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86.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3-14 |
고대사 86.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선생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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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학자·역사학자.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다. 저서《조선사연구》,《양명학연론》이 있다. 국학대학의 초대학장을 지냈다.
출생-사망
1893.5.6 ~ 1950.11
주요저서
《조선고전해설》(1931),《양명학연론》(1933) <조선사연구> (1936)
1893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 ·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 위당(爲堂)이라 하였다. 생부는 정은조(鄭誾朝)이며 백부인 정묵조(鄭默朝)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생모는 달성 서씨이며, 양모는 경주 이씨였다.
어려서부터 외삼촌 서병수(徐丙壽)를 통해 이건방(李建芳)의 휘하에서 양명학 등을 수학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1911과 1912년 두차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여 광복운동을 하였다.
1913년 부인의 사망으로 귀국하여 충청도에 머물며 학문연구에 매진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역사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그의 학문관은 이때 기초가 이루어졌다.
1923년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전임이 되어 한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하였으며, 불교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고전해설》(1931)을 집필하였고 사상이 근간을 이루는 것이자 대표적인 저술인《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에서는 '치양지(致良知)'를 양명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다산 정약용(茶山 鄭若鏞) 서거 100주년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전국 순회 강연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오천년간 조선의 얼》(1935) 등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 ·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에 따라 조선어강좌가 폐지되자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전북 익산군에서 은거 중 8 ·15광복을 맞이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국학대학(國學大學)의 초대학장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4월 장관 임영신이 관련된 독직사건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사직,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 ·25전쟁 때 북한군에게 피랍되었다.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다.
저서에 《훈민정음 해》(1938),《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서울신문사 1946), 《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1955), 《담원문록(薝園文錄)》(1967),《양명학연론 陽明學硏論》(1972) 등이 있고 1983년에 《담원 정인보 전집》이 발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인보 [鄭寅普]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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