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91. 위당 정인보선생이 역사연구를 하게된 계기와 이유(펌)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3-17 |
고대사91. 위당 정인보 선생이 역사연구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란 글을 펌했습니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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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위당 정인보 선생이 역사연구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란 글이 있어서 펌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위당 정인보 선생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XXX 이병도와 그 XXX 이병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점제현 신사비를 선전하고, 점제현이 평안남도 평강군이라고 조작한 일본인의 조작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dgdragon/222361308452
위당 정인보 선생이 역사연구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
역사 연구의 계기
"나는 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선친께서 늘 "우리나라 역사책을 좀 잘 보아 두어라. 남의 것은 공부하면서 내 일은 너무들 모르더라"라고 말씀하셨건만 다른 노릇에 팔려 많은 세월을 허비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우연히 일인들이 《조선고적도보》랍시고 낸 '첫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장 두세 쪽을 넘기기도 전에 벌써 '분'이 터지면서 "이건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어느 해인가는 일인들이 이른바 "한일 병합 몇 주년"이랍시고 《경성일보》인지 《매일신보》인지에다 기념호를 내었는데 거기에 이른바 '점제비(秥蟬碑)' 사진이 최근 몇 년 내의 대표적인 대사건의 하나로 올라왔다.
... 그것을 보고 나는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것이 저들의 총독정책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으며그들의 음모를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 버리리라"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위당 정인보, <부언>, 《조선사연구》(연세본, 하권). 270쪽)
위당 정인보 선생의 <개천절가> 초고
위당 선생이 역사 연구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의 '한사군 재평양설'을 주장하며 식민통치의 역사적 명분을 강조하려는 책동 때문이었고 1935년 1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한민족의 진짜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위당은 1915년 즈음 상해에서 단재 신채호를 처음 만난 이래 교류를 가지면서 그의 고대사 연구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역사 연구의 이유
"과거는 곧 지금의 뿌리이며 과거의 책은 곧 과거가 남긴 자취이다.. 그런데 이 과거는 묵고 썩은 구태의연한 과거가 아니니 이를 풀어 본다면 곧 '본연의 나[本我]'라고 할 수 있겠다. 말류의 폐해로 그 뿌리에서 어긋나고 또 그것을 버리고 말았다면 그 다음에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본연의 나'를 스스로 입증할 도리가 없으며 또 이러한 스스로에 의한 입증이 아니고서는 언제나 맴돌면 맴돌수록 더욱 미혹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런즉 우리 자신에 대한, 아주 섬세하고도 치밀한 뿌리에 대한 조사야말로 바로 우리가 우리의 '올바른 실체[正實]'로 되돌아가는 밑천인 것이다." (<조선고서 간행의 의의>, 《동아일보》, 1934.9.15)
위당이 말한 '본연의 나'는 일찍이 행촌 이암 선생이 말한 '천하만사가 먼저 나를 아는데 있다(先在知我)'에서의 '나(我)'요, 단재 선생이 말한 '아(我)와 비아의 투쟁'에서의 '아我'이다.
나와 나의 정신, 정체성을 아는 것이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이며, 설령 몸과 나라를 빼앗겼어도 나와 나의 정신(정인보의 '얼'이며 박은식의 '국혼'이며 신채호의 '낭가사상'이며 문일평의 '조선심'이다)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다시 재생(再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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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일인들이 평안도 용강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는 본래 용강지역에 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요서 지방의 낙랑군 점제현에 있던 비를 왜놈드이 평안도 용강에 옮긴 것이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수양제는 좌12군과 우12군의 고구려를 향한 진격로를 정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점제),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위의 수양제 침략경로를 보면 우12군 첫 번째 침략경로가 바로 점제(점선)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 부근 지역인 요서지방에 있는 땅이며, 결코 이병도란 놈이 왜놈의 사진을 인용해서 평안도 용강이라고 한 것이 맞지 않는다. 한국의 역사연구자들으 수양제가 침략경로로 삼은 점제현(점선현)의 위치를 반드시 밝혀 주어야 한다. 점제현(점선현) 뿐 아니라, 한사군에 속한 속현들은 대부분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었으며, 결코 한반도나 황해도에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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