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92. 개마대산이 낭림산맥이라는 xx는 이병도란놈을 옹호하지 마라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3-17 |
고대사92. ○개마대산이 낭림산맥이라고 열을 올리는 XX는 이병도를 옹호하지 마라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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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X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은 낭림산맥이라고 열을 올리고 있다. 개마대산이 낭림산맥이라고 하는 자들은 XXX 이병도와 XXX 이병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주장인데,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모르는 낭림산맥을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고 한 사실이 없다.
개마대산은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요수(遼水: 지금의 灤河)를 건넌 후 바로 만난 곳이 현도(玄菟)이고, 바로 이 현도(玄菟)에 개마대산이 있었다.
XXX 이병도무리들의 주장을 옹호하느라고 열내지 말아라.
개마대산은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요수(遼水: 지금의 灤河)를 건넌 후 바로 만난 곳이 현도(玄菟)이고, 바로 이 현도(玄菟)에 개마대산이 있었다. 이 개마대산의 동쪽에 평양왕검성이 있었다.
-“11대 동천왕 21년(AD 247년)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리(*관구검의 침입)를 겪었으므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명은 본래 선인 왕검(王儉)의 택지였다고 하였고 또는 왕의 도읍지를 왕검이라 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이곳에 기록된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성이 결코 아니다. 평양성을 선인 왕검의 택지이었다는 기록을 볼 때 앞서 기록된 현도군 개마현에 위치한 왕검성 평양일 가능성도 있다.
11대 동천왕 때(AD 24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했는데, 만약 한국사 XXX들이 주장하는 대로 미천왕 15년(AD 314년)까지 낙랑이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그보다 67년 전에 고구려가 평양에 수도를 옮길 수 있단 말인가? 선인 왕검의 택지이었던 평양은 현도군 개마현의 왕검성이며, 이곳은 신채호도 주장했던 개평(蓋平) 지금의 요령반도 중간에 위치한 개주시(蓋州市)이다.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의 기록에 볼 수 있드시 15대 미천왕 3년(AD 302년)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범하여 8,000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여기에 나온 현도는 요동성과 서쪽의 요하 사이에 현도가 있었으므로(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고) 이곳에서 사로잡은 8,000명은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이 결코 아니고, 현도군 개마현(예전의 평양성이며, 왕검성)으로 옮긴 것이다.
미천왕 3년은 AD 302년이여, 낙랑이 망한 해가 식민사학자들은 AD 314년이라 하고, 그때까지 낙랑이 평양에 있었는데 어떻게 12년 전에 현도군 백성 8,000명을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낙랑의 평양으로 옮길 수 있단 말인가?
-16대 고국원왕 4년(AD 334년) 추 팔월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增築 平壤城). 5년 춘정월 축북국신성(築國北新城). 9년 연왕 황(모용황)이 침입하여 그 군사가 신성(新城)에 미치니 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돌아갔다.
*위의 기록에서 증축한 평양성은 신성(新城)과 더불어 연(燕)의 침입을 막고자 증축한 성이므로 지금의 평양성이 아닌 연나라와 국경지대에 있는 평양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국원왕 13년(AD 343년) 추 칠월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왔으니,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秋七月 移居平壤 東黃城 城在今西京東 木覓山中)
*위에서 왕이 옮겨 간 평양의 동황성(平壤東黃城)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평양 동쪽에 동황성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또 지금의 평양은 장수왕 때 옮겼을 것으로 보이므로(*임찬경박사는 영양왕 때 수양제 침입시에도 평양성은 요동에 있었고, 지금의 평양은 장안성이라 하였다고 함) 여기에 표시된 평양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 개평(蓋平)의 평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 개마현은 수양제의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시 수양제 군의 좌12군 4번째 침략경로에 있던 땅임을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책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무시한 이병도란 놈을 추종하는 무리들의 주장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수양제는 좌12군과 우12군의 고구려를 향한 진격로를 정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점제),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이의 침략경로를 보면 개마현은 수양제의 좌12군 첫 번째 침략경로에 개마현이 있었고, 개마대산은 이 개마현에 속한 산이었다. 한국사학계에서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개마대산이 낭림산맥이라느니, 백두산이라느니 하는 해괴한 주장에 빠져 있는 것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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