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96. 요동성은 난하 동쪽에 있었고, 수양제는 요동성도 함락못하고 패퇴하였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3-19 |
고대사96. 요동성은 요하가 아닌 난하 동쪽에 있었고, 수양제는 요동성도 함락치 못하고 패퇴하였다.(폄)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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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찬경의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요수 요동성, 압록수, 살수, 평양의 위치 비정“이란 논문중 일부를 펌했습니다. 내용은 수양제가 지금의 난하인 요수에 도착한 후 고구려의 저항으로 30여 일 후에야 겨우 요수(遼水: 지금의 灤河)를 건넜으나, 난하 동쪽에 위치한 요동성을 수없이 공격 하였지만 요동성을 함락조차 하지 못한 채, 전투 시작 203일 만에 완전히 궤멸되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임찬경의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요수 요동성, 압록수, 살수, 평양의 위치 비정“이란 논문중 일부를 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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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12년 요동성(遼東城)의 위치
612년 정월에 탁군에 집결한 수군(隋軍)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203일 동안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고, 그 해 7월 25일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철수했다. 그러한 수군(隋軍)이 고구려 군대와 처음으로 치열하게 전쟁을 치룬 곳은 요수이다. 위에서 이미 밝혔지만, 612년 당시의 그 요수는 바로 지금의 난하이다.
수양제는 2월 13일 탁군을 출발하였고, 32일만인 3월 15일에 요수 즉 지금의 난하에 도착하였다. 수양제의 요수 도착에 대해 『수서』는 “요수교 (遼水橋)에 도착하였다.”고 기록했다. 즉 수양제가 도착하기 이전에 수군 (隋軍)은 요수를 건너기 위한 부교(浮橋)를 설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수교의 설치는 물론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요수를 건너지 못했다.
수양제가 수군(隋軍)을 이끌고 요수를 건너 것은 4월 16일, 수양제가 요수에 도착한지 30일이나 지난 뒤였다. 요수를 건넌 동쪽에서도 역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요동성을 포위하게 되었다. 『수서』의 기록에 따라,32) 이러한 전쟁의 경과를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 3 생략
[도표 3]을 보면, 수군(隋軍)이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한 것은 4월 16일인데, 다른 곳의 군막(軍幕)에 가있던 수양제가 요동에 다시 와서 장수들을 꾸짖는 6월 11일까지 55일 동안의 전투에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요동성은 수양제가 군대를 철수시키는 7월 25일까지도 함락되지 않았다. 612년의 전투에서 수양제는 요수 즉 지금의 난하를 동쪽으로 건넌 지점에 있던 요동성까지 왔지만, 그 요동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채 전투 시작 203일만에 철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수 즉 지금의 난하 동쪽에 있던 고구려의 요동성을 수군(隋 軍)이 오래고도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 가? 그 이유는 고구려가 오래도록 철저한 전투준비를 해왔고 또 수군(隋軍)을 상대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전략적 대응을 했기 때문이며, 다른 원인은 수군(隋軍)의 공격 전략이 시의적절하지 못했으며 또한 오랜 전쟁준비와 행군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수(隋)의 침략에 대비하는 고구려의 전투준비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또 철저하였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평원왕) 32년(589년) 왕은 진(陳, 557∽589년)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兵器)를 정비하고 곡식을 모으며, 막고 지켜낼 방책(方策)을 세웠다.”35)
589년 진(陳)이 수(隋)에 의해 멸망하자, 평원왕은 수(隋)의 침략에 체계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는 수(隋)의 침략을 대비할 뿐만 아니라, 먼저 수(隋)의 변경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변경을 정리 및 강화하려 했다.
이런 전략에 따라, 598년 고구려는 요동에서 출발하여 당시의 요수인 지금의 난하를 건너 서쪽으로 수(隋)의 변경을 공격한 것이다.
“(영양왕) 9년(598년) 왕이 말갈(靺鞨)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 西)를 공격하니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冲)이 이를 막아냈다. 수(隋)의 문제 (文帝)가 듣고 크게 화를 내며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에게 명하여 나란히 원수(元帥)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했다.…(중 략)…한왕(漢王) 양(諒)의 군대가 임유관(臨渝關)으로 나섰는데, 장마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계속되지 않아 군대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 역질(疫疾)에 걸렸 다.
주라후(周羅睺)는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역시 풍랑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가을 9월에 수(隋)의 군대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이었다.”36)
위의 기록과 같이, 598년 고구려가 먼저 수(隋)의 요서를 공격했는데, 과연 그 요서는 어느 지역인가? 지금까지 한중일 3국 역사학계에서 발표된 연구들의 대부분에서는 598년 당시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을 현재의 요하로 설정하고, 현재의 요하 서쪽을 수(隋)의 요서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수서』 등의 문헌을 잘 검토해보면, 598년 고구려가 공격한 수(隋)의 요서는 수(隋) 시기의 요수인 지금의 난하 하류 서쪽 일대였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37)
즉 598년 당시의 고구려는 요수 즉 지금의 난하 동쪽에 요동성을 두고 있었고, 여기에서 출발하여 난하를 건너 수(隋)의 변경을 공격하여, 앞으로 있을 수(隋)의 군사적 침략을 대비하는 차원의 변경 정리 및 강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렇듯, 고구려는 수(隋)의 침략에 오래도록 대비해왔고, 특히 최전방이 될 요수 즉 지금의 난하 동쪽 요새인 요동성을 방어에 유리하도록 완벽하게 축성하였다. 612년 수군(隋軍)이 요수를 어렵게 건너와서도, 그 대군(大 軍)으로도 요동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또한 수군(隋軍)은 612년 정월의 아직 추운 계절에 출병하여 탁군에서 32일 정도의 힘든 행군을 거쳐 요수 즉 지금의 난하에 도착했고, 또한 그 요수를 건너기 위해 30일 정도의 힘든 전투를 치르느라 지칠 대로 지쳤으며, 또한 다음과 같은 수(隋)의 공격 전략 역시 요동성의 함락을 불가능하게 했다.
“여름 5월, 처음에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올 때 황제가 훈계하여 말하기를 “일체 전쟁에서 진격하고 정지함을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 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고 하였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여러 번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 공격하라고 명을 내리고, 또 여러 장군에게 명하여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위무하여 받아들이고, 군사를 풀어 해치지 말라.”고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이 갑자기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였다. 여러 장수가 황제의 뜻을 받들어 감히 제때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급히 아뢰게 하였다.
급기야 회답이 이르면, 성 안의 방어도 또한 정비되어 적절히 나가서 대항하여 싸웠다.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고, 그 후 성은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38)
요수 즉 지금의 난하 동쪽에 있던 고구려의 요동성이 수군(隋軍)의 오래고 격렬한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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