기록
삼국사기 동천왕조 20년(AD 246)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천왕 20년 왕은 사잇길로 전전하여 왕이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군의 추격이 그치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동부사람 유유가 나와 말하기를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모두 함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교가 있습니다....유유가 칼을 식기에 숨겨둔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이 혼란에 빠져 전열을 가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 퇴군하고 말았다.“(東川王 二十年 王間行轉輾 至 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 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愚計....紐由 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 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 搖亂不能陳 遂自樂浪 而退...)
***위의 기록을 보면 왕이 관구검의 추격을 피해 남옥저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남옥저는 이병도같은 XXX나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함흥이 아니다. XXX들은 동천왕이 남옥저(험흥)에서 북옥저(가노)까지 도망쳤다고 하기도 하는데, 관구검의 위군이 백두산을 넘고 개마고원을 넘어 함흥까지 진격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도 없는 허구이며, 간도까지 와이 도망쳤다면 어찌 바로 왕이 세길로 나누어서 위군을 격파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 위군이 평양에 위치한 낙랑으로 퇴군했다고 XXX들이 주장하는데, 낙랑은 평양이 아니다. 낙랑은 수양제가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으로 향하라”고 지시한 수양제의 침략로 좌12군 12번째 진격로가 낙랑인 것이며, XXX들이 주장하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동천왕 21(AD 247년)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천왕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평양으로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왕의 도읍지를 <왕검>이라고 했다“고도 하였다.”(東川王二十一年 春二月 王以 丸都城 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本仙人 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 王儉)
***이 기록을 보면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난리를 겪은 다음해 동천왕은 관구검에 의해서 완전히 황폐된 환도성에 더 머물 수 없어서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이곳으로 백성들과 사직을 옮겼다. XXX들이 주장하는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면 어떻게 동천왕이 21년(AD 247년) 어떻게 미천왕 14년(AD 313년)까지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이 망하기 67년 전(AD 247)에 낙랑이 버티고 있는 평양으로 서울과 사직을 옮길 수 있었겠는가? 또 이 평양성은 본래 단군왕검의 도읍지라고도 하였으므로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은 XXX들이 주장하는 백두산이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이거나 또는 노호아산맥이며, 평양은 백두산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이거나 또는 노호아산맥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평양(왕검성)이 위치했던 개평은 지금의 요령반도 중간의 개주(蓋州)시다. 단재 신채호는 ‘평양패수고’에서 개주시 조금 위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를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고 위당 정인보(鄭寅普)도 1946년 ‘조선사연구 상(上)’에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 평양과 원래 무관하다’면서 신채호처럼 해성현(海城縣)을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다.
북한은 왕검성의 위치를 어디라고 보고 있을까.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1963)에서 요동군 험독현과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각각 다른 곳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험독현은 지금의 하북성 산해관 부근이고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오늘의 개평(蓋平)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서술했다. 개평은 지금의 요령반도 중간의 개주(蓋州)시다.
○옥저,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에 대한 고찰
한서(漢書)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또는 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책자에는 옥저(沃沮)와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 등 옥저와 관련된 기술에 여러 명칭이 사용되고 있어서 이들의 지명이나 나라라 같은 나라인지 또는 다른 나라인지 혼동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의 견해로는 옥저,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는 모두 옥저(沃沮)에 속한 땅으로 보인다. 특히 동옥저(東沃沮)라고 표기한 것은 옥저의 동쪽 땅일 수도 있지만 한서(漢書)를 기록한 사람이 중국 장안을 기준으로 기술하였으므로 동쪽의 옥저(東沃沮)라고 기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남옥저나 북옥저는 옥저가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천리에 가깝게 길게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같은 옥저에서 남쪽의 옥저와 북쪽의 옥저를 구분한 것으로 본다.
○ 낙랑평양설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낙랑이 미천왕 14년(AD 313년)까지 평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낙랑이 망하기 67년 전(AD 247)에 어떻게 11대 동천왕이 낙랑이 있는 평양에 서울과 사직을 옮길 수 있였고 낙랑이 망하기 11년 전인 15대 미천왕 3년(AD 302년) 어떻게 현도에서 잡은 포로 8,000명을 낙랑의 수도 평양으로 이주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수양제의 침략경로이던 낙랑과 옥저를 평양과 함흥이라고 왜곡 궤변하고 있는 한국사의 잘못된 기록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앞으로 양심있는 자가 한국사 선생을 하거나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들이라면 옥저의 위치나 평양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명확히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참고: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 당시,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옥저는 수양제의 평양으로 향한 좌12군 11번째 침략경로가 옥저이며, 옥저가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다는 것은 옥저가 수나라 국경에 가까운 요서지방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결코 이병도란 놈이나 이병도란 놈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주장하는 함경도 지방이 결코 될 수 없다. 어째서 역사를 하는 놈들이 이같은 사실을 전혀 무시만 하고 있을까? 왜색식민사학을 뿌리뽑고 정확하고 올바른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새로 써지기를 갈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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