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천왕이 빼앗은 낙랑과 대방은 요하부근에 있었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7-10 |
○ 미천왕이 빼앗은 낙랑과 대방은 요하부근에 있었다.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에서 보면 미천왕 3년(AD 302)에 현도군을 침범하여 8천명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여기에 보인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평양은 요하 부근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
위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느시 개마(蓋馬)에 대한 설명 중에 개마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한 땅일 뿐 아니라 이곳이 곧 평양와검성(平壤王險城)이라고 했으므로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만 정확히 안다면 평양왕검성의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유주와 계주 등지를 순행하면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요동과 갈석에서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계획을 밝힌다. 이듬해(AD 645),
“<四年 夏四月 世勣 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 進至遼東城下.> (4년 여름철 4월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서 현도에 이르렀다. 고루려의 성읍주민은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 갔다......오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모두 죽었다. 이세적은 더 나아가 요동성 아리에 이르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현도는 요하를 건넌 다음 고구려의 현도성에 다다른 것이며, 이후 진군한 요동성과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다. 다시 말해서 요하와 요동성의 중간에 현도성(玄菟城)이 위치해 있다. 또 개마현(蓋馬縣)이나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현도군에 소속된 것이므로 요하를 건너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평양 왕검성은 기록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드시 요하를 지나 요동성에 이르기 전에 위치되었던 현도군의 소속현 개마에 위치해 있었고, 현도와 가까운 위치이며, 결코 지금의 평양은 아니다.
○낙랑은 요하 부근에 있었고, 미천왕 14년 고구려가 점령하였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미천왕 14년(AD 313년)에 침략을 당했고(멸망했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이해에 멸망했다는) 낙랑의 근거지가 평양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고구려 땅 평양에 어떻게 낙랑이 남아 있었겠는가? 미천왕에게 AD 314년에 망한 대방이 황해도와 한강이북에 있었다고 계속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서울로 삼고 한강 유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인데 어찌 황해도에 대방이 있었겠는가?>
○ 수양제가 침략한 요하 부근에 낙랑과 대방이 있었다.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遼東) 예맥(濊貊)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遼西)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幽州)와 삭주(朔州)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면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요하 부근에서 진격하는 길목에 낙랑과 대방이 있었다. 낙랑은 수나라군대 좌12군 12번째 경로가 낙랑이었고, 대방은 수나라 군대 우십이군 11번째 침갹경로가 대방이었다. 낙랑이 평양일 수 없고, 대방이 황해도라는 이병도의 한국사 매국노 짓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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